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act    
이헌미, 북한 '혁명' 개념 외, 하영선, 개념사 3권 프로젝트 마무리 발표
 

2015-10-31 

2015 10월 세미나 기록


일시: 2015년 10 31() 1:00-3:00

장소: 중앙대학교 R&D 센터 610호

참석하영선, 손열, 김상배, 이헌미, 김성배, 김현철, 도종윤, 용채영, 최은실

발표: 이헌미, 1. “한국 개념사 연구의 내재적 연구와 국제정치학: ‘전파연구모임의 이야기

2. 북한의 혁명개념 

하영선, 개념사 연구 프로젝트 마무리 발표 

 



발표 및 토론 내용


이헌미 발표

 

1. “한국 개념사 연구의 내재적 연구와 국제정치학: ‘전파연구모임의 이야기 


(미발표 논문)


2. 북한의 혁명개념

 

서론

- 80년대의 접근법과 다른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 기여할 부분은 북한의 혁명론이 18세기-19세기의 pacific revolution이라고 부르는 부르주아 민주혁명, 영국 명예혁명, 프랑스 혁명, 미국 혁명과 어떤 연속성 또는 단절인지, 글로벌한 혁명 전통과 북한 혁명을 비교한 시야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지의 고민이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까지는 서구 자유주의 혁명전통의 연속성에서 보는 것 같은데, 중국, 아시아의 혁명은 유럽과 다르다. 아시아적인 특수성이 있다. 북한이 과연 혁명국가인가? 혁명을 했다면 그것이 언제 일어난 사건인가? 프랑스 대혁명사로 기점, 종점을 찍는다면 북한이 혁명을 했다면 기점과 종점이 언제인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로 넘어간 문제가 있다. 북한이라는 국가정체성을 다시 생각해보면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이 자본주의 국가와 다른 측면이 있지만 그 국가의 권력의 정통성의 핵심, 혁명전통이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혁명전통의 추출과 재창출의 문제가 북한의 국가정체성에 중요하며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더라도 권력의 정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의 혁명이 있다고 할 때, 1910년 신해혁명까지 가고, 아편전쟁까지도 갔다. 그런 식의 역사관이 북한의 혁명서술에 있어서도 보인다. 북한의 혁명개념은 북한의 통일개념과 밀접하다. ‘민족’, ‘인민이 무엇인가? 혁명-통일-대외정책의 목표가 일관되게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이론적, 실천적 문제의식을 보고 보려고 한다.

80년대 이후, 탈냉전기의 혁명개념을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시기의 변곡점에 따라서 본문을 정리했다. 19193.1 운동 이후, 윌슨적, 자유주의적 혁명 속에서 1920년대의 출발. 북한이 자신의 혁명가의 원점으로 서술하는 1940년대 항일민족투쟁, 북한의 혁명개념 기점으로 잡을 수 있다.

- 핵심문서 중 하나. 1965년 알리 아르함 사회과학원 김일성 연설. 추상화된 김일성 이론저작 등을 볼 것인지, 노동신문, 평양타임즈 등을 얼마나 반영할 것인지 고민. 중요한 ‘3대 혁명역량논의 진행.

- 1967년 변화.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 혁명의 현실화가능성을 높게 본 듯.

주권-혁명을 논의. 1968년까지의 북한의 혁명전통을 쭉 공식적으로 정리하고 있음. 항일무장투쟁에서의 혁명의 기점으로 이행. 그 당시의 반제반봉건혁명 출발.

- 1970년대, 기존의 남북한 이중혁명론에서 하나의 조선혁명론으로 나아가는 배경? 미국이 UN을 통해 두 개의 한국을 공식화에 대한 하나의 반발, 대응이라고 생각. 19727.4 남북 공동성명, 고려 연방공화국 제안. 경제/문화만 협의하고 정부대표들로 이야기되는 조직만 이야기.

이후 김일성주의, 주체사상으로 넘어가서 자신들의 내러티브를 구성.

 

결론

- 북한을 글로벌하게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 1945-70년까지 탈식민 공산국가로서 본다면, ‘탈식민 공산국가에서 글로벌한 주류적인 혁명과 다른 형태의 근대이행기를 북한이 거친 것인데, ‘혁명전통의 창조가 어떤 함의를 갖는가?

