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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환, Rise and Fall of Detente on Korean Peninsula, 1970-1974 (12.09.15)
 

2012-10-12 
전파연구모임

일시: 2012년 9월 15일(토) 오후 3시
장소: 삼성경제연구소  
참석자: 전재성, 마상윤, 하영선, 손열, 이정환, 조동준, 이원덕, 김성배, 도종윤, 권민주, 옥창준, 송지예, 용채영

I.  발제:  이정환, "Rise and Fall of Detente on Korean Peninsula, 1970-1974"

-발제자료는 우드로 윌슨센터의 북한국제문서프로젝트(NKIDP)의 일환, 한국교류재단의 재정지원으로 진행되어 1970-1974년 남북대화에 관한 한,미 간행된 외교문서뿐만 아니라 동유럽국가 외교문서들을 수집하고 있고, 추후 수집할 계획.
-총 5권의 외교문서 발간, 70-74년 냉전구도의 변화 시기, 한반도에서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는지 시기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료집 출간한 것
-자료집을 바탕으로 남북대화 시기 관련 외교 담당자들 대상으로 critical oral history를 한국 북한학대학원과 공동으로 개최한 conference의 결과물 자료
-5개의 패널로 진행, 첫 번째 패널, 남북대화의 시작, 둘 째, 남북대화와 한미관계, 셋 째, 북한과 북한의 동맹국, 넷 째, 유신헌법과 북한 사회주의 헌법 개정 논의, 다섯 째, 1973년 남북대화 중단 내용
-회의 참여자 6명의 증언을 들으며 느낀 점은 불가리아의 Mitov는 새롭게 증언하거나 공헌한바 적음. 미국 참여자 3명은 당시 얼마나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새로운 내용 별로 없고, 이동복 중심으로 진행되며 김달술은 한정적, 교과서적으로 이야기
-남북대화, 데탕트의 구조변화에 대해 국지적인 한반도의 반응, 얼마나 영향, 얼마나 독자적 성격이 있었나? 남한 정책결정자들은 어떤 반응과 대응? 의 질문에 주로 이동복이 주도하여 회의 이뤄짐. 남북대화에서 남한이 reactive, 북한이 proactive로 규정되고 있음. 닉슨 독트린 이후 남한의 위기의식에 대한 이런 대응 차원. 북한은 대남 적화통일에 대한 낙관론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화 임하려는 자세 있었다. 기본적으로 남북이 중미가 대화를 하라는 요구를 받아서 한 것이 아니라 국지적인, 코리아 이니셔티브였지, 외부의 영향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결론
-국제구조의 변화에 따른 local politics의 대응, 영향력을 어떤 수준에서 봐야 하가에 대해 회의는 ‘미국이 찔러서 대화했다고 보는 의견이 아니다’로 정리된 것
-패널 3에서 Mitov의 논의 중, 70년대 사회주의권에서 북한의 자리잡기의 선택임을 알 수 있음. 지보코브가 북한에게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과 mingle해서 고립되지 말라고 권고했으며 같이 경협해야 한다고 논의 함. 김일성은 자립(self reliance)를 강조, 이것이 중소갈등 속에서 북한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 북한의 갖춰지고 있는 주체사상의 internal한 base가 있는 것인지, 양자 간의 관계에서 나온 것인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일성의 대중태도도 불분명하다. 김일성-주은래 만남 자료 보면, 김일성이 만나는 사람마다 다른 말 하는 문서들을 보고 연구자들이 계속 질문을 하는데 이동복은 그 차이가 당연한데 왜 묻느냐는 식. 김일성이 중국 외교정책을 incomprehensible하다고 했다는 내용이 나옴
-4번째 패널에서 중심적으로 논의된 것은 남북대화 중단과 김대중 납치와의 관련성임. 남북대화 중단의 빌미이긴 하지만 이동복씨는 이미 남북대화에서 북한이 흥미 잃었다고 진술하는데 특별히 틀린이야기 갖지 않음. 남북대화의 rise는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이루어졌고 남북 간의 local dynamics에서 그림이 그려지는 듯 하나, 이 글에서는 남북대화의 흐지부지 상황의 그림이 별로 잘 그려지지 않았다.
-Documents 자료 소개, 윌슨센터의 자료에서 구동유럽국가들의 외교문서가 신선하므로 많이 담겨있다. 25권 중에서 고른 것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아서 정리한 것임,
-No. 16, No. 22가 가장 재미있다. No. 16은 1972년 9월 북한경제사절단과 루마니아 Ceasescu와의 대화 내용+김일성의 친서, 남북대화를 통해 남한의 혁명세력이 더욱 강해질 것이고 강화시킬 수 있다는 내용. No. 22는 김일성과 불가리아 Zhivkov의 1973년 대화내용, Zhivkov는 북한에게 북한 고립시키면 안 된다고 설득함. 김일성은 연방제가 남한의 혁명세력 키우는 혁명통일적 성격이 있다고 함

