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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진,「서유견문 해제」, 흥선대원군 사료휘편 제3권 (09.11.07)
 

2010-07-23 
2009년 11월 7일 전파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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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 하영선, 구대열, 김봉진, 전재성, 강상규, 윤비, 김준석, 김현숙
발표: 김봉진, 「서유견문 해제」
발제: 전재성, 김준석
     흥선대원군사료휘편 제3권 (현음사, 2005) 중
     <日韓外交資料集成>(pp.7-43),  <秘書類纂(조선교섭자료)>(pp.437-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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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발표

김봉진, 「서유견문 해제」

본 논문은 2004년에 전파모임에서 발표한 내용을 바탕으로 서유견문의 저작 및 출판경위, 내용 및 의의를 정리한 글. 후쿠자와 저작과의 비교도 포함. 서유견문에 있어서 전통과 근대가 어떻게 이종교배(hybridization) 되었느냐, 하는 시각으로 접근하고자 함.

▷ 유길준이 맨 처음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1881년.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간 것을 계기로 그곳에 남아 후쿠자와 유키치가 운영하는 게이오 의숙에서 유학하면서부터. 후쿠자와에게 배운 것은 1년뿐이었으나, 굉장히 큰 영향을 받고 그것을 글로 쓰고자 했음. 이 때 신문장정, 경쟁론 등 몇 편의 글을 씀. 이후 보빙사에 가서도 계속 글을 써서 책으로 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 그러나 1882년 귀국 이후에는 곧 보빙사로 미국에 가게 되었고, 미국에서는 학업 때문에 저술 기회가 없었음.

▷ 에드워드 모스(Edward S. Morse)와의 만남: 유길준은 1883년 보빙사로 미국에 갔다가 민영익의 허락을 받고 현지에 남아서 유학. 그 계기가 된 것이 모스와의 만남. 로렌스 로웰(Lawrence Lowell)의 소개로 Salem시에 있었던 모스를 만나게 되고, 그의 집에서 유숙하면서 덤머 아카데미(Dummer Academy)에 수학. 모스는 친(親) 일본적 시각을 갖고 있었는데 일본을 미국 사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 그 과정에서 유길준으로부터 얻은 조선에 대한 지식은 일본과의 비교를 하게 만듬. 조선과 일본의 여성들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이를 통해 보았을 때 폐쇄적이고 어둡다는 인상을 받았던 듯. 조선의 생활상에 대해 유심히 물어오는 모스에게 설명을 해주면서 유길준도 조선과 비교되는 미국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

▷ 미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인: 보빙사 인터뷰 한 것을 보면, 유길준이 굉장히 gentle하며 깨알같은 사전을 가지고 다닌다는 묘사가 있음. 보빙사에 대한 우호적 인상. 특히 호기심 많고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는 기록.

▷ 덤머스쿨 이후 갑신정변으로 당황. 짐을 꾸리면서 방황 한 기간이 4-5개월. 덤머스쿨에서 나온 날과 미국을 떠난 날 사이 수개월. 그 공백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음. 떠나는 날짜는 1885년 6-7월 쯤.

구대열: 곧장 조선으로 돌아오는가?

하영선: 유럽을 돌아서 일본에서 김옥균 만나고 들어옴.

김봉진: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난 것이 미국 신문에 난 것을 학우가 알려줌. 그 소식을 듣고 잠을 못이뤘다는 기록. 그러면서도 학업은 계속 함. 언제 학업을 마쳤는지, 어떻게 그만두게 된 것인지, 미국 다른 지역을 여행했는지는 알수 없음. 필라델피아에 관한 이야기가 서유견문에 나오는데, 직접 가지 않고 썼는가? 보빙사는 들르지 않았었는데, 유럽 가기 전에 필라델피아 들렀을 수도. 독립선언서에 대한 관심에서 가지 않았을까 상상.

구대열: 당시 독립선언서에 대해 당시 그만큼 관심이 있었겠는가? 미국의 독립이라는 문제가 당시 그만큼 절실하게 드러났었을까?

김봉진: 보빙사 인터뷰를 보면 워싱턴을 아느냐는 질문에 유길준이 안다, 대단한 정치가다, 라는 답변을 함. 조선은 이미 미국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고, 또 일본에서도 들었을 것.
갑신정변 취조문을 보면 갑신정변의 쟁점은 독립이었다. 그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독립이라는 말에 모두 들고 일어났던 것. Independence. 일본에서는 독립이 큰 이슈였다.

강상규: 한성순보에도 미국의 독립에 관련한 기사화 된 것을 본 기억이 있음.

김봉진: 그것도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소개했는지, 급진개화파의 입김이 작용해 소개되었을 수도 있음.

유럽의 도시들에 대한 기록: 서유견문 마지막 19-20편. 유럽 국가를 다 돌았는지에 대한 의문. 다 돌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순서대로 돌지는 않았을 수도. 지리적으로 근접한 국가들을 먼저 돌았을 수도. 다 돈다고 한다면 일정이 매우 빡빡하다. 각 도시들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조선에 돌아와서는 연금상태. 원고의 대부분은 분실. 남은 원고를 가지고서 분실한 원고를 채워 넣음. 여기서 또 의문은 그 남은 원고는 어느 부분이었을까? 추후 다시 쓰게 되었던 부분은 후쿠자와의 서양사정 등 외국에서 갖고 온 서적들을 참고하지 않았을까? 서양사정은 테마적으로도 자기가 쓰려는 목적과 부합. 애초에 처음부터 서양사정의 번역본을 쓰려하지는 않았을 것. 서유견문 전체 구성을 보면서 서양사정의 일부를 채워 넣지 않았을까.

