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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윤, 장세진 저 <상상된 아메리카>
 

2013-03-30 

일시: 20133 30() 3-6

장소: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 회의실

참석: 하영선, 마상윤, 전재성, 손열, 윤비, 강상규, 이헌미, 송지예, 권민주, 용채영

발제: 마상윤

장세진, <상상된 아메리카: 1945년 이후 한국의 네이션 서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푸른역사, 2012)


주요토론내용

발제

 

- 책은 미국과 한국의 관계, 미국을 통해 한국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관심으로 시작. 1960년대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민주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문. 대중적 인식보다는 당대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미국과 관련된 개념들, 이미지들 추적. 텍스트로는 신천지 등 대중적인 잡지 등 신문 등 텍스트를 다룸

- 아메리카를 매개로 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음. 거울에 비추어진 한국의 이미지, 내러티브가 문제시된다. 한국인들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들이 한국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고자 했는지 노력했고, 거울이미지의 아메리카를 어떻게 이용했는가에 초점

- 잡지<아메리카> 표지(96):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한미의 시각적 형상화. 한국과 미국이 일대일로 만나는 모습 상당히 상징적

- 4장에서 미국의 정신에 대해 주목해야겠다는 인식이 등장. 이에 대해서 자세히 다룸. “1960 4.19를 전후로 탈식민을 실천하려는 새로운 정치문화세력의 메타포로서의 아시아, 아프리카 등장했다. 해방된 상상력, 식민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해방된 상상력은 5.16 이후 다시 죽기 시작했다. 아시아에 대한 상상은 역사의 깊은 망각 속으로 잦아들었다고 함

- 식민지 유산부터 해방 이후 지속, 변화되는 방식을 밝히고자 했던 것인데, 맥락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는 않는 느낌. 5.16 이후 완전히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주장이 분명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 아메리카 이야기보다는 거울에 비친 한국의 자아상, 서로들의 담론의 경연장 같은 느낌.

 

토론

 

윤비: 이 책이 성공적이라는 느낌이 있었는가?

 

마상윤: 미국이라는 나라내지는 문명이 보통 반공으로 엮여 있는 것으로 생각. 한꺼번에 그것이 들어온 것으로 생각하는데, 저자는 다양하게 쪼개져서 온다고 보고, 수용자의 입장에서도 다양하게 의미를 두는 측면이 있었다고 함. Variation과 받아들이던 쪽의 담론충돌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의미. 가장 재미있게 본 측면.

 

식민지 시기 자체는 저자 자체의 이념의 과잉이 아닌가 생각이 됨. 또한 박정희 시대에 아시아에 진정한 연대를 추구하려던 상상력이 죽었다고 하는데, 박정희가 아니었다면 그러한 생각들이 발화가 되어서 잎도 나고 꽃도 피고 했을까? 저자 스스로의 희망이 섞인 해석이 아닌가.

 

윤비: 미국의 상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이 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이를 보고 국내, 우리의 담론으로 바꾸어서 이야기함.

 

마상윤: ‘우리를 무엇으로 만들 것인가. 여기서는 nation building. 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미국을 보면서 했다는 것. 한국과 미국이 바로 만나게 되었다는 것도 신기한 해석이라고 봄.

 

이헌미: 실제 읽어보니 미국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기 보다는 한국, 1945년 이후 1960년대까지의 한국의 모습을 더 보여주는 책. 물론 대상자료의 장르, 선택 과정에 있어서 보여주는 이 시기의 아메리카 표상을 재구성해서, 재구성된 상이 반드시 균형감이 있고, 대표성이 있는지는 생각해 봐야 함. 정치사상사의 측면에서는 이 시기, 한국전쟁 전후의 정치사상은 쓰기가 어려운데 그런 면에서는 흥미롭게 읽음.

 

마상윤: 국문학 쪽에서 이런 것 많이 하나?

 

윤비: 책에서도 기표, 기의, 다스 노이에 등의 표현을 씀. 장단점이 있음. 장점은 문학테스트가 보여줄 수 있는 포텐셜이 큼. 하지만 충분화 이론화된 훈련을 받지는 않고 씀. 문학이 어떤 컨텍스트에서 나왔는지는 잘 안 나옴. 그렇게 하는 것은 어떤 장점, 위험이 있는가? 무엇을 보여줄 수 있고 무엇을 감추는지 검토를 해야 함. 그동안 한국의 문학에서 주어로 자리잡았던 국민/민족을 탈피하려는 것. 그분들에게 정말 질문을 하고 싶은 것은 민족은 정말 만들어진 것인가? 급진학파에서 왜 그러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어떤 토론이 이루어지는지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마상윤: 민족을 만든다. 내가 불편한 것은 기표 등 안 써도 되는 표현을 계속 씀. 미국이 아니라 아메리카로 쓰는 것이 꼭 필요한가? 혹은 저자의 독특한 스타일인가?

