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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준, 션즈화 저 <마오쩌둥, 스탈린과 조선전쟁>(12.12.16)
 

2013-01-23 
일시: 2012년 12월 16일 3시
장소: 수지 세계정치연구소
참석자: 하영선, 조동준, 손열, 윤비, 전재성, 이원덕, 니시노 준야(게이오대 법학부), 송지예, 용채영, 옥창준

발제: 조동준, 션즈화(최만원 역). 2010. 『마오쩌둥, 스탈린과 조선전쟁』(서울: 선인)

<발제>

*발제문 8페이지에 션즈화는 중소동맹의 변화, 중국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 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전쟁 연구. 중국, 소련의 많은 사료 검토, 중국지도자들의 생각과 결정사항 검토. 그의 생각은 고전적 현실주의와 유사하다. 이념보다는 국가의 이익 강조, 안보 측면에서 소련의 행동 설명. 중국도 이에 마찬가지도 대응하는 형태. 중국과 동아시아의 관계에서 설명하고 미소 양극체제와 연결시키지 않음. 즉 종합적으로는 한국전쟁의 원인을 중소동맹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점은 이 책이 중소동맹과 한국전쟁의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명확하게 보여주는가? 중국이 러시아에 대해 가진 의구심, 역사적 관계 속에서 엮인 의구심이 서술에 드러나 있다. 또한 중소의 역사적 갈등관계 속에서 이 책의 저자, 중국인 저자를 염두할 필요가 있음.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시각. 전통주의, 수정주의 등 분류. 공산권의 나름의 전통주의b는 미국 제국주의의 확장 과정으로 설명. 미국 제국주의에 부합하는 한국의 전쟁 도발, 이 대응과정에서 발발했다. 저자는 글의 시작의 문제제기에서 자신이 전쟁에 대해 국가로부터 교육받은 상황과 다르다고 지적. 왜 한국군이 패주를 했는가가 의문 사항. 전통주의 시각과 반대하면서 진실을 찾기.
*전통주의 B. 탈수정주의. Post-탈수정주의. 미소 국제체제의 경쟁, 한반도의 내적갈등을 만들었다. 국제전, 국내전의 의미가 없다. Post-탈수정주의까지 가면 한국, 북한의 연구자료가 필요함. 시각별로 부합하는 사료 등이 있음. 서방측의 자료 공개, 소련과 중국 사료에 기반했는지 비어있는 한 공간을 찾기. 중소관계변화가 가장 큰 유인.
*2차 대전 후 소련의 대외정책 목표 변화에서 (1) 평화공존, (2) 세계혁명, (3) 국가의 안전과 이익으로 요약. (3)이 가장 중요. 한반도에서 냉전의 시작을 소련의 관점에서 미국, 유럽의 변화의 종속변수의 측면으로 봄. 북한, 한반도를 위성국으로 보고자 하는 생각 없었음. 김일성이 소련과 긴밀한 관계 요청한 반면 스탈린은 냉대.
*소련의 중국정책은 중국 공산당과의 갈등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음. 중소 우호조약은 중국 국민당과 소련 관계의 갈등 조짐이 있었음. 만주를 누가 장악하는가의 문제. 소련은 여순, 대련, 장춘철도 세 가지를 원함.
