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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대한제국의 서구식 대례복 패러다임>&김성배,<유교적 사유와 근대 국제정치의 상상력>(09.12.12)
 

2012-02-29 
일시: 2009년 12월 12일(토) 오후 3시
장소: 경기도 수지 세계정치연구소
참석자: 하영선, 구대열, 양승태, 박명규, 전재성, 강상규, 마상윤, 김현숙, 윤비, 김준석, 손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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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1. 이경미 박사님, 박사학위논문 <대한제국의 서구식 대례복 패러다임>

이경미: 저의 문제의식은 조선후기 복식관의 변화에서 시작되었음. 기존의 유교적 복식체계(대외적으로는 화이론적 세계관, 대내적으로는 禮질서 강조)에서 조선 중화주의, 조선의 의관문물제도(조선문화에 대한 자부심의 표상)로의 변화는 어떤 모습이었나?

서구식 대례복 패러다임은 19세기 후반 서세동점으로 등장하게 되었음. 이는 유럽 공법적 세계관과 독립된 주권 국가를 표상하고 있었으며 유럽 문화 우월주의를 접하게 됨. 그 결과 1897년 대한제국 선포, 1900년 대한제국 정부 서구식 대례복

조선후기 복식에 나타나는 중화의식을 보면, 중화의식에 적합한 복식과 부적합한 복식에 대한 구별이 분명함. (적합한 것: 백의/ 성인남자-상투, 망건/ 성왕(聖王)-冕服, 弔服, 祭服
부적합한 것: 부인의 修飾-가락지, 귀고리/ 동자-編髮)

(사진) 冕服 (근대적으로 치면 대례복에 해당-吉禮, 하늘에 제사지낼 때)
조선은 제후국이기 때문에 십이장복(十二章服) 중에서 아홉가지만 쓸 수 있으며, 천자로부터 선택을 받음. 해, 달, 성신은 천자만 사용할 수 있음. 구슬도 9개만 사용 가능. 유교적 국가로 인정받았다는 의미를 지니며, 일본은 받지 못했음. 청나라는 처음에는 이를 입지 못했으며, 명이 망한 이후에 스스로 만들어 입었을 때조차도 12장복을 쓰지 않음.
조복, 제복, 상복 또한 서열에 따라 나뉨.

양승태: 복식문제가 일어나게 된 계기는?

이경미: 박규수뿐만 아니고 송시열도 계속 문제제기를 하고 있음. 실록에서도 이러한 기록이 있음. 그러나 18, 19세기 지나면서 교조화되는 경향이 있음.

구대열: 명청 교체기 이후에 그러한 논란이 등장했는가?

이경미: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변발에서 다시 상투로 바뀌었는데, 이 때 정몽주의 역할이 컸음. 그래서 그를 오랑캐를 중화주의로 바꾼 성인이라 기록함.


강상규: 옷의 종류가 굉장히 다양하고, 직선을 곡선으로 바꾸는 것 등의 문제도 매우 미묘해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음. 시각적으로 보여주면서 설명해주시는 것이 많이 도움됨.

이경미: 일본의 서구식 대례복 제도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당시 일본도 복식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었음.

(사진)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의 모습(출발직후): 이와쿠라 사절단은 전통복식. 자부심이 느껴짐. 미국 대통령 접견 시에도 착용. 빅토리아 여왕 접견 시에는 서신교환을 통해서 도안(디자인)을 받아서 서양 복식을 만들어 입고 만남.

이때 실제 디자인을 보면, 꼼꼼히 자수를 넣었음. 하이넥. 오동잎과 같은 천왕의 상징을 집어넣음. (국화는 문장이 12세기부터 있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처음 이를 썼는데, 이후 무사단 사이에서는 이를 국가의 상징으로 생각함.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를 만들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는 자수가 들어간 양식으로 만들었던 반면, 유럽에서 만들어 넣은 것은 유럽식으로 해야 했음.)