II.   토론

마상윤: 북한대학원대학교와 윌슨센터 간의 1년에 한 번 당시의 문서를 두고 당시 관련자들을 모아 회의를 한다. 이동복 의원의 발언이 많았고 의견이 자료집에도 많이 반영 됨. 미국 외교관들은 기억이 잘 안 난다고 이야기하는데 미국외교관들은 정책 레벨에서 고위직이 아닌 경우가 많음

남북대화의 진행이 국제적 레벨이냐 남북 상호관계의 국지 레벨에서 시작이냐는 질문에서 국지 레벨에서 시작한 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는 듯함. 다만 국제적 환경의 변화를 당시 박정희 정부가 읽고 선제적 대응인지, 미국의 압력에 대한 남북대화의 시작인지의 차이임. 국내 학자 몇 분은 미국 국무부에서 대사관으로 보낸 전문에 보면 조금 push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구절이 있어서 이를 보고 push를 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음. 만나본 사람 중 강인덕 씨(1972년 중앙정보부 북한정보국 국장 남북대화협의회 사무국장), 이동복 씨도 여기에 대해선 극구 부인하면서 사전에 닉슨 독트린부터 감을 잡고 있었다고 함. 강인덕 씨는 남북 힘의 격차가 바뀌는 것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고, 자신감을 갖고 대화할 여건이 되었다고 판단한 측면 있었다고 함

궁금한 점이 북한의 데탕트 초기 한반도 정세에 대한 낙관론. 초기엔 북한이 미중접근에 대해 놀라고 부정적 반응 하다가, 주은래가 만남에 대해 북한에 설명한 후에는 입장 바뀌어 미국의 백기 투항으로 인식하고 북, 중에 유리하게 흐를 것이라는 판단하는데 이 낙관론 근거에 대해선 자세히 봐야 할 듯. 남한의 정세가 우리에게 ‘유리한 정세’다라는 판단이 다른 문서에도 나오는지?

이정환: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기대와 주한미군 나간 후 미국에 대한 남한 영향력 줄어든 상황에서 북한이 논의하는 민주세력의 집권이 가능하다면 진짜 그럴 수도 있다고 Chausescu에게 김일성이 말함. 주한미군 문제가 한반도 정세 판단의 핵심이 아닌가

마상윤: 역으로 박정희는 196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닉슨과 회담에서 사정하다시피 만남. 우리 외교문서를 보면 닉슨은 ‘주한미군철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함. 3개월 후, 주한 미군 대사가 철군 협상 시작하자고 하는데 미군은 사실상 방침 모두 정하고 와서 이야기했고 박정희 정권 입장에서는 충격. 분위기는 있었고, 감은 잡았으나 실제 두 정상 만난 상태에서 안 한다고 해서 시간 벌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안되어 나간다고 하니까 신뢰도 저하, 주한미군 문제 더 심각해짐

북한의 남북대화 흥미 저하 역시 주한미군문제와 연결시켜 봐야 함. 주한미군이 더 이상 나갈 것 같지않다는 것이 1972년 후반 되면 드러남. 일종의 대남 선전선동이 먹힐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유신 때문에 약화되자 북한 입장에서는 흥미 없어진 시기. 김대중 납치사건 자체가 남북대화 중단 이유는 아니었던 듯하며 대화해서 얻을 소득이 별로 없다고 판단한 듯

남북 각각의 유신, 헌법개정에 대해선 국내에서는 거울 이미지, 적대적 의존관계로 정설적으로 이야기하는데 더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 남한, 북한이 서로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그럴싸하지만 보여줘야 하는 증거가 취약하고, 이론에 그쳐있는 듯. 북한의 헌법개정 이유를 따지면 주체사상이 언제부터 시작 했는지, 권력승계의 시작을 따져보면 헌법개정 훨씬 이전에 시작된 것이 아닌지 생각됨. 적대적 의존관계가 있긴 있었으나, ‘유신과 헌법개정이 그것의 한 표현이다’ 라고 이야기하기엔 의구심이 있다.

UN의 한국문제 논의, 제 3세계 비동맹 문제에선 중국의 UN가입문제가 빠져있음. 중국의 가입으로 대만이 나가게 된 것. 박정희 입장에선 중국이 P5가 되어서 이전에 주한미군이 UN군 타이틀로 주둔했는데, 중국의 가입으로 미군 철수가 고려 논의되지 않을 까 고려했고 당시엔 UN문제 중요했었다.

불가리아, 여러 나라들의 문서들을 보는데 동독 문서의 퀄리티가 가장 높다. 이유는 나름대로 동구권 대사들도 북한에 직접 접촉하는 부분 별로 없었던 듯하고 자신들의 해석과 분석이 반영된 것 같다. 분석 수준이 동독, 서독의 경우가 높고, 중국은 많이 틀리더라.

조동준: 분명히 남북 간 유엔문제에 대해 온도차이 있었던 듯하다. 미국이 UNC유지하는 데 한국은 한국문제 아예 논의 배제에 초점을 두었다. 문서들을 봐도 다른 입장에서 각각 접근한 느낌이다.

