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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 Erich Boedeker ed. Political Concepts and Time: New Approaches to Conceptual History 외
 

2014-09-27 

2014 9월 세미나 기록

일시: 9 27() 3:00-6:00

장소삼성경제연구소 회의실

참석하영선, 마상윤, 손열, 전재성, 구갑우, 김상배, 김헌준, 도종윤, 김수암, 이헌미, 김현철, 조은정, 용채영

발표: Joern Leonhart, "Language, Experience, and Translation: Towards a Comparative Dimension" in  Hans Erich Boedeker ed.,Political Concepts and Time: New Approaches to Conceptual History (Universidad de Cantabria. Servicio de Publicaciones, 2011) (전재성)


Cesare Cuttica, "What type of historian? Conceptual history and the history of concepts: a complex legacy and a recent contribution", History and Theory 51-3, 2012 (용채영)

 



토론내용


이헌미: Leonhart의 글은 사변적 방법론 논의보다는 직접적으로 정치적, 국제적 개념의 실증적 작업을 보자는 측면에서 선정하였다. 젊은 학자들이 여러 나라의 접근법 등 반영해서 개념사 프로젝트들이 진행 중이다. Leonhart 처럼 방법론적 이야기를 하고 뒷부분 자신의 실증적 작업 소개의 형태가 많다. 앞으로 북한관련 개념사 작업을 할 때 직접적 도움이 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많은 사례들이 북한과는 다르게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므로 분석하는 대상자료, 잡지 등의 성격도 다루게 된 북한 쪽의 1차 자료들과 다르다. 그렇지만 개념사 1, 2권이 그랬듯이 개념사의 트렌드, 접근법 등에서 통합적 방법론을 도출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방법론을 앞세워서 공부하자는 것은 아니나, 제시되는 사례연구를 통해 고찰한 것이다.

 

Leonhart의 글을 보고 첫째, 하나의 고립된 개념이 아니고 어휘군, 개념군의 연구로 의미연구가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종휘, 조동준 교수님이 북한 신년사를 통계기법을 돌려서 양적처리를 한 것을 발표하셨는데 11개의 유형으로 나눠서 빈도수 별로 10개의 단어들을 중심으로 시기적으로 나눔. 혁명, 평화, 인민 등도 있다. 시작 단계인데 1969, 1972년 등 질적으로 인적 연구를 할 때 의미 있는 변화의 지점들을 보인다는 것이 초보적으로 드러났다. 각자 다른 주제를 잡고 다른 글을 쓰게 되는데, 양적 연구의 도움을 받거나 각 연구자들끼리 개념이나 어휘들의 연결이나 대립 쌍의 말들을 생각해보면 좋겠다. 은유나 사상사, 담론연구와 어떤 차이를 갖는가? 결국 일반론적으로 결론내릴 수 있는 주제는 아닌 것 같다. 메타포, 주장, dichotomy 등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드러나는지를 풀면서 보아야 할 것 같다.

 

둘째, 번역을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사회사대신 문화사가 중요하게 주목을 받고 있고, 시간이라는 것이 중요한데, spatial turn, 장소적 차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한다. 개념사의 공시적 차이는 남북한 사이에서도 같은 시간이지만 다른 시간대를 살고, 동일한 어휘를 갖고 다른 개념화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transfer, travel, translation의 문제로서 남북한 개념의 번역을 생각하게 한다.

 

셋째, 경험과 의미의 이야기를 함. 구조이자 주어진 것으로서의 언어를 처리하는 방식과 그것을 사적인, 개인적, 민족 집단적인 시도로서의 개념, 얼마나 분석가능한 객관적 범주인가의 긴장이 방법론적, 분석적으로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기존의 내용분석이나 담론분석, 개념사가 너무 연구자 개인의 자질에 맡겨져 있었다. 더 통계적으로 보완가능하다면 그런 지적들이 공동작업으로 보완될 수 있으면 좋겠다.

