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act    
독립신문 (1897.4.1-1897.9.30)
 

2003-01-22 

97년 10월 세미나 기록

 

일시 : 1997년 11월 1일(토) 오후 3시-8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회의실
참석 : 하영선, 최정운, 신욱희, 김봉진, 김용직, 김석근, 손열, 장인성, 안인해, 김영호
독회내용 : 독립신문(1897.4.1-1897.9.30)

 


 

주요토론내용

 

독립신문의 주요내용
- 7월 27일자에서 '독립'의 의미: 형식적 독립과 참독립이 있음
- 개화당의 예를 보면 결국 남의 속국이 될 것임. 마음의 자주독립이 중요. 일본과 러시아에 편벽되지 말고 인민에게 편벽되게 해야 함. 참독립으로 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을 중용해서 4-5년 국사를 맡김(교육 등). 조선사람임을 알게 하는 것이 중요.
- 상황인식에 있어서의 차이가 드러남. 5월 25일자와 7월 27일자에서는 각각 육해군을 육헝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과 외부의 위험을 강조하는 내용의 낙관론과 비관론이 혼재되어 있음. 나이브한 국제정치 인식을 엿볼 수 있음.
- 문명에 대한 인식: 세종대왕의 문명의 정치를 강조함(학문숭상 등).
- 경제: 부국강병의 맥락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강조. 농업(상업작물)에 힘써야 함. 학문과 자본이 없어 제조업은 어려움. 수입대체(통상)를 언급.
- 정부비판: 이전까지는 탐관오리에 대한 내용이 주였음. 이 시점부터는 정부의 기간정책 또는 정치세력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 시작됨.

 

서재필의 근대화 패턴은 강병쪽을 강조하지는 않았음. 교육부분이 대부분.
- 일본과 조선의 단계가 다르기 때문에 국제정치 인식이 나이브하다기보다는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으로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 이 당시 상황은 환궁 이후에 정치적으로 미묘한 시기. 개화파와 수구파가 서로 왕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는 시기. 서재필은 자칫 여기에 말리면 독립신문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기에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려 했지 않았을까?
- 5월 25일자도 외침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보다는 낙관론으로 보아야 할 것임. 즉 일국의 침략을 다른 외국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
- 4월 20일: 정책의 우선순위는 바위에 곡식을 심을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은 거름을 주는 수밖에 없다는 식.

 

대외관: 대외적 독립을 어떻게 보고 있나?
- 청에서 벗어난 상황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은 알고 있으나, 현실정치 차원에서 외교전략 이외에 군사적 성격에 대한 고찰이 부족한 듯함. 그러면 독립신문의 대외관을 어떻게 잡아가야 하나? 확실한 것은 군사부문은 missing되었다는 것.

 

내부적으로 문명의 standard 세우기 위한 정책적 준비는 뭐라고 생각했나?
- 초기에 국내 정치세력에 대해 서재필은 좌절함. 실질적 독립을 위해서 지금은 씨를 뿌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듯함. 토양을 바꾸는 거름의 의미로 교육을 해야 함. 계몽론으로 기울어지게 됨.
- 주도세력을 창출할 생각을 하지 않고 민중교육적 계몽론으로 빠진 한계가 노정됨(cf. 노선생의 비판 對 신용하교수의 미완의 혁명론)

- 아직도 마음의 개화가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으며, 국제사회에 너무나 커다란 기대를 하고 있음. 그러나 제국주의의 현실은 기대와는 다르게 작동함. 또한 위기의 초점이 국제보다는 국내에 집중되어 있음(예: 동학같은 반란이 또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역설).

 

국제정치보다는 국제관계(해외사정) 전반에 대해 관심: 국제관계의 열려진 가능성을 발견하려 노력.
- 일본 신문을 인용한 예에서 보면 서재필이 글을 이중적 의미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국문판에서는 그 신문을 그대로 전제하고, 영문판에서는 일본을 비판함).
- 문명의 정치: 한글 창제의 실용주의 정신을 높이 삼. 4월 22일부터는 논설 대신에 의견이 같은 인물의 글을 인용하기 시작함.

 

의사로서의 서재필의 담론
- 위생에서부터 시작하여 과학적 지식과 생물학을 얘기함.
- 고민: 유교사상에 물든 조선 지식인의 규범론적 사고. 좀더 경험적이고 실용적이며 분석적인 사고를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음.
- 6월 5일자: 기독교의 공공정신과 조선의 전통을 비교.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도록 각성하는데 역점을 둠. 따라서 교육 얘기에 집중하게 됨.

 

7월 27일자의 '실상교육'의 아이템은 무엇인가?
- 독립의 base는 인민이고, 그 인민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므로,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 교육은 실상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 그렇다면 그 커리큘럼은?
- 실상교육은 양의보다는 한의로 치료하자는 것 아닌가?
- 그 의미는 '실상'을 보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뜻이 될 것임. fact를 보면 서양식 사고가 맞는다는 것을 알 것이라는 의미로 파악됨.

 

독립신문은 '개화'보다는 '계몽'의 시작이라고 파악할 수도 있음. 실상교육 자체가 유학비판은 아닌 것 같음. 공공사업의 정신을 보면 유교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님.

 

계몽서와 건백서, 책략서 등을 비교하여 볼 때, 독립신문의 base 자체는 인민. 따라서 한글로 인쇄. 밑으로 내려갈수록 문명개화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극단조치를 얘기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계몽' 자체가 더 중요했을 것임.
- 개인보다는 전국 인민의 힘을 강조(국민, 조선사람, 전국인민, 족 속의 인민 등) vs. 일본 계몽사상가의 얘기인 개인 힘의 총합.

 

주위의 제약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음. 그런 가운데 '제도개혁'을 중요한 주제로 다뤘고, 정부나 관료의 직분과 국민(평민)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이 엿보임.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