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act    
노대환 <동도서기론 형성과정 연구> (06.8.9)
 

2006-11-19 
동도서기론 형성 과정 연구 - 노대환 (2006. 8. 9.)

발제 : 김상배 교수님

참석자 : 하영선, 최정운, 구대열, 김상배, 전재성, 김봉진, 강상규, 양승목

발표 내용 :

동도서기론이 표면화된 것은 1866년 병인양요 이후, 그러나 그 원형은 18세기 후반 실학에까지 거슬러감.
‘주체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서양 세력에 대한 대응력을 확보해야 했던 현실적 고민이 도와 기의 개념을 통해 표현’->철학적 논의와는 거리가 먼 정치적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
개화사상의 연장? 위정척사에 기반? 양자의 중간?-> 동도서기론 자체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도서기론을 이러한 식으로 위치짓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보임. 동도서기론이라는 logical format 내부에 다양한 행위자들이 상이한 정치적 목표를 추구->관념이나 idea 자체의 위상을 정의한다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고 보인다.

(1) 18세기 후반

전통 주자성리학에 대한 반성에서 의리 경세 절충학풍이 제기되는 가운데 서양 과학 기술이 중화문화의 일부로 이해되면서 그것의 수용이 논의되던 시기. : 실학의 경세지학을 일종의 성리학적 절충론으로 평가하고 있음. 이러한 절충적 논리가 동도서기의 먼 기원이 되고 있음
북학론 : “오랑캐라도 뛰어난 문물을 가질 수 있으며 명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도 그런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북학론자들은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천주교와 분리하여 서양의 과학기술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서양 과학기술서가 유입되는 한편, 도에 해당되는 서학(천주교)에 대한 반발이 분명하게 나타남. : 절충학풍의 특성.
중국원류설의 등장 : 서명응 -> 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점차 중국원류설을 극복하고 서양인들의 독자적 성과를 인정하며, 그러한 성과도 수용할 수 있다는 개방적 자세로 이행

(2) 19세기 초반 (1800~1830년대)

○ 이 시기 수용된 청조 고증학은 경세지학의 성격이 약함. : 고증학의 유행 자체가 조선 성리학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킴. 조선 성리학의 관념성을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의 발생
○ 주자학의 의리지학은 여전히 신뢰하면서도 경세지학을 비롯한 학문분과와의 절충을 시도함.
○ 서학에 대한 중앙 지식층의 반응은 상이하게 나타남
- 山林 계열의 서학배척론
- 경제학풍 주도 계열의 서양문물 수용론 :
이규경 - 성명의리학(학, 예)과 명물도수학(술, 용)의 절충을 시도-> 도와 기를 이기성명학과 궁리측량을 통해 각각 터득해야 하는 별개 분야로 파악.
최한기 - 서양의 기와 동양의 도는 각각의 특장으로 파악하고, 실용의 관점에서 취사선택할 수 있는 대상으로 삼았음. -> 동서의 개념은 무의미하고 서도도 배제되는 것이 아님.

(3) 제 3기 : 19세기 중반(1840~1866년)

○ 중국에서 제 1차 중영전쟁이 발발하며 서양에 대한 위기 인식이 생겨나면서 동도 중심적 대응방략이 논의되던 시기
○ 막연한 위협이었던 서양이 가상적국으로 설정됨 - 서양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해방책의 등장 : 위원의 경세문편, 성무기, 해국도지 등
○ 해국도지는 서양세력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방략을 기술, ‘오랑캐의 장기를 배워 오랑캐를 제압한다.’ - 그러나 서양의 위협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았으며, 동도의 강화를 통해 서양세력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 동도대응론
○ 동도대응론 : 우월한 동양의 도를 이용하여 서양인들을 교화시키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인 방어책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 ->일종의 soft power론?

○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동도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나, 서기에 대해서는 인식의 차이를 보임: 척사론자(이항로), 과학기술의 부분적 가치 인정(박규수, 윤종의, 이장관), 서양 과학기술에 더하여 다른 부분까지 수용할 것을 주장(최한기) *최한기는 서기의 수용이 동도를 보완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였음-> 동도서기론을 넘어서 변법론의 특징까지도 보임.

○ 남병철은 특색있는 동도 중심적 대응방안을 제시 : 동양은 정신문명, 서양은 물질문명에 능하다는 이분법. 비록 서양인들이 요순의 교화를 입지는 못하였지만 그들이 이룩한 과학기술적 성과는 인정해야 한다고 봄.

하영선 : 1840년대 중국원류설이 유행하던 상황에서 남병철은 중국원류설을 부정하고 서양기술의 독자성을 인정했다는 측면에서 독특한 견해를 보이고 있음.
김 : 서기와 천주교의 구분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음.