1) 혁명의 지속. 계속혁명론. 후쿠야마, 헤겔. 북한의 자기정체성이냐 이념적으로 제출하는 역사인식에서는 진보를 향한 혁명이 끝나지 않음.

2) 혁명, 혁명이후의 제도화 문제. 공산국가에서 대표, 대의의 문제를 어떻게 해소하는가? 혁명권력의 승계문제, 김정일/김일성으로 넘겨오는 문제. 서사적인 투쟁이 있다.

탈근대 공산국가로서의 북한에서의 혁명론이 어떻게 전개될지 살펴보고 싶다.

 

토론

 

김성배: 북한의 혁명개념이 어떻게 시작, 굴절, 계승되는 것인가 보는 것은 좋은 착안이다. 혁명이 원래 권력에 대한 투쟁, 권력쟁취를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권력독점을 위한 논리로 전락한 상황이다. 계속혁명, 영구혁명이 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왜 지속되어야 하는가. 중국의 논리도 똑같이 적용되는데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고 공산국가도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계속되어야 한다. 강대국의 프로젝트도 여전히 공산당이 계속 독점을 해야 하는 것이고, 다른 사회주의 국가, 북한에서도 혁명이라는 것이 권력독점, 독재지속의 의미로 갔다. 두 번째, 일종의 반서구주의와도 연관이 있다. 유럽은 부르주아 혁명전통의 영향 하에 있는데, 러시아로 가고 레닌으로 가고, 모택동으로 가면서 왜 혁명이 비서구 후발, 후진과도 연관 있는 듯. 서구의 가치, 자유주의적 가치들은 배격이 되는 부분이 있다. 혁명전통이라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은 신선한 느낌을 주는데 서구 중심성에 해방되려는 것도 있는 것 같다. 혁명 전통을 강조하는 것은 북한의 자주-주체성을 강조할 필요성으로부터 정당화하는 논리, 비서구 혁명 전통을 창조해나가는 부분들이 있었을 것 같다. 동아시아 혁명, 비서구 지역 혁명이 가진 반서구적 서구주의와 북한의 전형적인 형태에 투영되는 것이 아닌가. 또한 남북한 3대 혁명역량의 이야기도 결국 남북한 관계에서 우월한, 정통성을 강화시킬 수 있는 북한 주도의 통일론이고, 남한은 여전히 혁명되어야 한다는 부분이 있지 않는가.

 

손열: 혁명이라는 언어를 통해 우리가 뭘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반체제혁명개념사의 목표가 무엇인지? 이를 정리하는 것이 잘 되어야 할 듯.

 

김성배: 혁명의 낭만주의, 지성사 속에 있었는데. 지금은 중국, 북한도 있고 혁명의 진보가 논리가 아니라 보수의 논리로 바뀌어져 있음. 서구전통의 혁명개념 정리 해주고, 실제 사회주의 혁명이 러시아, 중국 바뀌고, 북한적인 변용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 듯.

 

이헌미: 사실 북한관련 문건들은 80년대 주로 운동권에서 불법편집, 영입함. 80년대의 고민은 도식적으로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북한의 혁명론이 너무 도식적으로 뻔하다. 그걸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80년대 운동권은 다 알 것 같은 이야기인가?

 

김현철: 독립, 자주, 민주 비슷한 고민이다. 그 시대의 화두인데, 북한은 모든 용어에 다 혁명을 씀. 하지만 일상생활에서의 혁명용어를 사용하는 것과 사회과학 용어, 부르주아, 공산주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써 쓰는 개념이 다름. 다 다른데 이를 한 사람이 정리하는 것은 너무 어려움. 처음의 출발점이 무엇인가? 식민지 시기 왜 사회주의가 들어왔고 왜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었을까? 그 시기의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보다는 독립의 일환, 일본 저항에 의한 대비개념이었음. 여러 사회주의 세력들 중 한사람을 잡던지, 1945년 이후의 북한의 혁명사는 김일성 주체사상의 정리 방향을 본다면 식민지 시기의 사회주의 혁명개념과 북한의 혁명개념이 구분될 수 있을 것 같음. 1945년 이전의 한국에도 많은 사회주의자들 입장, 북한을 비판할 때 원래 의도했던 혁명과 비판할 때의 혁명에 대한 관점이 다를 것 같다. 어느 한쪽의 입장만이라도 정리하면 개념의 접근이 낫지 않을까. 한 사람 대표, 남북한의 입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람을 보여주는 방법도 있음.