*소련의 ‘이중 정책’은 1) 홍군을 활용해서 만주에서 미국 영향력 침투 막기가 목표였음. 전반적 시간 추이에서 볼 때 소련의 확실한 파트너였던 국민당 정부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홍군으로 파트너 축이 이동하는 점. 2) 중국 국민당 정부와 협의하여 얄타협정으로 얻는 이권 유지.
*중소동맹
미국이 중국문제 개입, 소련의 이권 획득을 막으려고 했다. 핵심쟁점에 관한 중, 소의 입장차이가 있음. 쟁점 A는 몽골, 쟁점 B는 신장, 쟁점 C는 소련의 중국 공산당 정권 지원. 쟁점 C가 가장 중요. 중소 동맹으로 인해 소련이 여순, 대련의 통제 불가. 소련에게는 태평양 진출을 위한 출구 필요. 여기서 의문점. 소련이 블라디보스톡을 장악한 상화에서 부산항, 인천항의 전략적 가치가 얼마나 있었을까?
*한국전쟁 개전
5월 소련의 입장 변화는 1월 30일로 연결. ‘국제정세의 변화’가 무엇인가? 준비할 때 도와줄 의사가 있었다. 이 입장으로 스탈린 만남, 김일성이 허락 받고 모택동에게 허락 받고. 뭐가 국제정세의 변화인가? 기존연구에서는 1949 국공내전 종결, 소련의 핵개발, 미국의 강경정책+애치슨 라인. 션즈화는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원인으로 꼽음. 소련의 태평양 진출 욕구는 상수임. 진출좌절 과정 → 부산, 원산 필요하다 → 중소동맹조약이 있다. 중국이 대련, 여순을 계속 러시아가 사용하게 해줄 것. 남침 실패하면 미국이 국경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기 때문에 중국도 안보위협 느껴서 여순, 대련으로 갈 것이다. 이 부분이 핵심주장인 부분이나 션즈화가 제시하는 직접적 사료 없음.
*중국이 언제 개입했는가? 소련의 압박보다는 중국의 자체 판단으로 개입했다. 연결고리는 미국이 개입을 매우 빠르게 함, 김일성, 스탈린도 예상하지 못하게. 스탈린은 두 가지 전략적 목적. 가능한 한반도 통일, 소련의 개입 증거 배제.
통상적으로는 10월 2일 참전 결정했다고 보나, 션즈화는 그 이전으로 봄. 소련의 공개 전문, 중국의 공개 전문을 보면 소련에게 보낸 전보는 이미 파병 결정 한 것이 있음. 하지만 소련 전문엔 파병 연기. 어느 시점이 맞나? 소련은 주저하는 중국을 압박해서 중국이 들어왔다는 것이 1960년대의 공식 주장. 양측의 주장을 보여주는 중요 사료임. 중국이 전문 준비한 것을 안 보냈다. 즉 파병 결정이 안 이뤄진 게 아님.
*파별병결정의 핵심 사항은 소련 공군의 엄호 상황. 10월 14일이 정확히 파병 결정 시점. 사실 그게 중요했나? 소련과 중국 사이에 소련의 공중 급유기 지원을 둔 갈등이 전쟁하면서 다 해소되었다라고 하는 그런 션즈화의 해석. 소련은 가능한 전쟁을 질질 끌어서 중국 약화시키고자 했고, 소련이 공산주의 지도자 되고자 했다. 김일성, 모택동은 전쟁에서 빠지려고 했다. 그러나 전쟁의 종결 파트에서는 중소가 합작해서 이룬 것이다. 중소 간 전시협력의 복원 과정은 10월 14일 파병 결정임.
*총평: 재미있었는데 몇 가지 의심스러움. 중국적 세계관에 기반, 나름의 가설 제시. 가설은 여순과 대련을 상실한 것이 결정적이었고, 한반도 진출의 기본 배경이었다는 것. 하지만 중소 관계의 진행에서 전시협력은 과연 그렇게 지속되었을까? 의문.