(4) 19세기 후반 (1866~1880년대 초반)

○ 병인양요를 계기로 주전론(동도 중심적 대응책의 고수)과 주화론(서양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갖추어야한다)의 견해가 분명하게 분화됨.
○ 양무운동에 대한 관심 :
- 양무운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 : 공친왕에 대한 부정적 인식
  / 양무보다는 청에서 형성되고 있던 淸議적 분위기(권위에 과감히 도전한다든가 현실적 정치참여를 중시하고 외치보다는 내치를 강조, 서양에 대한 강경한 대결을 요구)에 동조함
- 긍정적 인식 : 박규수 등
  / 양무운동이 서양세력을 축출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서양에 대한 진정한 방어책은 양무의 추진.
○ 강화도 조약 이후 척사론과 개방론의 대립이 본격화
- 척사론 : 왜양일체론, 개방반대운동, 의병운동
- 개항론 : 일본은 이미 300년전에 화의한 나라. 일본은 통상을 부국강병의 주요한 방책으로 삼고 있음.
○ 1880년대 초반 동도서기론의 등장 : 1881년 곽기락 상소 : 도는 동양의 것을 고수하되 기적인 측면에서는 성양의 것을 수용하여 보강해야

○ 당시의 동도서기론은 논리적으로 두 가지 논란거리를 가지고 있음
- 도와 기를 분리할 수 있다는 도기 분리의 문제 : 철학적 모순
- 도가 변하지 않는다고 보는 도의 불변성 문제 : 이로 인해 서기의 수용범위가 제한되고 동도서기론의 주장은 보수성을 띠게 됨.
○ 적극적 개화론자들은 도까지도 변혁의 대상으로 삼음 - 變道論
: 유길준 - 綱常을 고수하고 변화시키지 않으면 功을 도모하기 어렵다.
  김옥균 - 고종에게 서양 종교를 수입하여 백성들을 교화시키도록 건의


문제 제기>

○ 1880년대 초반 이후 동도서기론의 전개 과정은? 예를 들어 동도서기론의 관점에서 유길준을 본다면? 동도동기와 서도서기라는 광범한 스펙트럼 속에서 유길준이라는 개인의 사상을 평가할 때, 동도서기론이라는 개념 자체가 큰 유용성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음.

○ 동도서기론이라는 관념(ideas) 또는 인식을 봄으로써 무엇을 알 수 있는가?
- 동도서기론을 보면 당시에 여하튼 관념적으로 계속 진전이 있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세력(interests 차원)이나 제도(institutions) 차원의 진전이 없었다면?

○ 중국과 일본의 중체서용론, 화혼양재론 등과의 비교의 관점에서 조선의 동도서기론을 이해하면?
- 논리적으로는 같으면서도 실천적인 차이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인가?
- 도(윤리적, 기계론적)에 대한 이해의 차이? 기(기술, 지식)에 대한 이해의 차이?

○ 동도서기론의 현대적 의미?
- 글로벌 스탠더드 수용론, 아시아적 가치론 등에서도 동도서기론적 논리구조가 나타나지만 그 규모는 작음 ->  문명적 차원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 내에서의 국가간 차이 정도




