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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ner Keller, The Sociology of Knowledge Approach to Discourse(SKAD) 외
 

2014-07-12 

2014 7월 세미나 기록

일시: 7 12() 3:00-6:00

장소: 삼성경제연구소 회의실

참석하영선, 손열, 김상배, 전재성, 마상윤, 도종윤, 이헌미, 송지예, 권민주, 용채영, 김양규, 구민선

발표

Duncan Bell, "The Cambridge School and world politics", 2001 (김상배)

* Jan-Werner Muller, "European Intellectual History as Contemporary History",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46-3, 2011 (손열)

* Reiner Keller, "The Sociology of Knowledge Approach to Discourse(SKAD)", Human Studies 34-1, 2011 (도종윤)

 



토론내용



김상배: 개념, 언어로 실천적인 행위를 한다는 점이 저의 관심분야, 네트워크나 IT 등의 개념에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생각하게 됨. 언어에 담긴 실천적 함의가 무엇인가? 이 분야의 개념들은 다른 역사적 개념과 달리 딱 하나로 불려지지 않는 개념들이 많다. 기술, 미디어, 정보, 지식, 커뮤니케이션, 문화, 정체성 등의 개념들인데 캠브리지 학파의 어프로치로 현대에 접근하면 잘 안 잡히는 언어, 개념은 어떻게 잡을 것인가 생각하게 됨.

 

언어적 실천이라고 했을 때, 유길준의 양절체제론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 지금 우리가 현대에는 유길준이 말, 글을 쓰면서 19세기에 느꼈던 개인적 안보에서의 긴박감, 절박함을 느끼면서 사회과학적 언어를 쓰고 있는지.. 최근 미중 사이버 안보 경합에서의 인터넷 전쟁 등에서 법률, 체제 등의 여러 용어들을 가지고 뭐라 명명할지에 대해서 생산, 재생산의 양상이 벌어지는데 이러한 양상의 언어적인 함의가 무엇인지 생각함.

 

손열: 제목이 헷갈리는 부분이 있었고 초록만 보면 잘 이해가 안 됨. 20세기 유럽사에 대한 모든 연구들을 검토하는 서베이 논문 형식. 논지 자체는 명확. 민주주의 개념에 대해 논의하는 부분은 한국의 민주주의 개념 등에서 참고가 될 수 있을 만함. 빌레펠트에서 쓰려고 하는 것이 1930년대의 일본의 공동체 개념인데 20세기 전반의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공동체? 민주주의로 이야기를 하고 있음. 여러모로 흥미를 느끼게 한 논문이었음.

 

토론내용

 

손열: 캠브리지, 개념사, SKAD의 공통점과 차이점의 비교가 필요할 듯.

 

마상윤: 잘 구별을 못하겠다. 이것을 갖고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 해방 이후 자유민주주의의 한국의 개념사를 쓴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처음 닥치는 문제는 누구의 개념인가?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누가 이야기할까? 어떤 자료를 두고 연구할 것인지? 지식인들의 민주주의 개념인지. 그럼 사상계 등의 지식인들의 저작들을 주로 볼 것이고 일반적으로 보면 일간지 등도 보고 당시의 정치상황도 봐야 하고. 누구의 담론인지 의견일지 이를 어떤 식으로 상호연계성을 잡아야 할지 고민이 됨. Legitimization을 할 때 민주주의로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했으면 정당화의 작업이 있을 것임. 특별한 정치엘리트들이 가져온 개념을 대중들에게 씌우려는 노력, 정당성을 획득하려는 노력. 기층의 대중적인 의견과 엘리트들의 생각, 담론이 연결이 되는 맥락일 것 같다. 이를 어떻게 잡아낼 것인가, 이것이 개인적으로 문제가 닥칠 것 같다. 만약 개념사 학파, 캠브리지 학파에서는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가, 정당화의 문제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인, 상층의 담론만 다룰 것인가. 이런 문제들이 떠오름.

 

이헌미: 정치사상학회에서 한국 정치사상사에서의 스키너와 코젤렉의 두 방법론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었음. SKAD는 잘 모르는데 양 진영의 차이점 정리했었음. 스키너의 경우, 벨은 캠브리지 학파의 대표자는 스키너라고 하는데 자기도 통찰을 얻는 사람은 팀 던(Tim Dunne)이라고 함. 방법론적 논의보다 이론적 논의로 감. 스키너에 집중하자면 텍스튜얼리즘, 소셜 컨텍스튜얼리즘 둘 다 반대. 소셜 컨텍스튜얼리즘은 후기구조주의적 언어개념에 연결. 개념사는 언어의 장기적 변화를 다루는데 캠브리지는 단기적 논쟁에 집중되어 있음. 18세기 볼링브룩의 의회 논쟁에서의 이야기 등. 정권을 잡은 주류 집단에 반대하기 위한 논변, 정당성 확보를 위해 patriotism을 개념적 도구로서 사용. 제가 이해한 바로는 스키너는 언어는 구조적인 산물이라서 그 당시 사회의 컨벤션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는 생각, 소셜 컨텍스튜얼, 맑시스트의 언어비판에도 반대. 그렇다고 미국적인 텍스튜얼리즘, 텍스트의 locutionary force에만 집중해서 자유 등의 해석에만 집중하는 것도 반대. 스키너는 ‘author’를 가져옴. 저자가 가진 intention이라는 것은 개인적, 심리적인 것이나 의도가 재구성되는 과정은 객관적이라는 것임. 텍스트 내의 언어라는 것은 locutionary하게 언어의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당시의 정치적으로 moral한 언어, 규범에 의해서 재해석되어야 한다. Author가 저술을 던진 행위, speech-act의 수행적 측면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

