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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미, Shogo Suzuki, Civilization and Empire: China and Japan’s Encounter with European International Society
 

2013-04-27 

2013년 4월 세미나 기록


일시: 2013 4 27() 3-6

장소: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 회의실

참석: 하영선, 손열, 윤비, 김성배, 이헌미, 도종윤, 송지예, 용채영

발제: 이헌미

Shogo Suzuki, Civilization and Empire: China and Japan’s Encounter with European International Society (Routledge, 2009)



주요토론내용


토론


윤비: 최근 제국주의, hierarchy를 장기 연구프로젝트로 진행하고 있음. 저자는 구성주의를 방법론으로 채택했다고 하면서 학습 과정을 강조했는데, 구성주의는 학습 과정 이전에 무엇을 갖고 있었는가가 중요함. 서양의 국제질서를 우리가 항상 배워왔듯이 당시에 전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 전혀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보았는가? 서양질서를 평등한 국가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제국주의도 불평등 국가들 간의 관계로 이해했더라면, 두 질서의 교대가 아니라 이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제국주의에서 새로운 제국주의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일본은 이전의 중국형 제국주의질서에서 서양형 제국주의 질서가 있구나라고 봤을 것이라는 것. 중국의 hierarchy가 웨스트팔리안적인 평등질서로, 하나의 hierarchy가 다른 hierarchy로 전환되면서 선택을 강요 받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이전의 서양적인 hierarchical model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면 스즈키에 대해서 회의적. 기본적인 모델의 논의 이상이 없는 것이 아쉬움. 이 사람이 구성주의적으로 국제질서의 변화관을 추적하겠다고 했지만 적합한 개념적 도구를 갖고 추적하고 있는가.


도종윤: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국제사회, 문화, 규범에 대해서. 국내적 차원에서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았다면 어땠을까. 중국과 일본이 국제사회에 가진 관념이 달랐고, 문명이 들어왔을 때의 내부적인 논의가 무엇이 있었는지 더 보았다면 좋았을 듯. 지식사회학적 측면에서 스즈키 쇼고의 글을 본다면 유럽사람들에게는 신기하고 재미있게 받아들였을 듯.


하영선: 국제문제연구소에서 몇년 전에 영국국제사회학파를 다루는 특집을 냈음. 발제자는 19세기동아시아를  국제사회적 관점에서 보는 것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함.


이헌미: society는 중요하다. 동아시아에 대해서 더 적실한 것은 19세기가 아니라 지금이다. 현재 국제 사회론을 갖고 맞다, 안 맞다를 이야기 할 수 있을 듯. 결론에서도 반복하는 부분은 국제사회라는 논의, 이 사람들은 국제사회를 존재로도 생각하고 당위로도 생각한다는 것. 국제사회를 이야기할 때 비판하는 것은 realism anarchy.


하영선: 영국학파 불(Bull)은 사회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발제의 부정적 평가에 비해서 이 책은 보다 자세히 읽을 필요가 있다. 영국학파들의 국제사회 정의를 동아시아에 적용하는 데 두 개의 딜레마가 있는데, 동아시아를 영국학파가 정의하고 있는 국제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가하는 문제와 유럽형 국제사회를 동양국가들이 어떻게 수용했는가의 문제다.


윤비: 문제가 복잡함. 평등한 개인체의 연합체로서 society, 반대로 hierarchy, 그 밖에 anarchy라는 구분선이 있음. 서양역사에서 보면 자기가 겪은 경험의 일정부분을 선택하게 만든 것. 과연 16세기 자유주의가 부상하면서 만든 이 모델이 처음부터 국제정치를 바라보는 적절한 구분인가? 이를 가지고 국제정치를 묘사할 수 있는가? 이 구분을 동양의 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가? 서양학자들의 것만 건드리고 가면 안 됨. Anarchy, hierarchy 개념만 가지면 중세 위계질서도 이해 못하고, 동양의 것도 이해 못할 것임. 적용의 문제는 19세기라는 장을 놓고 영국학파들이 가진 것을 적용하느냐, 아니냐인데 더 복잡하지 않지 않는가?


