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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열, "근대화", 전재성, "자주"
 

2017-12-20 

2017 6월 세미나 기록


일시: 2017년 6 10(토) 10:00-12:00

장소: 동아시아 연구원 회의실

참석하영선, 손열, 전재성, 김준석, 김헌준, 이중구, 최수온, 용채영

발표: 손열, 냉전기 “근대화” 개념

      전재성, “자주” 개념

 



발표 및 토론내용


<발표>


손열, 냉전기 “근대화” 개념 (발제문 참조) 


<토론>


김준석: 아연 회의 자료가 있나? 일본 이야기를 같이 서술할 것인가? 일본-한국 비교의 개념사인가? 


손열: 언론 보도된 것은 서양학자들의 이야기만 보도되어 있고, 한국학자들의 논의가 적음. 비교이기보단 근대화 이론 논쟁이 일본에서 먼저 60년대에 전개가 되었고, 일본에 의해서 전파과정이 있었음. 이를 한국학계가 안 보진 않았을 것임. 하코네 회의는 워낙 유명하므로 보았을 것임. 그것들을 통해 근대화 개념 논쟁을 할 때 이야기되었을 듯


하영선: 비교하기에는 서론을 써야 할 듯. 


손열: 비교가 아니라 앞선 논쟁이 한국의 65년 전후로 한 근대화 논쟁에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추적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 


하영선: 논문 순서를 어떻게 짤 것인지가 딜레마. 19세기 문명을 할 때, 서양 문명개념의 동아시아적 전파, 한반도적 전파로 썼었음. 처음은 그렇게 쓰려고 했는데 이것 자체가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님. 우리 이야기를 쓰려고 주변부를 보았는데, 주변부의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 다시 global한 것을 보았음. 그래서 한국을 먼저 쓰고 뒤 부분으로 주변부, 세계를 봄. 시작을 여기서 global은 늘 미국이 중심. 과연 여기서부터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한국이야기부터 들어가서 어느 정도 연결되었을지 찾아가는 순서가 있을 듯. 순서를 바꿔서 한국을 먼저 가면? 개념사는 현실이 가장 먼저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는데, 담론투쟁이 벌어지는 1965년 이후의 상황이 들어와야 함. 박정희에게 조국근대화라고 하는 말을 준 것은 누구인가? 박정희가 스스로 조어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그렇다면 그런 개념이 먼저 들어왔던 것이 아니라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 프로젝트에 연결된 학자군이 있었을 것임. 즉흥적 생각은 65년 고대 아연적 발상의 회의와 68년 4월 동주-노재봉의 국제정치학회의 회의는 굉장히 대비되는 회의였던 것 같음. 개인적으로 저쪽은 global하다고 하지만 당시 정치학과 교수들이 열심히 읽었던 것은 princeton의 근대화 시리즈를 읽었음. 고대 회의는 이런 분위기와 연결됨. 1970년대 종속론이 강하게 들어올 때 프린스턴 시리즈가 영향. 미국의 근대화론을 비판한 great debates들이 있었는지. 


68년 국제정치학회 논총을 보면 다 유심히 보지 않는데, 8집만 미완성. 68년 서울회의에서 다 잡혀갔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음. 잡혀가서 상당한 문초가 있었는데, 가장 당당한 것은 노재봉이었다? 동주는 패닉. 그렇다면 왜 68년 4월 회의를 하려고 했던 것인가? 그 앞에 민족주의부터 시비가 걸리기 시작했는데, 상반기는 동주가 박정희 국제정치의 최고측근, mentor 역할로 되어 있었는데 멀어짐. 그 회의는 왜 이루어졌는지 사례연구 필요.


근대가 무엇인가라고 했을 때 동주가 기본 speech한 것. 논총의 앞부분에 토론취지문이 붙어있음. 거기 summary와 동주의 speech가 딱 맞지도 않음. 정치적으로는 modern state formation이고 사회적으로는 서구화 등등. 동주의 서머리처럼 누가 무엇을 어떻게하고 등등 중에서 어느 것이 박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을지 따져봐야 함. 박정희는 경제개발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물질주의가 한국 근대화의 모든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 포인트였음. 목표도 셋팅이 잘못되어 있고, 주도세력도 잘못 설정되어있다고 논의해서 싸움이 난 것이었는지 불확실. speech와 토론들이 붙는데 토론들을 세부적으로 분석, 검토를 해야 함. 하이라이트는 65년과 68년의 논의의 차이. 19세기 문명론은 바로 후쿠자와 영향을 받았음. 하지만 일본 하코네 영향을 바로 받기엔 조심스러운 부분. 문명전파는 일본의 고민이 전통 속에서 서양 것을 어떻게 할지의 딜레마였는데, 만약 근대화 잘 되었던 잘못 되었던 여하튼 일본은 상당히 진행된 상태에서 modern의 의미는 뭔지에 대한 것을 논의. 반면 1960년대 한국은 가장 꼴지의 국가였는데 modernization race에서 어떻게 한국이 생존하는가 고민. 동주 말이 일리는 있음. 그러나 맑시스트, 종속이론 쪽 시각에서 비판이 아니라 한국 쪽 시각에서 비판할 수밖에 없음. 당시 대학원 다닐 때 분위기는 프린스턴류를 열심히 해야한다는 것이었는데 동주는 아니라고 봄. 65년 버전과 68년 버전이 달라짐. 65년의 마인드와 68년의 마인드 달랐을 것. 배후의 미국 쪽이 보는 것도 다를 듯. 