 

윤비: 이러한 작업을 하는 쪽의 기표임. 네이션 서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역사학과 국문학에서는 계속 글을 써옴. 창작과 비평 등의 여러 잡지. 네이션 서사가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데, 그러한 주장은 그 이전에는 없었다는 것인가?

 

마상윤: 새로운 것이 없었다는 것. 과거를 반추해서 앞으로 어떤 것을 보여주는지를 쓴 것. 1950년대는 거의 폐허에 가까운 상황. 무엇을 만들긴 만들어야 하고 떠나야 하는데,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이야기 등.

미래지향적 부분에 초점을 둔 듯. 여기서 표상하는 미국은 미래세력임. 쫓아가야 할 미래세력으로서 모범이 되는 나라로서 앞으로 한국이 어떻게 갈 것인가가 관건

 

이헌미: 아시아의 이야기, 동양, 담론, 표상, 기호 등으로 접근하는 것은 일본 쪽에서 시작. 이효덕의 표상공간의 근대”. 루쉰 등 근대문학을 다루면서 그 속에서 아시아 각국의 근대성의 모습을 보는 것. 국문학계의 동아시아학에도 영향을 미치는 등. 이론적 자의식, 감수성이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유행이 되는 말들을 사용. ‘공론장이라는 단어도 뜬금없이 나오는데, 명백하게 정의해서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느낌. 지성사, 개념사, 공론장 등. 결정적 이유는 문학작업을 하는 쪽 근대국가 형성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인 측면에 대한 문제의식이 희박한 듯. 이런 종류의 작업이 의미가 없고, 부족하다고 버리면 해결이 안 됨. 박사논문의 원제가 책에는 더 적합. “문학작품을 통해 본것이었음. 인용된 텍스트, <사상계> 혹은 김수영, 박인환 등의 기행문. 정치학자들이 대중적인 국민국가에 대한 인식, 국제상황에 대한 아시아, 미국을 보는 것들은 포함되지 않음

 

손열: 우리는 아메리카라고 안 부름. 일본 것을 따온 것인가 했는데, 1950년대 아메리카 잡지, 아메리카니즘의 이야기도 함. 아메리카가 사라지고 미국이 있음. 아메리카의 국가표상의 constructor가 있고, 이를 보면서 그려나가데,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때의 차이가 있을 듯. 미국을 표상할 때 미국이라는 것을 자유민주주의, 윌슨주의 등으로 그렸던 것. 또한 모더니즘의 극치가 있었다. 한국의 모델은 1960년대 일본이 있었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는 부담스러운 개념으로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추측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아메리카가 1950년대 구성되었던 것이 이후에는 잘 통용이 안 되었던 것 아닌가, 정치경제적으로?

 

이헌미: 잘 모르겠다. 1970-1980년대는 미국이라고 씀. 식민지 시기에는 쌀 미(), 해방공간에는 다시 아름다움 미의 미국(美國)으로 변화. 아메리카는 일본 제국의 눈으로 본 식민지 시기의 으로서의 미국이 아니라 직접 가서 유학생들이 보고, 미군정들이 전해주는, 직접 대면하는 이름으로서 아메리카카 등장했을 것이라는 것

 

손열: 왜 다시 미국이라고 등장하게 되었나?

 

하영선: 1950년대도 별로 안 썼는데? 아메리카?

 

이헌미: 직접 인용을 하면 미국인데 쓰면서 아메리카인 듯

 

하영선: 저자가 쓴 아메리카가 진짜 그 시대의 아메리카와 부합되는 경우, 한 두 편의 저널이 있었지만 1950년대 아메리카라고 하면? 나의 기억에는 국민학교 때도 아메리카라고 미국을 부르지는 않았음. 사상계 지식인들도 아메리카는 익숙하게 쓰지 않았던 듯. 김수영적인 분위기, 독특한 분위기임. 그런 독특한 분위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인지가 굉장히 어려운 파트.

 

윤비: 아메리카라고 들은 적 없음. 청춘소설, 쌍무지개 뜨는 언덕 등. 어릴 때 거기에서 본 기억.

 

이헌미: 김수영, 손창석의 시에도 미국이라고 나옴. 마치 일본에서 가타카나로 그대로 표기한 것처럼 아메리카라고 부르는 데는 특별히 그 당시의 뉘앙스가 존재했던 듯. 1899년에 나온 미국 독립선언서에도 아름다울 미()의 미국이라고 나옴

 

전재성: 일본은 아름다울 미라고 한번도 쓰지 않음. 중국은 아름다울 미

 

윤비: 왜 영어개념과 독일어 개념을 섞어 쓰는가? 프랑스어 아프레(apres)’가 나옴.

 

하영선: 모던걸, 아프레 걸은 나쁜 의미의 신여성. 근대기획에 썼던 모던 걸, 그보다는 나쁜 여성.데카당트 하다. 자기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어설픈 짝퉁 여인

 

이헌미: 가장 못쓴 부분은 국제정치, 윌슨주의 파트임. 제일 잘 쓴 파트는 나쁜 여자들에 대한 부분. 자유부인 아프레 걸들이 주인공이 되면 주인공 여자가 자기의 타락상, 데카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 결말 등. 잘 씀.