하영선: 나는 19세기 동아시아를 국제사회론적 시각에서 분석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우선 영국학파의 중심인물인 마틴 와이트, 헤들리 불 등을 보다 자세히 검토해야 함. 스즈키를 보면 영국학파의 다른 서양 학자들 보다는 동아시아에 대한 기본 문헌지식이 있음. 중국질서에 대한 기본 문헌들을 제대로 소화하고 있는 저자는 중국 경전과 사서들을 원문으로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2차 영문연구서의 도움으로 동아시아 천하질서사를 쓴  David Kang 등과는 다름.. 영국학파의 대표격인 불은 <무정부사회(Anachical Society)(1977)>에서 국제 사회를 이익과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이 상호관계에서 규칙을 따르고 공통의 제도를 함께 만드는 모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불은 왓슨과 함께 <국제사회의 확대(The Expansion of international society)>에서  유럽형 국제사회가 19세기 전세계로 확대되는 과정을 다루었다.  스즈키는 1장 국제사회의 사회화(socialization into international society)에서 유럽 국제사회의 두 얼굴 즉 제국주의적 요소를 간과해서는 안된고 지적하고 있다. 동시에 유럽 국제사회의 전파국이 아니라 수용국들의 소용과정 분석이 보다 치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푸 샤오위(Pu Xiaoyu) "Socialisation as a Two-way Process: Emerging Powers and the Diffusion of International Norms"(Chinese Journal of International Politic, vol.5,2012)에서 신흥국의 국제규범 전파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음. 넓게 보면 전파이론의 싸움임. 서양 학자들은 발신자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고, 동양학자들은 수신자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다. 그는 세력균형연구의 대표적 학자인 슈웰러(Schweller)와 같이 쓴 “After Unipolarity”(Internationjal Security, 2011 Summer)에서 오늘의 미중관계를 보면서 모델스키의 국제정치 장주기이론에서 보듯이 새롭게 등장한 도전국이 질서 주도국과 반드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안 싸울 수도 있다. 대국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규범전파(norm-diffusion)가 가능한가를 이야기하면서 기성대국만만이 규범을 전파하는가, 신흥대국의 규범전파는 가능한가라는 어려운 무제를 다루고 있다. 발신자의 입장에서 볼 때, 국제 사회의 확대가 군사적, 경제적, 규범으로 된 것이라면 복합임. 수신자의 입장에서 보면 국제적 사회화와, 국내적 사회화를 거치면서 전통 천하질서에서 의 근대 국제질서로 넘어감. 그러나 스즈키가 혼란스러워 한 것처럼 동아시아국가들의 모임을 국제사회로 불러야 할지 조심스러움.


이익과 가치을 공유하는 국가들이 행동의 공통 규칙을 가지고, 또 제도를 만드는 모임을 국제사회라고 하고,  정체성를 공유할 때 공동체(community)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전통 중국 천하질서를 쉽사리 국제사회라고 부르기 어려움. 중국은 북방의 이적국가들을 이해(interest)의 원칙에 따라서이번원에서 다루면서 조선같은 나라들을 사대자소라는 예의 원칙에 따라서 예부에서 다룸. 따라서 단순하게 중국형 천하질서를 국제사회라는 시각에서 보는 것은 문제.  중국형 천하질서는 원형이 선진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진한시대이후 수당시대에 본격적으로 형성되고, 명청 시대에 보다 본격적으로 제도화됨, 일본은 명청시대이래  일본적 세계질서도 있었다는 주장을 함.. 19세기에 들어서서 청과 일본이 둘 다 부국강병의 시도를 했는데 일본이 상대적으로 쉽게 성공하고, 청은 실패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일본이 기존 중국적 천하질서의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쉽게 천하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 일본은 중국형 천하질서와 마찬가지로 일본형 천하질서를 주도했으나  청에 비해서 빠르게 서양의 근대국제질서를 수용한 것으로 주장함. 동주는 전파적 시각에서 일본이 혼자 일본형 천하질서를 주장했지만 이는 주변 세력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못미쳤으므로 크게 주목받지 못한 것이며 동시에 일본은 동양질서의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쉽게 서양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설명 함.


그런데 스즈키 쇼고는 청, 일을 비교하면서 사회화의 딜레마를 거의 비슷하게 씀. 그러나 중국이 전통 천하질서에서 서양 국제질서로 변용하는 딜레마와 일본의 딜레마는 단순하게 비교하기 어려운데, 두나라 드라마의 차이가 전체 글에서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다. 한 예로서, , 일이 서양식 수호조약의 교섭을 하게  1876. 주중일본공사인 모리아리나리가 이홍장과의 만남에서 유명한 복장론 논쟁을 함. 이홍장이 일본 외교관들의 서양 연미복 착용을 전통보호론적 시각에서 비판하자 모리 공사는 기능주의적 입장에서 반론을 하고 있음.