 

정치사상사 워크숍을 김영민 선생님, 박성우 선생님과 진행 중. 스키너의 방법론과 관련해서 미국 학자의 발표를 들었는데 방법론적으로 스키너 이야기를 함. 스키너의 방법론을 개념사의 작업에 원용할 때 최종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intention이 있고 speech-act가 있고 speech-act가 만든 저술이 있음. 저술은 observable object. 그리고 social norm이 있는데 그 사이에 저자의 reasoning이 있다. Intention이 개인적인 차원인데 이는 복원할 수 없음. 해석학, 독일의 관념사와는 거리가 있음. 따라서 스키너는 사회과학적 방법론으로 의미가 있다고 주장. Intention이 아니라 사료의 실제 산물을 다룸. 벨이 비판하는 비성찰적인 미국 학자들, 텍스트 자체가 내용을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면에 social norm이 있음, social norm author reasoning을 통해 구현하려고 했던 과정을 연구자가 재구성하는 것이 개념사의 작업이라고 함.

 

하영선: 그게 결국 intention이 아닌가?

 

이헌미: 벨의 경우도 언어의 두 측면, innovative ideologist들이 revolutionary한 것을 선동해서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speech-act를 한다고 하는데 이 수단이 되는 정치언어는 제약성이 있다고 함. 죽은 역사 속의 사가로부터 사적인 intention을 물을 순 없으나, 그 사람을 둘러싼 social norm inter-textual하게 그 reasoning을 추론하는 것이 아닌가? 김상배 선생님의 대학원생 세미나에서 한 학부생이 2010년 조어도 사태에 대한 한국 언론의 인식을 일간지 사설분석을 시도. 박사과정의 송태은씨는 사설 쓴 사람에게 인터뷰 해서 의도 조사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질문함. 저는 조어도 사태에 대한 지형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논설을 들어놓은 것이라고 봄. 학생은 사설에서의 청일전쟁에 대한 언급이 탈근대적 행위를 전근대적인 의미로 파악하는 뒤떨어진 행위라고 결론을 냄. 권력이동을 중국의 부상이라는 권력이동에 대해서 직관적으로 연결시킨 것으로 해석한 것으로 봄. 저는 이것을 조어도 사태의 객관적인 현상부터 잘 분석해야 한다고 봄. 이게 intention reasoning의 차이라고 생각. Intention은 논설 저자들에게 왜 그렇게 썼는지 물어보는 것인데 그러면 조어도 사건의 진실은?

 

김상배: 조어도 사건의 진실은 Intention, 저자, 텍스트와 별개의 저 멀리의 reality.

 

이헌미: reality를 알아야 social nom의 언어적 구조를 알 수 있음.

 

김상배: 이헌미 박사의 말은 이를 알려면 조어도 사건의 reality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송태은 씨의 말은 학생의 의도는 그에 대해 말하는 사설의 담론 분석이었다는 것임.

 

이헌미: reality 자체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norm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reality를 알고 나야 시간성, 역사적인 비유를 하는 것이 이해됨. 사설들에서 역사적 비유의 두 개의 다른 물질적 실재 사이의 유비, 왜 청일전쟁을 다시 소환하는 식의 담론구조가 드러나는지를 알려면 조어도 사태의 역사적 연원, 사실관계 정리가 되야 담론화 과정이 드러날 것이라고 한 것임. 학생은 이를 통해 동아시아 질서의 복합 조직원리로 조어도 사태를 재구성하겠다는 것이 논문의 주제였던 것인데..

 

하영선: 처음 개념사의 1권 낼 때 방법론을 코젤렉을 원용한다고 하고 앞의 소개를 쓰고 챕터들이 이를 따라간다고 했는데 리뷰하는 단계에서 이 책이 과연 코젤렉의 방법론에 따른 것인가의 시비가 있었다. 2권은 그러한 소개가 없었음. 3권을 쓰면 각 저자들이 다른 스타일의 방법론, 코젤렉, SKAD, 캠브리지, 한국 방법을 할 것인가? 이를 리서치 하는데 대강은 비슷한 방식에서 한국, 동아시아의 맥락을 담을 수 있는가?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이야기의 중심이 이 방법들을 이해하려면 그냥 캠브리지, 개념사, SKAD를 읽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글 쓰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임. 한국에서 사회과학 글쓰기에 그런 식의 생각을 가진 글쓰기를 하는가? 적어도 스키너, 코젤렉이 보는 문건은 시대의 주어진 상황에서 글, 말이나 추상적 제스처, 상징을 형성하는 사람은 현실을 바라다보는 속에서 그 현실에 대한 당대의 담론, 글 논쟁이 벌어지는 속에서 어떤 언어를 선택에서 position설정해서 글을 쓰는 것이고 이를 복원, 재현을 해주는 것임. 스키너의 입장은 쉽게 생각하면 이러함. 텍스튜얼리즘은 자유민주주의를 한다고 하면 단어가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canon 분석처럼 동서고금이 같다고 분석한다. 이는 맞는 것도 있지만 사회과학은 대부분 안 맞음.