 

옌푸 등 동양에서는 번역 중요하게 다뤘고 개념사학파도 점점 중요하게 생각한다. 번역과 개념이전에 대한 문제들을 다뤘었다. spatial turn은 생소한데 독일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지는 문제이다. 전통적으로 역사에서는 시간문제를 주로 다뤘었는데, 지리, 공간에 대한 내용은 적음었다. 유럽중심적, 단선적, 메타히스토리, 메타담론에서 더 이상 적실하지 않다는 탈냉전적, 탈식민주의적 트렌드인 듯하다.

 

하영선: :Leonhart는 문명 간, 문화 간의 spatial turn을 진지하겐 안 다룬 듯하다. 제목도 political concepts and time이다. 코젤렉류의 개념사의 출발은 어쩔 수 없이 작게는 독일, 유럽적인 문제의식에서 개념사 출발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적인 것은 당연히 뒤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유럽 내에서 space에 대한 관심은 유럽 내의 변방 또는 미국, 핀란드 등에서 코젤렉류의 개념사를 유럽적 범주에서 더 넓게 보려고 해서 한 듯하다. 처음 개념사 학회 갔을 때도 civilization을 하는데 유럽적인 문명개념 위주로 다뤄졌었다. globalization of conceptual history가 필요하다는 문제제기를 했을 때, 여전히 분석방법 이전에 language자체가 불가능한데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Time and Space에서 여전히 비중은 Time인 듯하다. 우리는 오늘 독일 개념사의 접근방법과 한국의 개념사 접근 방법의 비교가 필요한 듯하다. 왜 한국에서 개념사를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방법론적인 통일은 필요없어도 왜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선 막연하지만 공감대가 필요하다. 가령 독일 중심의 개념사 학회를 보면서 느낀 것은 19세기 독일의 안장시대가 있었다고 하면 아시아의 안장시대에 서구개념을 받아들인 것이 있었고, 우리역사가 받아들여지는 시기와 연결된다. 그런데 세월은 차고 흘러서 그렇게만 논의하기 어려운 측면이 개념이 항상 travel할 것인가이다. 개념이 결국 경험, 생생한 체험을 어떤 형태로든 언어적인 잡음으로 개념이 형성될 때 체험세계에 이미 아시아 공간이 굉장히 시끄러워졌다면 이는 어쩔 수 없이 언젠가는 또 다른 형태의 Begriffs를 낳거나, 현재의 개념들의 내용을 바꾸는 변화가 작동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해석학적으로 동양적인 prejudice이 강해진다면 미국도 자신들이 수출한 것만 볼 것이 아니라 재수입의 시기가 아닐 것인가? 한반도, 남북한, 아시아에서 쓰는 개념들을 자기성찰을 단순히 수입품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자기성찰을 할 때가 되었고 한국 개념사의 논의는 심화, 확대되어서 해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여태까지 수입으로서 개념사를 하려면 19세기 연구가 다였다. 아시아의 안장시기의 권력, 정치, 국제정치 등의 개념 수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관심이었다. 그것이 아니라 새로운 prejudice로 새로운 아시아 개념의 변형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이는 Time and Space를 동서고금의 아시아적 관점에서의 위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19세기 개념사 연구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 북한 개념사, 한반도 개념사의 논의도 이제는 19세기 동서개념의 상호작용이 아니라 전통, 근대, 냉전, 복합의미로서의 21세기의 축에서 어떻게 이것들이 전개, 변환되었는가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동서고금의 틀에서 남북한, 21세기의 개념사를 해야 하는데 형식적으로 남북한 개념사 하자고 하는데 서양에서 전파, 변용된 19세기 후반이 아니고 혁명, 전쟁, 자주 개념 등이 들어가면 그것 자체도 전통에서 근대, 근대 전반에서 후반, 냉전시기 형성된 concept들이다. 통일 이후 21세기가 되면 제 3concept로 전환되기 마련이고 그런 틀에서 잡아야 하므로 자연스럽게 토픽 잡을 수 있을 것이다. 1945-현재에서 잡을 필요도 없다. 남북개념이 달라진 것은 앞의 시기인 19세기가 걸려있다. 아시아 공간이 계속 커지면 우리가 전혀 모르는 서양의 고대처럼, 동양적인 고대의 편견이 21세기 개념의 편견적인 의미 또는 지평의 의미로 투영된다면 그것을 연결하는 큰 틀이 필요하다. 주제는 자유롭게 선정하되, 전혀 안 건드린 남북한의 이질적인 개념의 혼란, 개념의 분열과 통일에 상대적 초점을 두어야 할 듯하다.

