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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다 다케시, <일본의 사회과학> (소화, 2003) 외
 

2014-03-22 

2015 3월 세미나 기록

일시: 3 22() 1:30-3:30

장소: 삼성경제연구소 회의실

참석: 하영선, 손열, 배영자, 김성배, 마상윤, 김상배, 김치욱, 도종윤, 이헌미, 구갑우, 송태은, 송지예, 최인호, 용채영

발표: 손열, 이헌미

石田雄, <日本政治言葉: 平和國家> (東京大學出版會, 1989)

이시다 다케시, <일본의 사회과학> (소화, 2003)

 




토론내용

 

구갑우: 이시다 다케시의 책에서 Mill의 책의 제목을 왜 경제학원론이라고 번역했는가? 경세제민이라는 용어가 있었음. Political Economy의 측면에서 리스트가 굉장히 중요한데 별로 다뤄지지 않음. 오스카 하시오 같은 경우가 한국에 수입되는 경로에 관심이 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오스카는 경제학파 출신의 반자본주의적인 문제설정을 갖고 있던 것인데, 한국 야당세력에게 국제경제의 흐름들이 쭉 흡수되어 들어왔다. 그래서 김대중과 이론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가깝다고 알려짐. 유사하게 자본론이 북한으로 번역, 수입되는 과정도 궁금함.

 

하영선: 일본의 맑시즘을 수용한 것인가?

 

구갑우: 백남운이 일본 논쟁 사에서 어떻게 위치하는지도 흥미로움. 한반도에 수입할 때의 과정, 그 고리는 미국 정치학과 다 연결되어 있음. 대표적으로 일본에서도 오스카는 베버리안인데 진보 쪽에서 받아들임. 베버가 왜 일본에서는 진보적으로 해석이 되는가? 강상중도 마찬가지임. 그게 일본 사회과학에서 흥미로웠음.

 

손열: 강좌파 노동파가 1930년대에 싸운 논쟁이 있고, 명치국가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의 논쟁이 진행됨. 1930년대 나온 그 현실에 대해선 분석을 하지 못함. 그런데 1945년 이후 맑시스트들이 해방되고 다시 복귀되었을 때 강좌파들은 주권문제는 정리. 노동파들이 주로 나와서 신식민지 등 논쟁을 전개.  따라서 수입은1930년대 논쟁과 1945년 논쟁에서 7-8년 정도로 두 차례에 걸쳐서 있었던 듯. 그 논쟁을 나눠서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경세제민이 왜 경제로 되었을까? Economy political economy의 서양개념을 가져와서 번역어를 찾는데 경세재민의 약어로서 경제로 받아주었음. 그게 우리가 말한 것처럼 아담스미스가 논의하는 political economy와 리스트의 political economy는 다름.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고민들이 있었을 것임. 당시의 일본은 우리가 생각하는 political economy로 경제라는 언어로 인식할 때 훨씬 자신들에게 쉽게 이해되는 방식이었을 것임.

 

하영선: 정치학이라는 말이 언제 들어왔는가. 우리는 유길준이 수입. 김학준 선생이 한국의 정치학 도입사를 쓰면서는 사실 잘 모르고 씀. 일본엔 라트겐. 라트겐이 1982년에 와서 정식으로 가르친 것이 사실 당시 독일에서는 국가학이라고 불렀고, politics를 공부하고 와서 주로 가리킨 것은 국가행정법, 헌법 등 이었음. 그런데 일본 위키피디아에 들어가면 경제학자로 분류. 라트겐이 정치학을 강의를 하긴 함. 당시 동경대가 1972년 전신이 만들어져서 제국대학이 만들어지는 것은 1986. 완전히 정치학도 아닌데 국가학 전문의 라트겐이 와서 1982년부터 약 7년 동안 국가학 중심으로 가르침. 동경대는 정치경제학부 100년사가 따로 나온 것이 있음. 우리는 정치외교학부로 되어 있음. 그쪽은 정치경제학부로 되어있고, 그 안에서 정치학을 가리킴. 정치학이라는 것은 정치경제보다는 익숙하진 않다는 것임. 이시다 다케시의 경우, 1990년대 영미권의 영향. 라트겐이 동경대에서 가르치고 liberal한 쪽이 와세다를 만들고, 후쿠자와는 게이오 대학을 창설. 우리는 정치학부라고 생각하지만 국가학부가 없어짐. 당시엔 국가학, 정치경제가 익숙한 용어였음.

 

구갑우: 와세다가 최초로 일본어로 교육. 동경대는 초기 선생들을 데려와 영어 등으로 교육. 동경대는 법학부 산하, 와세다는 정치경제학 하에 정치학 붙여져 있음.

 

김성배: 일본, 한국도 정치학은 정당 등 행정적인 의미를 훨씬 많이 쓰는 듯. 남북한 정치학도 그렇고 이시다 켄이치의 저서를 봐도 프러시아 계통만이 아니라 영미계통도 짬뽕시켜서 쓰고 있기 때문. 그전에는 다 국가학. 우리는 역설적으로 정치학으로서 한 권을 쓸 수 있는가?