 동주 선생 밑에서 정치사상 수업을 했을 때 처음 리바이어던을 읽었는데 대부분 20세기 중반의 한국적 현실에서 생각하는 자유, 이런 느낌, 저 쪽의 freedom의 단어를 이해했음. 이는 홉스가 실제 던지는 질문과 100%는 다르지 않지만 사실은 맞지 않음. 사실 홉스가 생각한 정치, 자유와 너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함. 이를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했을 때 같은 과정을 초보여도 다 겪는다고 생각한다. 홉스, 로크에 대한 당시의 근접한 해석을 읽고 가서 이야기했더니 다르다고 함. 로크의 개념, 사유재산이 핵심이라고 했는데 social context에 가까운 해석이었음. 특정 명제, 주장이 이루어지는 것이 사회경제적 여건에 따라 불가피하게 그렇게 간다고 함. 과연 그러한가? 그런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당대에 다 다른 발언을 하고 있다. 스키너가 텍스튜얼리즘, 소셜 컨텍스튜얼리즘을 넘어선다는 것을 보면 당시의 발언, 의회 논쟁 등은 치열함. 지금 시진핑이 왔다간 것을 극도의 예찬론부터 사기성이 짙은 이야기와 50:50의 이야기가 난무한다면 똑같은 컨텍스트에서 생산되는 텍스트는 왜 다 다른가? 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스키너는 같은 컨텍스트에서 발생한 텍스트는 speech-act에서 차별성을 두어야 개별적 차이가 드러난다고 봄. speech-act를 본다고 하면 intention을 본다고 하면 과학이 안됨. 보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글을 쓰는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니까 당시 문제를 들여다보는 방식에 따라서 봄. 시진핑 방한에 대해서 칼럼을 쓰면서 생각을 시작. 왔다 간 컨텍스트가 발생했는데, 내가 author로서 우리 사회에 그 문제를 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다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내가 글을 안 쓴다. 대체적인 해석은 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시진핑에게 놀아난다는 명분론, legitimation이 작동 다른 한쪽은 잘된 일이다, 중국과 잘 해보자라고 함. 두 해석 중의 하나만 있던 가 두 개가 싸우는 속에 진리가 있어서 그것이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고 하면 나는 안 쓸 것임. 둘 다 틀린 것 같다. Intention이 다른 듯. reasoning에서 냉전적 사고로 미중관계 분석하는 사람들은 중국을 선택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봄. 그 동안 중국을 통해 미국에 balancing해야 한다고 하는데 다른 담론이 필요하다고 본 것은 지금부터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냉전적 공멸 시스템부터 먼 미래에서 공생으로 갈 기회는 co-evolutionary하게 시진핑, 박근혜 무대의 뒤의 오바마, 아베가 어느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갈 때 비로소 관계는 새로운 희망으로 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한국만이 아니라 미, , , 러 다 안한다는 생각에서 발화의 작업을 시작.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각자 자기가 말하기, 글쓰기로 돌아가야 한다. 1945년부터 어떤 글을 선택하는가부터 선택한 경우에도 개인이던 집단이던 어떤 형태로든 컨텍스트에서 왜 그런 텍스트가 나오는지를 재현하는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해서 reasoning이 된다고 하는 것에 사실은 intention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가서 물어봐서 확실히 알 수 있는지도 모르고 원래 그 사람이 글을 말하거나 쓰게 되었는지 보면 너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이렇게 쓴다 정도를 알면 실증주의와의 싸움에서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경우, 정신과학에서는 과학이 증명이 안 된다고 할 때의 결과적인 증명을 스키너가 노림. 사실 코젤렉을 선택한 것은 당시에 스키너를 몰랐음. 그러나 스키너를 못 쓴 이유는 사실 개념사 하려던 것이 아니라 한국외교사를 가르치려고 시작함. 사실은 그렇게 읽으면 안 되는데 21세기적인 시각에서 19세기로 가서 유길준의 문명론을 만나고 개념사로 이동. 유사하다고 생각한 것은 외교학과에서는 싸움이 걸려있음, 개념사를 쓰지 말라고. 사상사들이 오해하는 부분은 제목을 잘못 지은 부분도 있었음. 독일어로는 개념이 Begriff. 우리가 개념(槪念)이라고 하면 념이 둘에게 통한다, 모든 사람이 같은 념을 갖는다는 의미임. 문명에서 코젤렉이 넘어간 방식은 문명 연구를 하면서 독일이 유럽에서의 후진이었는데 전체적으로 언어, 담론이 형성되는 것이 안장이라는 말. 1750년부터 1850년에 자리잡게 되는데 이것이 유럽에서 자리잡은 것이 독일에선 어떻게 잡혔는지를 보고자 한 것임. 념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사회적인 structure와 연계되어서 자리가 잡힌다고 함. 사실 개념사와 특정 시공간의 정치사회사를 결합하겠다고 해서 8권의 작업을 했다. 국내적인 부분은 컨텍스트에 대한 관심이 없음, 개념의 역사를 잡는다고 하면 지성사 등의 방법이 영미권에서 쓰는 정치사회적 측면에 코젤렉은 강함. 이것이 짜여지는데 정치사회적인 버전이 맑시즘이나 더 프레임을 넓힌 만하임적 지식사회학과 코젤렉의 논의가 다른 지점은 코젤렉은 과거의 짐을 지고 미래의 수평선을 내다보고 오늘의 결단에서 역사가 진행된다고 이야기를 함. 등에 짊어진다는 것은 컨텍스트 속에서 이야기될 수 밖에 없다. 맑시즘이나 만하임이 생각한 것보다 복잡한 컨텍스트가 있고 그 안에서 개념의 상대적 자율성이 만들어져서 진행된다고 함. 등에 진 짐이 다 똑같다면 다 똑같이 써야 하는데 어떤 자는 더 멀리 내다보고 어떤 자는 발끝만 봐서 다르게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따라서 개념이라는 것의 상대적 자율성에 대해서 코젤렉은 더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캠브리지가 그 시대의 대 토론이 진행되는 가운데 어떤 개념을 통해 치고 나가려고 하는 부분이 뭔지를 본다면 코젤렉은 100년의 단위 정도로 long-term의 분석을 함. 지금 선택하더라고 문명을 19세기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은 캠브리지 보다 코젤렉이 자극을 더 준다고 생각. 그렇다고 유럽의 개념사는 되는데 우리 동아시아의 개념사는 안 된다고 보는 이유는 문명의 번역, 싸움, 국내, 국제 싸움이 함께 어우러진다고 보는데 이 이야기를 하니까 개념사 학회에서도 유럽학자들도 당황함. 유럽학자들은 어렵다고 함. Tool 상으로는 문명권을 넘어서는 쪽으로 가려면 한문, 일본어 등의 언어문제들 담당하기 어려움. 유럽적 개념사와 아시아적 개념사가 큰 면에서 자극을 주긴 하지만 이쪽에서 더 복잡하게 할 수 밖에 없는 것도 현실임.