스즈키는 1차 사료를 다루고 있으므로 보다 본격적으로 유럽형 근대국제질서의 어두운 얼굴을 보다 더 깊이있게 부각시키고 동양국가들의 수용 과정에서 나타난 어려움을 더 드러나게 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책은 영국학파들에게 커다란 교육효과가 있다고 생각. 영국학파의 신세대인 Edward Keene가 이미 서양 국제사회의 팽창이전에 동양에 전통 천하질서가 있었다는 것을 강조했지만 스즈키처럼 1차 자료를 읽지 않았으므로 전파의 수용자 얘기가 빠져있다.


동양에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영국에서 스즈키가 대신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전파의 이론화를 발신자와 수신자들의 1차 자료를 기반으로 해서 쓴다고 하면 발신자도 전파의 전체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야누스의 두면이 아니라, 군사력, 금력, 규범력의 삼면의 유럽형 국제사회를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봤는지 쓸 필요가 있다. 보는 과정에서 한, , 일의 국내적 딜레마가 다 다르게 전개됨.. 전파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개화와 전통의 충돌을 스즈키는 교과서적으로 잘 정리했는데 더 극화해야 함. 두얼굴의 서양 근대국제질서와 만나서 제국주의적 얼굴과 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부국강병의 얼굴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 그게 전파이론의 전체 상임. 즁국의 신예 국제정치학자인 푸 샤오위는  21세기의 규범 전파 사례로. 중국의 국제사회화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하고 있음.. 한국은 서양과 동양의 양제국에 끼여서 겪는 보다 복잡한 전파와 변용의 문제를 겪었기 때문에 가장 복잡한 모델의 개발이 불가피하다... 


윤비: 이 사람은 어떤 모델을 갖고 쓰는가? 19세기, 웨스트팔리안 이후의 질서는 문명화된 국가의 평등과, 제국주의의 두 측면이 있었다. 동아시아의 유럽질서를 볼 때도 이 두 모델을 전제로 한다. 동서양이 경험한 동일한 질서를, 각자 다르게 해석했기 보기 보다는, 서양이 만든 질서를 당시 동양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보였겠는가로 봐야 함.  중국적 제국질서가 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강압적으로 경험한 유럽질서가 무엇이었는지 보려면 보다 더 역사 속으로 들어가야 함


하영선: 그것을 깊이 있게 해서, 국제학계가 경청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쇼고 스즈키는 영국학파의 담론 안에서 자기 나름의 비판적 역할을 한 것인데, 한국의 전문가들은 한국의 19세기를 더 심층적으로 연구해서 지구적 논쟁으로 끌고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 이런 논의가 뜬 것 자체가 결국 21세기의 미중관계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


이헌미: 사회를 볼 때 interest만 핵심은 아니고 identity만도 봄. 국제적 차원의 identity는 각 정치체들의 role perception이라고 함. 영국학파가 보는 행동은 기능이 중요하지 내재화라든지, 행태를 신념의 표출이라고 생각하면 되지만 신념의 단계까지는 안 가는 것임


하영선: 정체성은 더 심화되야 하지만 내가 19세기 동양질서를 국제사회의 시각에서 분석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만약 19세기를 국제사회로만 보면 우리의 역사는 국제사회의 형성 속에서 나라를 잃는 것이었다. 국제사회를 이익과 가치를 공유되는 국가들이 행동의 공통 규칙, 제도를 형성하는 모임으로 규정하는 영국학파의 국제사회적 시각에서 19세기 동양국제질서를 단순히 볼 것이 아니라   유럽형 국제사회의 제국주의적 확대라는  양면적 시각에서 보아야 한국의 국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헌미: 우리의 정치적 실존으로 가기 전에, 저자의 사회개념이 여러 문제가 내재됨. 자유주의적인 사회계약론적인 사회와, 국내정치공동체를 생각할 때의 사회와 국제차원의 사회라는 것이 있는데 사회계약론적인 사회의 기초는 member들의 생존과 자유라는 공통된 신념이 있음. 실제 계약이 아니라 계약에 의존할 수 있는 원초적 공동체인데, 유럽차원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확장시켜서 정당화할 수 있다. 다른 사회에서는 역사, 문화 등이 안으로 구성된 이야기라고 해도 그것이 가능한가? 이런 종류의 사회가 권력의 정당성의 문제를 계속 마주치게 됨.  


