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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견문>(유길준전서 제1권) 중 제 5, 6편
 

2003-01-21 

월례세미나 기록

 

일시 : 1996년 2월 1일(목) 오후4시-7시
장소 : 서울대 사회대 국제문제연구소 내 세미나실
참석자 : 하영선, 최정운, 신욱희, 김봉진, 장인성, 손열, 이성형, 안인해
기록 : 정용화
텍스트 : 『西遊見聞』(『兪吉濬全書』제1권) 중 제5·6장

 


 

토론내용


김봉진

체계와 내용은 후쿠자와의 『서양사정』과 거의 같다.

 

하영선

결국 부국강병을 위한 정치시스템을 어떻게 구출할 것인가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군민공치>체제를 이상형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을 현실정치에 채용하는 있어서의 딜레마를 발견하는 시각에서 읽어야 함. 전통적인 <天-王-臣-民>의 위계질서를 배경으로 할 때 民의 정치참여는 혁명적인 발상임. 茶山은 왕권강화를 통한 민본을 주장했지만 이미 실학으로 회귀는 불가한 상황에서 일본의 새로운 시스템을 유심히 관찰하고 바람직한 모델을 찾고 있음. 石田雄은 『일본의 자유주의』에서 일본의 근대국가 모델을 후쿠자와의 영국형과 가또오의 독일형을 대비하여 논하고 있는데, 일본을 매개로 서양정치체제를 이해한 유길준은 어느 모델을 선택할 것인가가 핵심적인 딜레마로 제기됨. 유길준의 정체구분은 가또오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정부의 역할에서는 후쿠자와의 초기모델인 영국형을 수용하고 있는데 이것이 당시 과연 타당한 것이었나?

 

김봉진

유길준은 1/3정도를 후쿠자와의 것을 번역하고 있지만 그는 東道관념이 강력하여 후쿠자와의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음. 유길준이 왜 약 15년 전에 발간된 후쿠자와의 초기저작 - 즉 국권 강화론으로의 전환 이전의 저작인 『서양사정』을 대본으로 하였는가? 이는 그가 자유주의, 민권론, 영국형 의회 민주주의 등에 共鳴하였기 때문.

 

장인성

『서양사정』출간 당시에 일본에서 후쿠자와와 가또오 간에는 사상적 갈등이 없었다. 유길준의 <군민공치>체제에서 民의 위상은 君의 역할을 보완하는 정도임. 民의 여론을 참작하는 것은 전통적 국가관에도 있었던 것으로, 다만 유길준은 民의 여론에 조금 더 비중을 두는 정도로 보임.

 

김봉진

김용옥교수가 "조선/일본을 비교해 근대국가 건설의 성공/실패의 원인은 조선은 전통적 정치질서가 중앙집권체제로 근대국가체제와 별 차이가 없어 안이하게 전통의 변용을 시도하여 그 수용과 전환이 어려웠던 데 있다"는 지적에 공감함. 당시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은 근대국가로의 정치체제 개혁에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음.

 

장인성

후쿠자와는 國體의 레벨에서 논하고 있다면, 유길준은 기왕의 전통왕조국가체제 속에서 政體의 레벨에서 논하고 있어 그 논의의 장이 다름.

 

최정운

유길준은 서양정치의 원리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그것을 전제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음. 이로써 그는 서양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음. 그의 고민의 핵심은 서양적인 것을 현실에 적용하는데 따른 적실성의 문제였음.

 

하영선

<군민공치>는 전통적인 君-臣-民관계에서 臣을 民이 천거하여 君, 民을 정치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려는 것으로 전통과의 결별을 의미함. 유길준은 조선의 1880년대를 일본의 1860년대와 유사하다고 판단한 듯함. 그렇지만 유길준은 <만민공치>까지는 가지 못했음.

 

최정운

<군치><민치><군민공치>등 누가 권력을 가져야 하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쟝보댕 이후의 서양적 개념임.

 

장인성

정치주체를 <군신공치>에서 <군민공치>로 전환하고자 하는 것은 위정척사파의 논의에서도 진행되고 있었음. 그렇지만 인민의 권리와 국가권력이 잘 접합이 안되는 딜레마가 발생.

 

최정운

그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였음.

 

이성형, 최정운

핵심문제는 인민의 心과 力을 合하고 동원(mobilize)하여 부국강병에 효과적인 정치체제를 건설하는 것임.

 

김봉진

교육을 중시하는 태도는 후쿠자와보다 더 강함.<군민공치><군민공주>개념은 1840년대 이후 당시 많이 쓰는 개념이었으며 유길준은 이를 채용한 것임.

 

하영선

民을 키우고 王은 붙잡아 둬야 하는 딜레마, 그의 사상적 consistency를 찾아줘야 함.

 

최정운, 정용화

사상가의 사상적 consistency 자체가 하나의 myth임. 유길준은 영국형 자유주의와 독일형 국가주의를 편의대로 혼용해서 쓰고 있어 초기저작에서 그의 consistency를 찾는 것은 무리임. 후기에 갈수록 점차 정제되어 가는 모습을 보임.

 

이성형

유길준은 근대국가 건설의 담지자(trager)로 民을 포착한 것임.

 

안인해

유길준은 결국 헌법을 중심으로 한'법치국가'건설에 주력하였다고 봄. 결국 그 법 제정권력을 누가 가질 것인가가 문제.

 

하영선

유길준의 자유주의를 로크적인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벤담이나 밀적인 것으로 볼 것인가? 19세기 후반의 구라파 정치사상과 정치상에 대한 전문가의 참석이 요구됨.

 

손열

일본에서는 이미 1871년에 미국인이 쓴 보호무역론 책자를 정책당국자들이 입수해 정책에 이용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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