  느낀 점은 글쓰기를 하면서 이를 왜 써야하는지 고민함. 대부분 SSCI에 실어야 한다는 목적으로 쓰게 되는데 이 시대의 담론 속에서 내가 꼭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하는 생각에서 글들이 잘 되지는 않음. SKAD를 보면 Social legitimization에서 어떤 사회적 reasoning의 발화의 process를 독일 방식의 지식사회학과 푸코의 방식을 섞는 그 과정의 설득력, 설득력과 동시에 과학력을 독일 스타일로 보여주겠다고 한다면? 독일 식으로 보여주는 과정이 진행되고 논쟁 중에서의 social reasoning을 하는 방식인데 사실 social practice이다. 사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권력/지식의 차원에서의 텍스트가 읽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임. 이를 미리 선택하고 고르기 보다 중요한 점은 만약 자유 민주주의를 한다고 하면 굉장히 다를 것이다. 따라서 cannon speech-act가 아니라. Freedom이 무엇인가 자유, 자유민주주의를 영국에서 쓴다고 한다면 내가 쓴다고 해서 학계, 영국, 유럽 사회의 여러 자유 개념들이 논의 중인데 새로운 speech-act를 하려고 하는데, 소위 linguistic context는 영미권의 쓰는 사람들이 자위에 관한 내용이며 홉스, 로크에서 내려오는 전통 속에 자기가 동시대의 언어 환경 속에서의 speech-act들의 싸움 속에서 내 발화가 의미있는 영향력을 주기 위해선 freedom을 다시 생각해봐야 함. 이는 bellfreedom이고, 우리가 1945년 이후를 쓸 때 어떤 컨텍스트에서 process가 나오는 과정을 본다면? 왜 글을 썼는지를 내가 찾아보겠다고 하는 것을 버리는 방식, 내가 어디까지 재현할 것인가? Reference까지 만임. 글이 써져 있는 것을 찾아서 자료 정리하거나 텍스트의 정리, social context가 의미가 있음. 그 상황에서도 특정 계층, 특정 사람이 말을 하거나 의미 부여하는 내면세계를 남들에게도 설득력이 있도록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 스키너들이 의회 문서로 주로 작업하는 것은 그런 환경이 있음. .. 또 다른 형태의 재현방식에 따라, 주제를 무엇으로 잡는 가에 따라서 reasoning을 할 수 밖에 없는 과정이 존재.

 

이헌미: 그렇게 비교정치적으로 한-영은 다르고, -, -프는 다르다고 한다면 큰 프로젝트나 개념사 적으로 한국에 접근하는 방법이 점점 더 알 수 없게 됨. 제가 문명의 개념 연구하는데 캠브리지와 맞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캠브리지 학파는 의회 문건도 그러하고 speech-act도 특정 저자가 글을 많이 남기고 audience에게 전달이 잘 되었을 때 적용되기 쉬운 듯. Invention과 매개하는 방식, authorintenntion과 재구성이 가능한지를 봄. 문건을 많이 남겼을 때는 캠브리지가 좋은 듯. 그러나 독일 개념사, 진보, 성격.. 고대사부터 현대까지 굉장히 이야기를 크게 함. 대표 개념과 대표 사건을 바로 연결. 그러나 문명 개념도 그렇게 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비판은 연구자가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것임. 이시다 다케시의 경우처럼 되지 않는가..

 

하영선: 이시다 다케시의 글을 보면서 그 글을 쓰는 사람의 agony에 대해서 들어가보는 것, 연구자가 그 안에서 들어가는 부분이 투영되는 부분이 약하다고 봄. 그 파트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차이라고 생각. 왜 사전을 제작하는 것과 시대의 개념들이 우여곡절 얽히면서 보는지를 봐야. 각자의 개념들에 따라 다른 방법 쓸 수 밖에 없긴 한데.. 1권에서는 다 코젤렉을 했는데 3권을 낼 때 어떤 틀로 쓸 것인가

 

이헌미: 선생님이 이시다를 비판하는 이유는 너무 사전적이고 사실적 관심 치중 보단 정치적 감각에 치중한 것이 문제라고 보신다고 생각. 결국 벨이 하는 것, 스키너도 정치적 편향이 있는 것 아닌가? 보수적인 리버럴리즘의 성향이 있는지로 비판됨. 정치사상도 실용적 학문이라고 봄. 개념사도 한국 국제정치학적 목적.. 작업도 정치적 저술이 아닌가? 방법론적 엄정성, 연구의 깊이가 문제가 아니라 정치성의 부족이 아닌가?