 

구갑우: 개념사가 왜 독일해서 출발했을까? 산업혁명 경험한 영국, 프랑스와 달리 왜 개념사가 독일에서 출발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전재성 교수님의 발제문에서 나온 것처럼 경험의 언어화, 내러티브화, 담론화, 정치사상화라는 것이 서구에서는 가능한 순서일 것 같다. 우리는 이론적 장이 복수로 형성되어 있고 정치사상들이 존재하는데 그 순서는 개념화 담론화 정치사상화의 순서가 다르게 나타나면서 있을 것인데 이를 인식하는 방법론적 합의를 만들 수 있을까? 그 과정을 거치면서 역추적의 가능성이 모색될 수 있지 않을까?

 

전재성: 독일, 핀란드, 네덜란드에서 개념사를 많이 해왔다. 말안장기에 근대 진입이 늦고 수입된 개념들로 했어서 우리와 비슷한 부분도 있고 현실을 담은 언어가 들어오기 되기 전에 수입된 언어로 경험을 담는 것의 어려움도 있다. 두 번째도 재미있는 포인트인데 <근대한국인의 탄생>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우리가 잘 살다가 서구가 들어와서 현실이 복잡, 처참해졌는데 이를 언어의 어떤 형태로 담을 것인지를 생각하다가 내러티브소설, 이야기가 먼저였다. 개념화되기 이전엔 개념이 없었고, 사상, 담론화하기엔 너무 뒤떨어져 있었다. 근대한국인의 경험의 언어화를 볼 것은 내러티브밖에 없었다. 개념화하는 과정에서는 개념과 담론, 개념과 지성사라고 할 때 개념은 담론, 아이디어가 응축된 몇 개의 개념. 푸코처럼 정상/비정상이라고 하던지, 복잡한 당시의 사물을 보는 질서가 만들어지고 거기서 응축된 기본 개념들이 있어서 이를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내러티브는 만들어졌는데 개념은 수입했고, 담론은 아직 없어서 우리 정치현실을 볼 때도 사건사들은 있는데 사건들을 민주주의의 문제인지 자유주의의 문제인지 개념화하는 수준이 낮고, 이를 담론화하는 것도 수준이 잘 안된다. 맑시즘도 담론을 일컫는 층위에 있다. liberalliberalism 등으로 구분하듯이 맑시즘도 맑시즘의 핵심 개념, ‘계급등이 구분되는데 이를 보면서 현실과 개념의 모순관계를 볼 수 있을 듯 하다. 독일도 우리도 개념화가 순조롭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슷한 것 같다.

 

마상윤: 개념과 관념의 유기보다 개념과 현실의 유기가 더 큰 것이 아닌가? 개념은 들어와있는데 현실은 따로 놀고, 개념을 통해 커뮤니케이션도 안 되고, 정치, 사회적 행위자들 간의 지적 커뮤니케이션과 일상언어는 따로노는 상황이다.

 

구갑우: 그래도 순서를 따지면 제1경험이 있다면, 수입 후의 경험과 다를 것 같다. liberalism을 수입해서 다시 하는 경험과 첫 번째의 경험은 다를 것 같다.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나, 개념으로 다시 포착하고 벌어지는 경험이기 때문에, 수입 변화된 계기로서 개념을 관찰할 수 있다면 볼 수 있을 것 같다.

 

전재성: 소설 <혈의 누>를 보면 자기 문제를 개념화할 개념적 도구가 없었다. 권리, 경쟁 등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이를 정리할 수 없었다. 개념 뒤, 사회는 이렇게 돌아가야 한다는 사상구조도 없었을 것이다. primary experience단계에서와 다른데 2차적인 것에 대한 상당히 다른 문제가 나타날 것이다. 개념에 따라서 현실이 형성되는 부분도 나타난다.