<토론>

김상배: 2003년 중국에서 출판된 계기는? 중국의 공식 입장은 전통주의-b였음. 저자는 중국당국이 허가 했다고 봄. 중국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출판 가능한 것 아니었나?

1950년 5월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제의를 허락했다는 사료가 나와서인가?

하영선: 2003년 본토발행의 계기는? 우드로 윌슨센터의 한국전쟁 연구에서 션즈화가 참여한 적.
세계 냉전 연구는 우드로 윌슨, LSE, Harvard, 조지 워싱턴에서 주도적이었는데 상해 화동사범대학이 세계 5대 냉전연구소 중 하나가 됨. 션즈화는 결국 중국 냉전연구를 장악.
1950년 12월 16일 마오가 모스크바로 떠남. 1월 30일에 스탈린이 생각을 바꾸는 과정이 있었고, 4월 김일성을 만나는 과정에서 중국이 어떤 위치에 있었나? 사실 이는 1994년 정도에 알려졌고, 2000년대에는 이미 아는 사실. 중국의 최근 냉전연구의 리뷰를 우드로 윌슨 센터에서 2012년판을 재 발행 . 저자인 Yafeng Xia인 롱 아일랜드 대학 교수가 쓴 The Journal of Cold War Studies의 2008년 리뷰 를 보면, 그 때의 냉전연구가 더 자유로웠던 느낌. 2012년 연구주제를 보면 중국의 중요한 냉전 연구의 초점은 냉전 경제사와 미국의 생화학 무기 사용. 일정부분 여전히 냉전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미국 비판의 요소를 가진 연구들이 있음. 그에 비해 2008년 리뷰에서는 잘 정리됨. 그리고 중국의 냉전 연구에서는 일정한 스타인데 왜 한국은 냉전 5대 연구에 없을까?  

조동준: 왜 커밍스 언급은 한번도 없는가? 내적갈등이 중요하다고 보는 탈수정주의자들 등의 이야기는 거의 없음. 이 사람이 보기에 그것은 정말 중요하지 않았는가? 중국 내 의사결정의 흐름을 따라가는 모습은 가장 재미있고 설득력 있었다. 정말 중국과 여순 간의 관계가 큰 것?

중국의 참전에서 미국의 핵무기에 대한 인식? 미국 내에서는 알 고어 아버지가 전술적 차원에서 방사능 핵 벨트 설치 주장 등이 있었다. 이에 대해 중국의 모택동의 발언은 ‘미국의 핵무기는 종이 호랑이다’라고 함. 중국은 참전 시 인민해방군에 대해 조사하고, 인민 해방군의 지원은 물질적 능력과 동시에 정신적으로 선동의 차원이 있었다. 내적으로 군, 국민을 사용으로 한 의사소통의 과정에서 참전 결정이 이루어짐. 소련과의 관계 속에서 마오쩌둥의 결정도 대내적 지지의 과정이 있었을 텐데, 이 책에서는 ‘소련의 핵보유로 인해 미국이 핵을 못 쏠 것이다’라는 것을 강조.  

하영선: 책 전체에서 아까 말한 국제정치적으로 변화했다(‘changed international politics’)는 부분을 설명할 때, 하루하루 체크하면서 션즈화의 기여한 부분이 어디냐? 1950년 5월 13일의 분위기는? 김일성이 사실은 4월 8일부터 4월 25일 러시아 갔던 것. 러시아 문서에서 커밍스는 부인함. 여기서 O.K 받고 스탈린은 김일성을 타일러서 마오에게 간 것. 6시간 동안 토론하는데 마오와 김일성의 분위기가 어땠나? 마오 - 김일성 - 스탈린의 삼각관계에서 세 사람의 상호 관련이 무엇인가? 중국 사료와 션즈화의 공은 러시아 문서 정리 작업임. 션즈화까지 포함하면 결국 표정은 어떠한가? 마오는 기분이 안 좋았고,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이미 O.K를 받았으므로 마오에게 또 가는 것이 싫음. 마오는 뒷거래 이루어지는 것,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O.K 해준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싫음. 소련 대사관에 가서 합의 내용을 요구했고, 그 다음날 이야기 한 게 ‘변화된 국제 상황’이라고 이야기. 한국의 국제정치로 보기에 스탈린에게 무엇이 바뀐 것인가? 스탈린, 김일성, 마오의 핵심이익은? 션즈화의 책이 쓴 시점에 스탠포드에서는 러시아, 미국, 중국학자들이 공조해서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1995) 발간. 소련과 중국이 상당히 긴밀한 동맹 속에 북한을 데리고 전쟁을 치뤘다고 생각 했을 텐데, 사실은 둘 사이의 긴장과 협력 관계에서 봄. 쐐기 이론(wedge theory)에 따르면 소련은 중국의 견제를 위해서 결정했다는 것으로, 중국이 대만을 해방시키면 중미 관계가 개선될 것이므로 차라리 김일성에게 해방전쟁을 시키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 스탈린의 판단이었다는 것. 소련과 중국관계가 편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션즈화와 비슷함. 애치슨 선언 후 마오가 12월 16일 스탈린의 생일에 갔는데 잘 안 만나줘서 마오가 기분 나빴음. 결국 동맹을 맺어 주고, 직접 마오에게는 이야기 안하고 김일성에게 오라고 한 변화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소련 외교정책의 3대 목표는 안보에 초점을 맞춘 국가이익, 평화공존, 세계혁명이다. 소련의 핵실험 이후 미국과의 핵경쟁에서 제한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지만, 미국과의 전면적 핵대결은 불가능했다. 애치슨 선언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약간 뒤로 빠지는 느낌이 있었고, 소련이 중국이 커지는 것에 대해선 동맹을 맺되 일정하게 컨트롤 하려는 생각. 동맹은 체결하되, 역설적으로는 중국의 대만 해방을 백업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해방의 ‘전쟁’을 허락. 중국이 동의 못하도록. 만약 한반도에 미국이 개입 안하고 해방전쟁이 진행된다면, 중국이 마오의 손에 갈 경우엔 소련은 자기 세력권 장악에 북 포함이 중요했다. 따라서 스탈린의 복잡한 계산이 있었다.