 

윤비: 개념사가 가진 장점은 다 상대화시키는 것. 왜 어떤 컨텍스트에서 그런 개념이 만들어지고 어떤 논쟁이 있었는가를 보게 됨. 우리 나라에서 비판적인 지식인들도 우리가 쓰는 개념들은 어디서 만들어졌는가를 봐야 함. 네오 베버리안(Neo-Weberian)들이 민족들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면, 그 이야기를 왜 하는지를 보고, 그런 스펙트럼에서 어떤 작업을 해야하는지 봐야 함. 어떤 개념을 그냥 취사선택되는 것이 문제. 처음으로 전제하는 것이 만들어졌다, fabricated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이 과연 정말 서양에서 만들어진 것과 같은 국가, 민족인가? 서유럽의 일부 국가들을 통해 보았던 모델로 한국도 만들어졌다고 선 전제하고 들어가는 것 아닌가?

 

처음부터 서양에서 근대적 의미의 민족이 등장하는 컨텍스트는 우리와 달랐음. 서양의 역사학자들 1980년대 베네딕트 앤더슨 식으로는 유럽 내 민족국가들도 설명이 안 된다고 하는 것. 이를 가지고 우리는 얼마나 볼 수가 있는가? 서양의 제국사를 보면 국가가 얼마나 형편없었는가를 느낄 수 있음. 인종들이 커다란 전쟁 등으로 자유롭게 섞여가게 됨. 국민/민족국가를 다른 국가를 설명하는데 관련성이 있을 것인가? 본토에서는 자기반성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를 뒤늦게 수입한 우리들이 이를 거꾸로 읽으면 우리가 우리 것으로 읽는 것을 못하지 않는가?

 

이헌미: 재밌는 부분은 1940년대 이후, 한국 민족. 민족개념이라는 것을 하버마스, 종족 중심적 민족주의와 민주적인, 시민적 의미의 민족개념으로 나눈 것에 대해서 저자는 1940년대 해방공간에서 한국전쟁까지는 친일파 청산과 함께 종족적 개념 구사. 한국전쟁 경험 이후 민족이 둘로 나뉘어지기 때문인데 혈연적 한국 민족에서 달라짐. 민족 정체성 구성하는데 있어서 미국의 제도, 건국헌법 등에 대한 관심과 함께 직접 미국에서 본 물질 문명, 그 이면의 실용주의에 대한 사상과 이념으로 감. 한편으로 풍속, 문화에 대한 비판. 이승만, 박정희 시기에는 다시 종족 민족주의적인, 민족의 영광을 살려서 정권에 동원. 유학에 대한 비판적 평가 등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여짐.  

 

마상윤: 끝까지 그 테마가 지속되지는 않음. 잠깐 스치고 지나감. 미국은 이념으로 만들어진 민족이라면 한국은 이념을 가지고 민족화, 남한을 가지고 함. 태평양을 두고 미국을 붙이고자 함. 그러나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 피의 문제가 있더라. 그에 있던 긴장감이 있었다고 하는 부분. 하지만 전체적인 theme으로 가져가지는 않음.

 

윤비: 하버마스 이야기는 민족주의 없는 애국심을 이야기임. civic virtue에 대한 ideal로 민족을 창출할 수 있지 않은가. “아직도 민족주의인가라는 책에서도 민족주의를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결론은 모른다라고 했는데.. 그렇게 나누면 서양역사를 볼 때 이념적이게 됨. 요새 서양민족주의의 연구는 서양민족이 아무것도 않은 상황에서 국가권력이 들어와 문화가 퍼져서 남아있던 ethnicity가 섞여서 민족이 창조되었다. 요새는 종족적 민족주의, 종족이 잘 나뉘어지지도 않고, 서양에서도 상당 부분 종족, 민족의 경계가 일치했다는 주장이 나옴.  

 

전재성: 저자입장에서 변명을 한다면 민족 서사를 분석하는 것이 민족 개념에 대한 분석은 아님. 개념사 책은 아님. 그렇게 하려면 분석적, 추상언어로 들어가야 함. 여기서의 민족, 아메리카는 감정 내재적, 일상언어 수준으로 내려온 것을 분석하는 것. 국제정치에서 구조가 있고, 이를 분석하는 개념이 있듯이 개념이 일반인에게 내려올 때 서사가 만들어짐. 내려와서 서사 level을 분석하는 것이고, 그것이 다시 구조에 영향을 줄 수도 있음. 서사분석은 개념분석과도 달라서 기표, 기의, 독일어 개념을 쓴 것은 문예비평, 문학비평을 하는 사람. 일상언어를 만들어 질 때는 나름의 구조가 있음. 여기는 대쌍론으로 보았는데 왜 서양/동양으로 나뉘어서 보는지. 왜 인간은 이원적으로 나뉘어서 보는가는 기호학에서 보는 구조주의적 인간의 인식체계임. 저자는 국문학에서 이를 연구했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나뉘어진 구조 속에서 국제정치에서 들어오는 것이 일상적 수준에서 언어화된 것을 분석하는 것. 이 분석은 지금 이야기하는 것처럼 nation-state nation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는 19세기 초에 모두 겪었던 것임. 대신 구조가 일상언어에 파고든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렇게 만들어진 국민들의 인식세계가 전략에도 영향을 미치게 됨. 우리는 구조-개념 쪽에만 매몰된 측면이 있어서 그러함. 일반인들이 인식하는 동아시아 질서사 등에도 함의가 있음. Top-down보다는 bottom-up으로 보는 언어적 문제를 다룸