전재성: 북한 쪽 15번 문서가 동독에서 작성된 것인데, 동독 외교관들의 분석 수준 높다. ‘peace offensive’라는 상당히 정제된 언어 사용. 북한은 3대 원칙 중, 첫 째, 외국의 간섭 없이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둘 째, UNC 모자를 쓴 주한미군 철수, 셋 째는 상황 조성으로 적십자의 80%는 요원들이었고 점차 일반인들을 involve시켜 Mass차원에서 움직였고 슬로건부터 쭉 만들어져 있었음. 남한은 준비과정부터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북한이 미중관계 보면서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다 만든 후 이후락에게 ‘UNC는 미군 아니냐’는 질문에 사과하도록 만들었고 논리도 서있었음. 남한도 여기서 독자적이었나? 대응할만한 우리 나름의 목적이 있었는지? 유신이라는 국내 목적이었는지, 나름의 미국 압력 피하기 위한 땜빵이었는지?

마상윤: 7.4 공동성명에 ‘민족’의 이름 들어간 것에 대해 말이 많다. 이후락의 작품인데 박정희에게 나중에 혼났다는 이야기가 있고 북의 언어인데 사용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사료는 없고, 들은 이야기이다.
남한의 전략이 있었는가, 왜 했는가에 대해선 김성진의 이야기가 맞는 듯 하다. ‘남북대화 중에는 적어도 북한의 동향을 어느 정도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대화 파악하는 동안엔 최악의 상황 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주한미군을 못나가게 하는 시간 벌기.
대내적으로는 경제, 민주화 목소리 등등에 대해 돌파구로 남북관계 개선이 필요했다. 즉 위기돌파용, 시간벌기용으로 박정희가 1975년쯤 항상 “70년대 후반이 되면~”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5년의 시간 동안 무엇을 하겠느냐 해석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 때까지 미국이 나가도 뭘 할 수 있을 정도로 군수, 방위산업, 중화학 공업 등 키우기를 목적으로 한 맥락이었다고 이해 중.

하영선: 우선 2000페이지를 어떻게 재미있게 읽나? 보면서 느낀 것은 ‘국내 문서는 없고 미국의 문서 보면서 70년대 다시 복원해야 하는구나’하는 생각. 우리말 문서를 영어로 번역된 것으로 봐야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아직 뉴라이트, 뉴레프트로 나눠져서 싸우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에 아직 70년대 사료를 제대로 모으는 곳도 없고,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제대로 논쟁한 적도 없다. 70년대를 어떤 눈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 학계의 정리가 되어있었더라면 현재 대선과정에서 벌아지고 있는 과거사 논쟁도 없었을 것임.  
우드로 윌슨 센터가 정리한 자료의 ‘Rise and Fall of Detente Detente on the korean Peninsula"’라는 제목은 잘 붙인 듯, 중요한 부분을 건드린 느낌. 2000페이지의 사료를 어떤 시각에서 보아야 하며, 70년대의 핵심질문은 무엇인가?
이 문서의 요약 토론에서 이동복의 논지가 주도하는데  2000페이지 사료를 이동복 버전으로만 읽어야 하는가는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있음.
90년대 이동복과 임동원이 평양 똑같이 다녀온 후에도 전혀 다른 시각의 훈련 시비가 있었으므로,  임동원, 이동복의 시각 논쟁을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읽어야 함. 임동원은 90년대 초반에 처음 북에 갔다 왔으므로 70년대 사료 분석은 이동복의 해석을 참고하되 보다 복합적 눈으로 볼 필요있음.
70년대의 최대 문제를 제대로 보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그 시대 동아시아 질서가 새롭게 짜여져 가는 과정에서 남북한의 리더들이 어떻게  했는가라는 기본 드라마를 설정하는 것임. 그러나 70년대만 봐서는 알 수 없으며 문서를 보기 전에 약간의 예비 공부가 필요하다.
1. 미중의 1970년대 수교과정사 2. 북한의 1960년대 이래 대남, 통일정책 3. 박정희의 1970년대 대외정책, 국내정책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한국현대사 연구는 한국 전쟁 논쟁에 이어 70년대 대토론이 벌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 냉전사의 꽃으로 한국전쟁이후 70년대의 데땅트 좌절사가 중요하고 90년대의 탈냉전 무산사가 중요하며 이 문제들을 뉴라이트와 뉴레프트를 넘어선 시각에서 풀어나가야 함.
마교수의 지적대로 미중이 한반도의 데땅트 시도를 남북한에 직접지시 안함.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김일성, 박정희가 미중의 만남을 어떻게 보았는가가 중요하다. 김일성은 웃었고, 박정희는 긴박하게 목졸려 오는 상황 속에서 생존전략을 짜고 실천으로 옮기는 모습을 재구성할 필요있다.,  문서 기록이 제대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나 최소한의 자료를 기반으로라도 재구성할 필요있다. George Washington University의 national security archive의 미중 파트에서 키신저-주은래 협상문서는 핵심문서이다. 이 문서에서 동아시아와 한반도 문제가 어떻게 다뤄졌는가를 조심스럽게 분석한 다음에 김일성과 박정희의 대응을 재구성해야 함.