 

하영선; 정치성을 덜 포착한다는 것 자체가 화자의 컨텍스트에 대해서 리딩을 덜 한 것이고 텍스튜얼리즘 적인 것임.

 

손열: 여기서 이야기한 것, 뮐러가 이야기 할 때는 설명의 대상이 분명히 나와있음. 유럽에서 극단의 시기를 설명. 이시다 다케시의 경우는 여기서는 극단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단어를 보고 그 단어를 잘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이시다 다케시는 개념을 잡아서 개념의 역사를 봄. 독일은 개념사에서 약 100년의 흐름을 잡는데 이시다는 국가라고 하면 명치시기부터 다이쇼, 현대로 이어짐. 국가 개념의 변화를 시계열적으로는 보여줬는데 그렇다면 너의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묻게 됨. 일본의 정치적 시대가 뭔지, 왜 극단의 시기를 맞이했는지 국가의 시각으로 보면.. 이론적, 방법론적으로 더 탄탄한 글이 되었을 것임

 

이헌미: 푸코주의자들은 담론에 복속되어 있지 않은 개념은 없다는 것임. 담론 내에 개념이 존재하는데 컨텍스트만 보고 되는가 담론 안에서 un-tool 해야 기본의 방법을 뒤트는 효과가 있고, 객관적 발견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이데올로기와 담론, 개념을 우리가 3권에서 다룰 때 한국, 동아시아의 역사 시기에서 20세기가 극단의 시기인지 생각할 수 있을 듯.

 

하영선: 어느 정도 깊이 있게 할 것인가? 마루야마와 이시다의 질문의 퀄리티의 차이인 듯, 자유민주주의, 혁명, 전쟁을 하는데 1차적으로는 개념 추적을 함. 읽는 사람이나 쓰는 당사자도 특정 시기, 특정 언어가 개념화되는 프로세스의 진통의 모습을 찾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이를 재현할 방식이 뭔가 없을까. 여기까지 가는가 못 가는가가 가장 중요한 파트인 듯. 리딩 방식도 다를 것이라고 생각, 문서, 자료들을 다룰 때 쓴 자 나 말한 자가 시공적 컨텍스트에서 당시의 다른 논의에 비추어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지는 해방 이후에 조심스러운 파트였을 듯. 푸코적 관점도 중요한 지적인데, 우리의 수많은 담론도 power-knowledge적인 부분을 사람들이 놓친다는 것. 시공을 합쳐서 왜 그렇게 작동할까? agony도 변환을 겪고 있는 부분이 없는지 여유 있게 풀고 리딩을 하고 자료를 찾고 해야 할 듯.

 

전재성: 텍스트와 별개로 결국 언어의 문제인 것 같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게 된 것은 20세기 언어에 대한 관심. 언어인류학, 진화심리학 등에서도 진행 중. 인간 언어의 구조가 뭔지가 다윈, 프로이트가 바꾸었듯이 언어학자들, 인간이 언어를 왜 사용하게 되었는지도 아직 밝혀지지 않음. 언어의 원래 효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인지 굉장히 연구가 많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는데 언어에 대한 많은 논의들이 지금 정리되고 있는 상황인 듯. 우리도 언어를 사용하고 문학가들도 언어 사용, 정치인들도 언어를 사용하는데 보통 지시어, 감탄사로 언어를 사용했는데 언어 이전의 감정, 사상을 언어화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언어는 아님. 한글도 몇 십 개로 단어 한정. 구문론, 화용론, 지시론 등으로 나뉨. 언어-지시대상의 관계도 1:1이 아니고 오스틴의 내용도 지시내용이 발화함축적임. 복잡한 것이 언어인데 전 언어적 현실을 언어화하는데 충분한 단어의 개수와 언어 자체의 문법에 속박되지 않는 단어, 표현형태를 갖고 있지 않음. 우리의 언어가 현실을 굉장히 제한적으로 반영하므로 많은 언어의 편차가 있음. 만들어진 언어체계 속에 정치적 함축도 있고. 우리가 가진 언어에 대한 많은 질문들이 전체적으로 정리되지 않음. 이를 정치학에서 가져왔는데 언어가 정치세계를 반영하는 부분도 있고, 정치세계를 사고할 때 언어로만 가능하니까 언어가 권력관계를 구성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질문이 많아짐. 언어가 추상적이므로 어떤 층위가 우리의 정치세계를 파악하는데 좋은 층위인지 묻게 되는데 개념이 가장 낮은 층위일 듯. 개념, 문장도 있고, 포콕처럼 패러다임도 있고 정치사상의 전체 내용도 있고 담론처럼 비언어적 상징이나 disposition도 있는데 어느 층위를 타겟으로 하는가가 정치층위에 따라 다 다름. 이것이 안 합쳐지는 이유는 언어도 정리가 되지 않아 있고 질문도 다 다른 부분을 묻고 있기 때문에 합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닐 듯, , , 불의 내용 합쳐질 수 있는 때가 아닌 듯 하다. 근본적인 언어에 대한 성찰이 있는 다음에 정치학으로 넘어와야 할 듯.