 

마상윤: 여기도 완전히 bottom-up이 아님.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지식인들의 말, 글 중심을 다루고, 더 내려가면 일반인들이 어떻게 보았을까 의문 제기. 그 당시에 여론조사 등도 없었기 때문에 방법론적으로는 문제가 있을 수도 있음.

 

윤비: 중세, 르네상스를 보면 제일의 문제가 그것임. 서양의 제국개념을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가? 로마법, 유명한 사람들이 쓴 글들을 추하다가 어느 순간 일반인들은 무엇이라고 했을까가 아날학파가 가지는 문제. 그러나 르보프, 망탈리테를 정말 연구한 것인가? 멘탈리티를 전복술, 점성술 등을 다뤘을 뿐이고 텍스트는 지식인들 것을 가져와서 멘탈리티 역사가 아님.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한 말과 사적으로 한 말이 다름. 마키아밸리가 처음으로 공격적 국가이성의 언어를 말했다고 하지만 13,14세기 정치인들이 점잖게 글 쓴 저자들이 뒤에서 다른 말 했을 수도 있음. 이 이야기들은 지식인들의 이야기인데, 한편으로는 formal하고, 지식의 정교한 지식적 생산을 목표로 하지 않는, 일반인들의 diffuse되지 않은 것. 어떤 메타포를 써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보는 개념적, 이론적 인식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임. 오래 역사학자들이 한 작업. 남에게 보여줄 것을 의식하지 않고 쓴 글을 찾아야 하는데 15-16세기부터는 ego document들이 상당히 발견됨. 적어도 앞의 말과 뒤의 말이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러한 작업들이 있음. 개념사에 대한 작업은 아닌 것은 알지만 아쉬운 것은 diffuse한 담론의 유통을 연구할 때도 연구자들이 이미 개념적 모델을 가지고 보는데 우리가 가진 개념사적 모델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봐야 함.

 