 

김현철: 개념사 글 쓸 때 막막한 점은 기존에는 서구의 개념이 19세기, 20세기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그 글에 해당되는 주권 등을 찾는 방법을 진행해왔다. 서구의 주권개념에 정통하고 한국 문헌을 비교하면서 맞냐, 틀리냐의 접근방법을 진행했다. 그동안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정치적 논의보다는 동양의 상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많았다. 문명도 관련되지만 이적의 오랑캐, 개념 등. 유교적 등도 서구의 가치기준에서는 개념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결국 개념 따로 논의 따로 가는 현상인 것 같다. 또한 서양의 정치학적 방법론으로 한국의 개념사를 접근했을 때 얼마나 유용할 수 있는가? 사용된 텍스트 방법론, 정치사상사의 방법론적 접근인데 한국, 중국의 경우는 나름대로의 정치담론에서 나온 논의가 있는데 이를 조절할 방법론 사례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헌미: 개념사 연구는 더 이상 독일 중심이 아니다. 넓은 의미의 개념사연구로 들어오고 있다. 코젤렉은 말년에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사람들은 본인의 경험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역사적으로 어떻게 재구성, 의미화하고 있을까에 관심을 두었다. 최근 개념사학회는 여러 가지를 개념사적으로 가져오려는 시도들 진행하면서 감정이나 소수자들이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것들의 의미를 어떻게 재구성할까에 관심을 둔다. 탈식민주의적 비판의식과 맞닿은 것 같고, 남미, 주변부의 개념사적 자료들은 영국, 독일 등 정치사상사의 고전적 자료가 아니라 소설도 많다. 도상, 비유 등도 있다. 두 개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개념사를 이것들과 떨어뜨리고 개념사적 개념사연구만 한다고 하면 더 어려울 수 있는 것 같다.

 

전재성: 너무 개념사가 넓어지는 것에 대한 우려, 반대는 없는가?

 

이헌미: 유럽의 개념사 사례들 이외에 남미 쪽에서 이베리안 concept이라고 하고 있음. 스페인을 매개로 하므로 유럽확장적인 특징이 있긴 하다.

 

하영선: 쉽게 생각하고 해야 할 것 같다. 너무 세련된 방법론을 쓰기보다는 생생한 체험, 체험세계에서 출발한다면 우리의 경우 개념사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벗어나야 한다. 질문이 역으로 되어야 한다. 개념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가 들여다봐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남북한, 냉전시기 개념이라고 불리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한반도의 남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왜 중요한가? 실제 만나서 회의를 해보면 남한어와 북한어의 충돌. 자유, 평화, 민주 등의 이야기를 하면 훨씬 더 큰 편차가 있다. 한반도만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례인 것 같다. 19세기, 식민지시기의 유럽인들은 구름에 살았지 바닥에 산 사람들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독특한, 비극적 체험세계를 보면 한, , 일 동아시아의 독특한 것에서 개념이 체험사여서 체험사를 하는데 개념사가 중요하다고 해서 19세기, 20세기 관심을 두게 된다. 냉전은 웃기거나 비극적 현실이 있어서 관심을 갖는다. 현재 살고 있는 시대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의 관심이 더 구체적으로 고민을 하고 그 다음 것을 세련도 있게 해 나가는 것은 다른 시공간에서의 지적작업이 어느 정도 되어있는지는 reference로 봐야지 거기에 비추어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면 연구자나 청중이나 다 실제적인 깊이가 없을 것 같다.

