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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과학 개념사 3권 연구 프로포절 발표
 

2014-10-25 

2014 10월 세미나 기록

일시: 10 25() 3:00-6:00

장소삼성경제연구소 회의실

참석: 하영선, 손열, 김성배, 전재성, 김현철, 김헌준, 구갑우, 김상배, 마상윤, 김준석, 이헌미, 용채영, 김민선

발표: 전재성(동아시아 '조공'), 김현철(한국 '평화;), 손열(동아시아 '공동체'), 마상윤(한국 '민주주의'), 구갑우(북한 '평화), 이헌미(북한, '혁명'), 김성배(북한 '자주'), 김상배(한국, ICT/정보화/네트워크)

 



발표 및 토론내용


1. 전재성, “동아시아 전통국제관계의 근본제도로서의 조공

 

전통국제관계 왕조 간 문화적, 물질적 교환의 실천, 행위로서 조공에 부가된 개념적, 전략적 의미와 함의를 살펴봄. 이로써 전통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기본 조직원리 및 근본제도의 모습을 분석

 

하영선: 네 개의 시각을 국내, 국제학계에 전파하기 위해선 가설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본격적인 싸움은 구체적인 사례이다. 가설을 제시하고 그 다음 단계로 갈 것인가, 복합 시각에 가장 여태까지 택한 변수들이 잘 안 맞았던 것이 유독 잘 맞는 사례를 하나 밀것인가, 거기까지 갈 것인지 아닌지를 결심해야 한다. 국내적으로 초보적으로 페어뱅크, 로사비 정도 해석하면 안 된다. 정통 역사가들이 보는 자료, 해석들도 다르다. 중국어의 문제, 중국에서도 영어로 번역된 책들 이외에 자료들이 다시 나오고 있다. 당장 중국어를 보기 어려우면 중국 내의 연구들이 정리된 것들을 포함하는 것도 한 방법이고, 영어로 번역된 자료들의 수준보다 원래 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들을 안다는 식으로 써야 한다.

 

2. 김현철, “1910년대, 1920년대 한국 지식인들의 평화개념 수용: ‘동양평화독립과의 상관관계 및 새로운 지역질서 구상의 모색

 

평화에 대한 이야기와 독립의 이야기가 얽힘. 1910년 이후, 안중근의 동양평화 구상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못했는가? 이토 히로부미 사후, 나름의 대안을 찾는 이야기들이 초보적으로 나왔고 독립-평화-질서가 연결됨. 이후 한국인들에게 평화가 별로 매력적이지 않고 독립이 슬로건이 됨. 동양평화에 함축된 의미, 동양주의의 국제질서관, 지역통합, 독립운동에 대한 연관성 등을 다룸.

 

하영선: 1910년대의 글이 누가 있나?

 

김현철: 신채호 이외의 논설들. 독립선언 이후의 평화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됨.

 

하영선: 결국 개념사지만 교과서적으로 쓰지 않으려면 그 글이 던지는 시대의 실천적인 의미의 꼭지가 들어가야 한다. 1910년대로 넘어오면 1차 대전이 있다. 독립을 상실한 시기에 평화를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현상변경을 해야 독립을 하는데.. 그 상황에서 방황했을 것 같다. 1920년대, 전쟁 직후 유럽에서 일본, 한국으로 들어오는 매커니즘이고 일본 내에서는 전쟁 직후에 협동주의냐 그대로 갈 것인가의 대논쟁이 나타났다. 요시난 사쿠자가 소일본주의의 대표했고 우리도 그런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이것이 정권적으로는 기회가 없지만 그나마 요시노 사쿠자의 영향이 강하게 있었다. 그 영향의 맥락과 한계, 국내에 그런 논문은 없다. 평화의 시각에서 그것을 어떻게 다루나? 요시노가 독립까지는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었으나 우리는 일본 유학을 간 상태에서 요시노를 모셨는데 그것을 메인으로 두고 앞뒤에 1차 대전을 두는 방향도 있다.

 

이헌미: 평화가 국제질서를 지향하는지 국제정의를 지향하는지에 따라 평화가 폭력, 전쟁이라는 수단으로 쟁취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평화가 비폭력, 평화적 수단에 의해 쟁취되어야 하는지는 한국적인 이론에 따라 갈릴 듯하다. 2.8 독립선언서를 보면 일본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혈전을 한다고 한다.