 

김상배: 북한의 혁명개념을 아는 것이 김정은의 북한의 대남정책, 대미정책의 이해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그런 질문으로 좁힐 수 있지 않는가?

 

이헌미: 그 부분을 개인적으로는 염두하고 있음. 탈냉전기의 정체성 정치의 하나로서 사회주의 국가권력의 정통성, 주권이 어떻게 대내적으로 제도화되는지, 정치이론으로 접근한다면 혁명전통이 김정은 시대도 중요한 것 같은데 그러면 탈냉전 시기까지 다 봐야 함.

 

김상배: 그런 경로를 따르거나, 개인/시기를 자르는 것은?

 

김성배: 전통과 혁명이 어떻게 만나는가의 시기, 1950년대에 초점을 두고 북한적인 것, ‘혁명전통이라는 말 자체가 별개로 만나게 된 연원, 과정인데 여기에 초점을 두면?

 

하영선: 3주 사이에 도식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함의를 주려면 몇 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다. 첫째, 남북은 분단이 되었고 한 쪽에서 가장 열광적으로 환영받는 개념이자 다른 쪽에서는 회피의 언어, 그 대표가 혁명이다. 북한은 정권이 혁명을 내걸고, 남한은 혁명을 이야기하면 안 됨.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이를 돌파하려는 핵심개념으로 왜 북한은 혁명을 선택하게 되었고, 남한은 결사적으로 회피하게 되었는가, 이것이 핵심 포인트이다. 70년이 지나고도 북한은 혁명을 핵심개념으로 쓰고 있고 남한은 여전히 혁명을 거부한다. 그리고 북한의 혁명이해는 김정은 체제 이해에도 핵심이다. 개념사적인 접근을 하려면 공식 문건들 이외에 왜 고민 속에서 특정한 혁명이라는 ()’()’로서 보편화시키려고 했는가? 그 내밀한 언어, 문건들을 접촉할 수 있어야 한다.

 

