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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비,"Aristotle between the Levant and Longthorpe" (10.02.20)
 

2012-02-29 
일시: 2010년 2월 20일(토) 오후 3시
장소: 경기도 수지 세계정치연구소
참석자: 하영선, 구대열, 양승태, 김성배, 김준석, 강상규, 윤비, 남민욱, 권민주, 송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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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윤 비 교수님
"Aristotle between the Levant and Longthorpe: Circulation and Localization of Political Ideas in the Later Middle Ages"

양승태: Longthorpe 타워의 성격은?
윤비:  3층의 네모난 상자처럼 생겼고, 도시화된 귀족층들의 거주공간이자 방어공간. 1층은 지하실처럼 쓰고 2층은 거실로 이용. 이 지역은 당시 상당히 번화했었지만, 성을 만들만한 여건은 되지 않았었다. 최근 논문에 따르면 Longthorpe 집안은 에드워드 3세 시대에 재상을 지냈던 인물과 같은 집안인 것으로 추정. 이를 통해 보았을 때 당시 Longthorpe 가문은 유럽에서 작지 않은 영향력이 가졌다고 할 수 있음.

양승태: 벽화 그려진 시기와 타워가 지어진 시기는 같은가?
윤비: 탑이 지어진 양식과 건축구조, 재료로 보았을 때, 벽화 보다 약 40년 앞섰다고 보고 있음. Longthorpe 가문의 후세의 권력, 권세에 비한다면 이 탑이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느껴질 수 있음. 그런데 이 탑이 Longthorpe의 할아버지 때 지어졌다고 한다면, 즉 Longthorpe 집안이 신흥 세력으로 막 부상하기 시작할 때 지어졌다고 한다면 납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탑이 건축될 당시만 해도 아직은 런던 대귀족의 풍모는 갖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음.

양승태: 지성사 차원에서 특이 사항이 있는가?
윤비: Longthorpe 가문의 세력에 비추어 보았을 때, 지역 기사들의 회의실로 사용되었다고 추정됨. 이는 이곳에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논의로 이어질 수 있음. 또 다른 벽에는 Longthorpe 수도원의 녹을 받는 기사들의 문장이 그려져 있음. Longthorpe 수도원은 실제로 Edmund Woodstock(에드워드 3세의 삼촌이자 엘리자베스의 숙청에 희생된 후 자유의 순교자로 당시 추앙받던)의 후원을 받았다. 이는 Longthorpe 뿐만 아니라 이곳의 많은 귀족들이 Edmund와 뜻을 같이하는 봉신들이라고 볼 수 있음. 이러한 사실은 수도원 문서들을 통해서 확인이 된다. 당시 영국은 정치적으로 혼란기를 겪고 있었음. 영국 최초의 쿠데타로 기록이 된 에드워드 2세의 퇴위. 그리고 그 이후 에드워드 2세의 왕비인 엘리자베스는 정부 Mortimer와 함께 에드워드3세를 왕위에서 배제시키고 섭정, 그 과정에서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Edmund Woodstock 등을 숙청. 이에 반기를 든 귀족들이 에드워드 3세와 함께 어머니와 그 정부를 급습, 투옥. 따라서 이 무렵 귀족들 내에서 왕의 의무, 올바른 정치에 대한 고민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생각.

양승태: 거실을 회의실로 썼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공장소, 공동시설이 아닌 개인 주택에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을 텐데.
윤비: 당시 영국에 개인주택 내에 공적인 종교, 정치적인 그림이 많았다. 이는 개인적 관심, 신앙심에서 기인했던 것. 그뿐 아니라 당시 거주공간이 손님 접대장소, 연회장소로도 썼음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그림이 그려졌다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음.

양승태: 다른 지역에는 비슷한 탑이 없는지?
윤비: 이 지역에서는 유일함. 흙과 목재를 이용해서 지은 이러한 조야한 탑은 당시 대륙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탑의 양식상 보존이 쉽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었음.  
이 탑의 벽화도 페인트에 묻혀 있다가, 2차 대전 이후 탑의 소유자가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어 1945년부터 약 5년간에 걸쳐 복원 작업이 이루어진 것임.