 

하영선: 이시다가 마루야마의 제자였고 대를 이을 만 한데 왜 일본 학계의 구심점이 될 수가 없었는가? 마루야마는 자신의 리서치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임. 마루야마는 자연, 작위 등 크게 때려서 남음. 개념화할 수 있는 자신의 것이 있었고 이시다는 그 계보, 어원적인 것을 잘 정리했는데 선생만큼 사기성이 부족하다. 많이 더 버렸으면 좋은 글이 되지 않았을까..

 

김성배: 대학원 시절에 봤을 땐 굉장히 재미있었음. 우리가 쓰는 용어가 이런 식으로 수입되었다고 보니까 나름대로 감명 깊었었는데 이제 보니까 그 때만한 느낌은 아님. 왜 그러한가? 어쨌든 이 논의는 일본적인 맥락이고, 여기서 차지하는 중국, 한국 파트가 없다. 따라서 최소한 한중일을 동시에 보고 전통도 염두해보니까 이것보다 좀 더 깊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중일이 쓰는 State도 국가라고 번역될 때, 앙계초가 중국으로 가져가고, 우리는 유길준이 가져오고. 한중일이 다르게 나옴. 우리는 나라라는 말로서 여전히 국가라는 말 이상의 것이 유지됨. 다 국가라는 개념에 흡수된 것은 아니고, 국가는 modern state로서 쓰임. 중국도 이 용어를 국가, 변방, 제후국에 대해서만 쓰지 자신은 천하였음. 천하사상에 압도되어 있어서 state가 생각되지 못함. 일본이 국가론으로 간 뒤에 국이라는 말은 거의 안 씀. 일본이 국을 받아들이는데 우리도 국가’, ‘나라라는 말 씀. 중국은 천하가 국가로 바뀌면서 쓰임새 달라짐. 따라서 삼국을 동시에 비교하면서 가야 더 크게 볼 수 있다.  

 

구갑우: 중국이 이라고 쓴 것은 어느 시대부터였는지?  

 

하영선: ‘나라. 선진시대의 나라라는 것은 방향성에서의 territory라고 씀.

 

구갑우: ‘()’가 국가라는 용례로서 쓰일 때는?

 

김성배: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서 과 연결. 명백히 국가를 하나의 단어로 쓴 경우에도 조정, 행정기구에서 쓸 용어였음. ‘국가 state가 번역되어 있으면서, modern state가 남음.

 

하영선: 저자는 일본 사회과학계의 극복요소를 자아비판적으로 제기하고 있음. 자기도 모르게 서구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반대로 테제적인 것도 있음. 왜 비교적으로 못 갔는지도 이야기하는데 결국 일본적 의미에서 논의.. 아마 이시다는 내가 다 꼼꼼히 챙겨야지 빠뜨리면 안 된다라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임. 그것보다는 역사적 안목으로 보면 버리는 작업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함. 나중에 그것을 일반화하는 과정, 남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을 보려면 문제 던지고 쓰는 방식이 더 정교화를 필요로 했다.

 

요새 관심가는 개념은 동아신질서. 1930년대 쇼와연구회 등의 작업을 보는데 재미있는 지적은 1, 2개는 있는데 몇 개 더 argument를 깊이 들어갔어야 함. 이는 비슷한 문제로서 야마모토 신이치 역시 본인이 모든 것을 안 놓치고 다 쓸려고 함. 따라서 사전은 되는데 경서가 될 수는 있는가?

 

이헌미: 우리는 사전 필요하지 않나? 선생님들처럼 쓰면 정치철학자 아닌가? 마루야마는 정치철학자이니까 괜찮은데 개념사를 표방하면서 정치철학 하면 안 되지 않을 듯?

 

하영선: 개인적 편향으로서 다를 수 있을 듯. 개념사의 특징. 방법론과 스타일이 다 다르다는 것이 특징일 듯, 보다 큰 지역을 크게 들어가는 것, 전체 mapping을 보여주는 작업도 있을 것임. 취사선택의 기준이 뭘까? 전통사가 선택적으로 봐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함. 이 저자도 전통을 전혀 안 한 것은 아닌데, 출전이 서양 근대의 수입에 초점. 원래 일본의 정치사 속에서 자리잡았던 개념들에 대한 성찰들이 부족했음.

 

배영자: 한국에서도 어떻게 처음 인민 개념이 수용되었고, 민의 개념이 전개되었는지 서술하는 작업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부분적으로 하는 쪽이나 사회과학방법론 적으로도 각자 재미있는 주제로는 안 되고 전 시기를 다 써야 하지 않는가?

 

하영선: 하루 이틀 해서 될 작업이 아님. 대강 이시다 다케시가 평생한 작업.

 

구갑우: 선배들 이야기에서 축적되는 것이 필요한데, 한국은 글쓰기에서 선배들의 것을 갖고 가는 것이 거의 없음. 자신의 것 또는 서양인들 것만 봄. 마루야마의 경우에도 맑스주의에 대한 평가, 그 안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음.

 

하영선: 처음 할 때는 짧게 해야지 길게 하기 어려움. 이시다의 형태로 쓸려고 하면 못 씀.