하영선: 불의 경우에는 anarchical society가 대표적. 와이트(Wight)의 삼분법 중에 불은 죽기 전에 그로티우스(Grotius)에 꽂힘. 미국 국제사회가 다 아나키라고 하는데, 자신과 영국학파적 시각에서는 무정부적 사회로 보인다고 하면서 그 지적 기원을 그로티우스로 부활시키겠다고 함. 그런 상황 속에서 국제질서를 들여다본다면 어떤 모습이 있길래 이를 무정부적사회로 부를 수가 있는가? 무정부적 사회, 국제법, 전쟁, 외교, great power, 세력균형. 이것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완전히 아나키로 보기도 어렵고, 국내적으로 보는 모임요소와도 다름. 이런 요소들로 국제정치를 보는 것이 어떤가?


김성배: 19세기 그 시기를 영국학파가 아니라 미국 학파식으로 봐주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 제국주의도 있고. 혹은 독일학파가 있다면 어떻게 보았을까?

 

윤비: 아주 간단히 보면 society, hierarchy, anarchy라는 것은 영국식 자유주의적 구분법이었다.17세기 프랑스 궁정은 위계, hierarchy-equality의 구분이 하나도 안 맞는다고 함. 그래서 이를 society라고 함. 불도 지배자는 없지만 국제정치가 돌아간다라고 자기가 묘사하려고 해 본 것인데, 국제정치학을 보면서 그런 영국에서 보는 좁은, 영국의 자유주의가 발원시킨 질서구분법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규범적일 수 있나? society라고 불러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이헌미: 우리가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대안이 무엇인가?

 

김성배: 충분히 공감. 40페이지 organizing society를 보면 그런 뉘앙스를 봄. 만국공법의 서문이 장황하게 나오는데, 그 글에서도 대부분 서양 국제질서를 춘추전국시대로 보면서 결코 이상적으로 보지 않음. 우리의 조직원리는 예()로써 위, 아래가 있는 질서여야 함. 무질서는 전혀 이상적으로 보지 않음. 만국공법의 수용은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적으로 되는 것이 문제임. 영국학파가 미국에 헤게모니를 내주고, 자기가 규범적 위치를 만들면서 개발한 이론인데, 적나라한 power politics로도 안보고, 문화적 요소도 선택적으로 본 것. 한국관점에서 보면 power 부분이 있고, civilization의 부분의 두 개가 있어야 함.

 

윤비: 독일학파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영국학파와 현실주의자의 싸움은 140년 전에 이미 시작. 19세기 말부터 독일에서는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 로크 비판하는 글들을 많이 씀. 여기서 형성된 것이 현실주의자 담론임. 독일인들은 무어나 로크, 영미권의 지적 전통을 보고 naive하다. 현실세계는 국내, 국제질서에서 규범적인 것이 차지하는 것이 적다. 저들이 저렇게 이야기하고 뒤에서 다른 행동을 하는 위선이라고 함. , 와이트가 현실주의자들을 밀어내는 것은 이 논쟁을 국제정치학에서 다시 벌인 것으로 대륙적-반대륙적인 관점의 대결이다.

 

김성배: 국제정치에서 common good이 무엇인가? 평화인가? 영국학파는 그것도 아님.

 

하영선: 불의 feel, 자기의 목표는 질서임. 싸움이 안 나는 것.


하영선: 한국학파는 어떻게 가야 하나?

 

김성배: 제국주의로만 설명해도 안 됨. 한국에서 본 복잡한 감정 담기 어려움. 개화파들도 소박하게 넘어간 것은 아님. 서세동점이 오는 것을 보면서 올라타고자 했던 복잡한 모습 그려야 함

 

윤비: 독일통일. High imperialism으로 이야기. 제국주의는 고대 로마부터 존재했는데 근대 제국주의는 역사적, 질적으로 나누고자 한 것. 19세기 전반기와 후반기의 차이는 그 전은 이름없는 영국패권이 무의식, 무의지적으로 작동했는데, 미국이 상업적 이익으로 등장하면서, 이미 신대륙의 식민지 선점이 끝남. 1870-80년대 독일에는 이미 정해진 것을 뺏을 수 밖에 없음. 밖에서 내부적 문제 해결 안되면서, 제국주의로 표출된 것임.

