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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경, "도덕정치와 권력다루기-황종희의 진화?" (10.06.23)
 

2012-02-29 
일시: 2010년 6월 23일(수) 오후 3시
장소: 경기도 수지 세계정치연구소
참석자: 하영선 강상규 김성배 김준석 민병희  양승태 이혜경 이헌미 홍지연 정연 송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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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이 혜 경 선생님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도덕정치와 권력다루기 - 黃宗羲(1610~1695)의 진화?”

김성배: 권력의 견제 측면에서 결국 근대 이전의 중국 정치는 근본적으로 유학 텍스트에 근거하고 있었다. 황종희도 그러했나?

이혜경: 황종희는 학교를 통해서 이루어는 정치를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에서는 반론이 있을수도 있으나, 저는 황종희가 도덕정치라는 측면에서 기존의 유학적 흐름을 거스르지 않았다고 본다.

김성배: 양계초로 가면 지식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 변화가 생기지 않나? 무엇을 가르쳐야 되는가, 하는 점에서 근대적 사고방식으로.

이혜경: 그렇다. 그러나 양계초가 표현상 “지식”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公德”을 의미한다. 국민이 될 자격을 도덕을 기준으로 하고 있음.

김성배: 그런데 그 견고한 지식구조가 유지된 것이 '德‘ 때문이었다고 보는가?

이혜경: 아니다. 유학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시대에 따라 변형, 적응할 수 있었던 힘 때문이 아닌가 싶다. 현대 신유학자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유학이 충분히 작동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관료집단 선발제도는 현재 공무원시험 등으로 유지되고 있지 않은가?

이헌미: 황종희 당대에는 그의 사상이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이혜경: 1660년대까지 명나라 회복 운동을 하다가, 그 이후로는 유민으로 사는데, 그러면서 강학을 하고 제자를 키움. 나중에는 자신이 청나라를 섬긴다는 것을 인정을 하면서도 스스로 출사 하지는 않음. 황종희는 젊은 시절부터 추천을 받는데. 황종희는 근대에 와서야 (지금처럼) 회자되기 시작. 당대 고증학과는 맞지 않았기에 그러한 분위기는 당연했을 듯

하영선: 통속적으로 민본과 민주의 개념 정립에 대해 논란이 있다. 다산에 대한 평가에 국내 학계가 혼란을 겪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조선의 루소”로 추켜올리는 분위기가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지나친 해석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세기 서양의 民主와, 황종휘의 民主, 그리고 民本이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즉, 다산은 원목(原牧)에서 민주를 이야기 했다고 추정되는데, 사실 서양적인 의미의 民主는 독립신문에 가서야 등장한다. 그렇다면 황종희의 民主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혜경: 서양적 의미에서의 民主를 의미했던 것은 아닌 듯. 다산은 지식인 엘리트와 군주에게 정치를 위임하는 것을 의미했을 것. 하물며 캉유웨이의 경우도 향신층에 발언권을 주자는 의미였다. 그는 민주주의는 아직 시기상조다, 라고 이야기했다.

하영선: 그렇다면 “democracy”를 民主 라고 번역한 것이 오류 아닌가?

이혜경: 군주가 주인이 아니라 백성이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쓴 듯. 나카에 조민은 <사회계약론>을 民約論이라고 번역하는데, 그러면서 民이 집단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고(본래 루소가 의미한 개개인이 살아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수 있을 듯.

노   : 질문 세 가지. 첫째, 유교 자체에서도 군주를 갈아엎는다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군주가 말을 듣지 않으면 자기가 죽어서 진실을 보여준다(할복)고 한다. 그런데 맹자 계열에 있어서 충성을 하는 것과 협력을 하는 것의 기준이 있는가? 둘째, 학교 이야기가 나오는데, 학교가 조직적인 것은 아닌 것 같고, 어떤 교화의 네트워크, 관계라는 인상이 강한데? 셋째, 公論, 公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여기서 공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어떤 여론이란 의미가 담긴 집단적인 것인지? 황종희를 동양의 루소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런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는지?