샘플로는 북한이 공식적으로 공개하지 않은데, 타의에 의해서 공개된 문건들이 있다. 1949년 스탈린-김일성의 만남에서 키워드는 전쟁이냐, 혁명이냐의 문제였다. 러시아쪽 문건의 발간으로 밝혀지지 않아야 할 문건들이 밝혀짐. 김일성은 한반도의 당면문제 돌파가 전쟁+혁명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전쟁, 혁명도 아닌 제 3의 길을 원했다. 스탈린은 전쟁을 반대, 차라리 혁명역량을 강화, 시간계산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 개념을 선택할 당시의 양쪽의 생각은 이때부터 국제역량에서의 현실, 남한의 현실, 북한의 현실을 각각 어떻게 보는가였다. 그 사이에서 전쟁’, ‘혁명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혁명이전에 빠르게 전쟁가능하다. 남한이 평화적 선거에 공산주의화되면 혁명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는데, 전쟁 시작하면 남반구의 정치혁명 이뤄내고, 이것이 결합되어서 인민혁명 성공될 수 있다. 군사역량을 스탈린이 도와달라. 한반도의 남북, 세계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함. 스탈린은 3불가론을 이야기함. 첫째, 미국의 개입은 위험한 생각이다. 짧은 시간의 전쟁은 예측 어렵다. 국제혁명 어렵다 는 것 알고 있었음. 둘째, 남반부의 혁명, 아직 상당히 강한 역량강화가 이뤄지지 않고는 어렵다. 셋째, 경제, 군사적 원조. 북한의 역량이 그쪽이 이야기하는 것만큼 단기전에서 차이가 나냐? 김일성은 이를 숙제로 받아들여서 이제는 되었다고 계속 설득하는 과정이 진행. 이런 문서들은 있다. 나중엔 당에 청원하기도 하고 스탈린은 계속 반대. 김일성이 이제는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스탈린에게 다시 이야기해달라고 한 것이 131. 스탈린도 이제 가능성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마오를 만나서 최종합의해서 일단 시작해라라고 함. 그래서 전쟁이 시작. 이와 같은 official statement가 왜 그렇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는 문서가 한 종류가 있다. 두 번째는 3대 혁명역량 강화, 1964년 당 대회의 연설문을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공개적으로 읽었음. 전쟁을 포기하게 되었는가? 이를 알 수가 있는가? 왜 그런 개념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는가? 그 앞의 문건들, 김일성이 사회주의 국가들, 인터뷰 등. 전쟁포기를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발언들 있음. 더 이상 전쟁말고 혁명의 방법이 있다. 국제혁명, 북한 사회주의 혁명역량, 남한 혁명 이러한 왜 세 개의 조합으로 문제를 풀려고 했는가? 이는 전통적, 맑스-레닌의 혁명, 베트남, 마오와도 다름. 국제파트와 분단이라는 역량, 식민지를 거친 북한의 내부적 역량들의 결합방식들을 보면서 북한형 혁명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파트에 대한 설명이 들어가야 한다. 제한되지만 김일성 내부 또는 북한 내부의 언어를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7.4 때 전후의 문건과 65statement는 어떻게 나오는가, 3대 혁명이 어떻게 바뀌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혁명개념에서부터 조선적 변환이 되어서 왜 speech를 하게 되었는가? 64statement는 중요하다. 김일성이 했는데 상당히 글로벌하게 퍼졌고 제 3세계에서는 중요한 문건으로 되어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었지만 72년이 변곡점이었는데, 72년의 우드로 윌슨 cold-war project 문서들을 보면 자기고민들을 의외로 토로한 것들이 있다. 특히 사회주의 국가들, 차우체스코우와 솔직한 이야기들을 했다. 왜 우리가 3대 혁명역량강화를 변형한 것처럼 보이는가? 남반부의 혁명에 대해서 통역당을 중심으로 한 혁명이 현실적으로 남부에는 어렵다. 계속 키워야 하지만 단기적으로 키우기 위해선 박정희 정권과 통역당의 격차를 풀어야 하는데, 일반 인민, 민중들이 통역당에 대해선 긍정적인 시야를 확대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기존의 남반부 혁명 강화로 갈 것이다. 이는 전술적변환을 한 것이었다. 그런 문건을 통해서 교과서적인 도식화가 일어나게 된 내밀한 이야기들을 개념사적으로 밝힐 수는 있다. 한국전쟁, 64-5, 72., 그 중의 하나를 하는 것이 낫다.

 

한국전쟁에서는 수정-전통주의의 싸움. 최종적으로는 김영삼이 받은 문건도 애매한데 무기모 문건 공개를 보면 간곡하게 부탁했고, 스탈린은 3대 이유로 반대. 뒷이야기 중요. 491212, 마오-스탈린 만남. 마오의 첫 질문은 우리는 진정 평화가 필요하다. 이제 간신히 통일했다.’였다. 우리는 당분간 안 싸울 것이라고 하는데 스탈린의 대답도 전쟁은 절대 안 난다. 그러면서 미국도, 일본도 쳐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코리아가 너희를 쳐들어가기 전까진 안 간다.’고 함. 491216일 그 전까지는 전쟁 말라고 시그널 보이고 있었음. 그 다음 달에 허락했는데 스탈린도 똑같이 생각했었음. 미국의 애치슨선언의 분위기로 약간 뒤로 빠지는 상황에서 김일성은 벌써 숙제를 다 했다고 보채고 있었다. 따라서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 김일성이 131일 다시 찾아간 것. 전쟁과 혁명의 결합을 스탈린이 부정하다가 허용해주었으며, 이런 것에서 간접적으로 혁명 개념, 왜 혁명을 선택했는가? 또한 50년부터 이미 남한 내에선 공산당 불법화되어 있는데 박헌영을 데리고 가면 국내혁명 반드시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쳐들어가보니까 안 되었다. 3대 혁명역량의 이상적인 방법이 어려워지고 마찬가지로 북한이 왜 주체를 할 수 밖에 없나? 국제역량의 위협을 중국 또는 베트남보다 더 받고 있음. 남반부 역량싸움에도 더 고난. 북반의 혁명은 주체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이렇게 생각된 것인 듯하다. 그렇게 되는 이유를 자신들의 statement들을 재결합해서 문건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된다. 1차적으로는 우드로 윌슨 문서를 볼 수 있음.

