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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영인본 1권 200p.까지 (1896.4.7-7.30)
 

2003-01-21 

97년 5월 세미나 기록


일시 :1997.5.3 (토) 오전 10시-2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세미나실
참석 : 하영선, 신욱희, 김봉진, 박명규, 장인성, 김용직, 손열, 이성형
독회내용 : 독립신문 영인본 1권 200page까지 (1896.4.7-7.30)

 


 

주요토론내용


배경설명
-일본은 청일전쟁이후 승전 분위기에서 3국 간섭으로 초래된 조선의 친러 분위기를 제압하고자 95년에 을미사변을 일으킴. 서양 특파원들이 이를 대서특필. 고종은 1896년 2월에 아관파천 단행.
-갑신정변 주역인 서광범, 박정양 등이 3차 김홍집 내각(1895.8) 성립 후 법무대신, 내무대신 등으로 중용됨.
-서재필은 망명한 박영효와 미국에서 접촉 후 1895년 말에 귀국. 귀국 후 중추원 고문직 제의 받았으나 거부함. 신문발행을 허가하면 그걸 수락하기로 함. 1896년 1월부터 신문발행 추진. 일본측(한성순보)에서 반발. 아관파천 후 상황 역전되어 재가를 얻고 지원금 받음.
-즉 아관파천의 상황에서 나온 신문. 막후에서 러, 청, 일이 한반도의 새로운 정세 전개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열강의 제국주의적 이권 침탈이 가속화되는 시기였음.
-고종으로서는 국제적으로 주권을 가지고 있는 왕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 알렌 공사를 중심으로 한 '춘생문 사건'등 고종을 미국 쪽으로 유인하려는 일도 있었음. 정치 파벌들도 생존하기에 급급해서 타국 공관에 피신하던 상황이 전개되었음.
-독립신문 발행 후 왕실의 권위를 다시 살려보자는 노력을 전개하는 아이디어가 계속 신문에 등장함. 7월2일 독립협회 발족. 독립문을 세움.
-독립신문 이전의 신문은 한성순보, 한성주보, 한성신보(일문, 국문)등으로 정리할 수 있음.

 

초점을 정한다면, 당시 상황에서 중립으로 빠지고 싶었던 것인가? 아니면 어느 한 나라를 쫓아가려는 것인가가 중요함. 당시 국제정치사의 맥락에서 몰락해 가는 상황 속에서 외세를 어떻게 management하려는 것인지를 재해석해야 할 것임.

 

국내정치 문제도 해석의 여지가 있음. 왕권, 민권, 국권 등에 대한 이해가 80년대의 해석에서부터 훨씬 진전된 형태인가?
-신용하 교수류의 적극적 해석 대 민중사관 측의 부정적 해석
-숙제는 두 가지로 우선 근대 민주주의 패턴 즉 군민공치인가, 완전한 민주주의로 더 나간 것인가의 문제와 외세처리의 민족주의 문제임. 이를 위해 1894년 갑오경장부터 1896년 아관파천까지의 복잡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임.
-우선 background reading이 있어야 하고, 본문에 대한 기존 연구의 견해, 특히 정치 분야에 대한 해석을 재검토해야 함.

 

서재필 정도면 러,일의 큰 충동을 예측할 수 있었지 않을까?
-그는 한양의 외신기자들과 정보를 주고받아 국제 정치적 감각이 당시로서는 뛰어난 편이었음.
-시간이 지날수록 러의 제국주의적 이권개입의 측면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내용들이 나타남.
-서재필이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는가? 김민환 교수가 한성순보보다 독립신문이 power struggle에 대한 분석의 정도가 떨어진다고 평가한 것에 동의. realism과 n대-liberalism으로 구분한다면 후자쪽. 당시 상황은 80년대보다 훨씬 더 현실주의적으로 전개됨.
-인식이 안된 것보다는 그걸 강조할 맥락이 아니었지 않은가?
-안됐다는 것은 아니고 당시 정세에 비해 현실 인식은 다소 낙관론으로 보여짐. 목표는 좋되, 현실 인식에서 한계가 있었음(국제정치 전반, 동양3국 공영론 등)
-국제정치, 제국주의 등보다는 구체적인 인프라(교육, 군사...)구축 등 실질적인 접근법을 택함. 의사의 작업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실용적이었음.