두 번째, 김일성의 의도에 대해 이동복의 이야기는 맞고도 틀림. 당시 북한의 통일정책에 대해 이동복은 ‘북한의 고려연방제 나온 것이 1980년이므로 1970년대는 구체적인 통일방안이 없었다’고 함. 그러나 김일성이 목숨 건 것이 한반도 해방인데 왜 기본구상 없었을까? 1964년 김일성은 3대 역량강화로 통일하겠다고 인도네시아의 유명한 연설에서 밝힘. 북한의 70년대 기본 구상인 3대 혁명역량의 시각에서, 2000페이지의 문서들을 조심스럽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강조하는  사회주의 혁명 역량 강화, 남한 혁명역량 강화, 국제 사회주의 혁명역량의 3대 혁먕역량중  70년대초 2대 혁명이 가능하다고  판단 함. 이러한 판단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김일성의 육성 또는 친서 등 1차자료만 분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1972년 5월 김일성-이후락 대화는 가장 중요문서임. 사진에서도 보듯 긴장된 순간의 한 시간 반 회담인데 논의 내용을 3대 혁명역량 강화의 시각에 맞춰 보면 크게 북한의 기본 입장이 크게 바뀐 것 없음

   국제혁명역량강화는 자본주의 약화이고 사회주의 강화이고 핵심은 주한미군 철수이다. 김일성-주은래 협상 내용에서 특히 주한미군 부분은 자세히 읽어야 한다. 우리는 키신저에게 메세지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는데, 주은래는 북에 갔다 오고 북의 메세지를 친절하게 전해서 키신저는 왜 북한 메세지를 간접적으로 자기에게 전달하느냐고 화낸다. 주은래가 집요하게 주한미군 논의할 때 키신저의 대답을 보면 박정희 목졸임당 할 만함. 키신저는 ‘주한미군이 이미 나가고 있지 않냐’고 답변하고 실제 당시주한 미 7사단은 철수 중이었음, 키신저는 미중관계가 진전되면 주한미군이 추가 철수할 수 있으며, 마지막은 중국에게 달렸다는 말을 들은 김일성, 박정희는 완전 다르게 해석 함. 김일성은 찬스있다고 생각함. 미중 데탕트가 진행되고, 남북 데탕트가 따라서 진행되 면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있다고 봄. 키신저가 주은래에게 공군만 남기고 지상군은 나갈 수도 있다고 함. 키신저의 기본구상은 가능한 형태로 대화 진행. 박정희 입장에서는 주한미군이 더 나가면 안보에 치명적임 .
북은 3대 혁명 역량 강화를 위해 남북 데탕트 시도. 남쪽에서도 삼중 생존전략을 박정희가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 믿을 수 없을 때 한미동맹을 끊지는 않지만 다른 살 딜도 알아봐야겠다. 이에 북방정책 구상, 남북 관계 완화. 박정희는 이제 간신히 중화학 공업 시작, 거의 10-20년 더 경제발전해야 하는데, 만약 선군으로 전환하면 망하므로 아직 시간이 아니라고 봄. 한국 형 화평발전 비슷하게 북쪽과 대화 해보자고 생각. 이는 미중관계 변화하고는 분리. 미국에 통보없이 남북 비밀접촉함. 71년 10월까지 논의된 것을 볼 때 미국이 한반도 데땅트를 직접 강요한 것은 아님
1970년대 미중 데탕트 연구는  21세기 미중 신질서에 대한 이해에 필요하다. ‘신형 대국관계의 구축’이라는 단어가  오바마와 시지핑 작년 초부터 사용했고  비슷하다. 냉전사의 꽃인 데탕트를 21세기사 연구에서도 주목해야 할 시기다. 1972년의 미중 신 관계개선과 현재 시진핑-오바마 팀과의 사용 단어가 비슷하다. 기성국가(established power) vs 부상국가(emerging power)의 만남에서 역사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예견되는 충돌을 피해보자는 논쟁이 진행중, 북한이 3대혁명역량 강화를 모색할 때 한국은 닉슨독트린에 맞게 3중 생존전략을 북방, 남북한, 국내자강(핵무기 방산 + 유신)의 기본 구도로 짜고,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 문서들을 봐야 함
세 개가 얽힌 모습의 드라마 재현 할 때 이미 시작은 우드로 윌슨센터가 했고, 학자들도 국내에서 연구를 시작하고 있으나 사실은 싸움은 이제부터이고 어떻게 70년대를 새롭게 볼 것인지를 설정해야 한다. 문서는 미국에서 활용하고 플러스 알파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것이 뭐가 있을지 따지자.

