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교사연구회 2017년
4월 정례모임
일시: 2017.4.22.(토) 3:30~6:00 pm
장소: 동아시아연구원 (EAI) 대회의실
)
1.
독회자료
및 발제
주제: 김현철 | 효종-숙종때 북벌론의 전개와 한중관계에 미친 영향
1)
김현철
발제
한명기, “‘재조지은’과 조선후기 정치사:
임진왜란∼정조대 시기를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대동문화연구』 제59집, 2007. pp.191-230; 허태용, “17·18세기 북벌론의
추이와 북학론의 대두”,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대동문화연구』
제69집, 2010, pp.373-418.
2)
김수암
발제
송양섭, “효종의 북벌구상과 군비증강책,” 한국인물사연구회, 『한국인물사연구』 제7호,
2007.3., pp.169-192.
3)
노가연
발제
김선혜, “입관전후 청과 조선의 통혼과 시녀 문제,”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제91집,
2014.8, pp.231-265.
4)
추가
자료
김창수, “19세기 후반 조선사신의 공식보고와 정치적 파장,”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제106호,
2012.6., pp.141-173; 김경록, “17세기 조·청관계와 ‘왜정’의 군사·외교적 활용,”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 제94호(2015.3),
pp.205-245; 이명종, “17·18세기 조선에서
‘만주=故土’의식의 출현과 전개,”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구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동아시아문화연구』 제58집,
2014, pp.213-238; 백기인, “18세기 북벌론과 대청방위전략,”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 제41호(2000.12), pp.245-271; 장페이페이 외 지음, 김승일 옮김, 『한중관계사』 (북경대학
한국학연구센터 한국학총서), 범우, 경기도, 2005, pp.476-511.
2.
토론
내용 정리
n 17세기 중반 조청관계의
정상화에도 불구하고 청은 여전히 조선을 신뢰하지 않는 모습을 보임
-
홍타이지 시기에는 입관 전에는 조선의 반청 움직임에 대해 매우 민감하였고 (심양관에서 매일 처영 집행 등) 전쟁을 직접 겪은 조선인들은 반청
감정을 지울 수 없었을 것.
-
입관 이후 자신감으로 홍타이지 때보다는 완화된 정책이지만 특히 조선의 군비 증강에
대해서는 불신. 조선은 왜의 위협을 빌미로 청에 군사 증강 허락을 요청.
n 청이 안정화 되면서 동아시아는
균형적 평화가 아닌 패권적 평화가 등장. 허태용 논문에 등장하는 이하곤(1667-1724; 미술평론가)의
3가지 시나리오 주목
n 기존 연구와의 차별화: 기반을 갖고 있지 않은 세력이 패권적 질서와 규범을 세우는 과정에서, 명분론과
힘의 관계가 결합되는 모습이 기존 연구들에서는 명확하게 눈에 띄지 않음. 질서재편기 조선-중원의 쌍방적 관계에 대한 국제정치적 시각이 필요함.
-
정치학회보,국제정치학회보에 북벌론에 관해
정치학자가 쓴 논문은 게재된 바 없음. 북학론/북벌론을 정치학적으로 (국내정치,국제정치) 정리할
것.
n 북벌론이 실제로 불가능하지만
담론으로 남은 이유: 외교노선이자 국내정치적 효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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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시기 북인 vs 남인 간의 권력
다툼 중에 집권을 위해서는 숭명의식이 중요했음. 효종과 송시열의 입장에서는 광해군/동인의 실리외교를 인정하면 인조반정의 정당성 파괴.
-
임진왜란 때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왕가라는 컴플렉스. 국내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도 사라진 명에 대한 존중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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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론을 이루는 여러 요소 조명: 원-고려의 관계와는 달리, 북벌론파의 주장에 따르면 명은 ‘나라를 세워준 존재’. 복수설치론과 북벌론은 별개.
-
북벌 추진에서도 효종과 송시열의 차이점: 효종에게
북벌론은 전략적 개념, 그러나 관념론적, 지속가능한 합의를
만들지 못해서 좌절됨
-
에피소드적 측면 외에 장기적인 북벌론의 큰 그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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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론이 소모적이라면 북학론의 한계는?
-
조선 입장에서는 청,왜 중 누가 더 위협적이었나? 호란 이후의 방비론에서는 남방과 북방을 둘다 할 것을 강조. ‘북방=북벌’인가?
n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이 효종 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
-
북벌론 비판. 연암의 북학론은 일방적으로
순응하는 것이 아닌 청에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취하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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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의 3가지 방안: 모두 네트워크적. 義-力-理 차원에서 보면 力은 이미 실패했으나 義는 정조 때까지 작동 중이었음 (예: ‘義順공주’의 이름). 군사를
동원하지 않고 청을 다루기 위해서는 ‘실질적으로’ 장악해야
한다고 함. 북벌론이 기울어지고 북학론이 자리잡는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연암/허생 외에도 이런 논의가 존재했을 가능성. 義-力-理의 combination은?
n 17-19세기의 조선의 대청(對淸) 담론의 전체 사이클을 제시:
전략적,관념적 사대가 전략적,관념적 북벌로 변화하는
과정.
n ‘북벌론의 형성과 변용’을 기준으로 서술: 허태용 논문에 등장하는 북벌론에 대한 다양한 논의. 현실전략적인 면에서 후에는 관념화. 북벌담론은 계속 살아남았음. 북학세력도 ‘북벌을 하려면 북학을 해라’ 이지 ‘북벌을 중단해라’가
아니었음.
n 전체를 보여주되 너무
교과서적으로 도식적으로 보여주기보다 ‘main stage’를 하나 잡아야.
n 조명관계와 조청관계는
질적으로 다른가? 통혼 문제에 대한 반응에서 엿볼 수 있음. 외교관계가
정상화될 수 있는 간주관적 합의가 부재. 원명교체 때 요동정벌론과의 비교.
n 의순공주와 통혼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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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자금성 근처에 살았던 조선인의 역사를 찾으면 여성이 더 많았음. 다양한 연구의 잠재력을 가진 주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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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외교정책의 하나로서의 혼인. 예를 들어 청-몽골은 혼인정책 통해 매우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음. 그러나 우리나라에 반복적인 감정적 트라우마를 남겼음.
n 최근 시진핑의 “한국은 역사적으로 ‘part of China’” 발언: 중국형으로 bias된 역사관 반영.
트럼프는 어떻게 이해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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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는 무엇인가? 중국의 역사적인 한반도
이권 강조? 19세기 서양의 조선 수교 요구를 돌이켜보면, ‘속방이지만
중국도 한계가 있다’는 취지 (“조선은 청의 속방이나 자주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