구대열: 시대적 배경을 보면 마그나카르타 1215년, 백년전쟁 종결이 1452-3, 그 사이 기간에 이 탑이 지어졌는데, 이 시기 귀족들은 최고의 권력을 누렸음. 그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1330년 무렵의 다른 귀족들의 생활과 비교했을 때 너무 초라한 듯 보인다.
양승태: 당시 영국의 최고 귀족들은 성도 있었을 텐데.
윤비: 당시 영국 귀족들의 주거공간은 유럽대륙의 귀족들의 것보다 초라했다. 그리고 이 그림이 지금은 채색이 벗겨진 상태라는 점을 고려해야 함. 당시 기준에서는 화려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그리고 화풍을 봤을 때, 화공집단을 고용했다고 추정되는데, 이를 생각한다면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을 듯.

양승태: 미술사에서 볼 때 이와 비슷한 화풍이 다른 곳도 있었나.
윤비: 에드워드 3세에게 바쳐진 성경 필사본, 빈자들을 위한 성경 등을 보면 상당히 유사한 화풍을 발견할 수 있음. 이를 통해 볼 때 왕실과 관련 있는 화공집단의 한 사람이 그렸다고 추정할 수 있을 듯.
구대열: 이 시기 규모가 큰 King maker 집안과는 차이 있음.
양승태: 어느 정도 부는 있으면서 나름대로 교양을 추구했던 하층 귀족이 Secretum secretorum 읽고서 감명 받아서 화공을 시켜 그려 놓고 즐겼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 개연성은 있을 듯. 그러나 문제는 세세하게 어느 구절인지는 논란이 있을 것으로 보임.

양승태: Secretum secretorum 위서의 출처? 최초 등장 시기?
윤비: 아랍 10세기. 대략 12세기 중반부터는 유럽에도 알려졌을 것. 아랍 10세기라고 보는 이유는, 이 작품의 필사본을 추적해보면, 그 경로가 번역서에서 나왔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그 10세기 아랍어 버전 텍스트가 남아있음. 시리아에 보존. 현존 Secretum secretorum은 약 170페이지 가량. 그런데 full 버전 뿐 아니라 건강법, 숫자 이야기 등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옮기기도 했고, 이를 백과사전에 싣기도 했음. 어디서 발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가장 오래된 판본이 다마스커스에 보존되어 있음.

양승태: 위서 판정은?
윤비: 15말에서 16세기. 이 무렵에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제외되었음.

양승태: 사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과 거리가 있는 내용이 많은데, 왜 그렇게 오랫동안 아리스토텔레스 것이라 믿어왔을까.
윤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1260년 처음 번역. 그 전까지는 정치학이라는 작품 자체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논리학, 변증술 측면에서 조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음. 정치 도덕의 중요한 이론가로 꼽는 경우에는 이 작품을 근거로 삼았는데, 이는 아랍영향이었을 듯.

양승태: Secretum secretorum 대중적이었던 것은 학자들과 일반 교양인들 사이의 이중적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다가 위서로 판정되지 않았을까.
윤비: 당시 유럽에서는 그리스 문헌 왜곡이 종종 일어났으며, 양적으로도 부족했음. 따라서 이 문헌이 아리스토텔레스 것이라고 했을 때 반대가 없었을 듯.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 무너지고 처음 Chrysoloras과 일군의 학자들이 피렌체에 와서 처음 그리스어 강의를 시작하면서부터. 따라서 그 이전에는 Secretum secretorum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작으로 인정되는 데 무리 없었을 듯.

양:일반 독자층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표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지성사적 오류 아니었을까.
윤비: Secretum secretorum이 영향을 미쳤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이 그림들을 설명하기는 힘들 듯. 사실 오늘 발표는 그 순환과 전파 과정을 이야기 하려는 것. 따라서 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Biography 등 다른 자료도 필요할 것.

강상규: 발표를 들으면서 그 상상력이 참 재미있다고 느낌.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왜 이 Longthorpe 벽화에 주목하게 되었는지 궁금.
윤비: 마키아벨리 전공이다보니 fortuna의 바퀴 상징을 보기 시작. 특히 도상학에 관심있다보니. 그러다 한 문헌에서 “fortuna의 바퀴가 너무 널리 퍼져서 때로는 감각과 관련지어지기도 했다”는 언급을 봄. 이를 찾아보았는데, 제가 보기에는 fortuna의 바퀴가 아니었다. 처음 가설은 이것이 국가를 상징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는데, 그런데 애를 먹은 것은 바퀴가 아니라 왕이 배의 rudder를 잡은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에 쉽게 풀 수 없었음. 하지만 당시 그것이 rudder가 발명되지 않았음을 생각하게 되었고, rudder가 아니라 수레바퀴를 표현한 것임이 분명해졌음.