1875에는 대례복을 바꾸었기 때문에 경례식 제정. 절하지 않음. 1886년 대례복 정착. 프랑스식으로 바뀜. 대한제국의 경우 이를 모방함. 영국은 군복으로서, 프랑스는 대체적인 분위기를 영향을 받았던 듯 하지만 분명치 않음. 일본에서는 옷에 수놓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새롭게 개발해야 하는 상황이었음. 우리나라의 경우 전통적으로는 견사로 자수를 놓았다면, 이 시기 이본에서는 양감이 있는 두꺼운 실로 자수를 놓음. 단추, 바지 측면에도. 1884년 복식사에서는 구화주의(歐化主義)를 강력하게 외쳤던 시기이기 때문에 굉장히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음. 예를 들어, 유작자(有爵者)의 경우 그 대례복 백작, 후작이냐에 따라 소매와 견장이 다름. 한일합방 이후 작위를 받는 친일파들이 입었음. 문관 예례복은 프록코트(연미복)로서 국화 가지 도안. 우리나라는 줄여서 넣음. 구화주의의 강조와 더불어 도입됨. 이 시기 몇 년 전 수신사 방문이 있었음.

일본의 서구식 대례복 문양은 그 의미가 바뀌는데 1. 오동문양: 황실과 武家의 문양에서 국가의 문양으로, 2. 국화문양: 황실의 문양에서 황실 측근까지 범위 확장.

다음으로, 대한제국의 서구식 대례복 제도로의 변화를 보면, 서계 문제에서 처음 서구식 대례복 문제를 대하게 됨. 그리고 강화도조약은 전통예복과 서양식예복 입은 사람들 사이의 조약체결이었음. 조선이 최초로 양복과 접한 사건. 개항 후 일본에 파견된 1차 수신사와 1881년 조사시찰단의 서구식 대례복 경험은 이미 존재. 김홍집 등은 조선 전통적 복식관 고수. 이와쿠라 사절단은 서열에 따른 복식 제도에 민감했던 반면, 우리나라 조사시찰단 등은 그렇지 않았음.

1982년 박영효 수신사 파견 시 사진 촬영을 보면 양복 단발함. 일본에서 처음 단발. 아직 의제 개혁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복식의 서양화가 필요하다는 의식이 있었음.  1884년 갑신 의제개혁 때 두루마기로 기존 복식 체계를 간소화함. 그러나 갑신정변으로 곧 철회됨. 1894년 갑오 의제개혁 이후 대례복을 쓰기 시작했던 듯. 형식적으로 보면 명칭은 대례복이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흑단령(黑團領)을 씀. 내용은 그대로 두면서 명칭만 바꾸는 식. 1895년 을미의제개혁 단행. 단발령 시행하나 곧 철회. 이러한 변화는 당시 외교관계의 영향. 요컨대, 기존 복식을 간소화했으며, '대례복'이라는 근대적 의미의 형식에 '흑단령'이라는 전통적 내용을 접목시킴.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1899년 원수부(元帥府)관제: 전체적인 틀은 육군 복장

양승태: 원수부 제복은 외국으로부터 그대로 수입?

이경미: 양모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생산이나 디자인을 못했기 때문에 외국에서 수입. 단발령은 철회되었기 때문에, 고종이 양복을 입은 것은 1898년.

(사진) 예복/상복 (왕에 대해서는 대례복이라는 말은 안 씀) 을 보면 프러시아 제복 같음.

일본 복식제도에서도 한 번의 과도기가 있었는데, 자수 형태 등이 새롭게 바뀜. 대한제국에서도 문양이 다양했던 시기가 있었음, 이 시기를 과도기라고 볼 수 있을 것. 이 시기 의복연구는 주로 외교관들의 사진이 증거가 되고 있음. 외교적 상황에서는 무조건 입어야 하는 것이 규정. 이 시기 문양으로 무궁화가 들어가기 시작. 주임관은 완성된 무궁화는 없고 반개씩.

구대열: 이러한 규정은 어떻게 정해졌는지?

이경미: 일본의 것을 따름. 고려대 박물관에 유길준 유물 중 주임관의 것 - 무궁화 반쪽짜리 네 개 -으로 보이는 의복 있음. 1904-5년 칙임관은 온전한 모양의 무궁화 4개-5개였음. 1906년 문관대례복 개정. 일본의 유작자 대례복 형태와 유사. 1910년 이후에는 그대로 총독부 하의 대례복 관제로 이어짐. 그래서 이 시기 친일파 사진이 많음. 송병준, 이완용 등.

구대열: 1896년 윤치호는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참석 때에는 그 시기 대례복이 없었다. 그런데 윤치호 재혼 사진에는 대례복을 입은 모습이다.
1907년 일본 황태자 방문 시기. 다이쇼 천왕 때 - 이때가 되면 양국의 복식이 거의 같게 됨. 목걸이 견식을 일본 황태자가 가져왔음.