< 토론 >

양 : 동도서기는 하나의 principle이라기보다는 정신적 태도나 세계에 대한 막연한 정신적 흐름으로 이해해야. 이러한 태도 혹은 반응은 특수한 국제정치적, 문화적 조건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임. 이러한 방식으로 사상사를 접근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보임.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서 사고의 변화, 현실의 인식 등을 설명해야하며, 후대의 관점에서 규격화시키는 방식으로는 곤란함.
구 : 하나의 attitude를 시대적 사상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동도와 서기의 갈등은 어떻게 보면 오늘날의 급변하는 세계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난다고 볼수 있음. 과거의 정신적 흐름을 동도서기라는 틀 속에 넣고서 이해한다는 것은 잘못된 학문적 접근임.
강 : 나름대로 의미있는 작업. 다만 논지가 불명확한 부분은 유교적 사유 내지는 성리학적 사유라는 것이 어떤 고민 속에서 탄생한 것이며 그 핵심적 세계관은 어떤 것이었는가를 천착할 필요가 있음, 이러한 질문이 곧 동도서기론에까지 연관되는 것일텐데, 이러한 부분에 대한 고민이 이 책에서는 잘 보이지 않음. 종교 없는 세계, 현실 속에서 가장 바람직한 세계를 구상하였음. 당대인들에게 천주교는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이 책에서 18세기의 북학론의 사유방식과 19세기의 동도서기론과 연관시켜 설명한 부분은 인상적이었음.
양 : 동도서기론이라는 사상적 흐름이 고종 시대에 실제로 구체적인 정책적 슬로건으로 제시되었고, 그것이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는가? 만일 아니라고 한다면, 고종 때에 이러한 지식인들의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김 :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에서는 동도서기론이 현실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부분은 잘 나타나 있지 않음.
강 : 병인양요 이후의 19세기 동도서기론에 대한 논의가 상대적으로 빈약해서 아쉬운 점이 있음. ‘병인양요를 계기로 동도 중심적 대응을 하는 측과 서양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서기를 수용해야 한다는 측의 주장이 확실히 분화되었다.’라는 주장이 이해하기 어려움. 이를테면 박규수나 대원군의 관점은 이 두 가지 입장 중에서 어느 쪽에 속하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저자는 병인양요 이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음. 동과 서의 이분법이라는 식으로 사유가 진행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관점에서 동과 서의 이분법은 화혼양재, 중체서용의 논의와는 사유방식이 다르다. 중일의 경우, 나와 남의 이분법인 반면, 동도서기는 나와 남의 구분이 아니라 동과 서의 구분으로 나타남. 이 때 조선에 있어서 ‘우리’의 범위는 어디까지이며, 그런 식으로 관념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사유방식은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입장에서 해결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현실 정치에서 ‘비겁한’ 방식의 대응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보임.
양 : 북학론의 논의 자체가 조선 정부의 정통적 입장이라기보다는 일부 학자들의 급진적 의견. 체제 이데올로기와는 구분되어야.
최 : identity의 ambiguity가 문제가 됨. 동의 입장에서 우리는 누군가라는 문제가 20세기까지 정리가 안 된 상태로 이어져 온다고 보아야함.
강 : 1880년대의 동도서기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의 긴장관계 속에서 보아야할 필요가 있음.
봉 : 강상규 박사는 동도서기론을 어떻게 평가하며, 그 당시에 동도서기론이 하나의 논리로 성립되어 있었는가?
구 : 삼국사기 이후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東國이나 東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음. 따라서 동도서기론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주체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강 : 실록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 우리 스스로를 東國으로 칭함.
양 : 의미의 묘한 coincidence가 나타남. 중국에 대한 동국이라는 의미와 서양에 대한 동양의 대표라는 의미로서의 東이라는 의미가 겹친 듯이 보인다.
봉 : 동도서기론이 하나의 용어, 혹은 표어로서 나타난 적이 있는가. 곽기락을 비롯한 몇 명의 상소를 제외하고는 나는 본 적이 없다. 구대열 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광범위한 태도로 보아야. 하나의 논의로서 정립된 것인지의 여부는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해보아야.
하 : 논의를 전개하는 방식을 바꿔야. 정치학, 사학에서 나온 논문들을 보아도 자기가 다루는 시기의 지식인들의 글을 제대로 추적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음. 성균관대의 김명호. 연구에서 다루는 문서들이 다른 연구에서도 계속 반복될 뿐, 새롭고 독창적인 해석은 보이지 않음. 이를테면 해국도지만 하더라도 그 텍스트를 꼼꼼히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 면에서 이 작업은 일단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동도서기라는 틀 자체가 당시의 심층적인 철학적, 정책적 토론으로 진입하는데 장애가 되는 경향이 있다. 1880년대의 원용부회론과 문명의 표준 자체를 변형시킨 입장과는 큰 차이가 있음. 후자의 경우 동도서기론이 하나의 수사학적인 차원에서 원용됨. 그러나 양자의 견해차가 철학적 문제에까지 도달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음. 결국 혼란된 상황 속에서 해방론은 실현되지 못하였으며 망국을 맞이함.