 

하영선 교수님 말씀

 

3권 프로젝트 시작 이전에 이야기했던 내용을 이야기하고자 함. 첫 번째, 개념사 연구에서 개인사적으로는 1991년이 중요했다. 내년 2016년은 전파의 20주년이고, 개념사를 국내에 소개한 이래 25년째의 해가 된다. 1991년에 전파연구와 2016년의 전파/개념사 연구는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 것인가? 한국의 개념사 연구의 목적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런 면에서 보면 같고도 상당히 달랐던 것 같다. 1991년도는 탈냉전을 넘어서 새로운 공부를 해 보려고 해서 시작했고 탈근대의 맥락에서 전근대를 동시에 들여다봐야 하는 상황 속이었고, 그래서 바로 개념사의 공부의 틀을 빌린 것은 아니었다. 복합연구가 복잡계 연구로 시작해서 이를 원용해서 90년대 초반을 본 것이 아니라 좀 더 뒤의 시기에 코젤렉을 만났다. 북한이 혁명으로 자신의 간고한 현실을 품으려 했던 것처럼 90년대 초반, 탈냉전 시기 새로운 역사의 변곡점을 그 때는 문명의 변환, 새로운 문명의 도래 식으로 더 크게 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던 시도였는데 전혀 ()’로 퍼져가는 ()’이 안 되었었다. 우리가 겪은 문명사적 변곡점에서 앞의 세기는 어떻게 진행되었는가의 의문에서 19세기 문명론과 만나게 되었고, 그러면서 코젤렉을 만나게 되었다. 25년 이후의 지금은 어떠한가? 1991년 초반의 한국개념사가 부딪친 딜레마는 새로운 역사적인 변화였는데, 이제 기존의 ()’하는 방식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쟁적인, 혁명적인 단절이 19세기에 있었고, 당시 부딪친 현실을 새롭게 개념화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과거의 동양적 전통개념에서 19세기의 새로운 서양 개념을 수용해서 만들어내는 중요한 변환이 있었기 있었으므로 이를 보는 것을 한국 개념사의 일차적 목표라고 보았다. 지금 22세기의 한국 개념사를 내다보면서는 다른 생각이 든다.

 

코젤렉의 용어에서 시간의 축도 우리가 과거라는 표현이 있지만 사실은 현거가 필요하다, 현재에 살아있는 과거의 모습이 중요하다고 한다. 코젤렉이 과거 속의 미래라고 썼지만 현래면 현재를 중심에 두고 과거로 기억되는 과거가 중심이다. 미래도 현재가 필요해서 중층되어야 한다면, 1991년에 하려고 한 개념사와 달리 지금의 개념사의 시간 축도 더 넓게 봐야 한다. 과거와 동양의 개념, 그 당시의 근대의 서양 개념이 어떻게 교배되어서 그 당시의 현실을 드러내려고 하는 개념이 탄생했는가에 몰입되어 있었는데, 국내의 개념사 연구에서 21세기 시간의 축은 이것보다는 폭이 넓어져야 한다. 현래-현거의 만남, 현재-기억된 과거의 만남, 현재-현실화된 미래의 만남 이런 식의 시간 축을 생각해야 하는 문제가 핵심문제가 된다. 그렇게 되면 공간개념에서도 전통의 공간개념에서 근대적 공간개념으로 가는 것에서 21세기에 다뤄야할 공간개념은 상당한 편차를 보인다. 가장 위에는 19세기-20세기에는 없었던 사이버공간 식으로 생각해서 지구, 한반도, 지역공간이 중층으로 얽혀있다. 시공간이 넓혀진 형태에서 시공간을 잡을 개념을 창출하고 전파할 것인지 이것이 한국 개념사 연구의 중심축이 되어야 한다.

 

