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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견문>(유길준전서 제1권) 중 제 7,8,9,10편
 

2003-01-21 

3월 월례 세미나 기록


일시 : 1996년 3월 29일(금) 5시-7시
장소 : 서울대학교 사회대 국제문제연구소내 세미나실
참석자 : 하영선, 신욱희, 김봉진, 손열, 이성형, 안인해 교수님
독회내용 : 『西遊見聞』(『兪吉濬全書』제1권) 중 第 七,八,九,十編 (收稅하는 法規부터 巡察의 規制까지)까지, 발제자 없이 각자 읽은 소감을 발표하는 형식으로 세미나를 진행함.

 


 

토론내용


국가의 경제적 역할(세금징수, 자유주의 및 신고전학파가 내세우는 국가의 역할)을 언급하면서, 구체적인 경제(시장 지칭)에 대한 언급은 없음. 실제로 정부가 하는 일 (예: 예산집행)은 문명개화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상주의적 경향을 언급함. 유길준은 '經濟'를 '經世濟民'의 의미로 사용함.

-아마도 유길준은 neoclassical state로 가가 위해 해야되는 것은 '경제'로 파악함. 즉 '시장'이 없는 상태에서, 마치 시장이 존재하며 이에 필요한 기능들을 국가가 담당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문명개화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파악함.
-유길준이 언급한 物産學이 요즘의 經濟學에 해당됨.
-유길준의 『西遊見聞』에서 빠진 '市場經濟論'이 조선에 도입되는 시기는 아마도 갑오경장 이후 일 것으로 추정됨.
-유길준은 당시 조선 농민들의 세금에 대한 저항, 그리고 그 세금을 중간에 누락되지 않고 국고에 놓는 문제를 염두에 두었을 것임.

 

제7편이 '富國章'에 해당된다면, 유길준은 부가 형성되는 부분(즉 시장을 만들어 내는 것)은 생략하고, 단지 세금을 걷어들이는 부분과 이것을 쓰는 부분만을 언급함. 그는 당시 선진국가의 기능을 따라 하기만 하면 될 것으로 판단함. 그러나 이 章만으로는 어떻게 부국을 해야되는 지는 불분명함.

-유길준이 보기에 '富'가 强兵보다 더 중요하며, 조선의 경제체제에서 거두어 쓰는 부분이 생산부분보다도 더 근대적인 것으로 파악함.

 

당시 '官民調和論'의 주장이 엿보임. 이것은 백성들이 서로 권리의 주장보다는 의무의 이행을 잘하자는 것으로서, 臣民은 세금을 잘 내고 병역의무를 지킬 것이 요구됨. 또한 '안 걷고 안 쓰자'는 유교적인 사고를 잘 반영함.

 

제7,8편에서 '民稅費用'하는 사무부분의 언급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의 체계와 거의 비슷함. 다만 유길준의 저서에서는 '왕의 존엄을 위한 비용'에 해당되는 부분이 빠짐.

-statecraft의 차원에서 세금을 언급함
-절약=economy의 의미도 있었을 것임

 

제7,8편은 유길준이 복택유길의 저서를 구체적으로 베낀 부분임. 단지 약간의 말을 덧붙였으며, '敎育','利用厚生','道理'나 '信義'등의 용어를 사용한 것은 유교적 관념을 반영한 것임.

-그러나 제9,10편은 유길준이 복택유길을 베끼지 않은 독창적인 부분임.

 

19세기 후반의 역사를 바라보는데 있어, 다음의 3가지 틀, 첫째 diffusionism(-외생적), 둘째 evolutionism(-자생적),그리고 셋째, 위의 두 가지가 얽힌 상황 등으로 바라볼 수 있음.

-그 중 diffusionism의 대표적인 서적으로 소개되는 것이 유길준의 『西遊見聞』임. 유길준은 당시 위의 첫째, 둘째의 것이 얽히는 과정의 딜레마 속에서 이 책을 썼을 것임.
-당시 조선의 군사제도, 사상, 교육 및 화폐제도 등 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아는 것이 필요함.

 

법률개정 부분에 대하여, 유길준이 자신의 저서에서 현실을 고려하여 점진적 및 개량적으로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과 달리, 갑오경장 이후 유길준이 주도한 실제정책은 이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줌.

 

1874년에서 1884년 기간은 조선이 기존 체제 내에서 개혁을 모색하였던 마지막 기회였음. 따라서 이 기간에 대한 자세한 고찰이 필요함.

-개화파가 쿠데타가 아닌 방식에서 쿠데타를 구상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던 계기나 원인은 무엇인가?
-1881년부터 조선에서 실제의 정책결정에 깊이 개입하였던 사람들은 개화파였음. 이 당시 구세대의 관료들은 6조등에 재직하였으나 정책결정에서 일단 뒤로 물러나 있었던 상황이었음.
-1884년 조선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였음. 대부분의 온건개화파 사람들은 청을 조선의 동맹세력으로 붙들어 두어야 한다는 관념을 지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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