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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저, 민족문화추진회 편, 국역<면암집> (솔출판사) 1권의 "소"
 

2003-01-22 

98년 7월 세미나 기록

 

일시 : 1998년 7월 4일(토) 오후 3시-8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회의실
참석 : 하영선, 장인성, 김영호, 김용직, 김석근, 손열, 박명규
독회내용 : 최익현 저, 민족문화추진회 편, 국역{면암집} (솔출판사) 1권의 [소]

 


 

주요토론내용

 

'북벌론'과 '효종'을 자주 언급하는 이유
- 송시열의 '소중화론'을 얘기하고자 함.
- 최익현의 스승은 이항로. 이항로는 특별한 스승이 없이 독자적으로 출현했다고 파악하고 있음. 그렇지만, 사상적 영향은 주자학 또는 송시열에서 찾을 수 있음. 이 시기 직전에는 이항로와 기정진이 태두였음.
- 현실적으로 '청'을 적대시하자는 것보다 '명'이 없는 상황에서는 우리가 '소중화'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음.
- 정치사와 사상사가 일치하지 않음: 정치적으로는 청과 잘 지내야 하나(사대교린), 사상적으로는 명에 뿌리를 둠.
- 주자학의 전통이 조선으로 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음. 왜냐하면 중국에서는 주자학 이후에 양명학 등도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조선의 주자학이 더 전통적임.

정통주자학→ 퇴계
        → 율곡 → 송시열 → (이항로, 기정진) → 후대
                            ↑
                      독학으로 등장 (사상적으로 후대와 이어지기는 함)
장지연의 [조선유교론(?)] 참조

 

당시 상소의 format은 어떠한가?

최익현은 실질적인 벼슬을 하지는 않았음. 즉 근무를 하는 직책이 아니었고 일종의 명예직이었음. 일반관료를 다소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음.

 

이 시기를 네 부류로 나눈다면?
  이항로, 최익현 그룸: 강, 위정척사
  박규수, 김윤식, 어윤중 등: soft, 중도
  유길준: soft
  김옥균, 박영효 등: 강, 적극개화
-  은 이념적으로 사고하고,  는 현실적임(외교관, 관료출신 등)
  은 개혁이 절차중심적이고,  는 개혁이 행동중심적임.

 

최익현은 왜 약 20년간 상소를 하지 않았나?
- 대유학자로서 적절한 시기를 고려하였을 수 있음.
- 본인 설명: 한일 두나라의 관계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으려 칩거했음(일본 정부에 대해 쓴 글).
- 유학자의 한계일 수 있음. 유학적 사고나 담론 내에서 포착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 없었을 것임. 즉 discourse 변화에 대한 준비기간(공부)이었을 것임.

 

이들의 유학을 종교적 수준까지 들어간 것으로 볼 수도 있음. 이럴 때는 사고의 틀을 깨기가 어렵다.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이 약 100여년 전인데, 그때와 비교하여 진전된 사고가 엿보이지 않음. 즉 철학자보다는 종교에 가깝기 때문에 자신의 사고의 질서체계를 깨는 것을 용납하지 않음. 학문을 하나의 방법으로 인식하여 합리적 사고를 하려는 것이 아님.

 

84-95년 사이에는 일본이 상대적으로 주춤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절박한 상소를 올릴 필요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음. 95년 이후에는 다시 일본이 들어오기 때문에 다시 '도끼 상소'의 분위기로 상소를 쓰게 되는 것으로 추정됨.

 

최익현이 보는 일본관에 변화가 있는가?
- 후에는 삼국연대식의 얘기도 얼핏 하지만, 도끼상소문에서는 명백히 일본이 금수였음.

 

1900년대에 들어와서는 근대적인 것을 인식했다고 봐야 할 것임.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개화의 인식을 인정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임. 또한 공법 얘기를 하는 것을 봐서도 95년에는 금수론은 포기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임.

 

금수론이 없어졌는가?
- 95년에도 개화를 금수로 칭함. 서양화되지 않은 일본은 우호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음. 생각의 변화보다는 원칙적인 얘기임. 서양화된 것에 대해서는 점차 비판의 강도는 떨어지지만 원칙이 변한 것은 아니다. 단 국제법 질서는 인정함. 그렇지만 문명과 야만의 틀을 버리는 것은 아니었을 것임. 본(유교), 말(기술)을 구분하고 있음. 본은 변하지 않음.
- 그렇다면 국제법이 금수의 법인가, 문명의 법인가.
- '사대'가 공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함의 바탕이 되었을 수도 있음.

 

청에 대한 '이적관'도 점차 약해짐. 후에는 거의 언급하지 않음.

 

같은 훈련을 받더라도 재야와 관료의 인식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 같음.

 

문명개화론자, 동도서기론자, 위정척사론자로 구분한다면 각각의 이념적 정향이 분명히 드러날 수 있을 것 같음.

 

19세기 위기극복의 모델 설정의 문제: 핵심요인은 외세의 극복과 내부의 자강
- 문명개화론자는 반청용일의 외세 적극 이용
- 동도서기론자는 용외세의 외세 소극적 수용(외세의존적)
- 위정척사는 반외세: 일제의 침략성에 대해 반응하는 것은 이쪽 뿐임

 

동도서기의 정치체제가 대한제국이라고 본다면?
- 조선왕조에 기반을 두면서 근대국가적인 부분을 수용함. 면암과 같은 전통지식인들이 대한제국을 어떻게 보았을까 하는 질문이 생김.
- 면암은 국왕을 강조하지만 대한제국을 지지하지는 않음. 전통적인 유교이념의 구현자로의 국왕을 상정한 것으로 보임(즉, 절대군주로서의 국왕이 아님).

 

만국공법에 대한 유학자들의 초기 생각은 지켜야 할 법체계가 아니라, 만물에 존재하는 자연법적인 원리였을 것으로 보임.
- 공법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있지 못함. 유길준은 예외지만 대부분은 당시 국제정치 상황이 공법상황이기 때문에 그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위기의 상황을 타개하는 수단으로 이해하려 함.

 

소를 올린다는 행위 자체는 굉장히 전통적 방식임. 즉 유교적 질서임.

 

한편으로 중앙의 관료들과 대유학자들과의 관계도 고찰해야 할 것임(처세의 의리?).

 

장지연, 박은식의 글을 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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