1월 17일 스피코프가 김일성이 중국에 오고 싶다는 말 전달하였고, 중국은 1월 30일 오라고 하는데 그 때 마오의 입장은? 션즈화의 객관적 설명력이 있다. 앞 부분, 마오가 모스크바에 있었을 때의 정황 등. 소련의 판단, 김일성, 마오, 미국에 대한 판단? 중국은 당시 전쟁 안 해도 되는데 왜 들어갔나? 이는 한국전쟁 전문가보다는 국제정치학, 이론 파트가 해야 한다.

조동준: Coldest Winter의 저자는 션즈화의 연구결과를 많이 인용하고 있음. 중소동맹을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해 스탈린은 믿을 수 없었다고 이야기 함. 마오도 스탈린 믿을 수 없었음. 동맹 이론에서 본다면 이미 동아시아의 파트너로 신뢰할 수 없었고, 따라서 북한으로 갔다는 느낌. 오히려 중소 회담, 중소 조약에 너무 초점을 두기 보다는 스탈린이 모택동을 봤을 때 느낌? 그리고 모택동이 어디로 갔는지?

하영선: 12월 16일 모스크바에 가서 2월에 나옴. 60일 동안 상호 간 동맹과 경제원조를 요청. 마오가 구걸해도 당당하게 구걸하고 싶어 함, 스탈린은 대해주지 않았고 마오는 기분 안 좋음. 그 60일의 복원이 필요.

조동준: 분명 스탈린은 마오를 제대로 대해주지 않음. 김일성도 마찬가지. 원조의 양이 너무 적음. 스탈린도 모택동 믿을 수 없다고 판단. ‘변화의 국제정세’의 측면에서 중요 한국은 주한미군 철수가 가장 중요했다고 보았는데 이 책에서는 나오지 않음.

하영선: ‘변화된 국제정세’를 우리가 정리하면 비중치는?

조동준: 파트너가 파트너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 아닌가? 핵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느낌. 주한미군 철수는?  

하영선: 역사적 전제조건 필요. 1949년 5월 김일성이 갔을 때 전쟁 할 생각 없다고 감. 1월 직전에 스탈린은 절대 안 된다. 그렇다면 핵심적으로 안 된다고 한 대표 원인? 첫 째, 미국 요인이 해결이 안되었다. 둘, 전쟁 준비가 불충분하다. 남반구의 게릴라나 내부적 문제 일으켜서 혁명을 일으켜야지 전쟁으로 안 된다. 1949년 9월에서 12월에 변화를 보는 프레임의 첫째는 미국 요인. 미소의 힘의 격차도 알고 있음. 두 개의 변화가 있었는데 소련의 핵실험과 애치슨 선언. 미국 개입 시 소련이 감당 못한다는 것은 변화 없다.
김일성이 요구할 때, 첫 째, 스탈린의 생각에는 상대적으로는 힘의 배분 개선된 느낌. 미국이 아시아에 대해 주춤한다면? 여전히 공개적으로는 싸울 수 없지만 점차 준비가되어 북한이 단기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길 수 있지 않나? 둘 째, 마오에 의해 중국이 통일되었을 경우에 소련의 안보나 동아시아 전체 관장해야 하는 입장이 중요 요소. 마지막으로 한반도. 이게 1949년도 오늘도 마찬가지의 대국 계산 방식일 수 밖에 없다.

