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act    
독립신문 (1898.4.1-1898.9.30)
 

2003-01-22 

98년 1월 세미나 기록


일시 : 1998년 1월 23일 (土) 오후 3시~8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3회의실
참석 : 하영선, 신욱희, 김영호, 김용직, 장인성, 손열, 김석근, 정재호, 박찬승
독회내용 : 독립신문 (1898.4.1  1989.9.30)

 


 

주요토론내용


장인성 박사의 발제: 잡보에 미서전쟁이 많이 언급됨. 단, 제국주의론적 관점은 결여됨. 외교상의 원칙 문제와 동양3국 연대론이 몇 군데 언급됨. 이후 호수에 따른 요약(별지참조)
- 교육이 주 테마
- 부국이 강병보다 우선
- 예의 또는 도덕이 조선 정치에서 의미가 큼
- 동양3국 연대론에 대해 우호적

 

권도의 요즘 의미를 무엇으로 볼 수 있을까? 권력남용(?), 편의주의(?)

 

항상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  (맹자)
-그렇지만 그것이 없어도 항심을 유지하는 것이 군자다. 윤치호에서부터 민본사상이 좀더 드러남. 그러나 하의원 등을 반대하는 것으로 보아 민의 자유나 권리를 근대적으로 해석하지는 못하는 느낌. 한편으로는 법으로 그것을 보장해야 한다고 하지만 민이 그것을 획득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부정됨.

 

독립협회 그룹은 서재필과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을 것임.
-따라서 누가 쓰더라도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을 것임.
-독립신문 판형이 7월부터 크게 바뀌는 것으로 보아 내부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

 

다시 국제부분, 왕 관부분, 민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과연 리증동처럼 독립이 청으로부터 일본으로의 이동인가? 하는 부분을 살펴보고 결국 그 상황에서 가능한 독립의 방안이 무엇일까? 하는 문제를 고려해야 함. 나름대로 한계가 있는 것 같음.
-서재필이 떠나면서 (독립협회가 궁지에 몰림) 독립신문에는 관에 대한 비판이 강화됨. 즉 피열한 싸움이 전개됨.
-민에 대한 평가: 동학 또는 의병을 비도로 표현하ㅡㄴ 의도는 무엇인가? 북한의 평가와 비교(북은 부르죠아적으로 민을 보는 시각이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평가하지만 그 위치는 인정)
-국제부분에 대해서는 입장이 대략 정리되어 있음. 기존의 연구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는 것 같음.
-주진오의 연대 박사논문의 독립협회 분석에서는 온건파로 남궁억 등을 지칭하고, 급진파로 윤치호, 안경수 등을 지칭함. 만민공동회 주도 세력은 이전의 독립협회 주도세력과는 좀 다름.

 

군사관과 교육관을 살펴봐야 할 필요성이 있음.
-특히 독립신문에서는 교육을 강조.
-군사관은 다소 비현실적이 아닌가 생가고디지만 대한제국의 재정운용을 보면 군사부분이 20%에 이를 정도로 가장 많이 소요. 교육은 2%정도 밖에 안됨.
-따라서 독립신문에서는 교육 예기를 해야하는 상황이었을 것임.

 

개항에 대해서
-1년전에는 개항에 대해 비판적이었음. 1년 후에는 개항 옹호.
-집필자가 바뀌지 않았는가하는 생각이 있음. 이 시기에 실제로 개항이 계속적으로 이뤄짐.
-정부차원에서 개항을 계속 할 이유는 관세수입을 노린 측면이 큼. 독립신문에서는 그 지적은 없고 통상에서 얻는 이익만을 지적. 이 부분에서는 정부와 입장이 일치됨.

 

군사를 덜 강조한 것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음.
-그렇지 않다면 실제로 군사적 대립의 가능성이 줄어든 덜 첨예한 시기에 외교로 독립을 쟁취할 가능성을 크게 평가했다고 봐야 할 것인가?
-세력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결국은 민을 키울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하고 판단하고 있었을 것임. 다음의 고민은 민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하는 것임.

 

서재필의 입장은 다른 이보다도 미국에 기대는 것 아닌가?
-또한 민을 강조함으로써 개혁을 밀어붙이려는 식이었을 것임.
-윤치호 이후에는 고종을 보다 더 의식하게 됨으로써 좀 온건해지게 됨.
-윤치호는 민을 좀 추상적으로 보고 있음.

 

연속성이 발견되는 점
-서재필과 윤치호는 둘 다 교육이 가장 큰 문제라고 판단
-그것은 단순 교육보다는 정치나 국가의 주체를 자체적으로 설정하는 문제(기존의 사람들은 미래가 없다고 판단). 따라서 교육이 중요
-당시 청년지도층이 등장. 그러나 독립신문의 논조에 동감하는 자들과 편집자들과의 시각에는 상당힌 편차가 있는 것 같음. 따라서 자기 수하이지만, 자기 입장의 설파에는 도움이 별로 되지 못함.

 

국제정치 언급 부분
-근대적 국제정치의 관념도 나타남: 힘, 의리, 신의 등
-서구적 근대 국제정치의 규범적 측면이 강한 것 같음.
-장기적으로는 맥락을 잘 파악했지만,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원론적 생각에 머무른 느낌.
-동양3국 연대론이 동맹의 의미였다면 지리적 근접성이 중요했을 것임(예:합종연횡). 언어와 풍속이 과거보다 약화된 것이 근대적 정치질서에로의 이동을 나타내주는 것 아닐까?