북한을 다룰 땐 무리지만 각주 등 60-65년 사이 김일성과 박정희의 연설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음. 우리는 성공했으나 전후복구에 북한은 실패..우리는 자본주의 근대화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김일성의 발언은 우리가 대신 프로그램을 짜주겠다고 함. 64년 비밀회의에서 3대 혁명역량 나누고..따라서 남북 통틀어 이야기를 한다면 고대 회의적 생각들이 있었고, 68년 국제정치학회적 생각, 북한은 삼대혁명적 생각을 하고 있음. 한쪽엔 맹아의 생각이 있었을 것. 고대 아연적 생각, 동주적 생각. 세 가지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


손열: 김일성 저작집, 천리마 운동 등 보려면? 


하영선: 당론, 64년 당 대회 중요. 김일성의 생각은 65년 인도네시아 speech에서 공개


이중구: 1965년판의 근대화론이 미국쪽 영향이라면 1968년은 어떤 성격인가? 마루야마 마사오 등 일본쪽의 영향이라고 아니면 실제 미국식 근대화라고 하지만 실제 한국식 성격을 추구했는지, 아니면 일본쪽 성격을 많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을지? 


하영선: 마루야마 근대의 눈은 상당히 다름. 


손열: 68년을 읽지 않음. 잘 모르겠음. 일본의 영향이 어느 정도 였을지. 전체적으론 프린스턴의 5부작을 더 중심...


하영선: 68년 사고에 대해서 아무도 쓰지 않음. 최대의 사건인데. 


<발표>


전재성, “자주” 개념 (발제문 참조) 


<토론>


이중구: 북한에서의 자주는 동맹관계. 한국도 미국과의 동맹에서의 마찰이 있을 때 자주인 것이 있는데, 북한은 중, 소와의 관계에서의 자주가 크다. 55년 소련지원이 줄면서 중공업 위주로 가겠다고 하면서 김일성은 무력통일도 생각. 당대회에서 쫓겨날 위험도 있었음. 적대정책에 대한 간섭에 대해 대항해야 하는데 맞설 이론이 딱히 없음. 55년 사상사업에서 이야기하면서 주체가 나옴. 66년에 자주성 옹호하자고 나오는 사설이 개제가 된 것에 대해선 약간 66년 비동맹 참여 이후의 다른 맥락이 있다는 점도 강조하면 좋을 듯. 66년은 문화대혁명이 있고 북중이 안 좋아지고 동맹대립 안에서 자주를 옹호하는 테제가 있음. 지금도 중국에 대한 상투적 문구로 자주 나올 수 있음. 


80년대는 동맹에 대한 방기의 위협이 있음.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겠다. 이 가운데 국방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을 외쳤을 듯. 82년도는 북한은 핵개발도 생각했을 듯. 중국이 독립외교노선이라고 해서 반소도, 반미도 아닌 경제개발에만 도움되는 것을 받겠다고 함. 북한은 우리의 활용가치가 떨어지는지에 대해서 고민. 80년대 중후반은 소련이 페레스트로이카로 가면서 북한이 소련을 다시 잡았다가 썩은 동앗줄...방기의 우려에서 다시 자주 이야기. 방기우려를 정당화하는 테제. 인민대중이 강조되는 것도 특이. 개혁개방 속에서 자주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지적. 컨텍스트에 있어서 방기와 간섭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이 강조되면 좋을 듯. 


한국도 결국은 일본에 대한 자주가 있는 것이 독특. 일본에 대한 자주라던지..그런 부분이 동맹 간의 정치적 부분으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미국의 압력인지 궁금. 


전재성: 일본에 대한 자주는 ceremonial. 65년 이후는 일본의 개입, 간섭을 두려워했다기 보단 한미협력이 더 중요. 70년대 초까지는 한미협력이 중요하므로 일본이 빠지는 것을 우려. 일-중 데탕트 진행되면서...80년대는 다루기 어려울 듯. 전두환 때는 자주가 중요개념이 아니었을 듯. 경제발전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북한에 대해서 공세적. 레이건-나카소네와의 정상회담 등. 북한에 82년 정상회담 제의도 하는 등 행동.  