1949년 4월 양자강. 아직도 완전히 중국의 파트너 불명확, ‘빨리 가면 미국이 개입한다’와 ‘미국이 발 빼니까 미국 개입 안 할 것 같다’의 논쟁. 1949년 6월 군사고문 빼고 철수 하고 사태 진전. 소련이 미국에 대해 얼마나 걱정했는가? 1949년 9월 당이 반응하여, 당이 내부적 검토로 최종 결정. 당의 공식문서로는 아직은 안 된다. 미국은 여전히 핵심 요인이고 전쟁으로는 안 된다. 따라서 그 이후의 내부 결정으로 봐야 함. 12월 24일 만난 후, 1월에 와서 스탈린이 마오를 오라고 함. 마오는 계속 모스크바에 이전부터 있었는데도 마오는 전혀 몰랐고 스탈린은 1월 30일에 통보. 김일성이 그 사이에 온다는 사실에 마오는 화남. 둘의 모종의 관계를 몰랐던 것

이론적으로 어떻게 프레임을 만드냐? 문서-이론 매치할 경우? 스탈린의 key는 미국이었고 중, 일 그리고 마지막 한반도로 그림이 나와야. 문서로 꼼꼼히 정리? 최근 사회경제적, 통계적으로 접근하는 시각이 있음. 그 세가지 요소가 중요하다면? 사회운동의 세력을 통계적으로 보고 해도 안 된다면, 결정적 변수에서 우리가 접근이 불가능하다. 마오와 스탈린의 대화를 션즈화가 보면? 김일성이 그 대화를 봤다면? 마오는 뭘 도와주냐? What can I help you? 스탈린에게 이미 다 받았는데 뭘 도와주냐? 마오의 입장에서는 (소련보다) 김일성이 더 간절함. 간신히 통일한 상황이었고 전쟁을 치룰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중국에게 한반도는 소련보다는 더 중요. 그 맥락이 한숨 쉬고 도와주냐 혹은 적극적 도움인가? 스탈린과의 만남에서 김일성이 본 한국은 어떠했는가? 이는 역사가들이 아니라 이론가들이 해서 봐야함. 만남의 전황, 앞뒤를 역사가들이 만들어줬으면 양쪽의 이익을 잘 설정해서 어떻게 치고 받았는지 보여줘야 함.

윤비: 유럽의 한국전쟁 연구에서는 특이하게 커밍스를 별로 안 봄. 사료는 별로 안 봐도 그 안에서의 perspective를 보는 법을 개발하려고 한다. 프레임 이론처럼, 어떤 프레임에 넣어서 보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오늘날의 의미가 무엇인가? 유럽은 이런 방식과는 다른 관심, 다르게 볼 것이라고 생각. 공산권 전통주의는 1980년대에는 수정주의였다. 한국전쟁을 더 구조적으로 봐야 하지 않나?

손열: 소련은 북한의 남침을 지지해서 통일 지원. 분단상황에 있는 북한 정권에 대해 소련이 영향력 행사하기에 분단 상황이 더 낳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도 전쟁을 지원해서 통일 한반도를 지원하는 상황에서 스탈린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의 차이는?

조동준: 제가 스탈린이었다면 북한은 언제든 통제 가능하다고 판단했을 듯. 그런데 스탈린에게 부동항 필요했고, 대련도 있는데. 원산까지? 미국과 대결할 수도 있었는데? 만주가 막혀서 여기로 왔다는 논리가 잘 이해되지 않음.  
이원덕: 소련이 북한에 대한 공군지원을 몰래 하는데 이는 내전 양상으로 보이게 하려던 것. 소련에서는 나쁠 것이 없는 구도.