이론이나 외교사적으로 다음과 같이 몇 개 재미있는 이야기 가능할 듯
첫 째, 미중 데탕트- 남북데탕트의 관계. 이론적으로도 복잡한데 미중이 찌르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하긴 함. 그러나 김일성은 웃고 박정희는 울었는데 이를 어떻게 영향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영향력이라는 것, 문서를 보면 아는데 1차적으론 본인들 것이 중요하다. 북한은 루마니아 문서, 차우베스체프 처음 만나고 그 다음 친서. 3대 혁명에 대해 거의 맞게 해석 함. 국제정치 바뀌고 있으며 상당히 솔직히 남반부의 변화 언급. 남반부 역량에 대해 상당히 자신 있는 톤으로 이야기. 북한의 사회주의 혁명은 강한 것으로 생각, 두 개가 변수인데 나라도 해야지 왜 안 하나? 데탕트가 등장한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완전히 북한의 쇼, 남한의 쇼, 미중의 쇼였냐는 것은 교수들의 바보 같은 질문임. 그래도 이동복이 그럴 듯 하게 대답한다. 북은 proactive, 남은 reactive. 김일성-박정희-주은래-키신저 넷의 그림 중요

둘 째, 7.4 공동성명 발표 후, 정확히 400일만의 남북대화 포기. 그 직전의 김대중 납치 20일만에 북한 뒤집었는데 20일만에는 뒤집는 것 불가능하다. 3대 혁명역량 강화를 위한 절호의 찬스 중에서 2대 혁명역량 강화가 예상대로 안 된다고 판단 한 것을 7.4부터 자세히 관찰 해야 함. 김대중 보다는 그 앞에 10월 유신이 걸림. 10월 유신, 북은 어떻게 판단했는가? 남한의 소외로 혁명역량 성공으로 봤는지 혹은 박정희가 잡아서 혁명역량 실패로 판단했는가가 중요
71, 72년, 미국 외교문서만 봐도 주한미군 철수에 대해 경우에 따라 ‘상당히’ 나간다는 것을 강조, 키신저도 거의 나갈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주은래에게 던졌고 그 쪽도 대충 감 잡음. 그러나 7.4에서는 더 자극되어야 하지 않나? 남북 평화, 미중 평화가 이뤄질 때 주한 미군 왜 있냐? 현실적으로는 7.4 공동성명 발표 후, 7사단 철수 후 2사단 철수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한국군 현대화 프로그램 논의 중에서 더 철수하는 것의 논의가 진전 안 됨. 그렇다면 남쪽이 시간을 버는 중이라는 것은 북한도 알게 됨. 그렇다면 계속 해야 하나? 내부판단을 할 수 밖에 없지 않았는가?

마지막, 김일성- 이후락 대화는 한국 현대사의 기념비적 문건이다
한반도 통일원칙 3원칙에 대해 이후락이 3마디로 요약 가능하다고 함. 90%의 하이라이트는 그것. 이후락의 답변은 ‘어떻게 김주석은 우리 박대통령과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냐?, 바로 김주석의 3원칙이 우리 대통령의 원칙과 같다’라고 함. 이는 합의 안된 상황에서 저렇게 말했으면 사형감 아닌가? 당시 북의 3원칙 합의는 바로 사형감인데 곧바로 두 사람의 생각이 같다고 대답할 수 있었을까? 이후락은 지시 받은 듯하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자주는 절대 금기어였고 북이 63년부터 쓴 공식 언어였기 때문에 남한 다 알고 있었다는 걸 보면 남쪽 굉장히 급했구나라고 생각. 돌아와서 이후락이 이 단어 어떻게 처리하나? 학자로선 박정희의 어록 볼 수 밖에 없는데 그러나 별로 이야기 없음. 1974년 신년 기자회견을 보면 3원칙을 격렬히 비판. 물론 이전 73년에 남북대화 깨져서 그렇지만 박정희 이미 잘 알았을 것이다. 그 이후 자주=외세배격, 평화통일=주한미군철수, 민족대단결=종북, 친북세력강화라고 설명하며 3원칙 비판하는 기자회견 진행. 왜 74에 깨졌는지, 1년 만에 판 깨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북한이 가진 3대 혁명과 남쪽 박정희의 3중 생존전략이 정면충돌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상윤: 2002년 프로젝트로 유신관련 논문 쓴 것 있음. 유신 했던 제일 중요한 이유는 북한이 그 동안 한 평화공세가 위협적으로 느껴진 것이었다. 말로 하는 것이 무슨 위협인가? 하지만 평화공세가 실질적으론 군사적 위협보다 준해서 혹은 그것 이상으로 위협적으로 느껴짐
3대 혁명에서 대남혁명 잘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내적으로 박정희는 위기상황, 대외적 위기와 거의 겹친다고 생각. 한편으로는 당시 안 쪽에서만 봤을 때 북한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 누구였나? 대남혁명과 북한의 낙관론을 신중하게 볼 필요 있다. 북한이 나온 것 박정희가 읽고 있었더라면 ‘이미 위기다’ 라고 주장할 근거는 있지 않았는가. 북한의 낙관론과 남한의 위기감 조응하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대내적으로 유신 할 수 밖에 없었는가? 그러나 그 정도로 위기였나? 국제적 차원의 peace offensive, 북의 대남 peace offensive는 아프고 위험했다. 신민당에서 4대국 안전보장론 들고 나옴. 미국 공무원들은 이를 합리적으로 평가. 박정희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움. 김대중 이야기에 대해 박정희는 잠꼬대다, 국민들 현혹시키는 이야기, 국제정세 못 읽고 놀아나는 것이라고 평가. 낙관적으로 본 것은 있는데, 구체적으로 그리기에는 문서 많이 나와있지 않음. 김대중이 흑색선전, 김대중의 당선 가능성을 북한은 어떻게 봤을까? 차우체스코프와 한 논의 김일성은 진정한 민주주의 될 것 같다고 판단. 71년도에 남한의 민주세력을 뭐라고 파악? 4월의 대선에서 김대중의 득표가 거의 근접, 이를 근거로 판단했는지 아니면 다른 근거 생각한 것인지.

