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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볼 지음, 김영민 옮김 『역사 속의 성리학』(2010)
 

2013-09-28 

20139월 세미나 기록


일시: 2013928()


장소: 삼성경제연구소 회의실


참석: 하영선, 전재성, 김봉진, 김상배, 이헌미, 최인호, 최은실, 용채영


발표: 김봉진 - 피터 볼 지음, 김영민 옮김 『역사 속의 성리학』(2010)




토론내용


이헌미: 당송 변혁기, 중앙-지방관계의 변화를 가져온 핵심적 국제적인 맥락을 중국의 약화, 요나 금의 다툼 속에서 남송으로 변화할 때 나온 것을 집어준 것 등이 재미있었음. 피터 볼 생각처럼 사상사, 사회사를 같이 봐서 영미권의 연구의 장점이 돋보이긴 함. 하지만 네 학파로 나눈 것도 기존의 고전적인 명칭이 있는데, 용어가 통일되지 않은 상태에서 읽어서 조금 재미가 없었음. State activism local activism이 달라서 중앙-지방 관계가 왕조간의 변화를 주도하고, 주도 원인이 경제적인지, 이념적인지를 보는 것 같은데 별로 설득되지 않음.


당송변혁기에 일어난 여러 일들 중에서 당나라의 엘리트들이 토지 귀족들이었는데, 토지-관직을 독점한 특권계층이 송나라에서 토지와 유리되고, 나라로부터 녹봉을 받는 예비 관료 계층의 사가 증대했다는 것이 연결됨. 우리는 여선(麗鮮)교체와 평행하게 간다고 비슷하게 봄. 우리나라 성리학이 본격화되는 것도 조선시대로 보임. 사상적인 시차와 사회경제적인 토대의 연관성을 볼 때 그런 역사적인 발전단계가 조선이 늦은 것인가? 근대국가 발전 또는 고대-중세-근대의 국가발전사와 국제관계사가 연결되는 부분이 궁금함.


김상배: 7장에 보면 사회 자발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당시의 ()”, 사대부들이 조직화되는 방식의 매커니즘은 굉장히 인터넷의 collective intellectual와 유사함. 지식인들이 어떻게 조직화되어가는가? 당시는 아날로그 매커니즘인데, 여기에 주관적인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를 엮어 내는 규범적 의미들. 당시의 관()에 참여하지 않고도 만들어내는 사회형성의 가능성 등. 그런  시사점은 인터넷의 지식인들이 자기조직화되서 하는 것과 유사하다. 오늘날 민()에 가까워진 네트워크인데, 여기는 철저히 지식인들의 자발주의가 득세함. 중국사의 사이클과 유사하게 느껴졌다.