 

손열: 이시다 다케시의 글을 보면 1920년대가 세계평화의 시대였으며, 비전(非戰) 평화주의는 일본이 가고, 주권국가 간의 무장평화로 들어갈 때 그 가능성이 활짝 열린다는 이야기였다. 국제협조주의가 나오고 하영선 선생님은 그 컨텍스트 안에서 김양수를 다루었다. 요시노 사쿠자의 소일본주의, 이시바시 탄잔 등도 연관된다.

 

이헌미: 안중근의 동양평화론도 terrorist act에서 나왔다는 점도 한국적 평화론에 독특한 점임.

 

3. 손열, “‘공동체개념 연구

 

동아시아 공동체, 동아협동체 등의 이야기들을 하는데, 이 개념이 담는 국제정치적 의미가 있었음. 1930년대 일본의 동아협동체, 동아공동체의 개념의 창조 과정과 조선에 대한 전파를 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지향할 수 있는 공동체는 어떤 것인지 다루고자 함.

 

하영선: 동아협동체론이 나왔을 때 일본 내에서 반대론이 있었는지? 일본은 있었을 것 같다. 또한 국내로 왔을 때 전향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들도 노골적으로 찬성했다. 객관적으로는 반대파가 있었어야 하는데 1938-39년에서 반대를 했어도 말을 할 수 없던 상황인가? 이것이 사기라는 글이 있어야 정상인데 없었다. 해외망명파에서는 있을 법하다. 고노에가 아시아 연방론을 제시하는데 김명식은 그에 대해 자기정당화를 하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나 우리는 소수라도 찬반이 있었는지를 봐야하고, 네 번째 파트가 우리의 original한 부분이다.

 

구갑우: 전향을 정당화하는 논의가 있었다. 일본도 서구와 같은 것들을 하므로 여기에 동참해야 한다고 말하고 그래서 자신들이 친일한다는 전향담론이 있었다.

 

하영선: 전향을 빨리 하자는 이야기와 나중에 거덜나고 거지되고 두들겨 맞은 뒤에 못 참아서 전향한 것인가? 그러기에는 협동체론을 자기정당화하는데 끌려들어간 부분도 있다.

 

 

 

4. 마상윤, “민주주의의 전파와 수용: 현대 한국의 역사적 경험

 

한국 민주주의 기존의 일반적인 논리는 냉전의 컨텍스트로서 이로 인해 민주주의가 왜곡되었다. 상대적으로 왜, 그렇게밖에 안 되었을까? 냉전으로 해서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공간이 좁아지긴 했겠지만 과연 없었을까? 민주주의를 형해화하는 것들이 있었다. 개념사적 접근이 도움이 될 것인지 생각해보고 민주주의를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했는가를 찾아보고자 함. 가설적으로는 절차적 차원의 민주주의로 귀결되지 않았을지 생각되고 곧 민주주의를 서구에서 이야기하는 경우는 계급들, 집단들 간의 다툼, 타협의 결과로 가능하게 되고 실질적인 권력의 견제라는 제도화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봄. 한국의 민주주의는 관심이 없는 부차적인 문제였고 최소한의 수준의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강 만족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럼 왜 한국에서는 절차적 차원의 민주주의로서 개념화되었고 널리 유포되어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는가를 봐야 함. 대체적으로는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엘리트 차원에서 논의가 되었던 것이 강하고 일반 대중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뭐라고 생각했는지를 발굴해내는 것이 쉽지 않을 듯. 또한 미국식 민주주의 개념과의 만남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미국에 대한 한국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유지되는 가운데 한국의 민주주의 관념과 어떻게 상호작용 했는지를 보고자 함.

 

김현철: 민주주의는 19세기에도 많이 들어왔고 한국의 현실에 맞는 문명개화로서 민주주의 고민. 유길준도 고민했다. 조선의 현실에 맞는 민주주의를 한다면, 민주주의 서구식 개념을 재변용하는 것으로서 그렇게 쭉 논의가 있어 왔는데 박정희 시기 10월 유신이 있었다. 서구식의 민주주의는 한국의 현실에 잘 안 맞으므로 맞게끔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운다는 것이었다. 그것 나름대로 논리적인 측면에서 제 3세계와 비슷했지만 다른 한 면은 정치권력을 연장한다는 것에서 유신독재를 정당화 했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논리상으로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 이전시기와 유신시대를 비교한다면? 유신독재가 없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한다고 하면 반대하지 않았을 듯. 그러나 당시 유신독재를 했으므로 명분상 맞지만 정치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적을 넣어서 무슨 것을 더 볼 수 있는가?

 

하영선: 어떤 자료들을 보려고 하나? 박정희의 이론적 뒷받침은 무엇이었는지?

