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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권, 자유민주주의
 

2017-05-13 

2017 5월 세미나 기록


일시: 2017년 5 13(토) 3:00-6:00

장소: 동아시아 연구원 회의실

참석하영선, 손열, 전재성, 손병권, 김준석, 김헌준, 차태서, 이중구, 최수온, 용채영

발표: 손병권, “한국 정치지도자들의 자유민주주의 개념: 제헌국회 이후 이승만 권위주의 등장 과정에서 국회 본회의회의록을 중심으로”

 



발표 및 토론내용


손열: 모두에 자유민주주의가 두 가지 개념으로 이원화되는 것이 냉전적 특성이라고 했는데,권위주의에 대한 대항물로서 쓴 것이 냉전적 특성인가? 


손병권: 이원화과정은 처음부터 명확함. 제헌기간 지난 후 50년대 지나서 바로 드러남. 반공을 논의. 

이승만, 자유당은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같이 쓰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저쪽의 저항하는 엘리트들은 어떻게 보았는지도 궁금. 


전재성: 개념사 연구로 보면 자유주의, 민주주이가 합치는 과정과 겹침. 저는 민주주의에만 집중했는데, 사민주의도 있음. 지배 이데올로기, 반공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민주주의의 자유와 독재로부터 자유의 내용이 있음. 저항 이데올로기로서 자유주의는 국내 권위주의로부터 자유에 집중


하영선: 냉전사 개념으로 자유민주주의인 경우, 앞의 인트로가 조금 들어가야 할 듯. liberal democracy는 18세기 서구 개념인데, 이후 19세기에 우리에게 처음 번역되어 들어오게 되면서 자유나 민주 등 개념 사용. 유길준, 인민의 권리에서 처음 자유라는 말 씀. 하지만 공화주의로 쓸 때도 있었음. key는 45년 이후 북쪽의 민주주의 컨셉과 남쪽이 쓰는 컨셉이 다르나는 것임. 개념사를 통해 시기 분석이 가능할 것 같은음. 남로당도 45년 불법화하긴 했지만 50년까진 남북 왓다갔다 하고, 그 이후 프로세스 과정에서 한국에선 자유 민주주의 또는 민주주의라고 하면 자유로 받아들여졌어야 하고, 그것을 인민 민주주의로 불렀을지 의문. 남쪽의 상황에서도 개념의 이분화 현상에 대해 쓰는 것 필요 48-50년을 겪고, 한국전쟁을 통해 남북 분단이 되면서 역사적으로 개념의 분단화가 진행. 


손병권: 48년, 52년 선거만 되도 break가 있을 것 같음. 50년대 사상계에서의 자유민주주의 등을 보았는데, 국회 회의록의 경우 어떤 의미에서든 소수의 지식인들의 것임. 하지만 국민적 기반과 연계된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개념이었으므로, 당시 사회에서 넓은 폭을 갖고 보여주는 개념사적 트렌드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하영선: 이 분석 자체는 개념사 보다는 캠브리지 스타일로 접근할 수 있는 문건 아닌가 생각함. 미시적으로 들어가면 자유만으로도 그런데, 참고할만한 것이 당시 의회기록들을 보고 다시 컨텍스트 속에서 텍스트가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꼼꼼하게 따지는 것 필요. 저쪽은 이렇게 작업하는구나 참고할 필요. 이는 냉전이 되면서 진행되는 독특한 양분화현상이므로 한국적인 방법으로 처리해야 하지만 저쪽의 캠브리지 스타일에서 한 것도 다른 컨텍스트가 있으므로 참고할 필요가 있음. 


손열: 또한 일종의 일본의 전파개념사적 요소가 있을까? 일본의 자민당은 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당. 자유당은 오랜 역사를 가짐. 또한 일본은 사민당도 있었고, 여러가지 민주주의가 돌아다님. 하지만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이외에는 금지시 된 언어들, 사회, 평등 등이 민주주의의 금기로서 간주. 오로지 허가되어진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였음. 일본만 해도 다른 의미의 냉전개념사가 진행됨. 공산당, 사민당도 있었음. 남한은 매우 독특. 북한도 경직한 의미의 개념사용하고, 우리도 오른쪽의 언어만 사용가능하고, 일본은 좀 더 넓은 스펙트럼에서 사용..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논쟁. 김용직은 자유민주주의를 너무 냉전적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당시 민주주의 역사는 자유민주주의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논의. 반대편의 박명림 등은 비판적. ‘자유’를 빼야 한다. 오히려 자유민주주의를 수단으로 권력유지 한 것이므로 민주주의로 이야기를 해야한다고 주장. 결국 자유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양면으로 깔려있던 것 아닌가? 양면에 있다가, 전쟁 이후 한쪽은 냉전과 권력결합으로 자유민주주의가 새기고, 한국전쟁 이후는 같은 자유민주주의 안에서 한쪽은 반공, 다른 한 쪽은 견제와 균형으로 갔다. 이렇게 보는 시각도 있음. 