이경미: 궁내부 본부 및 예식원 대례복 제정. 일본의 대례복을 기초로 친임관, 칙임관, 주임관 대례복 제정. 이후 대한제국 서구식 대례복의 정체성 상실. 특히 1910년 조선의 귀족 대례복은 유작자 대례복 제식에 의거하도록 했음.  

1906년의 시기를 보면 전통, 대한제국, 일본의 세 가지 유형의 대례복이 모두 존재했음. 공존하는 형태. 그리고 국가의 문양은 일본은 오동, 대한제국은 무궁화. 무궁화 자체를 꽃 도안으로 쓴 것은 이때가 처음. 왕실 문양은 오얏 문양인데, 왜 무궁화를 쓴지는 모름.

양승태: 왜 그랬는가?

강상규: 1900년 전후 국화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던 듯. 국토를 상징하는 근위(近衛)의 의미로서 받아들였던 듯.

이경미: 종합하자면 대한제국의 서구식 대례복을 고찰하면서 서구식 대례복 도입의 제문제를 바라보게 됨. 1. 세계관에 대한 인식전환. 아프리카인, 유럽, 일본의 복식에 대한 인식. 2. 서구식 대례복 제작의 문제. 제 결론은 대한제국의 서구식 대례복 제정의 의의, 대한제국의 서구식 대례복 도입과정에서 일본의 역할 측면에서 1906년이 중요했던 시기라는 점. 통감부 시절에 변화가 있었다는 느낌을 받음.

강상규: 의복 개혁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고종의 입장은 변화를 겪음. 1872년 연행사 때를 보면 복장 문제를 민감하게 생각. 그러나 우리 것에 대한 의식 강함. 비록 결정적으로 바뀌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증거는 못 찾겠으나, 1884년에 고종의 입장이 바뀌게 됨. 황현에 따르면 박영효나 민영익의 견해 때문에 바뀌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잘 모르고 하는 소리. 고종은 이 문제를 한참 고민해왔고, 그러면서 바뀐 것이다.

하영선: 갑오개혁과 광무개혁 때 군국기무처의 의도를 보면 원형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인데, 의복개혁에서도 같은 논리인가? 광무개혁은 구본신참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는데, 복식의 경우에는 1897년 당시 서양이나 일본 것을 채택하지 않았는지?

이경미: 1897년 개혁을 보면 구본신참을 주장하면서, 왕정복고에 우선 중점을 둠. 복식에 있어서는 1897년에는 이전의 복식을 그대로 유지하다가 3년 이후 의복 개혁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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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선: 복식연구를 통해서 이 시기 국내외 정치적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는 실증적인 작업이 선행되어야 함.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변화/개혁의 과정의 애환을 담아내야 함. 같은 의미에서, 모리야마 시게루와 이홍장 간 대화를 실증적으로 밝히는 작업 이후에, 이를 통해서 당시 국제정치의 뒤에 놓여 있는 스토리가 정리되기 시작해야 함.

구대열: 복식은 결국 국가 아이덴티티 문제와 연결된 것. 청나라에서는 1645년 단발령이 시행되면서 작은 마을 하나에서 10만 명이 학살당함 - 단발 안하면 숙청. 한편 몽고 복식으로 바뀔 때 또한 또한 궁금해졌음. 몽고식/몽고풍에 대해 우리나라에서도 반응이 있었을 텐데 그 저항이 어떠했는지 알아보면 좋을 듯.

양승태: 몽고에서도 복식이 따로 있었나?

이경미: 일상적인 의복은 그대로 하면서 의례가 있을 때에는 몽고식으로. 공민왕의 청산대렵도를 보면 머리모양은 변발형식으로 원나라와 유사.

하영선: 양복 도입사의 연구 현황은 어떤가?