 

또 하나의 문제는 여기서 다루는 내용들은 국내정치적인 언어인데 국제정치적으로는 언어 이전의 폭력 등의 교환이 있음. 언어가 국제정치적 현실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나? 발화자의 언어가 있고, 정치현실의 언어가 있고, 정치사상의 언어가 있는데 우리는 보통 정치인들의 언어이고 이를 언어화한 월츠 이론의 언어 등을 학습함. 마키아벨리 식의 정치사상을 보는 것인데 국제정치에서는 지금의 컨텍스트를 사상적으로 언어화한 것이 없음. 국제정치적으로는 국가 간 공유하는 언어가 있기보다 언어 이전의 싸움이 크므로 국내정치적 언어의 보편성이 훨씬 떨어져 있음. 이런 논의들도 월츠 비판 정도로는 의미가 있지만 행위자들이 말하는 언어들이 실제로 그 이전에 있었던 정치관계를 얼마나 반영하므로 언어가 현실을 만들어내는 부분, securitize하고 경제화하는 단계까지만 분석의 의미가 있는 듯. 국제정치가 아닌 부분의 언어의 문제를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함. 3권 쓸 때 개념을 찾기 어려운 것은 전파의 경우는 국내정치적 개념이 들어오는 것, 언어 개념이 국제정치적 싸움을 규정하는 개념은 별로 없는 듯. 개념 자체가 불확실해서 현실을 이끌어나가는 효과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개념이 얼마나 있는지가 문제임. 이는 국제정치의 자체의 특성에서 비롯된 부분이 있음.

 

마상윤: 최근 지정학 관련 책을 읽었는데 대륙세력, 해양세력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것 맥킨더, 마한의 개념이 사용되면서부터임. 우리가 지금은 자연스럽게 쓰는데 쓰기 시작할 때는 엄청난 정치적 목적, 영국과 미국의 국제정치적 조건과 목적을 염두하고 있음.

 

전재성: 유라시아를 heartland로 부르는 순간 지켜야 한다는 발화수반적 행위가 있음.

 

하영선: 3권을 왜 내려고 하는가. 1권은 소박한 부분에서 당시, 우리가 사용하는 사회과학, 국제정치학의 기본 개념들이 알면 뭐가 도움이 되는지로 생각해서 국제정치학, 한국정치학을 하기 위해서 우리언어로 하기 위해서 언어가 처음 어떻게 사용이 되었는지로 시작해서 언어를 통해 드러나는 현실이 어떤 모습인지를 정리를 해야 비로소 우리말로 현실을 그리기 시작했고, 대체로 공감대는 있음. 19세기 처음 들어오는데 3권은 19세기 이후의 개념들로 자유롭게 고르자고 했는데 어떤 도움, 기여를 줄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듯.

 

도종윤: 3권을 왜 내시려고 하는지. 글 쓰는 방법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음. 민주주의를 누가 도입했고, 기원이 뭐고 시작이 보통 그렇게 들어가서 개념사는 가는데 저는 그게 과연 중요한 문제인지 별로 생각을 안 함. 누군가에서부터 출발했는지 기원을 찾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겠다는 전제가 있으면 그것으로 되는 것 아닌가? 연구자들, 지성사적 프로그램도 있는데 계속 개념을 define 하려는 목적의식으로 해서 탐구하는 것임. 그러나 이 리딩들은 define하기 위해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러한 접근이 있다. 문제의식을 불러일으켜주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임. 글을 쓰는 방식도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개념들을 썼고.. 이를 읽혀주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 방식을 다르게 해서 사람들이 느끼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 인용된 푸코가 쓴 저작 중 리비에르의 이야기에 대한 것이 있음. 1800년대 초의 리비에르 라는 하층민이 아버지를 죽이는 사건 발생해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괴롭혔는데 어머니도 착한 사람은 아니었음. 당시에 상당한 사회적 이슈가 됨. 푸코가 그 당시 사건에 대한 소송기록들을 책으로 엮음. 결국 그 사람이 사망할 때까지 리비에르의 사건 후기까지 쭉 모아서 푸코가 연구 팀을 모아서 토론한 것을 논평처럼 책을 만들었다. 이를 리비에를 케이스라고 책을 냄. 그 책을 보면 어떤 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담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고 한 듯. define하는 것이 아니라 소송장이 뭐고, 대화가 어떻게 오고 갔는지를 실질적으로 보여두고 현대에서 1970년대의 논평가들의 이야기들을 모은 책 자체가 후대인들에게 읽히면서 1970년대의 인들이 1800년대의 사람들을 이렇게 보았는지를 보여줌. 우리는 분석적으로는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는데 오늘 리딩들이 이야기한 것들이 다 들어가 있음. 우리도 개념사를 하면서 서양 개념사 등의 리딩 등을 보면서 대화한 내용의 녹취를 50, 100년 뒤에 21세기 초의 사람들이 과거를 어떻게 보려고 했는지를 잘 보여줄 수도 있음. 사실 사회과학적 방법도 아니고 사회과학적 시도도 아니므로 개념형성사는 별로 재미 없었다. 하지만 이런 맥락에서 리서치를 한다면 글쓰기를 하는 저자들의 여러 의식, 방향성 자체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함.

 

송지예: 개념사적 방법을 써서 어떻게 논문을 쓸까 생각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썼던지 간에 내가 방법을 차용하는 방식으로 쓸 때 어떻게 통합할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어떤 주제로 쓸 때 어떤 방법이 적합할까 생각해보았을 때 특정 시대의 한국의 경우를 쓴다면 저는 코젤렉의 개념사 방법은 절대로 쓰기 어렵다고 생각함. 제가 관심이 있는 근대 한국을 보는 도구가 되는 단위가 되는 개념이 없음. 이를 발견하기 위해선 근대 이전부터 근대 이후까지 통틀어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주권 등의 틀이 있어야 이 개념 기반 하에서 이 개념이 정말 중요하고 시대를 통틀어서 봐야 한다고 생각. 이런 문제, 개념의 큰 거대한 역사를 보기 보다는 특정 의미, 특정 사건에서 발화가 어떻게 되었고 발화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가 더 관심. 코젤렉의 방식은 저를 설득할 수 없다는 점을 발표할 때도 논의해야 할 듯.

