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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열, '공동체', 김현철, '평화' 개념사 연구
 

2015-02-28 

2015 2월 세미나 기록


일시: 2015년 2 28() 1:00-3:00

장소삼성경제연구소 회의실

참석하영선, 손열, 김현철, 김상배, 전재성, 김성배, 구갑우, 마상윤, 김헌준, 용채영

발표 


김현철(요시노 사쿠조의 '평화' 개념)

리딩: 1. 石田雄 저, <日本の政治と言葉> 下 ‘平和と 國家’ 중 전편, 서장- 제2장 (東京大學出版會, 1989) 
      2. 이규수, “민본주의자, 요시노 사쿠조의 조선 인식”, <역사비평> 2009년 가을호 (통권 88호, 2009.8)
      3. 김경일, "요시노 사쿠조의 평화론에 대한 고찰- 다중적 평화인식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日本文化硏究> 第52輯, 2014.10, pp.31-51.

손열('공동체' 개념)


리딩: 1. 오자끼 호쯔미, "동아협동체의 이념과 그 성립의 객관적 기초", 
      2. 홍종욱, "중일전쟁기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전향과 그 논리" <한국사론> 44 (2000)
      3. 동아협동체와 조선, <삼천리>(1939.1)
      4. 조선경제의 통제문제, <조광>(1939.10)

 

토론내용


손열 발제 코멘트

 

하영선: 사회주의 시각이 아닌 입장에서 1930년대에 자리매김을 하면서 보는 것은 중요한 작업일 것. 왜 그렇게 된 것인지? 연대에서 김양수와 김명식 이야기를 했었는데 왜 전향을 한 것인지에 대해선 정답을 모르겠다. 이미 곤욕을 다 치르고 난 다음에 왜 전향했을까? 조선의 그람시라고 생각될 정도로 버텼던 과정을 겪었으면 이후에도 더 버텼을 것 같은데 왜 마지막 순간에 전향을 했을까?

 

손열: 글을 보면 1943년의 것들은 전향과 상관없이 정세분석이다. 연구를 위해선 개인적 노력, 편의와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고 하는데 편의와 환경이 갖춰지지 않아서 안 된다고 한다. 30년대 들어와서 조선연구를 해 보았는데, 그것을 연결해서 민족문제를 본격적으로 하기 에는 편의가 아닌 듯. 그람시로 오래 산 것 같지는 않다.

 

하영선: 두 작업이 병행되어야 할 것 같다. 쇼와연구회에서 나온 협동체론은 농담 반 진담 반 일본이 만든 최고의 국제정치학, 또는 이념이었고, 가장 큰 공간을 상정해서 이야기했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왜 동아협동체론으로 불렀는가? 1937년 고노에의 전후로 20년대 일본이 키워드인 국제협조주의가 풍미했었고 30년대 협동체론으로 받았다면, 처음 그 선택하는 과정의 내부 논의들이 있는지? 쇼와연구회에 대한 자세한 검토를 할 필요가 있다. 용어를 봐도 은 갑골부터 있었고 제사지낼 때 바치는 술그릇들을 지칭한다. 제후들이 천자에게 예를 갖추거나 할 때의 자이다. 사실 공동community에 대해서는 맞는데 force가 반영한다. 20년의 cooperation도 협조/협동이 되는 것이 당시의 협동체론의 공식 명분이 서양대응이었다. 서양의 논리를 더 이상 따라갈 수 없고 독자적 논리를 만들어야 할 때, 중국을 포함하는 의미에서 명분론적으로 만들었다. 당시 조선인들의 시각에 대해서는 김명식을 욕을 할 수도 있지만 김명식도 자기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동아시아의 연방체론에 대해선 조선이 계속 가만히 있고 마차를 안 타면 완전히 설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식민지의 형태가 있고 독립의 형태가 있고, 3의 지역질서를 상정한다면, 3의 질서가 식민지보다는 낫다는 식으로 자기정당화의 과정이 진행되는 것이다. 글들을 통해 자세히 복원해줄 필요가 있다. 김명식도 글만 100개 정도인데 사회주의 논객이면서 가장 많이 글을 썼다. 1937-8년 왜 이렇게 오판이 난 것인가? 20년대 김양수 등은 미일 전쟁으로 갈 것이라는 현실주의 분석을 했는데왜 30년대 후반에 가서 그러했는가? 미일이 곧 전쟁으로 갈 것을 속으로 생각하고 이야기를 안 했나? 당시의 잡지들을 보면 미일이 곧 충돌할 것이라고 하는 전망은 민족주의, 사회주의 진영 양쪽에도 없었다. 이를 보면 국제정치를 안목있게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된다.