 

마상윤: 김종필 등 학생들의 아이디어도 포함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 이야기도 나오고 제3세계, 아시아의 맥락에서 교도 민주주의 등 수식어들이 붙는 것들이 많았다. 한국적, 교도 민주주의 다 포함해서 외양은 갖추되 민주주의 안하겠다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저항이 없었다는 것이 궁금증이다. 정권을 위협한다거나 혁명을 발생시킬 정도의 위협은 아니었다. 지식인 내부의 저항은 있었으나, 정치적으로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일 정도인가는 아니었다. 유신 체제 직전, 직후에도 몇 년 동안은 박정희 자신이 끌고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영선: 당시 대학원 다녔었는데 위수령을 했을 때 위협을 아예 안 느꼈다고 보긴 어려웠다.

 

마상윤: 정권에 대한 위협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통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통제가 안 되면 타협을 모색하는데, 타협할 필요도 없다. 정권의 어떤 자원을 써서라도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 듯 하다.

 

하영선: 북한의 3대 혁명역량 대 3대 생존 전략, 북방정책, 남북 데탕트, 유신체이다. 그러한 아이디어를 어디서 구한 것인가의 부분이 질문이다. 특정 시기의 긴박한 상황으로 들어와서 단순히 독일 개념사가 아니라 국제적 긴박성, 남북한의 긴박성, 국내적 긴박성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용어, 개념을 창출해야 하는 상황이다. 누군가가 개념을 내고 리더가 포착하고 제도들이 따라오는데 이를 따라잡아야 한다. 개념의 빈도를 찾는 것은 사전이 되고 드라마가 만들어져야 한다. 국내/남북/국제적인 긴박성 사이에서 박정희 본인의 아이디어인지.. 박정희의 배후도 유신헌법에 갈봉근 박사가 중심 멤버였다. 박정희의 유신체제의 선택에 관해서는 사회학 연구, 정치학, 이후 국제정치, 남북한, 국내사회의 연구들이 같이 모여서 연구해야 한다.

 

마상윤: 유신 관련해서 논문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저의 초점은 박정희의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보다 민주주의가 뭐라고 대체로 인식되고 있었는가이다. 실질적인 권력의 분점 등 이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이다. 박정희의 문헌들도 관심 있지만 사회적 차원의 민주주의 이해가 더 궁금한 파트이다. 당시의 저변이 민주주의의 문제와 관련해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국민들의 민주주의 수준이 이정도 이므로 이 정도만 해도 된다는 논의가 먹혔던 것이 아닌지.

 

5. 구갑우, “북한의 인테리한설야의 평화개념: 문학과 외교

 

소설가이자 시인, 정치인, ‘평화운동가’. 한설야는 평화를 곧 통일과 등치시켰다. 1940년대 후반부터 한설야 숙청까지 한설야의 평화개념의 변천사, 그리고 두 번의 중요한 경험인 세계평화대회와 한국전쟁에서 어떻게 변형되어 가는지 보고 싶음. 개념사와 문학이라는 것을 어떻게 접목할 수 있을까? 문학은 대중을 동원하는 것이 가능한 도구이므로 문학이 국가건설 초기, ‘국문학이 만들어지는 것이 대외적 풍경을 만든다는 점에서 국제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맑스주의 평화개념, 식민시대의 연장선상에서 세계 평화대회의 개념이 한국전쟁을 거치며 어떻게 변화되는지, 결론적으로 북한에 오래된 미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업.

 

6. 이헌미, “북한의 마르크스 혁명 담론 속의 주체개념

 

혁명과 주체는 실제 관련되어 있으며 냉전시기, 50년대-70년대. 김일성 시기, 김정일 시기, 김정일 후기로 나누어서 보고자 함. 마르크스주의의 전파와 변용을 보여주는 주제이기도 함. 마르크스주의가 러시아로 가서 레닌주의가 되고, 중공으로 가서 마오주의가 되고 김일성 주의가 됨. 사상의 전파와 변용이라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이론 개념 자체의 실천성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고 김일성주의와 주체사상에서도 당연하게 나옴. 1920년대부터 일본 공산주의 대 반 교조주의 논쟁과도 연관. 개념의 의미론적 층위의 퇴적을 잘 드러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음. 사회주의 혁명 개념과 소련, 북한의 공시적인 차이를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개념의 변화를 국제정치적 사건과 국내정치와 연동시켜서 매치시키고자 함.

