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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성, '조공' 개념 연구
 

2014-11-22 

2014 11월 세미나 기록


일시: 11 22() 1:00-3:00

장소삼성경제연구소 회의실

참석하영선, 전재성, 김상배, 손열, 조은정, 이헌미, 용채영

발표: 전재성, 조공개념 연구


- 이춘식, (1986) "중국 고대 조공의 실체와 성격" <중국학논총>
- 윤영인, (2002), "서구 학계 조공제도 이론의 중국 중심적 문화론 비판" <아세아연구
- 김위현, (2004), "중원왕조의 조공사례연구" <고구려연구
- 권선홍, (2010), "유교문명권의 국제관계: 책봉제도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발표내용


전재성, ‘조공개념 연구(발제문 참조)

- 작업의 주요 내용: 조공에 대한 개념, 용례의 조사

- 문제제기와 개념적 구분 작업

- 고려의 재발견

- 동아시아 전통질서의 이론화


토론내용


하영선: 처음 어떤 형태의 모습의 언행이 제도화가 되었고 어떻게 그렇게 부르게 되었는지의 이해가 필요하다. 서주가 은을 무력으로 지배한 뒤에 왜 봉건을 만들고 조공을 만들었는가? 천하국과 제후국 사이의 국내체계가 확대되면서 군사적으로 꺾으면서 소제후국들을 다스린 측면도 있지만 군사적으로 다 못하는 상황에서 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시기적으로 어떻게 제도화되었는가를 봐야한다. 서주 뒤의 원형을 복원하는데 제한적인 텍스트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심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에 대한 서구 학계의 논쟁들도 있는데 결국 왜 시작하게 되었는가의 질문으로 가야한다. 처음 국제관계가 아니라 봉건시스템에서 시작했는지의 원전으로 가야하고 주요 문건에 대한 리딩들이 필요하다. 왜 선진이 핵심인가? , 원 시대, 고려시대도 있었고 명분/실리를 이분법적으로 이야기하기 조심스럽다. 명분 10, 실리 90 또는 명분 50, 실리 50이었는가의 그래프는 복잡하게 그려질 수 있다. 또한 질서를 네 시기로 구분하는데 있어서도 단순히 한 시기에는 어떠한 측면이 있었고 없었다는 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각 비율의 변화의 형태로 가면서 13-14세기의 이해도 필요하다. 핵심은 주요 텍스트의 문장들만이라도 영어해석과 한문해석을 비교하면서 해석을 더 잘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

 

전재성: 문장, 개념 뒤의 스토리를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이헌미: 이를 논의하는 국제정치이론들, 조공제도를 볼 수 있는 국제이론들이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정리도 필요할 것 같다.

 

하영선: 주권의 단순한 번역이 아니고 주권의 이전에는 주권에 상응하는 개념이 무엇이었는가? 기원, 형성을 추적할 때 사상사 등의 텍스트 인용은 중요하지만 페어뱅크의 수준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조공의 practice의 가변적 측면을 계량화하는 시도들도 있는데 사실 통계학적인 처리들의 뒤의 이야기를 복원해야 한다. 처음 그 사람들이 그 말을 만들 때의 고민, 왜 그 개념을 지금도 쓰고 있나, 그 용어를 왜 상정하였는지가 중요하다. 서주시기 부터 명청 시기까지를 기본이론이 있는 가운데 그 시대적 변이(variation)를 보려고 하는 쪽과 허비아, 페어뱅크 등처럼 한 시기를 보편화하려는 양자의 싸움이다.

 

전재성: 그런 연구들의 변수 추출과정에 대한 메타적인 반성이 먼저 있어야 할 것 같다. 현실을 봐야하는데 서구가 적용하는 변수보다 우리 역사에서 변수가 나와서 다듬어야 한다. 상수적으로 적용되는 변수란 없고 변수가 역사에 따라 변화하는 부분을 봐야 한다.

 

김상배: 조공체제를 지속시키는 문명생산력이 있다면 그 구성요소는 무엇일지도 볼 수 있을 듯.

 

이헌미: 조공-책봉, 관계/practice, 구조적인 system을 구분하셔서 이야기하셨는데 조공/책봉을 시계열적으로 가변적인 국제제도로 볼 수 없는가? 패권적일 때도 있고 패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또는 패권의 이양 이후에 제도가 다시 회복되는 부분도 있다. 임진왜란 등 동아시아 전쟁은 패권 이양기 또는 도전국가가 있을 때 일어났던 것 같다.