조동준: 북한의 첩보능력의 한계인 듯. 오판이다. 고정간첩들이 항상 과정 보고할 때 듣고 싶은 정보만 듣고자 함. 권력자의 생각 바뀌지 않는 한 잘못된 첩보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권위주의 정권에서 항상 나타나는 현상. 76년 판문점 도끼 살인사건의 경우도, 계속 북한 오판의 연속.

마상윤: 박정희 입장에서 들으면 진짜 위기다. 북한의 낙관은 남한의 비관이 되는 상황.

하영선: 논문이 되나?

마상윤: 오판의 과정 매커니즘은 보여줄 수 있을 듯. 북한의 계속된 남한 정세, 국제정세에 대한 오판은 있었다.

하영선: 김일성의 오판의 core? 움직이는 사람도 있고, 그것만 보고 남한 뒤집힌다고 보는 것 같지도 않은 듯. 적어도 박정희 유형이 아닌 쪽으로 가서 바뀌면서 점차 유리한 국면, 혁명역량이 강화될 수 있는 뉘앙스로 그런 표현을 쓴다는 것이 재미있다

조동준: 월남전 외교관 바꾸는 이야기. 1:73으로 바꾸자, 후보자의 명단 400명 중에서 몇 명을 달라고 하는데 명단 중 사형당한 사람이 반 이었고 파악이 안됨. 결국 한국정부가 쇼 한 것인데 왜 200명이 죽었는지 사후에 문서 만들어서 북한 보여주었어야 했음. 과장된 정보가 계속 증폭되어서 나타나는데 북한 정부가 이를 계속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김성배: 결국 지구, 지역의 판이 바뀌는 점이 중요한데 90년대의 남북대화가 그러했다. 북한이 그 때는 수세적. 2000년도에는 크게 지역적 변화 없음, 2010년 미중 새판짜기가 중요한 시기 변화이므로 우리는 관심 있는 듯한데 묘하게 Again 1972의 분위기. 자주외교, 김영남 비동맹 논의 등 흘러간 옛 노래, 담론들이 다시 나오는 상황. 미중관계 변화 속에서 자신의 전략적 변화 암시하는 듯한 논의 나옴. 박근혜의 경우, 또 다른 의미에서 기본적으로 평화통일, 이념적으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정도로 나옴. 국제정치 큰판 변화 읽는 방식, 남북이 항상 local한 방식으로 대응하는데 전체적 판에 대응하는 방법은 잘 안 보인다.
당시에도 박정희 전략적 구상 있었다고 하나 국내정치 고려가 컸다고 하면, 지금은 외교적 역량 강화된 상황인데 전략적 상황 보이는가의 문제가 있음. 90년대 초도, 이 당시도, 지금도 그러함.  북한이 자신의 체제생존을 위한 문제, 김정은 체제 생존 문제도 지속

마상윤: 지금 북한의 비동맹 강화 얼마나 진행 중?

김성배: ‘자주’라는 말 띄우기 위해서. 평화 중요하지만 자주도 중요하다. 아버지 때의 등거리, 시계추 외교 끌어오는 양상으로 비동맹은 조미료. 자주의 의미는 ‘대국으로부터’의 자주.

하영선: 비동맹 표현 쓰는 이유는 국제역량 강화의 과제인데 북한에만 남은 것? 그나마 역량으로 품으려면 비동맹이 무슨 동맹이 있어야 비동맹 뜨는 것이지. 60년대의 비동맹과 현재의 비동맹 정확히 같은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용어 안전하니까 쓰는 것

김성배: 2000년대 이후 쭉 주장해왔지만 평화수교 의제는 2010년부터 한국전쟁 발발 60주년, 내년 정전협정 60주년 등으로 대대적으로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화두 될 것, 먼저 평화협정 띄우고, 주한미군 문제 중심. 이를 봐도 꼭 리메이크 버전인지, 그 이상인지 봐야.

하영선: 더 절실하게 그럼 더 미래지향적으로 학계의 담론이 정리되어야 할 것 같은데 보수, 진보, 뉴라이트, 뉴레프트 논리에 함몰되어 있음.