 

7. 김성배, “북한의 자주 개념사 연구

 

자주개념 선택은 북한의 지배담론이기 때문. 북한의 정당성의 원천이기도 하고, 정당성만이 아니라 실제 북한의 노선을 결정하는 factor가 됨. 한국의 전통적 자주개념을 다루고 북한의 자주개념의 특이성을 보고자 함. 북한은 극단적인 자율성에 대한 강조와 사대주의 비판을 많이 함. 북한 식 자주에게는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는 것이 심화됨. 미국과의 조선전쟁 때 싸워서도 이겼고 탈냉전 이후 사회주의 무너졌지만 고난의 행보 이후에도 우리는 살아남았으며, 실제 자기 능력에 대한 확신, 이를 밑받침 하는 국방상의 자위 등과 연결됨. 기술에서도 우리식기술의 강조. 정당성의 문제만은 아닐 것으로 보임. 이런 자주개념들이 어떻게 형성, 변용되었는지를 세 시기로 나뉘어서 보고자 함.

 

구갑우: 개인적으로 개념사를 하려면 30년대 반미투쟁을 봐야 함. 일종의 광기의 시대였는데 중국 공산당이 급진적인 소비에트 전략을 세웠었음. 그 때 김일성이 살아났고 김일성이 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는지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사건임. 회고록, 논문들도 많음. 당시 친구들이 김일성에게 유학가라고 했는데 안 갔다. 김일성이 이를 정리하는 방식이 중요함. 초기의 방식과 50년대 이후와 달라졌다. 50년대 이후, 사대주의, 종파주의, 민족의 중요성 세 가지를 나눈다. 중국 공산당이 자기들을 죽였다고 해석하는 듯한데 북중관계의 원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 현장 속에서 생각했던 것들을 체화된 형태로 갖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초창기 1944년의 방식들과 달랐고 소련 하에 들어갔을 때 김일성이 어떻게 다르게 느꼈을지, 그 기억들을 다시 복원하는 방식으로 개념사 작업이 진행되면 좋을 것 같다.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많은 문건들은 엥겔스를 베끼고 있다. 1982년 주체사상의 경우 엥겔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을 봐야 이해된다.

 

하영선: 중요한 것은 1945년 이전사료들을 봐야 한다.

 

이헌미: 두 방식이 있을 듯 하다. 역사서술을 통해서 자신들의 역사들을 재서술하는 것이 있고, 북한의 자기역사서술을 통해 접근하는 것과 실증적으로 접근하는 것들이 있다. 1945년의 이전 역사들을 자신들의 주체의 기원으로 보는 것으로서 주체의 진짜 기원을 개념사적으로 실증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말하는 주체의 기원이라는 것이 여러 개 있다.

 

김성배: 혁명, 주체, 자주는 연결. 주체 이전에도 자주는 있는데, 주체의 정책적 표현이 자주이기도 함.

 

8. 김상배, “ICT/정보화/네트워크

 

ICT/정보화/네트워크의 발전모델들이 바뀌는 과정 등을 볼 수가 있는데 외부의 개념사 수용만이 아니라 안에서의 번역의 과정들이 지난 30년 동안의 역사임. 19세기 기술 도입사처럼 근대화, 산업화를 넘어서는 새로운 국가목표와 연결. 변화를 어떻게 수용하고 사회전체를 조직화하려고 했는가? 개념사적으로 외연, 내포를 어떻게 잡을 것인지, 어떤 텍스트를 볼 것인지 어려움. 좁은 의미의 IT를 볼 것인지, 넓게는 한국사의 관점, 정보사, 문명표준의 도입사로도 볼 수 있음. 현장의 정보화의 논의와 학계의 네트워크 논의, ANT, SNA 등의 논의와 연결되는데 어떻게 층위를 잡을지 정리가 안 되어 있으나 한국의 정보화 모델을 정리해보고자 함.

 

: 300년 뒤를 보고 현 시점을 보면 크게 정보화로 묶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함. 21세기적 정보화의 모습으로 네트워크가 등장함. 정보 자체는 개념전파사들이 되어 있음. 아시아 군사에서 들어옴. 19세기적인 특성, 지금은 21세기적인 특성을 보여줘야 함.

 

: 개념으로 접근해서 되는 것이 아닌 하다. realityemerge하는데 그것 자체에 대한 이름이 없다. 30년 동안 그것이 안 되어있는 상황이다.

 

: emerge 중에 골라야 할 듯하다. 50, 100년 지났을 때도 남을 이야기가 무엇일지 생각.

 

손열: 노무현, 이명박 시기도 정보화가 다름. 담론으로 존재하는 것과 DJ의 정부조직 개편할 때의 이야기는 철학적으로 다르다. DJ는 신자유주의에 따라서 정부조직 개편, 정리했다. 정통부를 가져오는 합리화에서 가져오는 담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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