양 : 이질적인 타자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자기의 정체성에 관한 것. 조선 성리학적 정체성의 핵심은 도통론. 새로운 정체성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 동도서기라는 개념보다는 국가의 정체성 확립에 관한 문제로 돌아갈 필요가 있음. 조선 시대의 사상사 역시 국가의 정체성이 어떻게 확립되고 그것이 타자와의 접촉 과정 속에서 어떤 식으로 변형되어 왔으며 그것이 외부와의 대결 속에서 어느 정도의 역량을 발휘하였는가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봉 : 200여년 동안의 콘텍스트의 변화, 동도서기로는 포괄되지 않는 부분들까지 이 책에서는 포함해버리는 오류를 보이고 있음.
하 : 척사론과 해방론. 양자 사이에도 미묘한 정체성의 차이가 보임. 척사론의 경우 정과 사의 구분 속에서 사는 완벽하게 부정되어야 할 상대임. 반면 해방론의 경우 상대를 적이라는 하나의 존재로 인정. 그러한 기반 위에서 전략적 사고를 한다는 차이가 있음.
봉 : 두 가지만 지적하자면, 우선 동도동기와 서도서기 사이에는 너무나 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도서기라는 것에 대한 철학적 논쟁은 잘 벌어지지 않음. 동도서기라는 말 자체도 중국에서, 구체적으로는 易言의 발문에서 등장함. 반면 중국에서는 어떤 배경에서 동도서기론이 전개되었는가라는 문제는 잘 알지 못함. 성세위언의 ‘도기’ 편만 보더라도 경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소양은 있었다고 보여짐. 마찬가지로 왕도 역시 성세위언의 발문을 쓰면서 ‘정관응이 바꾸고자 하는 것은 도이지 기가 아니’라는 표현을 사용함. 왕도의 정치적 입장 또한 모호한데 서구의 제도 문물을 수용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천주교의 수용에는 부정적. 즉, 기라는 것의 정의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음.
최 : 동도서기라는 실체를 규명하지 않고 연구를 한다는 것에서 문제가 발생함.
봉 : 동도서기의 한꺼풀만 벗기더라도 정관응이라든지 보다 넓은 철학적 맥락이 존재하는데, 단순히 이를 우리의 것으로 전제한 상태에서 연구를 진행함. 왕도의 글에서 나오는 도기 이론은 무엇인가, 이를 밝힐 수 있다면 동도서기론의 철학적 맥락을 밝히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음.
최 : 이 주제는 조선 성리학의 해체를 말하는 것이지, 동도서기론 자체는 하나의 레토릭으로 보아야. 동도서기론이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무리가 있음.
봉 : 동도서기라는 표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음.
하 : 해국도지는 1840년대 쓰여짐. 그런데 왜 제목이 ‘서양도지’가 아니라 ‘해국도지’라는 이름이 붙었는가? 당시 사람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음. ‘해국도지’는 서양이 아니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작성된 문헌.
봉 : 해국도지에서도 해방론만 이야기되고 있을 뿐, 나머지 부분에 대한 독해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
하 : 지금까지 토의된 내용을 유길준의 '근대지식국가론‘이라는 주제와 연관시키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 수 있나?
양 : 유길준의 변도의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는가?
봉 : 유길준의 경우는 공맹의 도 자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음. 다만 말년에는 유사한 모습을 기독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동서 융합론으로 나감. 그런데 이러한 논의 자체는 최한기에게서도 보임. 그러한 의미에서 변도론이라는 말 자체는 넌센스라고 생각됨.
구 : 19세기 후반에 우리에게 닥쳐온 서양은 마테오리치의 이미지와는 다름. 우리 눈에 비친 서양의 다양한 모습을 정리할 필요가 있음.
최 : 동/서의 대립적 아이덴티티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동학. 이후로 동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뉘앙스 자체가 변화했을 가능성이 있음.
강 : 동도서기적이라는 말을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볼 필요가 있음. 철학적, 수사학적, 정책적 차원에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음.
김 : 도기론이라는 동아시아의 보편적 사유방식이 조선적 콘텍스트 내에서 어떤 특징을 가지게 되었는가라는 문제는 생각해 볼 수 있음.
강 : 유길준의 인용방식에 문제점이 보임. 하나의 구절만을 떼어서 인용할 경우 자의적 해석을 할 가능성이 있음.
하 : 유길준의 첫 글은 과거제 폐지와 관련된 것. 그렇다면 유길준이 상정하던 새로운 지식은 무엇이었는가.
김 : 유길준의 근대지식론을 쓸 것인가, 혹은 근대지식국가론을 쓸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음. 도와 기가 있다면, 양자는 지식이라는 것을 배경에 깔고 있는 측면이 있음. 기, 법, 도가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 아닌가. 도와 법과 기의 받침이 되는 지식의 역할, 기능이 근대 국가와 전통 국가에서 차이가 난다. 근대적 지식국가와 전통적 지식국가가 어떤 식으로 충돌하였으며, 그것이 혼란스럽게 절충되는 양상을 추적할 필요가 있음.
구 : 다음 발표 주제는 한국인의 대외 행위의 원형이라는 것이 제도, 이념 등의 측면에서 고대 이후로 어떤 식으로 형성되었는가를 추적하는 작업. 우리 민족의 대외적 행위가 삼국사기 등이 쓰인 시기로부터 어떤 식으로 형성되어 왔는가.

다음 모임 9월 23일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