 도입사의 측면에서 볼 때, 국내적 측면과 국제적 측면이 다르다고 번역어 차원에서 말씀하셨는데 주권이라는 개념을 볼 때, 선생님께서 해오신 것. 한국은 제 3의 눈,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고 한 것이 다가온 것. 저는 지금 여기서 근대를 거쳐온 주권을 볼 것인지가 아니라 sovereignty를 볼 것인지 주권을 볼 것인지. 영어와 한자어가 두 개가 하나로 만났다고 했을 때 전후의 역사를 어떻게 보고 서술해야 나도 납득하고 남들도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 조영조약에서의 한국와 영국의 만남에서 주권이 어떻게 번역되었는가 관심. 영문, 한문어로 있을 때. 한국의 sovereignty를 번역하면서 조선은 independent한데 중국에 dependent하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교차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우리말로도 아니고 영어로도 아니고 제 3의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 이 서술방식을 찾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생각.

 

하영선: 사전처럼 3권을 내는 것은 어려움. 사실 개념사 학회, civilization을 하려고 발표했을 때 서양인들의 관심은 첫 장의 그림, 견미사절단의 그림이었음. 견미사절단이 왜 그렇게 구성되어져서 애환이 무엇이었는지가 더 powerful한 설명이었음. 왜 열 몇 명이 다른 옷을 입었고 헤어스타일도 다른지의 그림이 1882년의 우리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줌. 뒤의 설명은 사전적, 교과서적으로 했는데 청중들은 사진에 더 관심이 있어해서 그것을 더 자세히 써볼걸 개인적으로 생각했음. 근자에 리디아 리우의 clash of empire도 결국 글자 두 개로 함. 19세기를 야만 ()’barbarian이 어떻게 만나는가. 개인적으로 문제의 핵심으로 가자면 푸코가 사건을 드러낸 것까지, 그러면 초보적 그림 얼개가 이루어지는 속에서 핵심 질문이 뭐고 핵심 질문이 가장 잘 드러내는 사건 또는 개념을 가져와서 그 물방울 속의 것을 역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훨씬 고급 글쓰기의 방식일 듯.

 

이헌미: 송지예양이 한 이야기는 강화도 조약 이후의 조선의 국제적 지위가 논쟁 중이었고 좋은 연구들이 이미 논의를 5개의 유형으로 진행하고 있다. 조영조약이 왜 그렇게 번역되었는지 궁금하면 관련 인물들, 공적 문건들을 봐야 함. 재구성하기 어렵다면 2차 문헌을 통해서 inter-texual cluster를 만들 수 있고 사료 들로 검증이 가능. 데니 등 일련의 사람들이 논의를 하므로 조영조약의 최종적 국제적 조약문을 들여다 본다고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연구자가 패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함.

 

송지예: 그렇게 되면 사건사에 매몰되는 것이라고 생각. 다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

 

김양규: 언어가 먼저 오고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사후적으로 언어가 legitimization을 하고 reality가 먼저 옴. 따라서 언어논리 속에서 실체를 복원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 않나.

 

이헌미: 리디아 리우의 이/바바리안의 작업도 아편전쟁 이후의 사실, 사건관계들을 정리하면서 축약했음.

 

도종윤: 영국 외교관들의 초서체, 속기록 등을 읽고 이해하는 작업 어려울 듯.

 

이헌미: 개념사 3권에 대한 함의라면, 자유 민주주의 개념을 보았을 때 사상계 등을 보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정치적 개념들을 소수 지식인담론에 국한. 혁명 개념도 power effect가 별로 없었음. Keller가 제시한 발화 생산의 분석적 기초의 세 가지가 저에겐 도움이 되었음. 사상계의 논의도 지식 생산에만 초점을 두고 얼개만 제공했지 담론은? So what? 이것이 너무 취약해서 사실 혁명개념 연구가 어려웠음. 도종윤 박사님의 말처럼 정치언어의 미시사와 사상사를 하는 것은 아님. 국제정치학자들의 개념사 프로젝트는 압도적으로 전자. 기존의 정치사상사에 대한 불만족으로 개념사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자유민주주의를 사상계 중심으로 보면 지식인 중심이고 mass reception의 부분이 빠짐. 대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은 엘리트에 대한 발화와 동떨어져 있다면 진정한 사상사가 아님. 벨이 논문 말기에 인용한 멕시코의 좌파 연구자, 맑스주의로 운동을 해보려고 했는데 안 됨. Local한 개념으로 자기 문제의식을 번역하는 과정이 어려웠음. 한국도 1950, 60, 70년대, 민주화 이전까지는 개념이 발화되는 담론 생산, journal 등을 학자들이 정확히 이야기 해야한다. 자료의 형태와 target-audience를 이야기해야 하고, 민주정치의 차원에서 권위주의 정권은 언어-현실의 괴리가 계속 남음. 권위주의 정권에서는 언어가 레토릭으로 미끄러져 가기 때문에 이를 연구자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마상윤: 그러한 괴리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할 듯. 민주주의도 지식인들이 압도적으로 이야기했고 정치인들은 수사적으로 사용했을 것인데. 한국 대중들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을 듯. 1950년대만 해도 민주주의 이해 못하고 그냥 이승만 찍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고민.