이혜경: 첫째, 신하와 군주의 관계는 명백한데, 신하 입장에서 어느 군주를 선택할 것인지는 그에게 왕도정치를 보여줄 義가 있는지 여부. 왕이 왕다운 가능성을 보인다는 한에서 혁명할 자격을 갖는지 여부를 판단한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이 왕이 될 명분은 없다. 둘째, 왕이 학교에 가서 배우고 비판한다는 것은 그 공론을 만드는 공간이 열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재상이 이런 공론을 만드는 사람이었을 텐데, 그런 공론의 장을 넓혔다는 측면에서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선한 본성이 한 방향으로 모여 있는 것이 공론이라고 봄. 개인적으로 실수나 일탈이 있을 수 있으니, 그것을 모을 수 있는 공간으로서 학교를 상정한 것으로 생각됨.

민병희: 맹자에서 황종희까지 이어지는 속에서 사실 맹자의 논의라는 것은 일관되게 이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주희 이전까지만 해도 맹자가 經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 經史子集 중 子에 속했었다. 사마강 등은 맹자를 부정했고, 사실 그들이 북송대 main stream 이었다. 오히려 맹자를 정이가 minor한 축이었다. 그것이 뒤집어진 것이 주희 대였는데, 황종희를 맹자부터 이어지는 어떤 한 선상에 위치시키는 것은 위험하지 않나?

이혜경: 제가 의미한 바는 도덕정치, 왕도정치를 유학의 기본이라고 보았을 때 맹자를 중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핵심은 성선설이 있다고 생각한다.

민병희: 그런데 북송대까지 맹자에서 성선설이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혜경: 황종희가 의미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주자학적인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다시 맹자를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제가 맹자를 과도하게 해석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황종희에 보다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것.

민병희: 황종희 시기까지의 맹자의 해석사를 다루어야 하는 거대한 작업일 수도 있는데.

이혜경: 제 관심사는 황종희가 새로운 유학정치를 제시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이론적 근거를 맹자의 성선설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고, 그에서 연구가 시작된 것. 그런 점에서 저는 황종희가 맹자를 어떻게 해석하는 지를 본 것. 그런 의미에서 하영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민주에 가까워졌다고 생각.

민병희: 公議는 주자도 이야기하고 있다. 황종희가 주자와 다른 점은 첫째, 理의 근거를 제외시키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주자학의 근거가 없어지는 것. 둘째, 본격적으로 제도를 통한 방안을 이야기하고 있음. 셋째, 군주에 대해서 강도 높은 비난을 가함. 그 외에는 주자학과 상당히 비슷해 보임.

이혜경: 황종희가 양명, 유정주로 유학의 도통을 세우는데, 이것은 자기 주체에 대한 믿음인 것 같다. 자득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스스로로부터 얻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민병희: 自得은 유학의 기본 모토인데.

이혜경: 그러한 의미에서는 주자도 유학의 전통에 있다고 생각함.

민병희: 결국 주석사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세세한 개념차이를 밝히지 않고서 어느 한 개념이나 용어 하나만 가지고 그것을 썼는지 쓰지 않았는지를 기준으로 차이를 밝힐 수는 없다고 본다.

이혜경: 그러나 理를 뺐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큰 차이이다.

민병희: 理 하나만 보더라도 주자와 황종희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보지 않은 채 주자와 황종희가 어느 한 용어를 썼는지 쓰지 않았는지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적절한가?

이혜경: 理 개념은 상당히 중요한 개념이다. 理가 아니라면, 어디에 새로운 권위를 부여할 것인지가 관건인데, 그것을 어디에 놓았는지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하영선: 황종희는 결국 公議라고 본 것인가?

이혜경: 그렇다.

민병희: 公議라는 형이상학적인 관념보다도 제도를 구체적으로 논의했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지 않은가? 공의를 만드는 과정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이혜경: 제도를 만드는 것도 公議라고 볼 수 있다고 본다. 그 公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황종희는 학교라는 제도에서 찾았다.

