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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수수께끼 같은 북핵담화
 

중앙일보 

2002-12-14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1994년 제네바 핵 합의 이래 동결해 왔던 영변 핵 시설들의 가동과 건설을 즉시 재개하겠다고 선언했다.


북한은 지난 10월 초 제임스 켈리 미국 대통령 특보와의 만남에서 제2의 제네바 핵 협상 유인 카드로서 핵 개발 계획을 시인했으나,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선 핵 포기, 후 대화'를 강조하면서 이 카드를 묵살했다.


북한은 10월 25일 기왕에 요구해 왔던 북.미 평화협정보다 낮은 단계의 북.미 불가침조약을 두번째 카드로 내놓았으나, 미국은 중유 제공 중단으로 응수했다.


북한은 세번째 카드로서 영변 핵 시설 재가동을 꺼내들었다. 이 패의 의미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수수께끼 같은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조심스럽게 해체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담화에서 북한은 첫번째 카드를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조심스럽게 거둬들이고 있다. "미국이 유일하게 들고 다니는 우리의 '핵 개발 계획 시인'이란 지난 10월 초 미국 대통령 특사가 우리나라에 왔다 가서 자의대로 쓴 표현으로서 우리는 구태여 그에 대해 논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 위험한 90년대식 판읽기


이러한 주장은 지난달 2일 같은 외무성 대변인 명의로 미국의 '선 핵 포기, 후 대화' 주장을 배격하면서 발표했던 "사실 조.미 사이에 지금 같은 적대관계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경제형편도 어려운 때에 그처럼 많은 품을 들여가며 방위력 강화에 힘을 넣고 특수무기까지 만들겠는가"라는 주장과 비교하면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북한은 첫번째 카드에 대해'선 핵 포기, 후 대화'를 주장하는 미국에 보다 위협적인 협상 유인카드로서 영변 핵 시설 재가동을 내놓은 것이다. 미국의'선 핵 포기, 후 대화' 요구는 북한의 표현을 빌리자면 벌거벗으라는 것이며, 무장해제시키고 먹어 치우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상당한 위험을 수반하는 극약처방으로 미국을 제2의 제네바 협상으로 끌어들이려는 모험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이러한 시도의 밑바닥에는 "현시기 조선반도에 조성된 핵 위기가 철두철미 대조선 적대시 정책의 산물이라는 데에서는 지난 세기 90년대 핵위기 때와 본질상 달라진 것이 없다"(12월 10일, 조선중앙통신 논평)는 생각이 짙게 깔려 있다. 따라서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의 탈퇴라는 단호하고도 원칙적인 입장표명이 미국으로 하여금 당근정책을 취하도록 만들었다고 믿고 있다.


동시에 미국이 '악의 축'의 중심국가들인 이라크와 북한을 동시에 다루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북한은 미국과의 상호 벼랑 끝 외교에서 어느 정도의 시간과 공간의 여유가 더 있을 것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북한이 90년대식 판읽기로 2000년대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과거의 대조선 적대시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과거 대북정책이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질서 운영, 미국 주도의 세계 안보질서를 위한 비핵화 정책의 틀에서 짜여졌다면,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9.11적 사고에 기반한 제2단계 대테러전의 틀 속에서 짜여지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90년대의 역사적 체험에 기대를 걸고 90년대와 같은 정책을 추진하는 경우에 북한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은 '선 핵 포기, 후 대화'의 입장을 강하게 유지하면서 외교전.경제전.정치전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현실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북한이 미국을 잘못 읽을 위험성과 마찬가지로, 미국이 북한을 잘못 읽을 위험성이 크다.


*** 제2 핵 위기 가능성은 없나


북한은 수령, 주체, 선군(先軍), 우리식 경제제도의 독특한 기반 위에 건설된 국가로서 미국이 추진하는 외교전.경제전.정치전의 의미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수령통치국가인 북한에 대한 정치전은 군사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북한의 세번째 협상 유인카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북한과 미국의 오해가 상승작용을 일으킨다면 제2의 제네바 핵 협상이 아닌 제2의 핵 위기가 발생할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북한이 과감하게 핵을 벌거벗은 대신, 거의 동시적으로 체제의 안보와 번영의 의상을 국제적 보증 속에 지원받으려는 새로운 발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河英善 서울대 교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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