하지만 여전히 바퀴 주위의 상징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 생각해보아야 했음. 특히 왜 왕이 하필 거미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해석하는데 상당히 힘들었음. 오감에 대한 최초의 알레고리는 Paul Getty Museum에 소장된 <Stammheim Missale>그림에서 찾을 수 있었음.

<Stammheim Missale> 예수 혹은 신이 바퀴를 잡고 돌리고 있는데, 이 바퀴는 우주를 상징하며, 원 안에는 창조의 6일이 그려져 있다. 바퀴는 불안정, 덧없음 뿐만 아니라 중세 시기에는 완전성을 의미하고 있었다. 특히 지도자와 그 지도자에 의해서 지도를 받는 집단을 나타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Cosmografia teologica(1390)> Pisa 공동묘지의 그림. 왕의 머리가 상단에, 중앙에는 단테의 아홉 하늘이 위치. 원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완전성의 우주를 운행하는 존재로서의 신. 이러한 발상은 발출설(epiphany)에서 출발하게 됭었는데, 신의 이성이 발출되면서 만물이 실체로서 창조되었다는 것, 따라서 이 세상은 신의 생각이 표현된 몸체라는 것.

동일한 맥락에서 국가 유기체론은 왕은 국가를 이끌어가는 머리이고, 국가는 왕의 의지가 표현된 몸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함. 이와 같은 논리가 Longthorpe에서도 적용가능하다고 봄. 신과 우주의 포맷을 왕과 국가에 적용시킬 수 있는 이유는, 중세의 많은 문헌들에서 왕은 신에 해당되고 백성은 왕의 몸에 해당된다는 유기체적인 생각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

양승태: 위아래 그림(인도왕자 그림과 수레바퀴 그림)을 붙여서 해석을 할 수도 있지 않나.
윤비: 우선, 다른 그림들에서도 그림을 분리시키고 있으며, Secretum secretorum을 보면 인도 왕자 이야기가 5感에 대한 이야기 바로 다음 페이지에 나온다. 즉, 두 에피소드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지는 않지만 왕의 통치를 설명하는 챕터 내에서 연결된 두 에피소드로 나옴.

<Sphaera civitatis(1588)> John Cased의 작품에서도 왕-국가 포맷이 나온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통치하는 국가와 그의 덕을 원으로 표현. 맨 마지막 원에는 “Elizabeth, on God’s Grace, Queen of England, France, and Irland and Defender of the Faith”라 적혀있음.

<Miniature of the Avis aus Roys(1360)> 뉴욕의 Pierpont Morgan Library 소장. 지금까지는 국가 유기체론을 상징하는 최초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제 가설이 맞는다면 Longthorpe의 그림보다 약 30년쯤 이후의 것이 된다. 눈은 보안관과 재판관, 가슴은 원로원, 왼쪽 팔은 기사들, 다리는 상인, 농부를 상징. 이 Avis aus Roys 필사본 안에 있는 미니어처는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음. 이 책 제목은 “왕이 본다”는 의미. 책 내용은 왕의 통치와 즉위식, 생활, 덕 등으로 구성됨. 학자들이 이 미니어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불과 4-5년 전부터.

양승태: 이러한 방향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지.
윤비: 제 박사 논문은 마키아벨리. 이런 방향으로 연구한 것은 5-6년 쯤 되었음.

양승태: 오늘 발표는 미술사 연구로도 볼 수 있겠는데, 미술사학계에서 좀 더 뒷받침이 된다면 정치적 의미를 찾기가 더 수월할 것. 그리고 시간개념이 아니라 공간개념으로 보자고 하는데, 사실은 시간 자체에 공간개념이 들어있는 것 아닌가.

윤비: 만약 전파와 지중해지역이라는 틀을 보면 적어도 2개 어드밴티지는 있다고 봅니다.