이헌미: 여기서 학교라는 것이 정치 참여자인가, 권력 견제자인가? 양계초도 황종희를 재해석하면서 학교 설립하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혜경: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학교가 아니라고 본다. 양계초에서 학교는 서양을 배워야 하는데, 서양처럼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덕이 아니라 경험적 지식이다. 필요한 인재상이 다르므로 그 시설과 교육내용이 다르다는 측면이 지적될 수 있을 것.

민병희: 학교제도는 유학흐름 속에서 계속 문제가 되는데, 왕안석은 삼사법으로 궁극적으로 과거를 없애고 학교에서 가르친 인재들을 그대로 임용했고, 그것이 정조개혁에서는 반대가 된다. 사실 주자학에서는 국가에서 학교제도를 운영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주자학의 서원운동. 그런데 황종희의 주장은 국가기관 내 학교가 포함되는 것인데, 그러나 왕안석과 다르게 주자의 의미에서 公議에 기반해서 사회적으로 bottom up으로 올라가면서도 정부가 관할하는 것이 된다.

하영선: 왜 주자학 쪽에서는 학교를 반대했나?

민병희: 주자학은 거의 모든 논의에 있어서 왕안석을 반박하면서 나왔다. 국가 중심의 개혁을 반대하는 것. 국가중심의 개혁은 결국 학교라고 보았으며, 따라서 사대부 주도의 서원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영선: 진정한 의미의 공의가 어떻게 만들어지냐의 싸움일 텐데. 그리고 학교제도에 대해서 당시 황종희가 그렇게 이야기 했다면, 최근 원자바오가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이 황종희라고 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굉장히 위험한 발언 아닌가?

이혜경: 황종희는 그 나름의 제도주의였다. 다른 방식으로 재편하려 했다고 보아야 함.

민병희: 그럼 황종희는 국가의 위치, 사회의 위치, 사대부와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을지? 그것이 황종희가 생각하는 학교의 역할을 제대로 보여줄 텐데.

이혜경: 국가라는 개념은 양계초 대에 들어온 것이고, 이 시기의 커뮤니티 자체가 사회라고 보았을 것. 명이대방록이란 제목에서도 明夷가 권력자의 입장에서 쓰고 있다.

민병희: 성인군주가 출현해서 이를 실현을 해야 한다는 것은 기존과 동일한 것 아닌가?

이혜경: 주체는 성인군주가 아니라 학교 집단이다.

하영선: 그런데 동림당이었던 부친이 했던 것이 투쟁만 한 것인가, 아니면 강학을 포함하는 것인지?

민병희: 주자학의 초기 묘사를 보면 조정의 시비를 논한다, 강학을 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문제가 된다.

이혜경: 학교 집단의 구성원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누가 지식인이냐는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당연히 유학자로 보았을 것. 공의라는 것을 통해서 견제를 해야 한다고만 함.

민병희: 지금의 철학사를 생각하면 안됨. 당시 철학사는 학파간 주류를 뽑고 저서를 정리하여 계보를 정리하는 식이었음.

하영선: 결국 당시에 그는 목숨을 걸고 쓴 책이 아닌가? 18세기 까지도 금서였던 것을 보면, 지금 학자들보다 훨씬 강도 깊은 논의 아니었을까? 조선에서도 읽었나?

이혜경: 유통된 것도 아니고, 그다지 많이 읽힌 것 같지 않다.

민병희: 생각보다 서적 수입이 있었는데.

이혜경: 박지원이나 허균의 경우 이탁오는 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황종희를 읽었다는 기록은 보지 못함.

민병희: 찾아보니 학교 내 주체들을 士라고 지칭하는데, 학교 제도라는 것이 그렇게 강해보이지 않는다. 학교의 견해와 조정의 견해를 일치시켜야 한다고 하는데, 조정에서 그 견해를 흡수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주장인 듯. 그런데 조정에서 흡수하되 의회처럼 작동시켜서 조정을 좌지우지해서는 않된다는 이야기. 서원에 대해서는 비판적.

