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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1896.12.1-1897.3.30)
 

2003-01-22 

97년 8월 세미나 기록

 

일시 : 1997년 8월 23일(토) 오후 3시-8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회의실
참석 : 하영선, 신욱희, 김봉진, 김석근, 손열, 장인성, 안인해
독회내용 : 독립신문(1896.12.1-1897.3.30)

 


 

주요토론내용

 

독립신문은 앞으로 발제자를 정하고, 읽을 내용은 사설에 한정해서 1회 모임에 1권을 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도록 하고, 이후 시기(애국계몽기 등)는 학회보 등을 몇 개 선정해서 분담하여 발제하도록 할 예정임.

 

지난 모임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독립신문을 하나의 개혁 프로그램이라고 가정한다면, 과연 최대의 화두가 국내냐, 국제냐 하는 문제가 있음. 왜 제호가 '독립'인가?

 

당시 사회의 문제
- 일상생활에 대한 얘기가 논설에 자주 등장
- 언론사 부분에서 한 범주구분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임(예: 국제관계가 12%라는 설정은 받아들이기 힘듦)

 

문명개화 또는 문명진보(더 많이 쓰임)에 대한 언급
- 유길준은 행실의 개화는 전파의 각도에서 고려할 필요가 없고, 우리의 가치를 지선 지고의 것으로 진전시키면 된다는 식으로 얘기하였으나, 여기서는 조선병은 학문, 생각, 행실의 개선을 통해 치유해야 한다고 함으로써(p.533), 행실도 외국 것을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얘기.
- 이는 재미 체류기간과 시간의 경과에 의해 나타난 인식의 차이라고 볼 수 있으며, 서재필은 일본과의 30년 차이를 따라잡을 수는 있으나, 외국 것을 전면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

 

개별 국가에 대한 인식
- 일본의 군사비에 대한 comment: 예산의 절반이 군사비인데, 병권을 잡으려 하는 것은 잘못이고 오히려 상권을 잡아야 한다고 함. 상대적으로 일본을 positive하게 보기는 하지만, 친일적으로 파악되지는 않음.
- 일본에 대해서는 한편으로는 reference로 생각하고 한편으로는 위협론의 가능성을 지적하는 이중적인 모습이 드러남.
- 청은 멸시함(예: 청국 놈들)
- 러시아에 대해서는 아관파천 이후 이미지가 점차 악화되는 것으로 드러남(러시아에 대한 불안의 고조).
- 미국에 대한 전체 톤은 미국 10년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 서유견문에서도 미국의 비중이 컸지만, 서재필에게는 문명의 척도로서 미국의 비중이 상당히 중요.
- 독립신문의 취지가 중립론인가? 아니면 내부적으로는 친 영·미·일 하자는 것인지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서 읽어야 할 것임.

 

국내부문
- 군주를 언급할 때는 문체를 띄어쓰고, 임금에 대한 negative한 언급은 거의 없음.
- 간헐적으로 관리들에 대한 언급이 있음: 문명진보가 잘 안되는 책임을 수구관료에게로 돌림.
- 한편으로 재판도 하지 않고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민중들이 살해하는 것은 옳지 않으나, 그들이 죄를 짓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얘기함.
- 사설내용 '문명개화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서유견문과 연속적인 측면이 보이긴 하지만, 서유견문이 80년대의 개화계보를 대표한다면, 90년대에 10년간의 시간적 편차가 전통과 문명관, 국제정치관 등에 투영됨. 이미 유길준이 생각하던 mixed system을 고려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중국이 몰락한 상황. 근대 쪽으로 가까워진 것으로 파악됨.
- 군민공치(조선판 입헌군주제)에서 얼마나 더 진전한 것인지도 생각해보아야 함.
- 생활풍속의 개화에 있어서는 서양의 수용을 더 강하게 주장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 같음.