 

손열: 당시 김양수는 절필을 했는데, 김명식이 무엇을 보고, 어떤 텍스트를 보고 이렇게 이야기했을지 궁금하다.

 

하영선: 고노에의 동아협동체론에 대한 내용과 공식적인 정보, 결국 일본 정보일 수밖에 없을 듯. 21세기적인 함의까지 생각해본다면 우리도 EU가 국가연합에 멈출 것인가, 연방으로 갈 것인가 논쟁 중이다. 동아시아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본 것이 이례적인 주장일 수 있다. 연방론의 문제제기에 대해 중국의 논의가 있었고 마지막으로는 당시 국내에서 얼마나 논쟁이 된 것인지까지 다루면서 김명식과 동아협동체를 다룬 논문은 없는 것 같다.

 

전재성: 홍종욱 논문을 보면 국제정세의 변화가 중요한 것 같다. 사회주의자들에게 동아협동체론이 평화로운 국제질서를 만드는 것처럼 인식되어서 식민지 내선일체론과 합쳐져 식민지에 있으면서도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중일전쟁이 일소전쟁으로 가는 상황, 국제정세를 나름대로 사회주의자들이 파악하건대, 그런 상황에서 뭔가 나아지고 있겠구나는 판단을 한 것 같다. 일본 관계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의 인식도 중요하고 이것들이 뭉뚱그려져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1937, 38, 39로 촘촘히 따라가봐야 할 것 같다.

 

구갑우: 사회혁명당의 전향 논리에 대한 연구도 석사논문이 하나 있었는데 직관적으로도 사회주의자들, 김명식이 왜 그랬는지 알기 어렵다. 김태준과 같은 지식인들은 계속 남았고 전향을 안 했다.

 

마상윤: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는 어떤 의미인가?

 

손열: 일소가 붙을 것이라고 희망하고 있었는데, 소련 쪽에서는 스탈린이 일종의 평화공작을 독일, 일본에 대해서 진행하였고 이로 인해 소련에 대한 절망 등이 있었다.

 

김성배: 미일 간 충돌가능성을 낮게 본 것이 가장 큰 판단 미스인 듯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라는 애니메이션에서는 일본의 비행기 제작의 과정이 나오는데 1930년대 초부터 전체적인 분위기는 언젠가는 미국과 붙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 길로 간다는 분위기를 왜 정확히 못 봤는가?

 

손열: 김명식의 <일미 국교의 타진>이라는 글에서의 분석에서는 영미 간에는 협조를 못한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로 제시되었다. 일본의 무력을 미국이 상당히 두려워하고, 본토공격까지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일본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상당한 억지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하고, 미영 협조의 한계로 아시아에서 미국은 일본의 영향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구갑우: 국제주의자로서 협동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국제주의자로 생각했고, 내용 측면에서도 협동체를 수용할 수 있는 점이 전향에 기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손열: 협동체론 자체는 매력적인데, 그 뒤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본 측면에서는 출구전략인데, 이를 너무 나이브하게 판단했다.

 

구갑우: 대동아공영권도 출구전략이었다는 것이 일본인들의 인식이었는데 그것을 수용했던 조선지식인들의 생각은 어떠했는가?

 

마상윤: 활용하자는 가능성은 있다고 해도, 그것을 할 수 있는 조선의 역량이 있었다고 보는가? 능력에 대한 평가를 높게 잡았던 것인가?