강상규: 시대적 맥락에서 황종희를 연결하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한중일의 인물들을 연결해서 다루면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17세기가 위기의 시대라고 한다면 그 시대를 구성했던 ‘위기’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고민을 많이 해봐야 할 것. 명청 교체기의 황종희, 그리고 조선의 기근, 기상이변 등의 문제와 송시열과 같은 식의 존주론 논의가 나타나는데. 그런 위기에 대한 처방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선생님께서 양계초에서 황종희로 관심이 바뀌었다고 하셨을 때, 마루야마의 경우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결국 시대가 변화하는 속에서 비판적 지식인이 기존 체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리고 어떠한 새로운 제안을 내놓는지 궁금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의 작업이 이른바 중국, 또는 동양에서 전환기를 살았던 지식인들의 논의로 엮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음.

드리고 싶은 질문. 제목 중 “황종희의 진화?”라고 물음표를 쓰셨는데, 어떤 느낌에서 쓰셨는지 조금 알 것 같은데, 진화의 느낌이 발전사관의 맥락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약간 걸리는 부분이 있었던 것 아닌지? 사실 제가 관심을 갖고 고민을 하는 부분은 一治一亂, 순화사관 등의 시각과 발전사관과 경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 선생님께서는 양계초, 황종희를 보면서 스스로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지 견해가 궁금.

저 같으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자동차 거울로 바라보는 것에 비유하고 싶은데, 운전을 할 때 하나의 거울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거울들을 본다. 다중적 거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역사적 시각에서도 진보의 거울로 보면 명확히 보이는 부분이 보이는데, 그것만으로 바라보면 분명히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 역사를 혹은 세계를 입체적으로 본다는 것이 무엇일까? 역사를 볼 때도 적절한 시각이 중요하다. 왼쪽 차선을 보는 거울로 봐야 되는 경우, 후방을 봐야 하는 거울이 따로 있다. 그리고 사각지대를 보는 거울이 따로 있는 것처럼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각각 따로 존재하지 않나. 발전사관이 명확하게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발전사관이 史實을 왜곡해버리는 측면도 있다. 선생님은 역사를 볼 때 어떠한 거울을 갖고 보시는지?

이혜경: 제 역사관은, 좀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제가 오늘 발표 제목을 진화라고 붙인 까닭은, 권력을 나눠 갖는 것을 진화라고 본다면 황종희의 사상이 진화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게 이름붙여도 될까, 확신할 수 없어서 물음표를 붙였던 것.

강상규: 그리고 황종희를 여러 가지로 고려말의 지식인이었던 정도전과 연결시켜서 보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정도전의 고민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전환기를 살았던 지식인들의 시대인식과 사상적 고민을 종횡으로 엮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오히려 17세기 조선 지식인들보다 14세기 정도전의 고민과 더 연결될 수도.

하영선: 약간 조심스러운 것은, 황종희의 표현 중 하늘이 내려앉고 땅이 주저앉는다는 표현이 있는데,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전환은 불교에서 유학으로 넘어오는 것인데, 명의 경우는 야만인 청에 의해서 망한 것이다. 그 어려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황종희의 이야기는 상당히 과감한 발언이었다. 역설적으로는, 우리 역사에서 이런 類의 발언을 했던 인물이 있었는지 생각해볼 문제다. 다산을 보통 조선의 루소라고 하는데, 모든 면에서 루소는 아니다. 다산이 겪었던 시대적 딜레마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황종희의 경험은 천하가 무너지는 것이었다고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강상규: 황종희는 명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강했다. 천하 세계에 대한 일종의 전복적 사고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송시열이 가졌던 사고와는 약간 달랐을 것.

하영선: 그러나 청 이후에도 청을 인정을 하지 않았다. 타락한 명이 원망스러웠으나 청을 환영했던 것은 아니다.

강상규: 그러한 측면에서 황종희는 안팎으로 모두 비판적 시각을 갖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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