이제는 과거의 개념사가 아니라 미래의 개념사를 이야기해야 한다. 19세기는 부딪치는 현실을 새롭게 잡으려고 할 때 서양근대가 개념을 잡았었다. 이제는 서양근대로 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고 어떻게, 누가 잡는지가 중요하다. 혹은 보편적인 개념화를 할 수 있다면 아이돌 현상과 같이 될 것. 그것이 핵심적으로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일 것이다. 미래 개념사의 이야기가 한국개념사의 하나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미래 개념사를 할 때의 문제는 과거 개념사와 어떻게 만나는가이다. 현실적으로는 21세기에 들어와서 우리가 당면한 현실의 국제정치개념을 보면 그 어느 쪽도 적절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미국의 국제정치학자들이 쓰는 것은 학자들만 쓰지만 보편적인 개념으로 정치화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서양근대개념의 좌절이므로 동양 전통개념의 부활이 맞는가? 자오팅양처럼 천하 개념을 부활시키고 있는데 말이 안 되고, 서양 개념도 적실성을 소실하고 있다. 그 중에서 무엇을 우리가 잡아야 되는 것인가? 따라서 근대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들의 사용되는 세 번째 항목에 대한 꼼꼼한 연구가 필요하다. 중국의 부상 등은 현실적으로 부딪치고 있는데, 중국은 서구와 같은 개념을 안 쓰고 있는데 미국 등 전 세계에서는 중국 개념을 다 안 받아들이지만 신경을 쓰고 있다. 신형대국관계 등에 대해 학계분석은 덜하지만 현실 미국정치에서는 그 언어를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네 번째가 미래사라면 현대적, 현실 속에서 변화하는 개념사와 냉전, 탈냉전, 최근의 복합시기의 변화를 잡으려는 언어들의 변환 등을 고민해야 한다.

 

두 번째 전통적 개념사 연구영역에서는 더 이상 전통언어가 안 돼서 서양의 도입이 이루어진 과정을 보았다. 첫 번째는 그런 수모의 이전에 우리가 사용했던 개념들로서 전통 개념사를 보았었는데 이것도 연구의 방향은 바뀐 것 같다. 90년대에 봤을 땐 전통 개념의 사망에 초점을 두었는데 지금은 전통개념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통-미래의 결합을 따지고 있으므로 새롭게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지금은 훨씬 시공간 개념에서의 폭이 넓어질 수밖에 없고, 개념사의 3, 4(개념형성사/미래개념전파사)를 포함해야 한다. 빠졌지만 우리의 냉전사속에는 분단이 있다. 근대적 도입을 통해 근대 도입의 후기에서의 식민지적인 언어형태를 거쳐 분단의 역사적인 현실 뒤에 21세기가 있다. 이를 다 끌어안는 개념사연구가 아니면 한국의 개념사 연구는 21세기에 큰 생명력을 갖기는 어렵다.

 

토론

 

김상배: 미래개념사가 아니라 미래사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하영선: ‘미래 개념사에서 개념을 빼면 미래사는 우리가 다가오게 되는 삶의 모드일 것이다. 삶의 모드를 어떤 식으로는 개념으로 잡을 것이다. 그런 개념사가 21세기 고민의 한 축이 되어야 한다.

 

김상배: ‘미래사의 영역이 있는데, 그 쪽에서는 뭘 하는지, 이런 개념사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왜 보는가?

 

하영선: 과거 개념사도 과거를 개념사로 보겠다는 것처럼 미래 개념사도 미래를 바라보는 것개념을 통해 보는 것도 다를 것이다. 산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한다는 것으로 구분되는데, 실천공간과 현실을 인식, 기억하는 공간이 있고, 현장의 현실공간이 있다. 미래사는 주어지는 삶인데, actor의 주체가 어떻게 내면적으로 받아들여서 다시 자기가 실천공간으로 가기 위한 매개변수에서는 개념이 중간에서 낄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냥 미래사로 가면 흔히 개념사가 주어지는 공간은 코젤렉처럼 개념으로 볼 것인가, 푸코 식의 ()’하는 방식으로 갈 것인가? 개념의 경우는 그런 현실의 내면화 과정이라고 해서 파악되어지는 것에서 과거, 현재가 인간 actor의 주인공에 의해 재구성되어서 실천공간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미래에도 똑같은 과정은 진행될 것이다. 경험의 지평과 미래의 지평 속에서 현재가 개념이라는 매개를 통해 실제 역사가 전개된다면, 미래도 다가오는 현재로서의 미래. 미래사/미래개념사가 단순 시나리오사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다가오는 미래에서 결국 시나리오 여러 개가 동등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하나가 현재어가 될 것이다. 그것을 개념사적으로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가는 길을 찾아야 가는 길, 대박이 나는 길의 과정으로 가야 할 것이다. 변화하는 현실을 여러 가지로 불러봤었는데 20년 전에는 복합이었다. 한 쪽은 unipolar라고 지칭했는데 이는 10년 뒤에 깨졌다. 복합 개염은 여전히 죽었다고 이야기하기엔 어려워졌는데 bipolar unipolar보다는 복잡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특정 다가오는 미래의 기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을 어떻게 창출하는가? 개념도입사/혁명사 이야기만 했는데 개념창조/개념창출의 과정은 어떻게 뵈는가? emergence의 문제가 연관된다.