 

손열: 활용하기 위해선 철저히 내선일체로 가야한다고 보았다. 일본인과 다름이 없이 민족으로서 동등한 지위를 부여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간 것 같다.

 

김상배: ‘조화역이라는 단어에서 보이듯 자기 역할 규정을 한 고민들이 있었을 것 같다.

 

김현철 발제 코멘트

 

김성배: 전통적 평화개념은 태평이고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국제정치적 맥락의 평화는 전혀 아니고 제-국의 구분이 없는 상태를 생각했으며, 백성들의 안민과도 연결된다. 경우에 따라 국내정치적으로도 사용되고, 한편으로 동양평화를 내세웠을 때 침략구실이 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 상대방의 후진적의 것을 바꿔야 한다는 논리로도 갔다. 그런 측면에서 비전론적 평화는 서구적인 것이라서 일본에 착근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경우 식민지가 되면서 독립이 들어오기 때문에 평화가 단순히 백성들이 안민으로 끝나지 않고, 국가 간의 평화라는 측면에서 동시에 사고되므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독특한 부분을 구성하게 되었다. 하나의 전제로서 전통적인 평화개념이 어떻게 국내적인 것이 들어왔을 때 변형이 되는가? 그런 부분에 주목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

 

하영선: 개념사 3권은 1권의 성격과는 달라야 할 것 같다. 처음 국내 개념사들을 소개할 때는 왜 19세기에 초점을 두었는지에 반해 지금은 21세기의 한국, 아시아의 개념사는 좀 다르게 해야할 때가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북한도 들어있고, 전통도 있고 시간 축이 늘어나는 점에 대해 왜 그렇게 문제가 주어지게 되는지의 설명이 필요하다. 각 논문들의 시작의 문제의식도 교과서적 패턴에서 써서는 안 되고 왜 내가 이것을 이렇게 접근하는 가의 문제의식이 강하게 있을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20년 전의 개념사가 19세기에 초점을 두었던 때는 약 100년 간 서양의 주요 개념들을 빌려 쓰는 상황이 있었던 시기이다. 20년이 지난 현재도 같은 문제의식인가? 19세기는 앞, 뒤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전통언어에서 전환의 문제만 걸리는 것이 아니라 transfer에서 re-transfer가 있다. 그리고 남북, 21세기적인 맥락에서 어떤 개념들을 어떤 맥락에서 개념사적으로 다루는가? 그 고민들이 공유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약간 독재를 했으므로 19세기 서양의 언어를 전통언어와 접합시켰다. 그러나 21세기는 더 복잡한 이야기를 해야 하고 유럽도 조금씩 당황하고 있다. 21세기적, 시공간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문제가 들어가야 하고, 이전에는 개념들을 베꼈지만 새로운 개념들이 나올 때 21세기는 내려와야 한다는 사태가 이미 온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언어의 부분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고, 서구와의 하이브리드의 차원도 한 구성 요소이다. 한반도의 특수성은 냉전인데, 이데올로기적으로 깨져나가는 것이 21세기적으로 새로워진다. 21세기적인 개념화 속에서는 조금 더 당당하게 동서가 부딪쳐야 하는 안목으로 3권을 쓴다고 서론을 써야 할 것 같다. 뒤의 따라오는 글들도 1권의 글들보다는 더 조금 생각을 나아간 형태로 진행해야 하고, 특정 시기를 해도 전체적으로 이후 어떤 함의를 지니는 지의 뉘앙스가 있어야 서론부터 본론이 잘 맞아떨어질 것 같다.

 

김상배: 개념사 방법론 측면에서 코젤렉, 담론분석 등을 어떻게 수용해서 아는지에 대해서도 이제는 정체를 밝혀야 할 것 같다.

 

김성배: 중국이 굳이 화평을 쓰는 이유? 평화가 아니라?