하영선: 내가 지도교수였으면 논문이 안 끝났을 것 같은 생각. 일독하면서 연민과 자기반성의 느낌 지도를 해줄 만한 학생의 느낌인데 지도가 안 된 것은 네이션 서사 부분에서 사회과학적 관점보다 더 넓은 것이 들어오는 것은 있음. 지도교수가 지적해줬어야 하는 것은 이 사람이 한국의 네이션 서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본인이 만들고 있구나. 그러나 본인이 의식하고 있지 못함.쓰는 것은 만든 것을 만들어서 보여줄 수 밖에 없긴 하지만 만드는 방향, 얼마나 조심스럽게 만드는가가 중요함. 서사를 만드는 것을 굉장히 선택적으로 만드는 것을 보면서 저자가 결국 한국 근현대사를 어떤 시각에서 보는 것인가 생각. 국문학이나 한국사 연구자들의 연구를 통해 원래 텍스트 보다는 2차 연구를 봄. 본인은 스스로가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음. 국내에서 사학계, 사회과학계, 국문학 쪽에서 1945년 이후 현대사를 다루는 경우에도 정통주의, 수정주의, 뉴라이트, 뉴레프트적 시각으로 갈리는데, 각자 top story나 서사 그 틀에서 텍스트들을 고르고 재해석하는 방향이 있음. 글 전체적으로 그러한 스펙트럼에서 보면 소프트한 뉴레프트적인 시각이 있고, 그 시각에서 텍스트를 선택하고 해석하고 있는 모습으로 이것이 우리 1945년 이후의 서사였다고 서술하는 한계가 있음. 그러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쓰는 부분이 부족.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서사들을 재구성해서 드러내주어야 하는가? 사학계 등 각각의 자기고민이 있었어야 하지 않은가. 그 한계 때문에 여기서 뽑힌 글은 1960년대에서 끊어짐. 그 시기 속에서 느끼는 분위기의 경우에 가령 미국 비행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 결국 죽긴 다 죽었던 것 아닌가.  사족을 붙이고 있음. 전통적 스토리에는 사족이 메인이 되고, 다른 데에서는 메인이 사족이 되는 자기제약적인 텍스트를 가지고 작업을 하면 이를 조심스럽게 자기반성을 하면서 복원했어야 한다. 전략적으로 리딩, 복원을 하기 위해서는 이 사람도 뒤에 자기반성을 하듯이 텍스트만 할 것이 아니라 저자의 친구들, 컨텍스트를 보았어야 한다. 텍스트를 입체적으로 분석을 했으면 그 서사는 더 웅장한 서사의 모습으로 재현될 부분이 있었을 텐데.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도 같은 경험으로 19세기를 건드렸을 때, 서유견문을 읽고 1880년대를, 독립신문을 읽고 1990년대를 들여다보았고, 내가 완전히 만들어내는 역사였음. 반성을 해서 아무리 근대적 시각이 필요하다고 해서 문명개화적 시각을 읽지만 반대쪽의 텍스트도 읽었어야 함. 이 책에서도 긴 시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연민의 시각으로 봄. 그런데 정용화 박사의 논문으로 서유견문을 대체하고 있음. “유길준이 서울에 와서 4년 동안 저술한 서유견문이라고 함. 사실은 연금된 상태에서 마지막 2년 동안 쓴 것이 서유견문임. 또 선택한 텍스트들에서 가장 많이 집중한 것이 사상계인데 그것만으로 1950년대, 1960년대가 그대로 복원되는가? 나도 독립신문 보고 1890년대 복원제대로 안 되었음. 텍스트의 범주를 넓힌 것은 박사학위 논문 자체로 환영되어야 하는 부분이지만 국문학과 지도교수가 하지 못하는 것들로서 사회과학자들이 좋은 시도이지만 더 가야한다고 해주어야 함. 선택의 범주도 넓혀져야 하고 국내 글만이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봐야 함. 해방정국 3년을 보아도 그 당시의 미국은 상당히 복잡한 시각임. 같은 남로당에서도 박헌영의 포지션이 남로당의 모든 포지션이 아니었음. 그러한 시각을 어느 것으로 만들어줘야 하는가, 어떤 기억을 버리고 어떤 기억을 되살려줘야 하는가. 기억도 미래를 위한 창조부분이 있기 때문에 내가 만들면 나의 bias로 만들 것임. 미국에 대한 picture가 상반된 것 두 사이에 중간에 끼워져 있었다고 한다면, 21세기에 필요한 것은 다양성을 보여줘야 하지 않는가? 탈식민을 해서 바로 냉전시대, 일본의 영향력도 굉장히 지속됨. 박정희 대통령도 일본을 살았기 때문에. 일본식에서 미국식으로 벗어난 것도. 1950년대에도 미국만 원죄를 지는 것이 아니라 일본도 있었음. 국내학계도 미국유학에서 돌아오기 이전에는 일본 영향권 하에서 진행되었던 것 아닌가. 텍스트를 조심스럽게 다 보진 못해도 조심스러운 복원이 필요. 1차적 작업은 박사학위의 포텐셜이 있는데, 국문학과 지도보다 다른 학과의 지도가 필요하고, 지도가 없으면 이런 시각에서 계속 리서치가 될 것임. 2010, 2020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런 연구가 한국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지, 더 중요해질 것인가 점점 빛을 잃을 것 인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아메리카로 부를 수 밖에 없는 것이 있었을 텐데 저자는 왜 자신이 아메리카로 불러야 하는지 별로 고민하지 않고 붙인 듯. 1948 - 1950년은 남한, 이후에는 한국으로 쓰는 것이 옳은데 1960년대에도 남한으로 씀.

 

스펙트럼이 너무 좁게 한계 지워진 부분. 조심스럽게 텍스트를 다루려고 하면 2차 문헌, 석사학위 논문으로 아시아주의처리하기 보다는 다르게 해야 함. 사후적으로 아시아주의가 중요해서 그렇지 1950년대 당시는 반둥에서 회의를 하는 줄도 몰랐음. 그게 저자 자신이 만든다는 의식을 갖고 조심스러운 작업이 필요. 2차적으로는 미래지향적인, 생산적인 부분이 있지 않는가. 나도 고고학, 금석학, 경학을 합쳐서 시대복원하려고 하는 것. 고대사만이 아니라 현대사도 그러 함. 현대사의 고고학, 금석학, 경학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 텍스트를 좁게 파악했더라도 복원의 작업은 조심스러운 작업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송지예: 네이션 서사가 아니라 미국을 통한 네이션 서사. 방법이 내용을 결정하기도 하는 부분이 있는 듯. 이분이 본 것은 서양/동양, 아메리카/동양의 이분법 틀에서 텍스트 선정이 편향성을 가질 수 있는 부분. 직감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네이션 서사가 이루어졌겠구나 이해는 되는데, 다른 텍스트 선정 어떻게 되었어야 했나? 일본, 중국도 보고. 민족주의 서사가 일본에 대비되는 것이기도 했다면, 혹시 일본을 벗어나기 보다는 미국이 제 3자적인 입장에서 등장했기 때문에 다른 서사도 있지 않았을까? 방법적으로 텍스트 선정의 고민이 있을 듯.