하영선: 정부차원에선 그런데 현 정권의 자주파 대 동맹파. 이 자주파가 80년대의 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전재성: 사회담론은 빠짐. 정부차원의 국가 담론만 살펴봄. 70년대까진 사회담론보기 어려움.


손열: 그냥 듣기론 북한은 자주가 정체성으로서의 자주 측면이 있는 것 같음. 북한의 존재의의와 관련되어서의 자주 또는 주체의 내용인데 한국은 자주가 그런 차원까지는 가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근대화는 양쪽의 체제경쟁인데..자주를 놓고 경쟁하는 정체성 수준의 경쟁은 아닌 듯.


전재성: 동의. 근대화는  민주주의 등과 연관되어서 정체성과 연관되는 개념적 지평을 갖는데, 자주는 국가담론에서는 instrumental한 부분도 있어서. 내적 모순 등이 있는 것은 아님. 동맹과 자주사이의 모순이 있기도 한데, 자주 강조하면 정권-시민사회 갈등이 생기는 것은 아님. 


손열: 뒤의 북한 파트가 전체에서 어떤 의미? 북한과의 interaction 속에서 남한의 자주를 이야기하는 글일 수도 있고, 대비 차원일 수도 있고. 뒤의 북한 케이스를 어떻게 설정할지 문제


전재성: 북한은 철학적, 사상적으로 잘 포장된 느낌인데...박정희는 시론주의적 내용. 사상 이야기 빠짐. 북한은 정책담론을 사상담론에서 끌어오려고 하는 느낌. 


하영선: 앞의 19세기를 짧게 쓰려면 ‘속국자주’ 개념. 오카모토 다카시의 속국과 자주의 사이의 논쟁. 속국자주에서 독립자주로 가는 이야기. 홍범 14조 독립자주 이야기가 나오는데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조선은 독립 자주라고 봄. 고종이 홍범 14조에서 독립자주라고 하는 것과 일본이 조선을 독립자주라고 부르려고 1870년대부터 노력해서 이야기한 것과는 다름. 용어만이 아니라 굉장히 복잡한 implication을 가진 것이다. 우리는 당시 독립자주를 하면 안 되고 균세자주 쯤 했어야 하는 시기였는데, 일본은 알고 있었음. 독립자주 시켜서 망하게 만들겠다. 


하이라이트는 72년. 자주평화-민족대단결. 김일성-이후락 만남에서 박 대통령이 ‘자주’라는 말에 동의 했는가임. 형식논리는 72년 5월 12일에 양쪽의 concept이 합쳐진 것임. 김일성이 박이 자주에 동의하고 내가 평화에 동의했으면 다 된 것이 아닌가 주장. 박정희가 당시 정말 자주했다고 하냐? 그 시점이 하이라이트. 앞의 합의봤다는 자주는 뭐냐? 그럼 그 이야기대로 북쪽의 자주개념은 중소분쟁 적인 이야기에서 외세로부터 떨어져나오는 파트라고 한다면, 우리의 경우는 68년이 중요함. 중소 분쟁처럼 김일성이 반외세 자주로 간 것만큼 미국을 불신하기 시작했는데, 우리는 동맹-자주 쯤 하고싶었던 것이 아닐까? 북한은 동맹자주가 아니라 반외세 자주할 수밖에 없었는데...남북이 서로 다른 자주생각을 갖고 69-72년으로 가게되는데 72년 합의봤다고 하고 다시 깨지는 상황.


전재성: 이후락이 박 대통령 허락을 받지 않고 한 것인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개념을 나중에 사용하고? 


하영선: 이후락에게 일정한 전권이 주어졌을 듯. 당시 험난한 회의였으므로 정홍진의 회고록을 보면 71년 적십자회담 시작되고 만났는데 계속 헛돌게 되므로 정호진, 김덕현이 양쪽의 실세로 앉음. 정호진-김덕현 따로 합의. 여러 번 만난 후 사전합의가 있었을 듯. 3개 요소에 합의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갔을 것임. 이후락이 너무 오바했다? 정권 2인자되기 위해서 다 갖다 바친 것이 아닌가? 등으로 평가하기도 하는데, 완전히 모르고 가서 김일성의 이야기에 yes한 것은 아닐 듯. yes했을 때 이후락, 박정희가 생각한 ‘자주’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었던 ‘자주’와 김일성이 독촉하는 ‘자주’의 개념의 범주가 어디까지 공유되었는지 명확할 필요. 합의가 깨지는 부분도 보면 중요한 빌미의 하나. 7.4 이후 주한미군 안 나가고...대남혁명역량도 안 되는 과정이 진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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