 

4월 7일자 논설에서 주적은 어디일까?
-러시아로 추정되는데, 3국 연대론이 98년 봄에 다시 나타난 것도 러시아의 압박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렇게 나타난 것이고, 이후 교육·통상 얘기가 늘어나는 것은 그 위협이 좀 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됨.
-조선의 안보관은 자체적인 것보다는 영국과 일본의 선전에 사로잡힌 측면이 많음. 그런 연장선 상에서 보면 아관파천을 하면 않되는 것이었음.
-결국 구한말의 안보관의 혼돈이 2차대전 이루에도 계속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임.

 

개화파는 고종보다는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약한 것은 사실.
-따라서 군사관도 앞과 같이 정리됨. 한편으로는 만국공법에 기대가 큼.
-당시 상황은 일본은 빠져나가고, 러시아는 들어오 k있음.
-독립신문은 처음부터 비도라는 표현을 씀.
-독립신문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갑오경자. 그것이 아관파천 후 일관성을 유지하기 힘들게 됨. 따라서 서재필은 관을 근대국가식으로 새롭게 정립하려 함. 민과 법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임.
-어떤 측면에서는 청일전쟁 때문에 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느낌이 있을 것임.
-일본문제는 개화파의 맹점이긴 하지만 context 속에서 봐야 함.

 

goal setting 과 그것을 츠진하기 위한 전략
-후자의 경우는 치열한 싸움. 결국 일본에 당하지만, 개화파의 전략은 일본을 끌어들여 외셀,ㄹ 중화시키고 국내개혁을 달성하려는 것. 즉 친러파를 견제해야 한다는 명제 때문에 일본을 포섭하려 함.
-내부적으로는 민 base에서 원하는 모델을 추진하는 구심세력을 어떻게 형성시키고, 그러기 위해서 외세를 어떻게 중화시킬 것인가가 문제
-결국은 소박한 친일이 아니었을까?

 

독립협회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검토해야 할 것임.
-급진파의 박영효 옹립 움직임이 성공했다면 또 하나의 갑신정변으로 결과되었을 것임.
-그러면 독립협회의 역사적 의미는 거의 없어졌을 것임. 고종이 그것을 막았기 때문에 독립협회는 애국적인 단체로 남게 된 것이 아닐까?
-내부적으로는 어떤 세력이 어떤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살피는 작업도 중요할 것임.

 

박영효 옹립 움직임은 소장파의 움직임이었을 것으로 생각됨.
-실제로 해산된 이후에도 윤치호는 크게 다치지 않았음.
-협회 전체의 방향은 주로 계몽이었을 것이고, 그것은 갑신정변의 실패에서 기인한 자기반성의 의미.
-그러나 협회 내에는 정치지향적 인물도 존재, 또한 윤치호는 집안내력을 보더라도 보수적 색채를 띨 수 밖에 없었음.
-또 민을 강조하지만, 민을 중심으로 정치를 하자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계몽의 대상으로만 설정된 듯함. 실제 주체의 설정은 이것과는 좀더 다른 의미인 것 같음. 즉 단기전보다는 장기적으로 생각한 듯한.
-후의 횡성신문은 국한문 혼ㅇㅇ을 하면서 유생층에 후러씬 더 어필함. 즉 지식층을 계몽하는 것은 횡성신문이었다고 판단됨.
-독립신문의 대상은 지방의 유생보다 서울의 학생, 상인 등. 실효성은 어투가 한문투여서 높지 않았을 것임.
-결국 제자층에서 혁명적인 인물이 등장함.
-고종이나 권력층이 독립신문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지와 대한제국기의 정치사도 보아야 할 것임.

 

결국 이 시기에 국제부분에서 과부하가 걸려 있었다는 점이 비극
-국제 역량 control 방법이 고도화되어야 했는데, 국내 역량은 부족
-독립신문의 창간 계획도 친러 세력이 들어서기 이전의 일이었는데, 창간하고 보니 이미 친러세력이 자리잡은 후
-진정한 의미의 독립이 내부역량 강화를 통한 것이라면 그러한 시간을 주지 않는 외압과 그것을 manage할 계획없이 민에 대한 계몽을 생각했던 것임
-이 시기는 조선의 외세가 가장 악화된 시기였지만, 그런 기회가 순간적으로 주어져서는 내부 역량의 미흡 때문에 모델을 설정하기 힘듬.

 

대안
-실제로 군사, 외교 두 가지를 다 했어야 함. 자주국방과 양다리 외교를 둘 다 써야 했음.
-그러나 개인적인 권력욕까지 결부되어 국내 싸움에서 이겨내려면 외세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 버림.
- 내부적으로는 왕권을 제한하고, 내각 또는 중추원을 강조하려는 노력이 있었음. 개화파 내부에도 고종의 절대권력을 제한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그것을 끝내 무너뜨리지 못함.
-대한제국시기에 대신들의 권력은 점차 약화되고 고종의 힘은 강화되던 추세. 인사권 장악, 내각의 재정보다 황실의 재정이 더 커짐. (궁내부와 내정원 비대해짐)
-당시 일본 공사관 기록도 검토해야함. 예를 들어 지나친 간섭으로 궁정 내에 반일감정을 조성한 것은 실책이라고 지적하면서 고종 자체를 친일화하려는 계획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됨.

 

외교로 플레이하지 못한 부분은 일정 정도 고종이 책임져야할 것임
-국내정치적으로 공백이 있었기 때문에 고종의 영향력이 중개한 것으로 보임
-고종의 전략도 근본적으로 소심함이나 공포에서 기인한 측면도 있음
-민영환(세력규합), 박영효(쿠데타음모 여러 번) 등의 움직임도 주목해야 함. 단 일본은 박영효 이용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임.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