 

하영선: 아메리카 서사, 미국 서사, 중간 서사도 있었을 것임. 이를 아메리카라고 서사하는 쪽은 왜 그런 서사를 했는지. Presentism의 문제. 현재적 관점에서는 그 당시에 나쁜 아이였고, 맹목적으로 미국에 목을 맨 사람인데 그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 그러한 류의 소설들을 쓰고 있었고, 또 반대의 소설을 쓴 사람은 어떻게 쓰고 있었는가. 선정 자체도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고, 선택을 했어도 그 해석은 여러 복잡한 문제인데 입체적으로 조명해주었으면 좋겠다. 분단의 문제도 걸려있음. Democracy America에 대해 토크빌은 미국을 다녀와서 미국의 서사를 전해줌. 1950년대의 미국을 어떻게 바라다본 것인가? 어떤 민족서사로서 미국을 이야기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고민한 복잡한 문제가 놓여있지 않은가.

 

권민주: 제가 쓴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 보게 됨. 1950년대 미국을 대상으로 한 자기표상을 주제로 잡은 저자에게 이런 류의 코멘트가 적절한지. 두 가지가 제 생각과 맞음. 발제하실 때 동양/아시아를 등치시켜서 이해할 수 있는가와 윤비 선생님의 말씀 중에서 지식인의 말, 앞에서 하는 말과 뒤의 말이 다를 수 있는데 이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대동아 전쟁 시기, 1930년대 공개적 언술로서 동양의 해방 직전에 지식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가. 1950년대 초점을 둔 저자에게는 잘 안 맞을 수도 잇지만 식민지 기간, 해방 후의 아시아 개념임. 누구의 개념으로 잡을 것인지, 민족주의 우파에서 잡을 거인지? 당시 공개적 언술이 제한된 시기였음. 저자의 앞의 해석의 틀은 탈식민주의적 해석의 프레임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식민지에는 제국 일본의 표상이 있었는데 해방 이후 전환, 삭제되면서 미국이 아시아 대응된 대상이었음을 극적인 것으로 보여주고 싶어서 일본, 내부 아시아로 벗어나게 한 듯. 1920-30년대 중 후반 동방 개념이 많이 나옴. 동방 개념은 백인 인종, 유색인종에 대응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인종 대응하는 공간사고도 있었고, 동양을 이야기 할 때도 일본이 동양의 주체가 아니라 일본이 중심이 되지 않은 동양, 동방에 대한 언설도 있었는고, 아시아와는 다른 차이도 있었는데. 결국 식민지 시기를 일원화해서 특정시기, 특정 글로 동양의 시각을 제한시켜서 보지 않나. 이후 동양과 아프리카가 실천적 차원에서 묶이는 부분이 있는데, 식민지 시기 이전의 부분을 소환시켜서 봄. 195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부분도 있지만 중국/인도의 소환이 아니라 서사를 소환해 내는 부분이 있음. 또한 1950년대 서사를 보여주기 위해선 앞의 네이션 서사의 부분을 보여줘야 되지 않을까

 

윤비: 정말 대한민국에 민족이 있나? 어느 순간에 우리도 서양과 같은 민족/국가가 있고, 이식되었다는 이야기를 함. 근본적으로는 서양과 같은 민족/국가가 있었다는 전제가 그 자체가 편견이 아닌가? 어떤 집단들을 국제정치집단의 주체로 인정할 것인가? 19세기 독일의 경우와 같이 우리도 그런 점에서 근대에 진입한 시기이다. 독일은 문화민족임. 우리도 어느 순간부터 그런, 근대국가, 민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익숙한 것 아닌가? 서양의 유형과 유사하다고 가정하는 것 아닌가? 서양인들의 entity, 민족과는 동양의 것은 다르다고 판단 가능. 이 질문을 던져봐야 책의 질문의 근본을 다시 물어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민족이 있냐고 물으면 전부 있다는 대답을 한다. 만들어졌다면? 누가?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의 질문으로 감.

 

이헌미: 언어적 전회. 전파모임도 우리가 국제정치이론을 하는데 우리 역사와 접하게 되어 우리의 사례를 보려고 함. 이론과 역사는 겉도는 부분이 있다. 민족의 사상사, 민족주의의 계보학을 알고 싶다, 이를 다시 쓰려고 하는데 우리는 민족을 구성하는 말 보따리는 관련된 개념군과 어휘군을 잘 만들어내지를 못하는 듯. 이를 전제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가지고 들어가는데, 갖고 들어갈 때도 1945년 이전의 민족도 국제정치적인 제약 속에서 항상 수입해야 하고, 따라가야 하고, 한민족의 피지배자로서의 지위가 민족사, 민족사상사를 제약하는 요소임. 이렇게 생각하면 1945년 이후, 중립화 통일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인용된 텍스트 중 중립화 통일, 평화통일론이 제기되었을 때 냉전구조가 우리 민족을 둘로 나뉘고 통일을 저해한다라는 논의가 있었음. 우리 민족주의사를 쓰려면 그런 이야기들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는 것. 아메리카, 애국심 등의 말보따리를 가지고 오기 보다는. 애초에.