김성배: 계속 peace offensive이야기 나옴, 이를 평화공세나 대응 문제로 좁혀서 가면 안될 듯

하영선: 남북관계 개선에서 서해 5도를 첫 번째 들고 나올 것. 영토문제부터 관계개선하자고 하면? 가장 마지막이 되는 것 아닌가? 더 교통 정리하는 담론 필요하지 않나?

이원덕: 2012년 미중관계에서 남북한, 1972년의 구조적 유사성. 비슷하면서도 너무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 데탕트는 냉전체제의 잠시 이완이지 기본 틀 바뀐 것은 아니기 때문에 키신저 - 주은래의 만남을 치명적 국제구조의 변화로 인식했을까? 현재 시진핑-오바마 2기 미중관계 재조정에서 우리가 느끼는 고민은 레벨이 다르지 않나? 당시 미중관계와 오늘 날의 미중관계와 등치시킬 수 있나? 남북한의 발란스도 70년대 북한이 압도적 상황, 박정희에게 북한 대단한 위협인데 반해 지금의 남북한 관계는 끝난 전후 처리 정도로 보고 있음. 많이 다른 것이 아닌가.
70년대 남북대화의 해석에서 진보/보수 균형 잡을 필요가 있다. 너무 국내적으로 해석하느라 발란스가 부족, 증거 가지고 비판해야 하는데 어려움 있음. 40년대 공간의 수정주의 해석, 국내체제 중심의 설명, 특히 현대사 하는 쪽. 국제정치 쪽에서 균형 잡아줄 필요가 있다.

마상윤: 정치학계에서도 여전히 유신문제에서 담론은 박정희의 권력욕으로 정리해버리는 경향. 임교수는 박정희를 마키아벨리적으로 해석, 국내위기 돌파에서 유신 했다고 함. 하지만 권력욕 자체만으로 설명하긴 어렵다고 생각. 미국 관료들의 전문 등을 보면 domestic politics때문이 아닌지 의심했지만 나중엔 박정희의 일관된 생각 있는 듯하다고 봄. 미국인들도 ‘실제적 위기라고 인정하긴 싫지만 적어도 박정희가 위기라고 인식했다’고는 인정하고 있음. 이를 마키아벨리적 돌파 수단으로 쓰는데 국내정치 차원에서는 역사학계, 정치학계 싸움에서 정치학계가 더 낫다고 하기도 어려움

하영선:  국내-남북-국제를 전체로 그림 그려야 함. 사회학계에서는 유신을 계급분석모델 아니면 관료적 권위주의모델로 분석했는데 국제정치학에서 제대로 된 복합모델을 보여줘야 한다. 마키아벨리/권력정치 요소가 없었단 것은 아님. 남북의 72는 원점으로 회기, 미중의 72에선 72 이전의 게임 룰과 이후는 미중수교에 의해 바뀜. 단, 다른 점은 지금 미국이 중국을 다루는 복잡한 계산이 이미 경제적으로 깔림.
1972년 소련 생각하고 전체 구도에서 끌어들인 것인데 정말 모든 차원의 파트너로 동아시아 질서를 짠 것이었을까? 속으로는 달랐을 듯. 당시 중국의 국력을 보면 미국에 비해서 압도적 열세였다. 일단 전쟁을 치른 ‘적’과  ‘파트너십’ 논의을 시작했으므로 미중관계에서 72년은 전환점이였음.  72년과 현재의 미중관계를 비교해 보면 유사성은 상대방을 단순하게 적으로만 안 본 것과 부상 파워의 기대다.
남북도 다른 점 있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박정희의 72년 고민을 김일성이 91년에 똑같이 하는 역설이 존재. 핵무기 개발도, 사용 단어도 비슷함. 91년 크리스마스에 소련이 해체 될 때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와는 비교 안될 정도의 위협을 느꼈다. 어떻게 남북한이 20년의 시간차를 두고 이렇게 똑 같은 이야기를 하나. 관계역전 상황에서의 이야기. 이를 잘 정리하는 것이 한국의 정치학, 국제정치학이 해야 할 본연의 테마이고 대토론을 할 필요가 있다.

마상윤: 10년 전의 논문에서 위기감은 인정 하자, 그러나 꼭 유신으로 가야만 했어야 했나? 그것은 아니다. 대단결은 필요했으나 꼭 권위주의적으로는 할 필요 없지 않았다고 결론 냄. 박정희 시대, 유신과 관련된 것 학자들이 각을 세워서 보는 우회통로가 필요한데 터부시 되는 분위기다.