 

그리고 동아시아 근대국가 발전의 역사사회학과 그에 대한 실증적 작업이 필요하다. 광해군, 인조반정시기 등을 볼 필요가 있는데 조선시대의 사대, 사대주의론과 당쟁론, 주권의 국내적인 형태에서의 왕권/주권, 왕권 대 신권의 갈등 등 내부의 권력투쟁과 외부가 어떻게 연동되는지의 동아시아 형태의 주권론과 역사사회학이 결함된 시스템 이론의 이야기가 가능하다면...sovereignty에서 anarchy가 나온다는 유럽적 역사사회학적 근거와 동아시아의 근대국가가 상이한데 이렇게 단위(unit)를 동일하게 생각할 수가 있는가? 근대 이행에서 유구와 조선은 멸망하였고 왜 전쟁국가가 되지 않고 비전국가가 되었는가? 제도를 해 안보이익, 자율성, 국익 등의 실익을 얻으려고 했는데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주권보존을 원했었나? 그렇다면그런 모습은 비합리성으로 봐야하는지 전략 자체가 틀린 것인가? 조공을 문화동질성으로 보는 것도 서구중심적인 것이 아닌지 생각이 들고 제도적인 합리성으로 봐야할 부분도 있다.

 

전재성: 주권의 유/무 개념으로 보기 어렵다. 중원국가는 간섭은 안하지만 원칙들이 공유된 상태였고, 상이하게 개념화하는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춘식의 논문에서도 주권개념들에 대해서 정확히 정리를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유구, 조선의 경우엔 중국이 근대화에 성공했다면 한국의 식민지화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중국은 서구식 정복제국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은정: 조공, 사대에서 중원의 규범이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면 청이 망한 뒤 유구, 조선이 멸망하는데 중국 입장에서의 미안함, 책임감이 있었나? 중국 구분되지만 하나의 지역질서로 이해된다면 조선 멸망에서 위기감도 크지 않았을까? 그리고 도덕적 질서의 이상에 따라서 중국이 갖는 도덕적 책임감도 있었는가?

 

전재성: , 청은 주변국에 대해서 보호책임을 느꼈다. 임진왜란시의 원조는 순망치한의 현실논리도 있었고 조공국에 대한 집단안보의 측면도 있었고 담론적으로도 존재했다. 청은 조공을 요구로 전쟁을 한 적은 적었고 거의 의례적(ritual)으로만 책임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19세기에는 조선, 베트남이 무너지기 전에 아편전쟁이 먼저 발발하여 책임을 느끼기엔 너무 약해진 상황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하영선: 설득력을 강화해서 기존의 논리들을 제압하려는 논지를 만들 때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페어뱅크, 허비아, 로사비 등의 싸움에서 보이듯 조공제도 또는 체제를 보는 IR이론들이 현재주의적이므로 아예 빼자는 논의가 있다. 최신 이론의 틀은 빼고 역사가들 중의 추상적인 개념화의 시도들을 봐도 역사가들도 사진이 보는 시기를 보편화하려는 시도들을 한다. 국내 사학계도 그런 영향들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IR계도 각성하게 하고 역사가들도 자기반성을 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런 역사가들도 한계가 있다면 전체를 일관하는 일반 이론적 요소를 가지려면 사학계도 현재주의를 배제하고 전체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있는지를 봐야 한다. 중국에서는 이운천이 <조공제도사론>을 냈는데 중국의 페어뱅크라고 평가되고 있다. 한문을 보고 사료의 해석학적 부분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IR이론 페이퍼밖에 안 된다. 텍스트를 보기 전에 송, /, 청의 질서사적인 시대구분을 하는데 사회경제사, 국가형성사가 아닌 측면에서 시대구분이 필요하다. 고려-, 원 시기를 보고 나머지를 일반화하는 경우와 명, 청시기를 포함할 경우는 달라진다. 전체시기를 조심스럽게 들어다보는 것이 첫째이고, 선진시대가 굉장히 중요하다. 조공이 이루어질 때 하는 자와 받는 자의 내적 심정도 포착하려면 원형이 생겨날 때의 심상과 조공이 자리 잡았을 때의 actor들의 생각이 어땠는지를 봐야 한다. 조공(朝貢)에서 는 갑골문에서, ‘은 진서에 등장한다. ‘는 달이 있는데 해가 뜰 무렵 이른 아침에 정사를 결정하였다는 의미에서 들어간다. ‘가 형용하려는 것이 이미 전통, 서주시절의 조공이라면 봉건 이후의 조공이 싹텄을 때는 어떤 생각을 하였는가? 조공이 기계화될 때 혈연적인 부분도 있는데 제후들의 의사에 따라서 왜 천자에 대한 알현을 조공으로 제도화하려고 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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