 

배영자: 앞에서 본인이 변명 비슷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제국의 경험. 전전(戰前) 제국이라는 개념은 빠진 것이고 전후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보편적인 사회과학적 개념으로서 시민, 국가에서 잠깐 이야기. 민주주의라는 정치학의 드러난 화두가 없었던 것이 일본적 현상이었고 미국 점령, 역코스 정책과도 연결될 수도 있음. 한국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등이 있었고 그 뒤에 민주주의가 사회과학적 담론으로 적용. 일본은 1945년 이후 민주주의가 시민의 분출이라고 되어 있고, 중앙에서는 민주주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방 등에서는 다른 논의가 전개되는 이중적 느낌이 있음. 중앙의 비민주와 시민적인 깨끗함 등이 있는 일본의 독특한 측면이 아닌가?

 

구갑우: 일본의 사회운동 몰락과 연결되는 문제로서 안보투쟁 때의 맥락이 반영. 이 책의 안보투쟁에 대한 서술은 마음에 안 듬. 나리타 공항 만들 때의 투쟁 등 그런 과정들을 재미없게 묘사함. 어쨌든 한국과 일본의 사회운동의 차이점은 우리는 모이라 하면 몇 백개의 단체들이 모이는데 일본은 안 모임.

 

손열: 지금 같은 논의를 개념사로 풀 수 있음. 민주주의라는 말을 어떻게 썼길래, 지금 이렇게 많이 아는 방식이 되었는가? 민족개념과 같은 것이 전형적이다. 민족이라고 하면 바로 1930년대로 갈 수 밖에 없음. 민족주의가 가진 일본적 역사성을 개념사로 풀어낼 수 있고, 그런 역사 속에서 설명될 수 있는 개념임.

 

배영자: 일본에서의 반미라는 말은 금기어인가?

 

마상윤: 이 책에서도 미국 점령 이후의 서술이 약하다. 우리 식으로 쓰면 미국의 지적인 영향 하에서 완전히 사회과학이 꽃피는데 일본은 다름. 미국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정도가 얕았고, 반미의 모티브가 상대적으로 보면 적었다.

 

구갑우: 또한 근대 초기의 동아시아와 관련된 논문들이 다 빠짐. 다케우치가 딱 한 번 언급. 동아시아를 상상하는데 있어서 생략된 것이 있음.

 

마상윤: 저자는 1950년대부터 전후 평화주의가 와해되었다고 함. 그런데 이게 1950년대부터 와해되었으면 한국은 반일주의를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일본을 군국주의 세력으로 외친 것이 수십 년인데 그게 맞는 것인가? 아베가 과연 우경화를 할까? 이를 일본의 전후 평화주의 와해라고 볼 수 있나? 냉전기 미국의 영향권에서 평화주의가 이미 와해되었다고 할 수 있나?

 

손열: 여기서 전후 평화주의라고 한 것은 1945-1948년 형성된 독특한 일본적 평화주의, 비무장 평화주의임. 냉전적 평화주의는 그 이후에 나온 것으로서 평화라는 것은 힘의 균형으로서, 전쟁없는 평화보다는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사용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임. 다른 한편으로는 평화를 위해서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 민주주의-평화 같이 가야하는 개념은 아닌데,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평화의 국내적 조건이다라고 해서 가는 것을 전후 평화주의로 논의. 이는 현실주의적 평화론. 이것이 깨져나가는 것이 전후평화론의 특징이라고 함.

 

구갑우: 대립구도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임. 그러한 개념은 국제정치이론의 수입인지, 자신이 일본적 현실에서 추출한 개념인지? 비전 논의에서도 나타남.

 

하영선: 직접 수입이라고 논의하긴 어려울 듯. 평화론 전체의 흐름으로 보면. 흔한 구분법. 코젤렉의 글의 경우, historian이지만 상당히 깊이가 있는 역사를 서술하는 반면, 통례적으로 구분하면 한국도 3분법으로 구분될 수 있음. 리스트주의가 있고, 정전론이 있고.. 수용-변용-전파로밖에 꼭 부를 필요는 없을 듯.

 

구갑우: 여기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어디서 위치시킬 수 있을까? 동아협동체론과 비교하면?

 

하영선: 분류하자면 안중근의 정의론은 정의와 정의롭지 않는가를 나누는 쪽에 가까움. 서양, 동양하고 붙는 것에 대해선 논의함. 왜 우리가 바로 옆과 정의롭지 않은 판을 벌이는가에 대해서 평화가 구분되어 짐. 그렇다고 완전한 realist, 좁은 의미의 현실주의적 평화가 아님. 동아협동체론은 세계통합까지 일본이 선도해서 하겠다고 까지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국가도 다 해체하고 새로 짜겠다는 이야기. 그런데 우리가 유심히 볼 것은 여기서 사회주의를 전향하는 국가를 해체 한 후에 동아시아, 세계로 지향하면 우리도 협동체론 만들어야 하지 않나? 전향의 중요한 명분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동기가 됨. 이시다가 더 가야한다는 것은 1930년대도 real하게 가면 생산이 걸리는 싸움. 이를 짧게 쓰더라도 삶과 죽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것까지 보여줘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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