 

김상배: 개념을 현실에 투영하는 power가 있어야 할 듯하다. 우리가 개념으로 실천하는 문제, 개념사를 연구하는 실천도 있을 것이다. 90년대부터 20년 간 한국이 성장해오면서 이러한 담론을 뒷받침하는 파워가 성숙된 만큼 과연 20-30년 뒤에도 갈 것인가?

 

하영선: 개념의 정착의 과정을 보면 코젤렉은 안장시대에 4개의 프로세스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개념화의 과정이 시대에서 구분되어야 하고, 자유롭게 이념화되어서 최종적으로 politicize 되어야 한다면, 21세기는 소통의 문제, 가장 강력한 소통의 문제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어떤 의미를 선택해서 최종적으로 그 의미가 자리 잡게 되는 것을 21세기적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세연에서 하는 이야기도 한국의 개념사적으로 좀 더 구체화되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할 듯하다.

 

김상배: 복합, 네트워크로 그리는 모습. 저쪽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오래 살아서 있음. 우리가 20년 동안 이야기해왔는데 지금은 저쪽에서도 유사한 이야기가 나오고 이렇게 만나고 있다는 것까지는 확인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우리가 만들었던 개념화, 실천적 함의를 던지는 것이 전파되어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미래의 개념사의 부분이 자리 잡으려고 한다면, 우리가 만들어서 역전파를 할 수 있는 것이 연결되어야 하는데 학계의 노력만으로도 안 된다. 국가, 사회의 공동체의 파워가 동반되어서 같이 가야하는 문제여서 어떤 면에는 한계가 있지 않는가. 또한 개념을 탐구하는 것과 실제 연구는 다른 것 같다. 말씀하신 것처럼 입체적, 복합적 시각에서 보려면 기성학계를 어떻게 넘어서야 하는지...

 

하영선: 국내 학계의 막힘은 여전히 통일 안 되고 있는 것이다. 미래 통일의 개념화에서 새로운 전파, 돌파구의 가능성이 있나? 그물망 통일? 여전히 국제정치는 남북한 문제, 동아시아의 아키텍처의 문제이다. 현실로는 개념화할 수 있는 작업이 없었기 때문에 미중 간, 미일 연계 등의 상식적 이야기부터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가야 한다. 동주로 돌아가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 이전에 우리가 부딪치는, 다가오고 있는 미래를 잡을 수 있는 개념을 염두한 연구들이 진행될 필요가 있다. 과거-현재-미래 속에서 언어나 담론들을 갖고 들여다봐야 한다.

 

김상배: 본격적으로 연구하기보단 연구를 위한 시론적 문제제기를 하는 연구들이 의미가 있을까? 이런 틀을 갖고 연구한 샘플이 필요한 것 같다.

 