 

마상윤: 1950, 1960년대 미국에 대한 대중적인 글들을 읽고 싶다고 함. 국제정치학자가 해야 할 일을 국문학자에게 혼내는 것은 마땅치 않은 듯. 1급의 연구가 되려면 지적한 사항이 반영되어야 하지만 모든 학자, 자기가 서있는 집안에서 연구활동 수행. 국문학사로서 분명히 접근 했고, 국제정치학에서 대표적인 연구나 연구서에 빌려서 하기는 어려웠을 듯

 

윤비: 기존의 개념 틀을 해체하고 positivistic하게 갔어야 함. 그러나 선험적인 가정이 너무 작용했다는 느낌. 이전에 <제국>이라는 글 번역한 적이 있었는데 우리는 민족국가적으로 너무 치우쳐져서 제국에 비판적이어서 제국이 자체적 생리를 가짐을 이해 못함. 미국 제국의 진행과정을 이해 못하고 민족국가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원 제국, 명 제국, 미국 제국을 다 번역하고 있는데, 번역 했을 때 제국이라는 empire라는 이름을 갖는 것 이외에 같은 카테고리라는 증거가 있나? 우리는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유사성을 가진 실체가 있지만 역사적으로 해부하면 같지 않다는 것. 심지어 비판적, 수정주의적 작업부터도 서양에서 가져온 틀 다 버리고 positivisitic하게 갈 수 있지 않았을까??

 

이헌미: 인식의 틀, 이름없이 가능한가?

 

윤비: 전문학자라면 이름의 틀, 자기 자신에 대한 distant 가질 필요는 있음. 장단점을 알 필요는 있음. 남의 이론 가져오지 말고. positivistic. selective하게 엮은 부분이 있음. 유사하게 쓰인 책들은 비슷한 argument들이 나옴. 한 번쯤 뛰어 넘었더라면? 필요한 원전들을 더 많이, 다양하게 읽으면 됨

 

송지예: 이분법적인 시각을 없애면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하나? 그 틀이 있어야 하는데?

 

윤비: 클리포트 기어츠라는 인류학자의 이야기는 어떻게, 서양인의 정신구조의 침해가 가능할까임.  Thick decription을 통해 가능하다고 함. 많이 서술하다 보면 어느 순간의 층위가 나타나는 것. 모든 인간들이 필요한 시각,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만 얼마나 neutral하게 가져 많은 사람과 소통 가능하게 쓰는가. 다양한 글들에게 두텁게 decription하다 보면 새롭게 해석할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까.

 

이헌미: 이론적으로 너무 옳지만 과거 한국 사료들을 본다면 그러한 고강도 퀄리티의 작업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연구자 개인으로 환원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하영선: 그게 그렇게 고강도는 아닐 듯. 1950년대 살아간 사람이 시장에 있는 사람이나 학자나 지식인이나 우리가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상황에서 글, 말을 나누고 있었을 것. 어차피 만들긴 하지만 내가 이것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만드는 것나는 만드는 것이 아니고 쓰는 것이다라고 할 때는 굉장한 편차가 있음. 1950년대 글쓰기, 말하기는 그 사람들이 가장 걱정한 것은 아마도 반공이었을 듯. 오늘날에는 이렇게 반공이 첫 번째의 자기검열의 창이라는 것이 아님. 이야기, 말하기의 기본적 프레임워크였다는 것을 알기 어려움. 1950년대 미국을 이야기하는 것도 굉장히 다른 상황이었을 것이라는 의식, 그 의식이 충분치 않았다는 것임. 김수영의 시를 길게 인용하고 있음. 우리가 바로 글쓰기 하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하는 의식을 저자는 없음. 김수영, 김지하, 서정주의 시를 읽었는데 김수영의 시는 독특한 상황 속에서 읽은 것. 분단의 아픔, 박정희 체제 속의 딜레마 속에서 암묵적인 signal을 교환하면서 이심전심으로 와 닿는 상황. 이를 이해해주려는 노력, 그 국제정치적 감각을 이야기하는 것임. 1950년대에 대한 국제정치학적 관점이 아니라, 힘의 분배의 상황에서 어떻고 등등. 시정의 사람은 그냥 아메리카도 아니고 미국이었음. 1950년대의 <사상계>를 읽는 것도 독특한 지식인이었음. 사상계를 독해한 것은 가상함. 사상계 지식인들의 애환까지는 가야, 사상계에 드러난 독특한 미국의 글들이 깔렸는지의

 

손열: 아메리카라는 말을 접할 때부터 일본 쪽의 discourse가 강했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일본의 정체성은 동/서 이항대립 속에서 이해했던 것은 정설이고 이를 통해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는데, 1950년대 한국 네이션 서사를 이야기할 때는 동/서로 놓고 서를 미국으로 등치시키고 동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동양과 아시아에서 자기 picture가 어떻게 들어가는지. 일본도 서를 저쪽에 두고 서를 반대로 나의 정체성 구성, 동양 내에서 자기 위치. 한국도 안 쪽에서 복잡한 부분이 있었는데 일본이 보았던 것을 그 프리즘을 가져와서 씀 이도 presentism의 문제가 있음.