전재성: 일단 어프로치 부분에서 서양 사상사의 어프로치와도 연결되는데 기본적으로는 contextualism인 것 같음. 사상가들의 정치, 사회적 동기를 파악해서 그런 정치적 동기가 사회사상사적 동기로 어떻게 확대되어가는지를 봄. 우리가 경전중심으로 고대, 한대, , 송의 경전내용으로만 보는 것과도 다름. 국제정치학, 정치학의 입장에서 당대의 제국이라는 보편주의를 깨고 송대의 중앙정부가 약화되면서 지방 자발주의로 갔을 때 지방의 사대부들에게 갖는 여러가지 지위들이 유학형성에 여러 가지를 미쳤다는 내용이고, 5-6개의 구성요소로 나뉨. 권력도 있어야 하고, 노동분업, 자연과의 관계. 사상의 내부구조가 어떤 형이상학이나 보편적인 관점에서 연역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사회적인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신유학자들을 설명할 때 거란과의 대결에서 민족주의적 성격도 띠게 되고, 신법을 사실상 뒷받침하는 부분도 있으므로 이를 봐야만 보인다. 그런데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고민 됨. 보통 신유학은. 인륜, 가족, 삶에서의 이해라는 것을 강조한 철학이었고 형이상학이나 우주론이랑 빠져있었는데, 엄청난 불교적인 형이상학에 불교가 죽었다가 나중에 통합함. 주정주의 쪽으로 가기도 하고, 인간철학, 사회철학이 다 집대성. 사상사적으로도 내적 맥락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여기선 굉장히 contextualism으로 본다. 오히려 컨텍스트 환원주의가 강하고, 사상보다는 사상의 배경에 더 관심이 있음.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가 문제인데, 모든 사상가들이 사회경제적 맥락의 영향을 받지만 결국 초역사적인 보편진리를 추구하게 됨. 자아개념의 변화와 연관되는데 인간은 자아 속의 우주의 원칙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철학적이기보다 형이상학적인 부분이 있는 듯. 두 번째는 고대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당나라들의 유학자들은 고대를 어떻게 물려받을 것인가, 신유학들은 맹자에서 끊어졌다가 신유학에서 다시 이어졌다는 상고주의적인 측면을 가짐. 레오 스트라우스도 그러함. 그런데 이것이 고대철학을 정통성의 레토릭을 reinvention하는 것인지, 고대철학이 질적으로 우월해서 돌아가는 것인가? 조선의 사대부들은 국제정치적으로 일종의 Confusion-Peace를 조명관계에서 이뤄냄. 당시 송명의 사대부들은 독특한 내부의 영향에서 탄생한 계급인데 반해 조선의 사대부들은 전혀 관계 없는 맥락이었는데, 거의 사상적으로는 비슷함. 조선이 수입한 유학은 원나라, 명초의 유학인데, 명 초의 유학은 국가로 거의 흡수가 됨. 국가권력이 약화되어서 지방자발주의로 가는 송나라의 신유학과 명나라의 신유학이 다르다고 보이며, 조선이 받았던 명시기의 특수성이 있을 것. 조선은 지방자발주의가 약한 사회였고, 중앙집권적, 사대부의 사회경제적인 집권도 다름. 그러나 아이디어가 탈 맥락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이는 맥락으로 설명 안 되는 유학 내부의 발전사가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됨. 조선신유학 텍스트의 해석에 더 관심이 감.


김봉진: 근대의 색안경을 벗고 우리 전통을 보아야 하는데 그것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음. 저자는 뒤에 가면서 The Culture of Ours의 책과 사상사적인 천착에서 별로 진전이 없지 않았는가. 사상적인 특징을 소위 컨텍스트에서 자신의 틀에 집어넣으려고 함. 정치, , 믿음, 사회, 이것이 그의 사상적인 텍스튜얼리즘인데 스타일은 다음에 나옴. 텍스트 자체의 분석은 약하고, 자기 나름의 텍스트로 재정립 한 듯함. 그것이 신유학, 성리학의 지식을 어느 정도 가진 사람에겐 이해, 의미를 포착할 수 있지만 배경 없는 사람들에겐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음.


 당대에서 송대로의 변화, 왕실, 귀족의 권위가 떨어졌을 가능성이 있음. 당시는 중국에서 사회경제적으로 생산력이 증가한 듯. 지방세력, 서민의 생활력은 향상되었는데 이도 무시하지 못함. 이전처럼 약탈적으로 하지 못함. 왕실권력이 떨어졌으므로 이전처럼 정치적인 권위주의로는 누를 수만은 없으며 기득권만 주장 못하는 상황이었음. 지방세력들이 공부를 하고, 한 사람들의 지식인들이 송나라 왕실을 보조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남송에서는 literati가 득세한다는 이야기. 이들은 귀족도 아니고 지방의 호족, 지방지주라고 함. 조선도 신진사대부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데 여기서 틀을 깰 것은 신진사대부는 사실상 평민, 평민에서 사대부로 뜬 사람이며, 이 과정이 성리학이 국가이념이 되면서 나타남.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라고 봄. 우리나라에서 성리학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매치가 되었고, 조선의 문명을 오래 끌었는가? 본인은 성리학이 서민 해방시켰다, 서민들의 권리의식과 주체의식을 심어주는 사상이었다고 생각함. 그런데 이게 퍼져나가는 것이 수백 년 동안 미미하게 변화하므로 이는 컨텍스트와 함께 매치해서 봐야 한다.  