도종윤: 현상학적 접근으로 미래를 들여다보는 방법을 보면, 후설식으로 이야기하는 생활세계의 개념은 하버마스에 와서 생활세계/체계로 나뉘어서 현실 상상하게 됨. 생활세계 자체는 과거, 현재, 미래가 같이 가는데 체계로 가면서 의사소통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갈등, 저항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생활세계를 보면 남북통일 되면 인간의 생활세계, 생로병사의 문제는 변화가 없을 것임. 그 가운데 하버마스적인 2차적인 생활세계가 접목되면 교육 등이 변화, 접목될 것이고, 이를 만들어주는 체계’, 자본주의, 공산주의 등이 접목되어서 미래가 형성될 것임. 생활세계의 문제 쪽, 인간의 삶의 문제에서 접근하면 일반화된, 시공을 넘어서는 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그런 미래를 보되 인간 삶의 문제를 보는 것이다. 언어를 보는 것도 중요한데 개념도 을 모으는 과정. 인간은 개념을 모으는 것인데 일상 속의 삶, 패턴이 있는데 언어로 유용화시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존에는 우리가 다 이미 알고 있는 국어사전에 찾는 언어들이어서 강력한 문제의식을 못 느낀다. 따라서 정의되어 있지 않은, 새로운 개념을 창출해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간과했던 것을 말로 던져는 것이지, ‘창조의 언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 언어가 적절한지 의문이 드는 사회현상이 있다. 통일이 적절한 언어인가? 위안부의 개념? 광주항쟁 등은 맞는 개념화인가? 그 언어들이 맞다고 생각되지 않아서 이데올로기적으로 갈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영선: 일반인들이 생활세계에서 느끼는 체험세계가 있는데, 언어군들이 꼭 그것에 적절하게 충족되어지지 않아서 새로운 언어, 용어의 창출, 궁극적으로 개념화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 때에도 언어/개념을 창출할 때 어느 체계를 만드는 것처럼, 누군가가 발화를 할 것이다. 그럴 때에는 이미 기존에 있는 것들을 빌어서 재결합 등이 이루어짐. 만약 통일을 쓰지 않는 경우에 뭐라고 부를 것인가? 그럴 경우 어느 것을 생활세계 쪽에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지, 창출되어진 것이 그 전에 부르지 않았던 것보다 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의 과정을 따져야 하는 것이 미래개념사연구일 것이다. 몇 가지 방법론들이 동원되어야 할 것 같다.

 

도종윤: 실천의 문제에서 연구자들의 효용성은 그런 아이템들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없는 개념, 우리 사회에 미세하게 흐르는 것을 패턴화, 유형화, 새롭게 창출하는 것인데 이것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주는지는 모르겠고, 논쟁, 이야기만으로도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영선: ‘통일을 대체하는 개념은 뭐가 있나?

 

도종윤: 정의되지 않은 것에서 정의하는 것이 중요한데, 통일의 경우엔 이전의 관념들이 있어서 공고하다고 하다면, 역사에서 광주, 제주 4.3 등에 대해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4.3은 미디어적인 언어로 4.3이라고 이야기할 뿐이지 4.3 항쟁/반란 등에 거부감이 있다. 그 실제로 들어가면 우리가 개념화할 때 문서적 접근에 한계가 있다. 과거의 문서들 보기도 의미가 있는데 어떤 삶, 사는지를 받아들여야지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영선: 그것을 하고 싶은데 하기 어려워서 피상적인 마지막 결과물을 보는 것임. 나의 차선책은 그 뒤의 중얼중얼 거린 이야기들이 남아있다. 그런 이야기들은 더 밑바닥의 것들, 일종의 고고학적인 발굴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의 고민이다.

 

도종윤: 기존의 개념들을 어떻게 들여다보는지를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어떻게 무엇을 만들어낼 것인가,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가, 사회에서 안 받아들여질 수는 있는데 이런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하영선: 기존의 사회과학계에서는 그런 것을 과학이 아니라고 본다.

 

도종윤: 가장 기본으로 들어가면, 인간의 삶이 있다.

 

하영선: 미래 중에 영원히 오지 않는 미래가 있고, 다가오는 미래가 있다. 그것은 살아보지 않고 알 수 없다. 왜 사회과학의 연구 범주에 미래는 제외되어야 하나? 만약 미래와 현래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하면, 사실은 그 연구는 굉장히 중요할 것이다. 과거-미래를 내다보는 현재의 발전의 의미라고 한다면, 360도를 도는 사람한테 미래는 약 30도 각도 내에 주어진다고 이야기해준다면 훨씬 생산력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360도의 시나리오를 던지고 컴퓨터로 이야기하는 상황이다. 20-30년대 이후에 예전의 이야기가 맞는지 아닌지 확인해보는 정도는 할 수 있다. 개념사연구도 향후 50-100년 지나서 의미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개념사 더 복잡해져야 한다고 한다면, 향후 21세기, 22세기의 백년사를 생각해야 한다.

 

도종윤: 개념사에 대한 생각은 개념의 정의를 해주고 답을 알겠다는 것 정도였는데, 만약 미래의 개념사 정도가 된다면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져주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용어들도 많다. 그런 것도 넘어서 학술, 사회를 개념화해주는 언어들도 필요하다.

 

하영선: 신상품을 개발해야 살아남는 것처럼 언어를 새롭게 창출하려고 하는 것도 연구의 중요한 부분이다.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