 

하영선: 우리는 전통언어가 익숙하지 않은데 <사서> 등을 보면 평화라고 안 쓴다. 당시에 썼다면 공자의 언어로 하면 평화는 대동과 가깝다. ‘대동은 같이 제사 지낼 수 있다는 것으로 권위(authority)를 공유하는 것이다. 논어에서 는 예악과 정벌을 천자가 결정한다고 한다. ‘가 작동하는 쪽이 있고 오늘날의 전쟁인 정벌이 있다고 보았는데, 대동이 있으면 안 싸운다고 한다. 오늘날 중국이 말하는 전면적 소강단계를 넘어서 궁극적으로 대동으로 간다는 것인데, 동아시아의 대동질서가 오늘날의 평화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점을 어디에 둘 수 있나? 서양 근대 개념에 익숙해졌다가 돌아오는 것인데, 초점을 대동, 평화, 화평 등에 둘 수있다. 고종실록을 봐도 평화의 개념은 건강. 태평, 안민, 대동 쪽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언어들을 볼 때 핵심 문제의식을 어디에 초점을 둬서 쓸 것인지? 봐야 한다. 요시다는 평화가 가능하다는 생각이었나? liberalism적인 생각을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어디에 초점을 두고 보는 것이 오늘날까지 함의가 있는지에 대해서 장절을 만들어야 한다. 요시다를 그대로 하면 이시다만이 아니라 많은 연구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초점을 둬야 할 부분은 사실은 1920년대 평화는 우리가 독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선 지식인들의 적지 않은 수가 요시다를 따랐는데, 김양수는 요시다 같은 논쟁에 꼭 동의하지 않았다. 국제협조주의는 말도 안 된다고 했다. 한국의 평화이야기를 하려면 요시다에 너무 초점을 두기보다 그것과 조선을 어떻게 연결시킬지를 봐야 한다. 20년대 우리에게 이율배반적 논의, 국제적 협조가 될수록 독립의 기회는 없었는데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었는지의 문제가 더 함의가 클 것 같다.

 

김성배: 약간 언어학적인 부분이 있다. 서구의 언어들을 일본에서 번역어로 쓰인 과정에서 대부분 국가, 자주, 독립, 평화, 경제 등으로 되었는데, 일본도 이전까지는 그렇게 안 쓰다가 서구개념을 만들었다. 중국도 이음절 채택을 하기 시작했는데, 우리가 일본에서 시작한 번역어로서의 개념에 우리가 다 갇혀버린 쪽이 있는 것 같다. 이전에는 한자 하나하나로 표현하거나, 사자성어 등 맥락 속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살아나게 되었다. 여전히 중국은 화평발전이라고 쓰는데, 그런 부분에서 일본의 번역이 시작된 것에서 그것을 넘어서, 전통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단순한 번역어로서 개념사가 아니라 이음절로서 가는 것을 넘어야 한다. 중국의 사회과학 개념도 다 그렇지는 않은데, 일본을 따라가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하영선: 30년대의 공동체 개념에 대한 함의가 21세기의 동아시아 지역질서가 짜여져야 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필요한 것에 대한 자기성찰이 있다면, 1920년대의 평화도 그런 함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왜 우리가 그것을 다시 봐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있어야 사전적으로 되지 않고, 문제를 추동할 것이다. 평화 개념 속에 조선은 역으로 가는 딜레마가 있었는데 이런 부분이 21세기의 미래의 개념사를 하는데 과거의 개념사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일본 유학을 매개로 10-20년대 서양 개념을 거쳐서 우리에게 들어오는 독특한 매커니즘에서 식민지조선에서 생기는 개념사의 의미가 있었다. 분단의 개념사와 식민의 개념사라는 문제의식이 잘 들어가야 한다. 공동체를 던졌는데 김명식이 받으니까 이렇게 된다. 요시노의 이야기가 우리로 들어오니까 엉뚱하게 나온다. 이런 식은 일본인이 못하는 개념사고 조선인이 할 수 있는 개념사라는 점을 보여줘야 할 것 같다.

 

김현철: 결국 조선 유학생들의 머릿속에 다시 들어가서 조선의 현실과 일본의 일상을 봐야할 것 같다. 평화, 독립의 과제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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