송지예: 남북 간 대화제의를 함에 있어서 대외적으로 비춰지는 이미지의 부분 있지 않나? 미, 중, 소에서 남북 대화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마상윤: 대외적 이미지 중요. 72년 김일성이 요미우리 신문에서의 광고, 비슷한 시기 뉴욕타임스에도 광고를 통해 ‘북한은 평화적 방식으로 한반도 접근을 한다’고 국제적 차원에서 자신들의 정책을 어느 정도 홍보함. 홍보의 이념, 북한의 이념은 한반도 전쟁이 아니면 주한미군은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 이 청중이 나중엔 미국 내의 여론에서 유엔 여론으로 넘어감. 당시 비동맹, 제3세계 국가들이 60년대 UN에 들어갔을 때 이들에 대한 홍보전 진행. 이것이 전반적 평화 공세였고 평화공세 뒤에 숨겨진 비수를 박정희 입장에서는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
박정희의 72년의 기록에서 “북괴로부터 우리는 ‘위장 평화공세’ 받고 있다.” ‘갑자기’ ‘최근에’라고 강조.
그런데 왜 남북대화 끝났나? 박정희는 유신 이후에도 계속 하자고 매달림. 그러나 북한이 끝내버렸는데 거의 심정적으로 주한미군 철수 어려워 졌다, 남한의 혁명역량 활용 어려워졌다고 생각. 김대중 납치사건을 빌미로 끊어 놓음.

전재성: 결국은 미중의 아키텍처적 구상이 실현이 안된 것 아닌가? 남북은 서로만 생각하고 남한 입장에서는 미중 아키텍처를 위험하다고 본 것. 북한은 중국에 지원 받고, 남한은 버림받을 신세될까 우려. 미국은 미중관계 original stance로 목적을 달성했는가?

마상윤: 박정희의 당시의 배신감이 현실적이고 이유 있다고 생각. 닉슨, 키신저 외교가 남한 쪽에서 비판 받는 이유는 약소국에 대한 배려가 없었음. 월남전 후 미국이 깨지고 나서 미국 힘 상대적 약화된 상황에서 전세계적 지배 유지하자는 것이었음. 방안이 중소 데탕트. 미국 입장에서는 강대국들 관계가 더 중요하게 부각되는 상황, 그 상황에서 약소국들의 이해관계 철저히 무시되었다. 이를 인지한 박정희는 미국 못 믿겠다고 갈 수 밖에 없음.

이원덕: 일본의 충격도 박정희 이상으로 컸다. 바로 중국과 달려가 수교한 것은 일본 또한 북일관계 개선 등 모색. 나름대로 일본 아키텍처 짜야한다는 인식.

마상윤: 하지만 위기의 정도로는 박정희가 가장 컸을 듯, 생존의 문제는 아니므로.

하영선: 일중 수교에 대한 좋은 자료 있나? 주은래의 일본에 대한 의심 강하던데?
일본에서 72년은 굉장히 중요, 중국과 국교를 여는 해. 중국이 어떻게 그 스텝을 밟았는지 궁금. 일본이 손 잡자고 할만한 것은 이해됨, 미국이 가니까.  

조동준: 남북대화의 깨진 것이 주한미군 철수가 안 이루어질 것 같다라는 고려 때문인가?
저는 주은래-키신저 대화에서 키신저가 닉슨 2기 때 거의 100%철수를 약속했다고 읽었었다.
그렇다면 이미 끝난 게임, 할 필요 없지 않나?

마상윤: 72년도 닉슨의 방중 시기 북한이 delegation을 대규모로 중국에 보내서 대기. 확실히 주한미군 철수 되게끔 정보, 압력 주기 위해. 만일 확정된 사항이었더라면 압력 안 넣을 수 있었을 것.

도종윤: 소련 파트는 거의 언급 안 됨. 소련-미국 냉전 심화 과정에서 키신저 아시아만이 아니라 다 관리하면서 유럽 정치공동체 형성 과정 방해하는 것도 있었음. 요즘엔 키신저가 이간질 한 것 처럼 쓰여짐. 유럽에서의 미국의 역할 강화하는 쪽으로 가서 오히려 냉전 심화시키는 과정. 전교수 말씀처럼 중국과의 데탕트는 가짜 아닌가?

마상윤: 미중 데탕트는 중국을 통해 소련을 잡자는 전략. 소련과 데탕트 먼저 하긴 어렵고, 소련의 의사가 없고, 이미 중소분쟁의 심화 상황. 이전의 미국 행정부에서는 중소 분쟁에서 인정 안하고, 활용 안 하려 했었으나 그 다음에 중국과 관계 개선하면? 소련이 수세 몰리게 되고 삼각 외교에서 소련도 미국과 관계개선 응하지 않겠는가? 삼각관계에서 삼각형 꼭지점에 미국이 올라가 있는 것, 미중으로 미소 관계개선 하겠다고 결심. 강대국 정치를 키신저는 투철하게 그림을 그려서 투영 한 것, 강대국 정치에서는 어느 정도 먹혔고, 성공했다고 판단 했을 것. 그러나 별로 관심 안 두었던 한반도 레벨에서 전혀 작동 안된 것. 처음엔 어느 정도 작동해서 남북 관계 개선 효과 등등. 우리의 구조적 효과 영향 미쳤구나! 그러나 결국은 미국이 그린 전략적 그림 잘 안됨. 동방정책 처음에 반대했으나 브란트 등 나중엔 미국에게 해가 안 된다고 설득한 다음엔 동의

도종윤: 동아시아 데탕트에서 소련 배제하고 논의하는 것 괜찮은가?

마상윤: 배제라기 보다는 큰 전략적 그림의 중요 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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