 

청이 물러난 이후이기 때문에 이미 새로운 질서로 들어갔다는 것을 전제로 얘기하기 때문에 긴장감이 덜한 것 아닌가? 또한 외교에 대해 상당히 둔감한 것으로 여겨짐. 내부만 개혁하면 잘 될 것으로 판단하는 것 아닌가?
- 질문: 왜 화두가 '독립'인가?
- 국내도 외교도 거론하기 곤란한 시점에서 신문이 발간되기 시작한 것이 비극이라고 볼 수 있음.
-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기독교세계로 완전히 들어가 있음(크리스마스 이브의 사설 등). 언론 상에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무리가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있으나 일반인들이 수용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임.
- 1880-1890년대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가 한일간의 쟁점임. 독립신문은 개혁프로그램의 일환이긴 하지만, 개화 이외의 보수 또는 관찬사료와도 비교 검토가 되어야 당시 얽혀있던 사정들을 설득력있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임.

 

갑신정변의 시점에서 개화파와 위정척사파 사이에 최소한의 연계가 있어야 했는데, 오히려 개화파도 2개로 분리되는 상황이었음. 또한 갑오. 을미개혁 세력이 떨어져버린 상황에서 독립신문이 발간됨으로써 독립신문이 큰 힘을 가질 수는 없었음.
- 국가가 망한 원인을 내적인 요인에 두면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이 나옴. 외적인 요인을 강조하면 '조선은 나름대로 근대화 프로그램이 있었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외세가 그것을 막아버린 것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음. 결과적으로 내부적인 틈새를 외세가 파고들었다고 얘기해야 함.
- 망했지만, 그렇지 않을수도 있었다는 점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함. 이쪽, 저쪽을 규정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너무 성급한 느낌이 듦. 그렇게 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아질 수 있음.
- 서재필은 국제정치적으로 나이브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임. 외교술, 방법에 대한 감각이 둔했음.

 

국제정세를 보면 당시는 기회가 있는 상황: 삼국간섭과 아관파천을 통해 일본이 주춤.
- '독립'의 의미: 청국으로부터 얻어진 독립도 부국강병을 통해 다지지 않으면 지킬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음.
- 일본의 근대적 의도는 최소한의 안보 또는 최대한으로는 세력권 확보라고 볼 수 있는데, 조선의 의도는 정책적으로 추진되기 전에 일본 등 외세의 개입이 시작되었음.-'근대의 잘못된 만남'

 

기본적으로 문명의 충돌은 자주 일어나지 않음. '문명의 섞임'이 일반적 현상임. 충돌의 예외적 현상은 중세와 이슬람의 충돌과 근대에서 보여짐. 이러한 이상한 시점에서는 급진개화파의 길밖에 없었음. 절충주의가 통용되기에는 시간이 없었음. 즉 후쿠자와 식의 생각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시점.
- 개화(근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근대화세력이 제국주의세력이라도 배우고 협력하지 않을 수 없음. 위정척사파는 개화는 하지만 반제국주의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에 잘 되는 얘기였음.
- 질문: 80년대, 90년대에 있어서 위정척사파와 개화파의 인식변화 문제.
- 사설에서 '개화를 하든 수구를 하든 하나를 확실히 선택하라'고 강조하면서 입장을 분명히 드러낼 것을 얘기.

 

전통과 현대는 잘 접합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임. 80년에서 10년 사이에 상황이 변화하여 수구관료가 자리잡은 것은 토양에 맞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임. 일본은 혁명이 성공했는데, 84년에 조선은 왜 실패했는가? 이질적인 면이 일본 쪽이 덜했던 것이 아닐까?
- 당시는 현재의 북한과 유사한 점이 있는 것 같음: 김정일 체제 하에서 고유의 개혁프로그램을 얘기할 수 있는가? 또한 그런 입장의 인물들이 세력화할 수 있을까?
- 결과적으로 조선의 개화파는 통합 이데올로기를 제시하는 데에 실패했음. 또한 그것을 제시한다 해도 수구파와 일반백성들이 따르게 할만한 힘도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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