 

하영선: 그런 한 얼굴이 있는 것이고. 만약 동주적인 시각에서 수신자의 관점을 보면 서양질서가 다가오는 모습은 군사와 산업혁명, 이념도 장착한 형태로 다가와서 동아시아가 난장판이 된 것을 보았음. 이를 막연하게 유길준의 양절체제 딜레마였다라고 하면 이는 contents가 포함되지 않은 언어임. 19세기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김성배: 일본이 membership을 가질 때, 중화질서를 dismantling한다면서 이야기가 끝남. 한국이 동아시아에서 차지한 위치가 다시 확인된다는 생각. 예를 들어서 중국이 건륭제 때 조선사절들로 하여금 인사시키도록 한 것은 우리를 활용한 것. 조선은 천자의 권력을 정치적으로 정당화시키는 중요한 표현을 담당하는 역할이 있었음. 가장 모범적인 베트남, 유구, 조선이 있었는데 유일하게 남은 조선을 활용. 이렇게 동아시아 패권질서에서 상징적인 부분이 있는데 영향력 싸움으로만 보기 어려움. 한국은 굉장히 이중적이었음. 중국과 관계에서 쿨하게 인정하는 부분도 있고, 문명적 측면에서는 복잡하게 위치선정. 한국적 국제정치를 한다면 1894년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할 수 있음.

 

송지예: 반드시 한국적인 입장이지 않더라도 스즈키의 맥락에서 이야기해도 사회화 과정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꼭 일본, 중국이 서양질서를 사회로 인식했을까. 먼저 society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쓰는 것 같은데 일본, 중국도 그렇고 유럽질서를 개별 국가들로 만났는데. 제국주의이론으로도 설명되고, 영국학파적으로도 이해되지만. 한국이 생각하는 유럽질서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구성주의의 사회화 과정에서 전략적인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일본도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도 있는데, 꼭 단순히 프랑스, 독일, 영국적인 것 중에서 선택한 것인가? 그렇게 구분한 것도 아니지 않나.

 

윤비: 수신자 쪽를 본 스즈키의 그림은 영국학파의 그림이 한 패키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임. 그 당시 이론가들이 말한 모델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 것처럼 그리는데, 사실 우리가 전파이론을 잘 살펴보면 받은 것을 한 패키지로 받아들이지 않음.

 

손열: 『세계정치』의 국제사회의 특집과정에서 참여했음. 당시 지식의 환류까지는 갔지만 국제사회론을 가지고 동아시아 전체를 설명하려면 난점이 있었음. 오늘 와서 답을 듣고자 했던 것은 유럽은 유럽국제사회라고 하는데, 동아시아는 비유럽국제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가, 여기의 모습도 좀 다른데. 너무 지식의 환류 수준으로 가버리는데, 그 이상 20세기 질서는 쓰기 어려움. 그 다음에 전체 국제사회의 팽창 시기가 있었는데 그 이후 시기를 쓰기 어려움. 지역적 국제사회의 논의까지 가서 regional society, community, regionalism. Thick-international society, thin-international society로 나눔. 부잔(Buzan)이 본 지역공동체까지 갔고, 그 정도로 개념이 가게 되지만 21세기 동아시아를 기준에서 어디를 찾을 수 있는가? Complex로 보긴 어려움. 19세기와 동아시아 지역을 국제사회라는 틀로 본다면 유럽중심적으로 보게 되는데, 밖의 세상을 무엇으로 잡을 것인지? 권역, 의미권, 문명 등 말은 붙일 수 있는데 19세기를 무슨 개념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인지..

 

하영선: 굉장히 중요한 문제. 동아시아론이 본격적으로 뜨고 있다. 최근 시진핑은 중국의 꿈을 미국무장관 케리의 태평양의 꿈을 얘기하고 있음. 무대별로 보면 군사, 경제는 합의가 된 것 같음. 지식이나 규범 무대에서는 중국도 보다 적극적으로 미국 표준이 일방적으로 세계 표준으로 전파되서는 안 되고 그 나름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 . 그래서 논쟁이 역사와 사상의 배경을 가지고 진행될 것임. 우리도 그러한 논쟁의 대열에 참여할 수 밖에 없는데, 아무런 배경 공부가 없다면 또 일방적으로 따라가게 되지 않는가? 이 논의는 국제정치학계나 지역연구에서 빠르게 커질 것임. 한국이 가진 꿈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함께 꿈꾸도록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윤비: 정말 웨스트팔리안 체제가 존재하는가? Periphery가 보는 근대는 어떠한가. 웨스트팔리아 체제를 볼 때, 폴란드 사람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폴란드는 빈 체제에서 나라가 조각되는 상황을 겪었고 슈미트가 말한 것과 같이 주권불가침에, 웨스트팔리아적인 규범에 근거한 안과 밖의 구분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음. IR도 조금 공부 한 팀은 그런 debate는 함. 거기서 나아가서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package로서 model 두 가지가 충돌하고 있었다는, 모델의 충돌사로만 역사를 구성해낼 수 있을까?