 

개화 또는 독립을 어떻게 구상했을까?
-안의 개화가 진행되면 자연히 독립됨. 대중교화가 우선임. 따라서 국제정치 부분은 뒤로 가게 됨. 한성순보는 국제가 50%, 독립신문은 10%미만

 

당시의 언론자유 상황은 어떠했을까?
-직접 통제는 불가능했지만 심정적으로는 조심해야 하는 상황. 계보로는 일본측에 가깝기 때문에 러시아가 우세한 상황에서는 조심해야 했을 것임.
-당시 상황은 국제정치가 매일매일 real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렇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는 없었음. 영문을 내는 이유는 과거의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합리적이고 개혁을 지향하는 정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기 때문.
-기존의 관권을 강화해서 지속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고 민에도 민족적인 정서 불어넣겠다. 외세는 앞으로 활용해야 할 자원으로 파악하고 있었음.

 

서재필의 인식의 한계에 대한 평가는 개인의 탁월성에 의해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각 나라의 정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 우선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임. 판단능력 수준과는 별도로 국제 정치적인 정보가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추측됨.
-알고 안 썼는가? 몰라서 못쓴 것인가?
-신문이라는 매체를 선택한 목적상 기사를 올리고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기자는 의도가 아닐까?
-고종을 끌어안고 구심점을 세우고자 함. 국제정치보다는 사회운동을 하려는 아이디어였을 것임.
-주적 설정: 의병과 관리 중 탐관오리의 제거가 국제정치보다 더 중요하게 설정되었을 것임.
-실제 정치에서의 실패의 경험과 미국 시민권으로 조선에서 겨우 버티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대군주 폐하를 붙들고 제도개혁보다는 행정개혁을 통한 밑으로부터의 개혁을 구상한 것이 아닐까?

 

미,러,일 3국을 서재필은 어떻게 요리하려고 구상했을까?
-일본은 부국강병, 식산흥업으로 문명 개화했음. 따라서 주적이 될 가능성 농후. 기댈 세력이 없기 때문에 일본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함. 일본을 자극하면 일본의 의도를 도와주는 것이 될 것임. 그렇다고 아라사를 주적으로 얘기할 수도 없었음. 어떤 나라를 배경으로 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를 주적으로 설정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음. 미국은 실제적인 지원세력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임.
-따라서 국제 정치적인 얘기를 하려면 외세에 대한 호, 불호를 명백히 해야 하는데 그러다가는 조선이 망한다고 생각.
-서재필 입장에서는 아직도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되었을 것임. 이런 상황에서 의병운동은 국가를 구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고, 일본군으로 하여금 의병을 제압하게 되는 쪽으로 나갈 것으로 판단하여 의병활동을 반대함.

 

한성순보보다 진전된 점
-개체들과 국가의 독립과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하는 듯함.
-의병활동이 민의 각성에 대한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음.
-'주권'의 문제에 있어서도 개인의 주체적 권리(민권)와 집합체의 주권(국권)문제를 동시에 고려하여 양자의 결합은 개인의 주체적 권리가 전제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것임.
-그 양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을 것인가?
-정치체 자체의 주권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은 요즘보다 더 컸을 것임. 따라서 대외적 침략에 대한 주체의식은 대내적 계층과는 다른 한 축을 이룰 수 있음. 이것이 앞으로 규명해야 할 점.

 

정부, 국가, 국가 개혁, 주권의 문제
-1884년 서재필은 이 regime으로는 안 된다. 싹 갈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독립신문에까지 이어졌음.
-공화정 얘기를 하지 않고 '대군주폐하'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입헌군주제의 관점으로 파악할 수 있음.
-머리 속에 공화정이라는 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구심점이 없기 때문에 고종을 배제하고 급격한 개혁을 추진할 수는 없는 상황.
-책이 아니라 신문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놓고 읽어야 할 것임.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세계적 사조가 공화제의 확산과는 일치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인민주권 주장의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았고, 보수적인 형태도 많았음. 서재필이 파악한 민중은 무엇인가? 결국 엘리트 중심의 민중 논위가 아니었을까?

 

communication의 문제
-독립신문의 실제구독자의 수와 그 계층 및 그 impact를 실증적으로 조사한 자료의 필요성.
-지방의 경우 대부분 opinion leader가 있고, 그의 말이 강력하게 대중에게 appeal됨. 1880년대까지는 유생이 여론을 주도하는 상황.10여년 지나면서 독립신문이 지방에도 퍼지게 되었고, 향촌의 식자층은 그 성향에 관계없이 새로운 지식에 관심이 많았을 것이라고 판단됨. 결코 매체의 효과가 만만하지는 않았음.
-매체가 무엇을 얘기했는가와는 별도로 얘기를 하는 공간(언로의 개진)을 만들었다는 파급효과는 컸을 것이라고 생각함 : 불특정 다수와 접촉, 한글 사용, 정부 비난, 외국에 대한 정보 등
-향촌 양반(사족)들은 향청이라는 매체를 통해 정보를 접해왔음 (예: 박경리의 토지-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막에서 얘기를 전해 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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