이경미: 개화기 이전까지는 전통복식, 개화기 이후로는 현대복식으로 정리. 그러나 각기 따로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 연결이 필요. 실제 양복이 처음 도입된 것이 1882년 인지 의문. 갑신정변 이후 일본사진관에서 찍은 사진(박영호, 서재필, 서광범, 김옥균)이 조야신문 1898년 10월 27일자 공개가 되었는데, 일본 동경의 한 사진관에서 촬영되었다고 함. 그에 따르면 확실하지 않으나 1882년에 찍었다고 하는데.. 아울러 공복/사복과 차이를 일러스트와 대조해볼 필요. 그리고 대례복이 정해지는 과정에서 흑단령으로 바뀌었던 이유에는 어떠한 영향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연구할 필요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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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2. 김성배 박사님, <유교적 사유와 근대 국제정치의 상상력-구한말 김윤식의 유교적 근대수용> (창비, 2009)

김성배: 禮의 국제정치는 근대국제질서와 접하게 되면서 매우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보인다. 대륙과 반도, 열도와의 사이에서 등장했던 근대 국제정치의 유형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외교나 국제정치사를 공부하면 유럽사를 먼저 배우게 된다. 그리고 한국의 국제정치학사에 대한 비중은 작은 편이다. 앞으로 국제정치학 연구는 한국 근대의 국제정치 모습에 좀 더 관심을 가질 필요. 김윤식은 전통과 근대의 만남이라는 점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인물

김윤식은 초기에는 민씨척족과 개화당(박규수 문하) 양측 인사들과 주로 친분을 맺었으나 영선사행과 임오군란 이후에는 청의 정치적 후원을 받아 개화당과는 멀어져 경쟁하는 관계가 됨. 갑신정변 수습을 계기로 김홍집, 어윤중 등과 함께 일시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민씨정권과는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의 환국을 추진하였으나 대원군 유폐로 뜻을 이루지 못함.

이후 원세개, 민영익 등과 함께 대원군 옹립 계획을 모의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유배됨.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을 계기로 정계에 복귀한 이후에는 일본의 정치적 후원을 받아 박영효, 김홍집 등 조정 관료들과 연합하여 왕실과 대립. 그리고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계기로 다시 실각하여 제주도 유배에 처해진 이후에는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함.

김윤식이 다른 유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근대수용에 적극적일 수 있었던 철학적 근거가 있다면 무엇인지 밝혀보고자 했음.

김윤식은 자연사와 인간사를 氣數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과정으로 보는 만물상감설을 전개하고 있는 바, 이는 그의 세계관에서 우주관과 역사관이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줌. 김윤식의 역사관은 義理循環의 시간관에 기초하고 있으며 시의, 시운, 시세, 시무가 있을 뿐 진보라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음. 김윤식에게는 과거-현재-미래가 동시에 공존하는 서양 중세적 동시성이 발견되는데 각각 과거(요순삼대)와 미래(구세주)에 예속되어 있는 차이점이 존재. 전통 유교적 사유는 근대 수용에 결정적 장애로 작용하지 않으나 시간과의 괴리는 넘을 수 없는 것으로 보임.


양승태: 전형적으로 노론 흐름에서 변화를 얼마나 설명할 수 있을지? 명성황후 시해에 관하여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이유로 제주도 유배되었는데, 당시 그 죄를 그렇게 가볍게 처벌한 이유는?

김성배: 유배는 제주도가 처음은 아니다. 그리고 당시 청이나 일본의 구명운동이 있었다.

양승태: 호락논쟁에서 낙론이 구미 문물 수용의 바탕이 되었다는 주장에 대한 보충이 필요하지 않은가? 낙론계에서 김윤식과 비슷한 논의를 하고 있는 사람은 없나? 김윤식이 개인적으로 특이한 케이스인지, 아니면 유교 흐름 속에서 중간에 등장할 여지가 있었던 사람인지? 사상사적 연속성 측면에서 김윤식은 어느 정도 위치인지?

김성배: 호락논쟁에 대해서는 pp.101-106에서 다루고 있음. 정치세력을 결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김윤식이 실패한 것이 아닌가 생각됨.

양승태: 정치세력을 결집할 수 없었다는데  유림의 대표성이 있었다는 평가는 그를 반증하는 것 아닌가?

김성배: 당시 기호지방의 노론들은 정치참여를 했음. 그러나 그 유림들은 대부분 지방에 있었는데, 그 만큼의 정치세력은 없었던 것. 따라서 대원군에 접근하려는 시도를 했었음. 그러나 그러한 모든 시도가 실패함.

김성배: 제 문제의식은 근대시기를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시작됨. 근대국가모델 간의 경쟁구도였나? 1880-94년까지 청의 양무개혁모델을 정말 따라갔었나? 청과 일본의 경쟁 사이에서 청을 따라가고 있었나? 현실 정치에서 청, 일본밖에 없었는지, 미국 모델과의 통합까지 포함하지 않았을까?