 

하영선: 따라서 윤 교수도 19세기를 해야 하고, 19세기를 한 쪽에서는 사상사, 국제질서사의 frame속에 어떻게 집어넣을 것인지 고민해서 debate가 걸려야 한다.

 

이헌미: 월츠가 제3의 이미지를 이야기했는데 버릴 수도 없음. 실제 19세기 문건을 들여다보면 국제에 대한 고민이 많았기 때문에. 특히 한국, 국제변수에 엄청 영향을 받았고. 국제사회라고 일부분만을 재현하기 어렵다는 것. 우리가 보는 3rd image를 어떻게 쓸지 생각해야

 

하영선: 중국도 개혁개방 이전까지는 개화, 문명 쪽 이야기 안 했음. 이제 꿈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회주의 꿈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1885-1895년의 귀신들이 다시 무대에서 살아날 것이다. 푸 샤오이가 미국만 norm-making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한다라는 발상은 재미있다, 우리같은 middle power의 경우는 어떤가?. middle power보다는 큰 대국인 중국이, norm market에서 어떻게 시장을 넓혀갈 것 인가가 중요하다.

 

김성배: Normative power로서 중국이 북핵 문제에서 veto를 할 수 있겠는가

 

하영선: 비확산 규범도 가져가면서, 평화, 자주, 핵 자주권도 가져가겠다는 중국의 입장

 

김성배: 그 안에서 한국은 할 것이 있는가?

 

손열: Norm success의 계량적 기준이 무엇인가?

 

김성배: 19세기에서 강압의 요소도 있지만 자진해서 들어오는 요소들도 있었다. 문명론지개략의 싸움처럼 결국 서양을 보니까, 힘이 중앙집권화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일본문명의 어느 핵심이 되는가가 문명론지개략의 팀의 논의였음. 개화론 팀에서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봄.

 

이헌미: 하지만 civilized power에서는 권력적인 요소도 있다라는 것인데.

 

송지예: 둘 다 civilization이라고 안 보는 입장이 아닌가? 유럽은 문명이 아니고, empire라고 보는 것이 맞나?

 

하영선: 동주는 괴로우니까 문화권으로 엮었음. 경제제국주의적으로도 보기도 어렵고, 정치군사적 제국주의도 어렵고, 복잡한 문화전파현상도 일어나므로 문화권이 충돌하는 속에서 complex하게 일어나는 관계로 보자고 한 것.

 

송지예: 제국주의가 유럽문명의 속성인가, 혹은 유럽의 core국가들이 유럽중심의 중심부와 주변부의 만남이 아니고, 두 변방들 간의 만날 확률은 적은가? 유럽의 변방이나 아시아의 변방이 만난다면? 유럽대국과 이슬람 문명권 하의 접경지대에서 만난다면?

 

윤비: 이태리 통일 이전에, 이태리의 royalist들과 마치니주의자들 간의 대립이 있었음. 이태리 통일 찬성론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며 그 사람들의 생각이 달랐다. 이탈리아의 정체성 의식은 크게 남았지만 이탈리아가 하나의 국가가 되어야 하는가? 이는 전통적으로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질서다라고 봄. 따라서 유럽질서들이 망하기 전의 질서를 보자고 해서 아시아의 질서를 본 글이 있음. 비문명권이기도 하지만 아시아가 유럽의 질서를 망치기 가기 전에 순수했다. 그 사람들의 논의는 유럽이 생각하기에 유럽의 팽창을 주도하지 못한, 질서에 편입하기 싫어했던 아시아인들이 있었고 또한 아시아사람들은 어떻게 이를 봤을까에 관심을 둠. 이러한 과정을 보려면 역사가가 되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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