 

마상윤: 드라마틱하게 한국과 미국이 만났다는 것을 보여준 것은 의미가 있음. 저자가 보는 것은 현재에서 보기 어려운 먼 것에 준거점을 두고 역사 해석. 못마땅한 부분이 있지만 탈식민주의가 나오는 파트는 다 읽어본 후에야 처음의 문제의식이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동양/서양의 대립이라는 틀은 본인이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을 꺼낸 측면이 있음.

 

손열: 지도 재미있었음. 실제 지도는 태평양은 일본이 다 가리고 있는데, 규수, 일본을 돌려놓고 한국이 태평양과 만남. 우리 입장에서 미국과 일대일로 만난다고 봄. 일본은 지리적으로 나와있지만 전략적으로도 일본이 가리고 있음. 필자는 이 파트에서 일본이 담론에 깊게 들어와 있었다가 1950년대 밀어내고자 했던 것을 설명하고자 했는데 그 파트가 잘 안 됨

 

마상윤: 당시 이승만 정부. 정책 상황과 매치시킬 필요도 있음. 아쉬운 부분. 이승만 정부가 생각하던 것과 모윤숙이 이야기하던 것이 조응하던 부분이 있음. 당시 이승만이 반공은 한국인데, 일본만 중시하고 한국은 왜 서자로 취급하는가 불만이 있었음. 이승만이 쓰진 않았지만 서사, 에세이로 드러난 부분을 본 것은 의미 있음. 안 맞는 부분도 있음. 박정희의 국가혁명관에는 분단, 미국책임론 나옴. 여기선 박정희가 이야기한 것도 있음. 현실정책적 차원과 연관 시킬 수 있는 사고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도움이 된 것. 미국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서 너가지로 저자가 나눔. 나라면 누구 편을 들었을까? 김동리, 선우휘 등. 나는 누구 식으로 받아들일까? 나는 누구 입장에서 썼는가? 개인적으로는 선우휘의 입장과 비슷하다는 생각. 저자 스스로는 여러 미국관에 대해 어느 손도 들어주지 않고 있음. 탈식민주의적 연대의 꿈이 사라졌다고 써서 조금 맥빠지는 부분이 있음.

 

하영선: 잡은 뒤에는 반추가 필요. 잡으면 선우휘 식으로 갔는데, 테러리스트, 불꽃 때문에 당시에 굉장히 인기가 있었음. 1960년대 선우휘가 변절. 초청한 자리에서 청춘에 불태우고 테러리스트 꿈꾸지 말고 세상을 넓게 살아라 라고 함. 주체측은 난감..이게 어떤 사연이 있었을 것. 어떤 형태로든 그 냄새를 글 속에서 맡을 수 있어야 함.

 

강상규: 제목을 보니까 상상된 아메리카의 이야기를 세계적 맥락에서 이야기하는 줄 알았는데 부제와 함께 보고 알았다. 해방 이후의 한국 네이션 서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아메리카가 상상된 기준, 표상으로 작동했는가. 이를 이야기해서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들으니까 ‘1950년대연구의 붐이 있다고 함. 좀 더 자기생각이 정립되었다면 아메리카, 왜 미국이 아니라 아메리카인지. 그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테마인 듯 한데 대충 넘어간 듯. 그러면 탑을 만든 것이 위험할 듯. 나는 아메리카라고 하면 AFA. American First Agency. 미국과의 관계는 19세기부터 이어지는 내용인데, 결국은 상상된 아메리카라는 제목붙이기가 가지는 단순화될 소지가 있음. 어떻게 실체로서의 아시아보다 표상으로서의 미국이 우리 속에서 논의되었는지, 마치 필요에 따라 아메리카의 거울을 심미적 동양, 정체된 한국에 대비되는 것. 역방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문학적인 차원에서 끄집어 내 이야기한 것은 중요한 부분이긴 한 데 그런 중요한 부분들을 자칫 이런 논의가 나온 후, 마치 기존에 보여주지 못했던 부분을 보여줬다는 생각에 자족적 작업으로 끝날 소지가 있음.

 

윤비: 책 제목을 보면 알 수 있음. Imagined community. 포스트 모던 문학비평은 최근 나는 타자를 통해 형성된다. 나는 상상된 타자를 통해 나를 보겠다고 함. 자신의 위치가 잘 드러남. 아메리카의 제목을 굳이 집어넣은 이유, 우리에게 익숙한 미국보다는 아메리카의 이름으로서 낯설게보기를 한 듯. 굉장히 슬라보예, 지젝 등 프랑스 탈구조주의의 이야기에 예민한 것 아닌가. 이분 글을, 자기의 글을 distance를 둔 description으로 보지 않음. 자기 글이 취하는 담론적 위치, 글이 하나의 담론임. criticism의 모토와 같이. 푸코적 글쓰기임. 과학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성을 가짐. 사회과학에서 지적을 해도 잘 안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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