저자는 성리학 국교화, 제도화 시켜주면서 점차 사()들이 동조하고, 명 중기쯤에 들어서 왕수인, 양명학이 등장했다는 식으로 감. 그러나 이 부분 구멍을 다 채우면서 보면 이해가 될 수 있지만 안 되는 부분도 있음. 서민들이 그냥 부유해진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literati들이 생각한 것들이 반영되었고, 양반 세습으로는 오래 안 된다고 판단. 왜 그런진 모르지만 유학을 재해석하는 파들이 생겨났고, 그 당시의 컨텍스트 변화에 적응시키려고 애를 쓴 것으로 보임. 우선 literati들이 약했으며 주자학은 환영 받은 것은 아니었고 탄압받음. 이 사람의 관심은 사대부들, 돈 있는 사람들을 대상이었음. 주자학은 상하관계를 중시하고, 상부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이는 한 쪽만 보고 파악한 것임. 하지만 성리학은 서민, 서민들의 혁명사상이라고 생각함. 이를 왕양명이 받아들였고, 성리학이 이미 제도화되어서 엘리트들이 조직원들을 다 모아서 확대된 뒤에 주자처럼 정통이념으로 형성된 것임. 이후엔 제도화를 위한 제도 구축을 하려는 듯이 보임.


하영선: 첫째, 영미학계의 연구경향은 성리학을 정치이데올로기적 접근, 인문철학적 접근, 그리고 지성사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데 하은주, 춘추전국시대이후 1000년 만에 등장한 신유학을 입체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고 있음. 당나라적 제국의 해체, 국내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1000년 만에 나타난 천재로서 당시의 지성사적 전통 속에서 시대적 문제를 정리하려는 주자의 고민을 집어내야 재미있는 얘기가 될 수 있음. 두 번째는 이(), () ()에 대한 이해를 얼마나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가임. 리를 coherence로 번역한 것은 일리가 있다. “()”는 구슬 옥()변의 리로서 옥을 조심스럽게 잘 갈아서 나타나는 결이 리()라는 의미임. 성리학의 ()”도 삼라만상에 나타나는 지속적인 패턴을 인간의 내면부터 외면으로 일관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을 찾는다는 의미임. 사회정치적으로 당시 제국의 격변이라는 밖의 상황이나 국내계층의 변화 속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신유학이 주자학이 불교나 도교등의 철학적 사유의 도움을 받아 이, , 성을 어떻게 일관성있게 정리하려고 노력했는가를 생각해야 함.


김상배: 현대의 중국이 공자를 띄우는 만큼 주자를 띄우고 있는가?  


하영선: 개혁개방이후 유학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커짐에 따라 주자에 대한 관심도 커질 수 밖에 없음.  정치사회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왜 10세기 중국에서 많은 탁월한 사상가들이 등장했었는지는 주목할만함.   


김상배: 상업적 출판업자의 등장, 인쇄술의 발전, 서양에서의 수입한 르네상스 시기와 비슷하게 인쇄혁명과 겹쳤다는 것 보면 재미있는 시기였다. 또한 사람들 간의 사회네트워크가 등장했다.


김봉진: 송대 근세설명으로 당송 변혁기가 근대에 대항된다는 설도 있음. 그러나 그 설이 이어지지는 않음.


김봉진: 공공이라는 개념, 정자(程子)와 주자가 개념을 재발명함. 그 공공이 뜻하는 바는 오늘날과도 연결. 천하공공, 중인공공의 표현을 씀. 그 발상자체는 서민이 있고 타자가 있음. 그 용어자체가 발명된 것만 봐도 이 당시에 엄청난 폭탄을 안고 태어난 사상가임을 알 수 있음.


김상배: 그 개념이 현대적인 의미의 민중이라고 부를 수 있나?


김봉진: 더 강력한 민중이라고 보고 있음


하영선: 지나치게 현재주의적 관점이 아닌가?


김봉진: 오늘날 민중은 오염된 용어. 여기서의 중인은 서민, 중서(中庶), 모든 인간임


김상배: 인은 지배층, ()은 지배 받는 층임. 인이 사()에 해당된 파트고 민은 그야말로 이름없는 민초들임. 주자가 사()들이 만들어지는 네트워크를 통해 왕권의 정당성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알 수 있는데 현재적 의미의 민중과 그 네트워크로 이야기한 것으로 연결할 수 있나?


김봉진: ()들과 네트워크가 아님. 그래서 아래로 퍼짐. 양명은 천지만물 일체의 인()이라는 관념을 발전. 만가의 서민들이 모두 성인이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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