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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일기>5권
 

2003-01-22 

2000년 3월 세미나 기록

 

일시 : 2000년 3월 25일(土) 오후 3시-8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3회의실
참석 : 하영선, 최정운, 장인성, 김영호, 손열, 신욱희, 김석근
독회내용 : 윤치호일기 5권

 


 

주요토론내용

 

하영선 교수 

5권이 1897-1902년까지의 시기인데, 98-9년경에 윤치호는 원산으로 발령받음. 이 시기의 국제정치는 러일전쟁으로 가는 중간과정이었음. 러시아의 군사고문단이 철수하는 상황. 98년 봄에는 러일 간에 balance가 잠시 생김.(p.145 중간) 그것을 한국을 위한 기회로 생각함. 그 긴장관계가 key point가 되어야 할 것임. 그렇다면 그 속에서 국내정치의 판을 어떻게 짜는가가 문제. 지리멸렬한 상황이었음. 독립협회 내부의 긴장관계도 유심히 봐야 함. 서재필의 역량을 윤치호가 인정하지만, 사람의 가슴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으로 평가함. 결국 고종이 친미파와 손을 떼는 단계에서 독립협회가 문을 닫게 됨. 친러 및 수구파가 독립협회를 몰아내도록 push함.

 

장인성 교수

오히려 독립협회를 허구로 보고 그 내부의 power struggle을 중심으로 다시 재구성해봐야 할 필요가 있음. 즉 수구파와 독립협회라는 구분보다는 협회 안의 대립과 갈등을 봐야 할 것임.

 

하영선 교수

윤치호는 과격하게는 가지 않으려 하고(즉 왕의 존재는 인정함). 협회의 젊은 그룹은 좀더 과격했음(왕을 없애고 다른 체제 주장).

 

손   열 교수

윤치호의 정치적 비중은 어떠했는가? 그것을 알면 국내 역학관계를 보는 데에 상당히 도움이 될 듯함.

 

장인성 교수

윤치호는 고종에 대해 근본적으로 신뢰는 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보임.

 

하영선 교수

윤치호가 일정한 정도의 안목이나 식견을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임. 당시의 정상배 무리보다는 뛰어남. 그러나 정치적 역량은 별도로 봐야 함. 역량이 있었으면 협회를 장악해서 발전시킬 수 있었어야 함.

 

손   열 교수

러시아에게는 왜 배척당했나? 러시아에 가서 좋지 않은 일이 있었나?

 

하영선 교수

이 시기에 독자적 내부 역량의 강화를 위해 고종이 일을 할 수 있었는가는 의문임. 윤치호가 보는 시각에서는 거의 가망이 없었음.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은 인정하지만, 그 기반인 power base의 구축에는 실패했음. 아마 아이디어는 독립협회였을 것임. 그러나 국제정치보다는 국내의 power struggle이 중요한 요소였음.

 

장인성 교수

국가 전략의 부재는 당시 인물(왕 포함)들의 공통점이었음.

 

김영호 교수

윤치호도 개혁의 문제는 많이 얘기하지만, 국제 part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거의 얘기하지 않음.

 

장인성 교수

독립협회가 당시 정치구조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라는 전체 그림이 잘 드러나지 않음.

 

하영선 교수

당시로서 control하지는 못했음. 그것을 수구 쪽에서는 역이용하여 왕을 부정한다는 식으로 왕을 설득하려 함. 그러나 그런 활발한 움직임을 오히려 사회사 쪽에서는 대단히 긍정적으로 보는 편임. 윤치호 개인 얘기보다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더 큰 것 같음. 긴박한 상황들도 세부적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음.

 

장인성 교수

6권부터는 국제정치 쪽 얘기가 더 많이 나올 것 같음. 러일전쟁, 한일협약 등이 있음.

 

하영선 교수

p.145.는 재미있는 대목임(Corea 이하).

 

장인성 교수

결국 국내정치의 문제가 선결과제임을 계속 이야기하지만, 자신이 행동파는 아님. 그가 생각한 국가상과 제도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음.

 

손   열 교수

결국 자기 프로그램이 없었던 것 같음.

 

김영호 교수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고 하기도 힘들 것임.

 

장인성 교수

초반의 자기 아이디어를 지속시키기는 힘들었음.

 

최정운 교수

당시의 아이디어는 뭔가?

 

하영선 교수

결국 [조선책략]을 탈피 못한 것임. 균세 속에서의 자강이라고 할 수 있음.

 

최정운 교수

왜 균세를 찾나? 오히려 강병을 요구해야 하는 상황 아닌가?

 

하영선 교수

우선 자기가 권력을 잡아야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임.

 

최정운 교수

그보다는 잡은 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했을 것임. 사실 김옥균이 택했던 방법이 유일한 길이 아니었을까?

 

하영선 교수

우선 자기가 권력을 잡아야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임.

 

최정운 교수

그보다는 잡은 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했을 것임. 사실 김옥균이 택했던 방법이 유일한 길이 아니었을까?

 

하영선 교수

균세는 자강을 하기 위한 대외적 조건으로 얘기했을 것임. 왜냐하면 독자적 힘을 가지려 하면 반드시 밖에서 치고 들어왔음. p.185에 일본에 대한 반감이 잘 드러남.

 

장인성 교수

비판은 잘 하지만, 그 다음 수가 없음.

 

하영선 교수

어떻게 보면 갑신정변 때보다 후퇴했다고 보여짐. 80년대는 엉성했지만, 나름대로 분명히 자강 프로그램이 있었음. 그러나 그런 프로그램을 실천할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음. 따라서 당시를 교훈으로 우선 권력을 획득해야 한다고 고민했을 것임. 쿠데타는 실패했기 때문에 고려에 넣지 않은 것 같음. 만약 이승만이었다면 즉각 전복시키려고 행동했을 것임.

 

최정운 교수

두 세대가 중첩되는 시기임. 전 세대는 갑신 실패 이후 장기적으로 교육. 계몽도 추진하는 반면, 그후 세대는 다시 과격해짐.

 

하영선 교수

독립협회를 한 묶음으로 처리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음. 따라서 내부의 다양한 아이디어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할 듯함. 이승만이 윤치호 입장에 있었으면 더욱 복잡했을 것임. 위험하지만 framework를 가지고 빨리 읽을 수밖에 없음.

 

김영호 교수

p.67의 '한국은 벨지움이 되라'는 얘기는 영세중립론을 얘기하는 것인가?

 

하영선 교수

알렌의 얘기임. 결국 갑신정변 이후 전략적 사고를 하는 그룹이 와해되었다고 보여짐.

 

김영호 교수

[독립신문]보다는 상당히 생동감이 있음.

 

하영선 교수

지난 200년의 역사에서 전략적 사고를 하는 그룹들이 별로 찾아지지 않는 것 같음.

 

김영호 교수

실패한 전략가는 어떤가?

 

하영선 교수

김옥균, 동인 이외에는 전략가로 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음. 정조가 the last chance였던가 하는 느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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