손병권: 그렇게 보지는 않음. 


하영선: 이런 자료들을 갖고 지금의 질문들에 대해서 실증적인 답을 해줄 수도 있을 듯. 이 분석과 동시에 정치사, 남북분단사, 국제정치적 개념이 어떻게 흐르고 있었는지 그려줘야 함. 


차태서: 캠브리지 스쿨과 같은 경우 미국 제헌의회에 대해 founding father들이 뭘 읽었는지를 탐구함. mixed government에 대해 접근함. 국회의사록을 말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읽은 텍스트는 무엇을 읽었을지 궁금. 


손병권: 익숙하지 않음. 뭘 읽고 이해했는지는 찾기 어려움. 하지만 헌법을 만들 때, 헌법을 누가 만들었고, 헌법제정과정 등을 보면 기초의원들이 뭘 보고 했는지는 나와 있음. 법체계를 연구. 


하영선: 결국 하는 것은 개념사. 원래 이쪽에서 설명하면 다 똑같아지는가? 똑같해진다는 것이 있고, 겉으로 비슷하지만 속의 차이가 중요한 부분이 있다. 조금 앞으로 가면, 일본의 정치학이 국가학, 헌법학이었음. 명치유신 이후 오늘날의 동경제국 대학의 첫 번째 교수가 베버의 제자로서 국가학 전공자였음. 1880년대 초반이었고, 유길준이 1890년대 망명간 일본에서 이를 정치학이라고 강의록을 만듬. 독일 것을 일본인이 베낀 것. 유길준의 서유견문의 국가 체제구분을 독일 것 일본이 베끼고, 우리는 그것을 또 베낌. 청국, 한국, 일본의 정치상황은 같고도 달랐음. 베끼면서도 일정부분 다를 수밖에 없음. 유길준이 군민공치를 강하게 때리는 것은 군주제가 기본적으로 압도적일 때 민주제하는 것은 개인적 생존이 불가. 그래서 미묘한 차이를 찾는 부분 필요. 유길준이 베끼긴 했지만 1880년대 일본 시스템에서 관찰한 것에서 빌려오는데 우리의 현실에 맞기 위해선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고민. 청국은 끝까지 자신들의 것을 유지하려다가 1899년 정도에 가서야 뒤집어짐. 베낄 수밖에 없어서 청조에서 베끼더라도 넘어가는 시기에 중국적 현실 속에서 베끼는 것과 조선식으로 베끼는 것이 있었고, 일본대로 베낀 상황이 있었고, 이를 보는 것이 동아시아 개념사임. 그 다음 식민지 시기 지나 45년 이후 들어가는 것 필요. 


손병권: 헌법을 만들 때의 위원회의 구성, 상해, 신해혁명시 헌법 만드는 과정과 유사함. 8개의 상임위원회 명칭도 유사. 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부분도 일본을 보고 베낀 것이라고 연구한 것이 있음. 그러다가 임시, 국회법 만들어지기 전에 국회조직에 대한 파트는 따로 논의하는데, 그럴 땐 상임위원회 등이 명칭 변화. 일본 제국국회와 한국 임시정부 국회, 명칭이 너무 똑같음. 하지만 명칭만 똑같이 베꼈고 내용이 어떤지는 아직 모름.


최수온: 미소냉전 이전의 시기는 저항이데올로기로서 민주주의이고, 6.25 이후에는 냉전의 맥락, 발전국가를 만드는 상황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로서 자유민주주의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가? 


손병권: 한국전쟁 이후 한 쪽은 자유민주주의 틀 안에서 권위주의와 냉전을 이야기했고, 다른 한 쪽은 시민사회의 성장 배경 등이 있었음. 야당 정치인들은 권력분립, 대의민주주의, 언론의 자유, 소수 사회세력들의 참여 등으로 저항 이데올로기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해서 둘이 같이 있었다는 의미임. 


최수온: 반공이데올로기와 저항이데올로기가 겹치는 부분은 없는지? 녹취만 보면 그럴 것 같은데?


손병권: 저는 대립항으로 봄. 이념형으로 두 개의 축이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논의할 때 두 개가 대립항으로 가고있었다. 노재봉 선생님의 개념 빌려씀. 이승만- 반이승만. 여기는 맞써서 싸워야 할 대상으로서 북한을 이야기하고, 민주세력은 권위주의 체제 논의.


하영선: 민주세력. 70년대 인권투쟁 시 국내에서 가장 radical한 반독재 그룹들이 미국에 가서 호소함. 그 때 드러내는 모습은 굉장히 친미적임. 사태가 구분되는 것은 광주 이전과 이후로 나뉨. 지금 시민저항세력들은 반공하고 절대 연결이 안 되는데, 그 당시는 복잡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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