 

이헌미: 사실 별개의 프로젝트가 될 수 있음. 이것에 대한 의식의 공유가 필요할 것 같고 한국적 정치언어가 얼마나 정치와 괴리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것도 중요할 듯.

 

도종윤: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과정자체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 않을까?

 

김양규: 그런데 복원이 정말 그러했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컨텍스트와 텍스트가 그러했다고 추적하는데 그것이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ontological reality인 것을 보여줄 수 있는가?

 

도종윤: 주관적인 것이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객관적인 것이 아니어도 공감하는 것이 많음. 지식, 경험의 문제이긴 한데 동시대인들은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부분이 있음. 여기에 너무 수학 증명하듯이 증명하려는 노력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영선: 50년대의 경우 사상계, 신문 등은 지금은 직접적으로 접근 가능하지만 그러나 나머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소설책? 위치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고민인데, 사상계는 당시의 찍은 부수 등도 봐야 함. 개인적으로 사상계를 보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부터였음. impact 자체를 생각해본다면 대다수 인들은 사상계 관심 없었고, 그것을 통해 소수의 영향력이 행사됨. 사상계가내는 문고판 등이 구미에 대한 중요한 접근 수단이었는데 그 밑의 수준으로 가면 괴리 등은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쉽지 않을 듯. 사실상 외교문서도 50년대의 것은 없음. 미국 문서들을 가져와서 복원하는 수준인데, 독특한 방법 필요. 50년대 국내정치 연구, 한국전쟁 등의 연구. 휴전 이후 50년대 후반의 국내정치연구는 무엇으로 하는가?

 

마상윤: 인물 중심 연구가 많은 것 같다.  

 

하영선: 그런데 대부분은 기록이 없고, 생존인물들도 거의 없어지는 수준.

 

권민주: 박사 첫 학기 때 스키너의 방법론으로 유길준의 글을 보려고 시도했었음. 스키너 방법론 몇 가지 유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스키너의 비판은 개별적, 통시적 사상연구들이 사상이 뭔가 이상적 형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사상가들을 통해 전개되는 것을 망각한다는 점, 저술, 사상의 일관성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비판. 저술, 사상가는 이런 분류에 속하므로 그런 저술에 언급이 안 되고 행간의 의미 자의적으로 읽어서 해석하는 방식에 대해서 비판을 담음. 유길준의 것도 자유주의적 등으로 그렇게 읽어내는 경향이 있는데 스키너의 방식 근대 정치사상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 지나치게 저술의 독창성 과대평가하는 것 등, 저술의 독창성을 가정하는 것을 전개하는 것 등에서도 유의미하다고 생각. 하지만 여전히 스키너의 방법론을 가져와도 근대 정치사상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부분이 있음. 많은 저서들의 번역서. 번역, 중역의 행위를 스키너의 연구에서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 스키너의 연구 대상들은 기본적으로 한국 연구자들이 다루는 자료들과 본질적으로 다룸. 이를 언어적 context라고 주장하기 위해선 유럽서, 번역서 등을 갖고 이를 컨텍스트라고 주장할 만큼 이를 꿰뚤어야 하는데 그 저술들에서 이 사람의 저술을 위치시키고 주장의 근거 제시됨. 번역서, 중역서 다루는데 가능할까? 이헌미 박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양적으로 제한. 중역, 번역서 제한한다면 유길준 같이 사상가라고 보기도 어렵고 사상가가 아니라고 하기도 어려운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가 고민됨. 스키너의 방법론이 한국의 연구주제에 원용될 수 있나? 언어적 컨텍스트만 본다고 하는데 소셜 컨텍스트들이 배제되는 것도 아님. 근대의 한국의 경우도 economy 등을 보면 정치, 사회적 영향이 더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화행이론의 경우도 화행이론이 드는 예들은 간단한데 그러한 것들이 정치사상의 서술에서는 복잡한 방식으로 표현됨. 우리가 illocutionary perlocutionary act의 구분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정치사상연구랑 정치사상사 연구랑 구분된다고 생각한다. 정치사상 연구는 현재의 컨텍스트에서 주는 의미가 중요한 것과 달리 정치사상사의 방법론은 어떻게 가져오고 유의미한가 고민이 됨. 이게 어떤 선택으로 tool로 쓴다는 것은 근대정치사상으로 어려움.

 

하영선: 3권을 꼭 내고, 왜 내야 하는가? 소위 홉스봄이 20세기를 age of complexity라고 표현하는 모습처럼 동아시아도 19세기의 재판이 21세기에 잘 안 될 수 밖에 없다는 것, 왜 냉전보다 21세기가 더 복잡한 싸움을 할 것이라고 생각함. 말의 전쟁이나 개념의 전쟁, 냉전시기의 개념사, 한반도적 의미의 개념사는 냉전시기에는 더 수용하기 어려웠을 것임. 하지만 21세기의 동아시아, 한국이 세계사의 흐름보다 느리지만 언어, 개념의 싸움, 전파, 변용의 의미가 다른 폭력적 대결이나 금력의 대결보다 비중이 커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기초적인 정리가 안 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손을 댈 필요가 있다고 생각. 전파적 시각의 군사, 경제 문제를 다뤄볼 수도 있는데 왜 개념, 언어적 문제를 다루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시기 상으로는 20세기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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