첫째, 그동안 유럽 중세 중심의 정치사상에서 나타났던 문제 해결 가능. 흔히 유럽의 정치사상사 서술이 가지고 있는 틀에서는, 고대 희랍과 로마의 적자인 유럽의 전통이 어떻게 중세의 등장에 의해 단절되었다가 다시 15세기 르네상스에 의해서 재복원 되는가, 하는 시각이다. 이에 중세 사학자 혹은 사상가들은 “중세 역시 고대로부터의 움직임과 전통에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라는 반론을 내놓고 있음. 그러나 이 두 견해 모두 “어떻게 그러한 지적인 부흥이 15세기에 갑자기 일어날 수 있었는가” 하는 물음에 너무 가볍게 대답하고 있다. 15세기 르네상스를 당시 비잔틴의 멸망과 그로부터 대규모 학자군의 수입과 그리스 원전의 보급 확대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듯이, 12세기 르네상스 역시 당시 스페인을 통해서 유입되는 아랍세계의 지식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갑작스런 지적 부흥으로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나.

둘째, 지중해권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아랍권이 차지하고 있었던 역할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하지 않을까. 아랍이 유럽에 고대 로마 지식을 전달했다는 점에서 기여한 점이 있다는 것은 기존에도 언급이 되어왔다. 그러나 그 주장을 보면, 유럽이 중세 시기 로마와 희랍의 전통을 잊고 있다가 아랍에 의해서 다시 전달받으면서 르네상스가 일어났다는 것. 즉 아랍 세계는 전달자, 보관자의 역할에 머무른다. 적어도 Secretum secretorum을 통해 전파의 과정을 재구성해 보면 아랍이 절대로 그렇게 고대 희랍의 지식을 고이 간직했다가 전달해준 것이 아니었다. 즉, 유럽이 고대의 전통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에 그쳤다고 해석하기보다는, 사실은 고대의 유산을 나름대로 발전시켜왔던, 그 유산을 나누어가졌던 행위자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구대열: 비잔틴이라는 것이 마지막 멸망될 때는 하나의 외딴 섬인데, 고구려사의 평양성의 최후와 비교해볼 수 있을 듯. 비잔틴 멸망 이후에 유럽의 유산이 어디로든 흩어졌을 것. 그 이후 이탈리아에서 다시 시작되었다면, 아랍적인 것, 아랍이 간직하고 유럽적인 것, 그리고 유럽이 간직했던 것이 모두 함께 작용했던 것이 아닐까.

윤비: 저도 그에 동의. 순전히 외인과 전파에 의해서 문화의 발전과 정치론의 흐름이 설명될 수는 없다고 봄. 다만 중세와 근대의 정치사상사, 국가사상사를 바라봄에 있어서 실제로 영향을 미쳤던 알 파라비Alpharabius 등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안 되고 있다.

알파라비가 서양에서 처음 연구된 것은 이슬람전공자에 의해서인데, 9.11 이후 이슬람에 대한 관심에서 연구가 증가하고 있음. 그의 저작의 중요한 한 꼭지는 1950년대 이미 미국에서 번역됨. 그러나 정치 사상사, 주로 중세 사상사 기본서들을 20종 정도 목차를 훑었지만 그에 포함되어 있지 않음.

그런데 알파라비의 국가유기체설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국가론 영향이 클 것이다, 라고 답하고 있음. 그러나 국가유기체론이 정치학보다 약 100년이 앞서있음. 서서히 국가의식이 나타나고 있었지 않는가 하는 견해도 있지만, 그것을 분명히 확증하고 있지는 않음. 그러나 피레네 산맥너머 이런 텍스트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고 하면 그 공백은 쉽게 메워질 것. 이러한 경향은 학문적 패러다임 측면에서 우리 시야가 상당히 고정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봄.

양승태: 당대 흐름도 중요하지만, 지금 현 시점의 사상도 중요하다는 점에서 현재의 학문 패러다임이나 인식을 볼 수 있을 수도 있음.

윤비: 국가유기체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뿌리를 4-5세기 인도에서 찾고 있기도 함.

양승태: 유기체론을 그렇게 몸과 직접적으로 비유하는 것은 유치한 이야기이고, 문제는 전체적으로 유기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더 강조되어야 하지 않을까.