손열: 그렇게 보면 여전히 동맹 요인이 중요했다고는 보이지 않음.

조동준: 동의함.

윤비: 소련의 입장변화를 두고 보았을 때, 동유럽과 동아시아의 차이의 방식이 있었나? 동아시아를 보는 스탈린과 동구를 대하는 스탈린의 차이는? 미시적인 부분에서의 전략적 상호작용이 있지만, 두 개의 사이의 비교연구 같은 것이 있는가?

하영선: 글로벌 냉전 작업에서 1947년 트루만, 마셜플랜 나오는 방안을 보면서 유럽은 왜 이런 식으로 처리되었는가의 질문. 아시아-미국관계의 입장에서 유럽의 미국의 자동개입은 확실한 상황이었음. 여기의 유럽세력 자체가 스탈린이 중국, 마오, 김일성 보는 것보다는 강한 힘으로 보임. 강한 힘 뒤의 미국이 있는 상황이 있는 것. 동아시아 전쟁의 무대는 다른 모습으로 진행. 따라서 한국전쟁의 형태로 결정. 대부분 역사가들의 논의는 사실상 한국전쟁의 진행, 유럽에서는 마셜플랜이나 경제적 봉쇄. 전지구적 차원의 변방인 동아시아인 여기서는 비군사적 봉쇄가 아니라 군사적 봉쇄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군사개입. 따라서 스탈린이 절대 하지 마라. 그래서 김일성의 숙제는 최소한 3일 전쟁으로 끝내는 것. 6월 25일 전쟁, 미군 투입은 7월 초 결정. 김일성도, 스탈린의 생각보다는 미국 개입 빨랐음. 전지구적 군사봉쇄의 차원에서 예상보다 빨리 옴.

윤비: 그러한 정교한, 비교연구가 있나? 최근 독일에 다시 ‘30년 전쟁’사 부각. 그 질문 중 하나는 왜 스페인의 지도체제는 이어지면서 네덜란드가 화약고가 되었을까? 당시 스페인 제국을 마주한 전체적 상황은 어떠했는가? 전체와 지역적 판세 안에서 다른 결론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원덕: 수정주의 이후 개디스에 와서 진퇴양난. 기본 논점이 전통주의는 동쪽의 세계 팽창주의를 강조하고 이에 대한 대항 강조. 수정주의는 미국 세계 자본주의 흐름 강조. 개디스는 역사적 해석의 균형.

조동준: 그러나 post-탈 수정주의의 흐름 있다. 한국사의 구술사 흐름 중에서 그런 흐름 있다. 확석영, 이문열 등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 사회과학적 접근과 연결 시킬 수 있나?
이용기 등의 구술사 연구. 이천에 모스크바만큼의 혁명적 열기가 강했던 마을이 있었다. 마을의 과정 자체가 원래의 갈등이 아니라 1945년으로 돌아가면 오두리에서 잘 살았음. 그것은 어떻게 복원할 수 있는지..내부의 연구에서 그런 것 많음. 기본 가정은 전쟁 발생 이전에 한국은 좋은 마을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있었는데 김일성이 스탈린, 마오를 만날 때 동아시아의 체제전쟁으로 생각하고 만났을까? 민족전쟁으로 생각하고 실현했는데, 체제 차원에서 고려했을까? 김일성, 스탈린, 마오 가자 자기가 전쟁의 중심이다라는 것과 한반도 전쟁의 중심과의 연결은?

윤비: 스탈린은 그렇게 까지 생각 안 했고. 소련 개념에는 그런 것 없었음. 그럼 갈등이 계속 필요했는가 라고 봤을 때 대립상태가 촘촘하고, 유동적이었음. 여전히 중국 전쟁의 분위기가 만연하고 미국의 영향력이 제한적이라면?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지, 전쟁을 해 볼만 하다고 생각했는지, 예상된 게임은 아니었을 듯.

조동준: 문헌정보의 정치학을 본다면 소련제공의 정보는 소련이 잘했다. 중국정보는 아직. 사료공개의 이해관계가 있고, 학자들의 연구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살필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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