김윤식을 통해 그가 살았던 시대를 바라보게 되면서, 저는 당시의 현실정치가 '문명역전의 시대'였다고 평가. 그 시기의 국제정치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당시 위정자들의 사고가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한 정치가의 사상만을 보면, 그들의 고민의 내용이 약하게 느껴질 수 있다. 반면, 김윤식의 경우도 그렇고,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인물을 이해한다면 그 시기의 고민에 담긴 국제정치의 모습에 보다 쉽게 다가가지 않을까.

김윤식은 이홍장과 한미수호조약 초안을 검토하면서 속방 조항에 찬성하였으며 ‘자주는 가하되 독립은 불가하다’는 기묘한 논리를 견지하였음. 그러나 전통적 사유에서는 내치외교의 자주권이 보장되는 한 사대관계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었음.

김현숙: 광무개혁 시 개혁 모델을 러시아식이었다고 보시는지? 개혁에 참여했던 러젠드르는 황제권 강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러젠드르는 1896-7년도에는 영향력이 꽤 있었긴 하지만, 의외로 군부 이외에 다른 부처에서는 미국이라 프랑스 쪽의 영향이 더 많았다고 느꼈었음.

김성배: 러시아 모델을 목표로 했다기 보다는, 황제 권한을 되돌리려는 의도가 핵심이었고 그 과정에서 러시아 모델과 유사하게 진행되었다고 봄.

구대열: 미국식, 독일식을 진심으로 그 내용까지 추종했던 것인지, 아니면 겉보기에 비슷하기에 그것을 모델로 삼은 것인지 의문.

김성배: 저는 複數의 근대와 複數의 전통이 만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강상규: 허동현 씨는 이 시기 러시아 모델을 따라가고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그에 따르면 일본과 대치하던 상황에서 러시아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러젠드르도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들어온 고문이었는데, 그 경합 속에서 러시아

윤비: 김성배 선생님 발표를 들으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중세 근대 정치사상을 공부하면서 종종 저지르는 실수는, 근대 이전은 비현실주의적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즉 중세를 이상주의 관념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으로, 그렇게 단색으로 칠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 근대 이전의 '禮질서'에서도 다양한 유형이 존재했다. 그러한 점에서 동일한 언어로 표현되는 여러 가지 다른 개념, 다양한 사고들을 보여주시고자 했다는 점에서 도움이 되었음.

하영선: 한국이 겪은 근대 국제정치는 전통과 근대의 양분법이나, 사학계의 3분법(위정척사, 동도서기, 문명개화) 시각으로 충분하게 담아낼 수 없다. 박영효, 김옥균, 유길준 등 개화파 들도 주자학적 전통에서 근대를 받아들였다. 김윤식도 그렇고, 스승인 박규수도. 비슷하다.

박규수의 글들을 국사학계는 국문학의 김명호 교수만큼 꼼꼼하게 읽지 못했다. 김 교수의 주장은 박규수의 성장기부터 자세히 따져 보자는 것인데 그러한 문제제기는 옳다. 박규수는 단순히 개화의 대부가 아니라 전통과 근대의 복합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수제자인 김윤식도 만국공법 시각을 받아들여 실제로 거문도 사건 때 이런 시각을 활용한다, 이 때 김윤식의 고민은 어땠을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세련화 된 유형화가 필요.  현실 정치의 김윤식을 좀 더 상세하게 연구하면, 할 이야기도 많고 그에 적절한 유형이 나올 듯.

국내 학계의 한국외교사 연구를 보면, 김성배 박사를 포함한  80년대 학번으로 나와 함께 박사 학위를 한 네 사람정도다. 당시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던 김성배 박사에게 본인의  성향과 정반대의 인물을 연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김윤식을 추천했다.

양승태: 발표자는 김윤식이 일반적으로 매력 없는 사람으로 인식된다고 했는데, 현실 적응력이 있었던 유교적 인물의 전형이 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매력이 있다고 봄. 근대를 대변하고 있다. 오히려 그러한 면모가 당시의 고민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듬. 다시 말하면, 일정한 범위 내에서 국제정치의 상상력을 발휘하고자 했을 것. 덧붙여 호락논쟁에 대한 보다 깊이있는 논의 필요.

하영선: 당시 사람들이 상상력이 없었을 리가 없다. 오히려 지금보다 몇 배의 상상력과 고민을 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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