강상규: 아까 이 연구를 하게 된 계기를 물어봤던 이유는, 발표를 들으면서 한편으로 제 친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일본 유학중에 한 친구가 동양의 별자리 공부하는데, 아사이 신문에서 별자리에 대한 벽화가 발굴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혹시 관련 있지 않을까 해서 보내줌. 그 친구는 보내준 자료에서 힌트를 얻어 몇 편의 논문을 썼는데, 그 별자리가 가지는 상징을 해석하는 과정을 보면서 재미를 느꼈다. 오늘 발표를 들으면서도 이러한 상상력을 이용하여 쓴다는 것이 굉장히 흥미있었음.

김성배: 당시 실재했던 중세적 시간과 공간감을 고려해야 하는 문제는 유럽중심주의와 연관되는 것. 한편 당시 중세적 시간관이라는 것이 비유럽적인 것이 제외되었던 시대라면 그것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동아시아에는 어떻게 적용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현재의 우리에게도 많은 의미를 줄 것.

윤비: 이 주제에 관심 갖게 된 이유는, 글 이외에 다른 부분에서 어떤 상상력으로 읽어낼 수 있을지, 그리고 그 밑에는 어떤 정치사상사가 있는가, 하는 물음에서 시작됨.

연구가 부족하지만, 궁극적으로 예술사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Longthorpe 집안에 대해서 연구해야 하지만, 그것을 사실 정치학자가 할 파트는 아니라고 봄.

하영선: circulate되고, 또 localize되는 것에는 다 연유가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함. 전파연구의 시작은 경로사이다. 전파의 모습을 보면, 아예 전파가 안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보다 쉽게, 또 어떤 것은 굉장히 힘들게 전파된다. Secretum secretorum이 고대 유럽에서 아랍, 그리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오는데, 그렇게 전파되는데는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이유가 있었을 것임. 당시 아랍 식의 유기체론이 어떻게 살아있었고, 그들의 문화나 종교가 그 속에 어떻게 남아 있었는지, 그리고 다시 유럽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그리는 일은 정치학자가 할 수 있을 듯. 동주의 미술사 얘기를 한국미술사학계에서 경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

윤비: 이 논문을 처음 발표하고 수정하면서 든 생각은, 알파라비 책이 최근 번역되어 나왔는데, localization 측면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부분. 아랍권과 유럽권의 circulation방식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살필 수 있다는 측면에서 localization 문제는 더 중요. 예를 들어, 아랍권의 Secretum secretorum은 대체로 수장들의 배타적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던 반면, 유럽권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 텍스트는 왕의 권력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쓰였는데 이는 개인의 왕에 대해서 국가의 왕을 처단할 수 있다는 의미로 쓰임. 이러한 해석차는 그 localization의 매커니즘의 영향이라고 생각됨.

최초 그리스 세계의 사상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중 하나인 Secretum secretorum 사고 체계가 지중해를 타고 circulation되다가 10세기 이베리아반도로, 그리고 마그나카르타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면, 한 사상의 흐름이 권역을 넘어 움직이고 있지 않았을까. 즉, 이슬람권과 유럽권을 나누고, 그 가운데서도 서유럽권에 특정하기보다는, 거시적으로 전체 그림을 보아야 할 것. 전파라는 문제도 단순히 주고받는 문제가 아니라, 너와 나를 형성해 나가는 중요한 사상사의 element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양승태: Secretum secretorum 의 전파 자체가 중요할 것.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전파되고, 읽혔으며, 실제 어떻게 작동하고 이해되었는지를 보아야 할 것. localization이라고는 하지만 모든 사상이 스스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일단 정치사적으로 Secretum secretorum 자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

하영선: 초보적인 것은 경로사부터 시작해야 할 것.

윤비: 제일 좋은 방법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학자들이 모여서 각 지역에서 발췌한 부분이 왜 다른지 보는 것.

하영선: 공동 연구가 반드시 잘되리라는 보장은 없음. 오히려 혼자 해야 하는 작업일 수 있다. 가령 한국, 일본, 유럽언어 전문가들이 토론하면 답이 나올까? 한 사람이 여러 언어를 조금씩이라도 공부해서 연구해야 보다 유기적이지 않을까.

강상규: 오늘 발표를 보면서 마치 쥬라기 공원 영화에서 모기피에서 공룡 DNA를 추출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림도, 아이디어도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 그만큼 내공이 느껴지는 발표였다고 생각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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