구갑우: 개념의 범위 확대한다면 한국은 번역의 경험이 없어서 일본 사례와도 다르다. 한글로 만드는 과정은 중요하게 보인다. 초기 한국 그리스도교 성경을 보면 가톨릭 신학공동체에서 급진적인 번역들을 진행하였다. 그것이 그들이 극단적 저항을 하는데 기여했을 것이라고 보는데 그런 과정을 들여다봐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헌미: 아시아, 한국적 개념사 사례연구의 모델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그런 작업들을 개념사로 정리 안했을 뿐이지 주요 작푸들은 있다. 야마무로 신이치 등 아시아 근대의 정치사회적 개념들이 어떻게 환류, 유통되고 서양에서 어떻게 들어왔고 일본 문건, 청 사이에서 돌아다녔고 정치사상이 어떻게 영향 미쳤는지 볼 수 있을 듯하다. 몇 가지 문제는 남아있다. 시기적으로 다른 시기 관심을 둔다는 것인데 우리 식의 말안장시기의 근대 이행기의 모델링에 얼마나 적실할 수 있나? 리딩을 선정할 때 그 시기와 연관된 내용을 아는데 집중할 것인지, 방법론에 집중할 것인지이다. 연구범위와도 핵심적인 연관되는데 개념의 환류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다. 서양에서 들어와는 것도 알아야 하고, 아시아, 일본을 거쳐 오니까 기초적인 맥락을 알아야한다. 두 번째는 국내로 들어온 다음에 사회세력을 통해 어떻게 이용, 정치화되는지의 단계를 봐야 한다. Leonhart의 정치화단계와 정치적 단계를 구분했는데 핀란드는 의회자료들만 보고 거기서 수입개념들이 정치싸움을 하는 지로만 갔다. 그렇게 가면 정치사, 정치사상사 사이의 개념사를 할 때 결국 둘 중의 하나의 방점에 놓일 수밖에 없다. 보는 자료, 논문 구성이 변화할 수밖에 없다. 개별 사상가의 것에 초점을 두고 미시사적으로 볼 것인지, 정치사적으로 가서 어떤 사건, 상황에서 개념들이 사용되었는지, 개념이 사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여 지기 어렵고 일반적 의미를 갖는 것처럼 처리될 수도 있다.

 

도종윤: 주체의 경험이나 체험을 드러내는 데는 언어가 하나의 매개가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라면 으로 간다면? , 도를 이야기하는데 필요한 언어학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쓰고 싶고 환유법에 관심이 있다. 모든 우리의 언어, 그 안에는 권력개념이 존재하고 이 개념을 알고 싶어하고 권력 작동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이를 탐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권력개념을 개념화하기 보다는 농축하면서 존재하므로 그 프리즘, 하나의 모아주는 역할은 환유법으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접근방법으로는 남들이 어떻게 우리를 부르는가? 코리아? 서울? the Rest라고 부르는지 관심이다. 한반도라는 주제로서 그들의 우리를 뭐라고 부를 때 다르다. 장소의 문제가 얽히는데 EU와 같은 권력지평에서 브뤼셀, 장소개념이 변화하고 개념의 전환이 있다면, 한국도 개도국이었다가 한반도, 북한의 문제가 커지면서 어떻게 변화했는가? 그것은 유럽 text들이 확신하고 있는데 저의 체험이 아니라 그 텍스트들을 보면서 체험한 것들이다.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부르는지가 관심인데 한반도라고 할 때 북한/한국 따로 안 보고 다룬다. 한반도에서 파생되는 여러 담론들이 있는데 개념사와 어떻게 연관될지 궁금하다.

 

하영선: 동서고금, time and space로 한다면 4개의 frame이 된다고 할 때, 동아시아/한국사에서 해외, 국내 학계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있다. hierarchical anarchy. 미국 구미의 IR의 시각에서의 기존의 월츠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봐야한다는 시론들을 쓴다. 데이비드 강, 페어뱅크, 허비아가 동아시아 질서를 다루는데 굉장히 중요한 것은 3000년 사를 잠깐 봐도 과거의 역사에서 왜 시비가 붙게 되었는지 이다. 이는 21세기 동아시아 질서가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앞의 것들이 깔려서 나타나는 영향력이 있을 때 이에 대해서 아무도 다룬 적이 없다. 몇 개의 텍스트들을 갖고 하는 영미권의 텍스트를 보고 과감한 일반화하는 것을 탓하기는 한계가 있다. 분단 문제에 초점을 둘 것인가, 북한이 언제 망하는가가 등의 양대 질문을 다룰 것인가, 전쟁과 혁명이 막연하지만 핵심 질문일 것 같다. 남북 영향의 이해와 조직적인 폭력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을 어떻게 첨예하게 생각한 것이며 왜 전쟁을 안 하는가에 대한 생각인데.. 그것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이 아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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