유길준이 서양사정을 베꼈다는 주장 반박: 베꼈다고 하더라도 베낀 양은 3분의 1남짓. 따라서 서양사정을 베꼈다는 주장은 과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삽입. 특히 결론으로 갈수록 자기주장이다. 미묘하지만 의미심장한 차이가 많다. 물론 내용적으로 유사한 부분이 많다.

그렇다면 왜 서양사정을 참고하였는가? 견문록을 쓰려니 서양사정이 가장 적합. 후쿠자와의 초기작에는 유길준이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 유길준이 유학하는 1880년대 후쿠자와는 이미 자유민권론자가 아니라 팽창주의자, 제국주의자로 변모. 유길준은 당시 최신 저작들은 건드리지 않는다. 이것은 부작위(不作爲)의 비판으로 볼 수 있을 듯. 그러나 일본에서 돌아와서 미국 가기 전 약간 보수적인 시각으로 후퇴하게 되는데, 예를 들면 "경쟁"을 "격려"로 바꿔 쓰고, 국권을 강조함. 결국 1870년 중반 이전의 자유민권론자 후쿠자와, 그리고 그 시기 쓰여진 서양사정에 유길준은 가장 공감했던 것. 그 이후 근대주의자 이자 제국주의자로 변모한 후쿠자와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1870년대 중반까지 저술된 학문의 권장, 문명론의 개략까지만.

왜 교순사에서 출판되었는가? 교순사는 후쿠자와가 만든 사교 클럽이자 출판사. 초기 회장 후쿠자와, 1895년 유길준은 원고를 후쿠자와에게 맡김. 갑오개혁 초기, 1894년 9-10월 즈음 장빈의 아들 의화군-급진개화파들이 옹위하려고 하는 인물-이후 독립운동가들도 주목. 유길준은 의화군을 데리고 일본에 가는데, 이 때 후쿠자와와 문답. 그러나 맞수가 안됨. 이후에 김옥균도 후쿠자와, 일본을 이용하려하였으나 그 만한 뒷받침이 안 되었다.

2편 中 무엇을 토대로 세계지리 등을 썼는가? 남의 책을 보고 역출. 당시 일본이나 유럽의 세계지리 교과서를 보고 와서 썼을 것. 일본에서든지 덤머스쿨에서 배웠던 것을 바탕으로.

3편 中 방국의 권리: 정용하 박사가 지적을 하였듯, 데니(O. N. Denny)의 청한론의 번안, 즉 자기 식으로 번역함. "청"을 "중국"으로, "국권론"을 "방국의 권리"로 용어를 바꿔 씀.

4편 中 인민의 교육, 인세의 경려(競勵)로 구성. 모두 서양사정 중 외편의 내용 번안한 것. 새로운 창작이 거의 없이 대부분 번역. 후쿠자와와 유길준 "권리"에 대하여는 전에 논문을 쓴 것이 있음. (김봉진, "서구 "권리" 관념의 수용과 변용 :유길준과 후쿠자와 유키치의 비교 고찰", 동방학지 제145집, 2009, pp.65-104) 유길준은 여기서 후쿠자와의 권리론보다 훨씬 길고 풍부한 논의. Competition을 경쟁이 아니라 경려(競勵)로 번역. 다투지만 권하면서. 유교적인 정신.

구대열: 경쟁(競爭)이라는 말은 원래있지않나?

김봉진: 경서에서는 쟁(爭)을 안씀. 병서(兵書)에서는 쓸지 몰라도.

9편 中 통계는 베끼지만 후쿠자와의 병론(1882년)에서 베끼지만, 병(兵), 군(軍)을 보는 시각은 다름. 유길준은 무(武)는 어디까지나 자위(自衛)를 위한 것.

10편 이후는 서양사정에 없다. 다만 화폐에 관한 내용은 후쿠자와의 통화론(1878)을 참고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음. 법률은 유럽이나 미국의 이야기가 많음. 순찰 규칙에 대해서는, 동생 유성준이 경찰규칙을 저술했다고 하는데 연관이 있지 않았나.

하영선: 유형준 관련 최근 에피소드. 하버드 방문연구원으로 가있는 박사과정 이헌미에게 연락이 옴. Salem시 박물관에서 서간집을 발간, 그 가운데 유길준에게 보내온 궁체로 쓴, 겉봉도 없고, 찢어진 편지가 있는데 카터 에카르트가 독해 도움을 요청. 그런데 보낸 사람의 이름이 없고 편지에 "종제(從弟)"라는 표현이 나와 유길준의 가까운 친척들을 찾아 보았음. 친동생 유성준은, 1884년 10월  편지를 모스에게서 유길준이 받을 당시 서울에 돌아왔음.  1884년 조선인으로 도쿄에 유학중이던 일본 유학생이 50명이었음. 그 중 유씨를 찾는 과정에서 이수정과 관련한 기록 중 1886년 귀국 시 유형준과 같이 귀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유형준은 유길준의 6촌 동생이다.(『유길준전』(유동준))  1983년 견미사절단을 가면서 유길준이 김옥균에게 친동생 유성준과 6촌동생 유형준을 일본유학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김옥균은 1883년 견미사절단 직후 1차 선발대로 유성준, 3차로 유형준을 일본 유학 보냄.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나 귀국하라고 명령이 떨어졌는데, 동생은 제 날짜에 귀국해서 괜찮았으나, 유형준은 이수정과 늦게 들어와서 사형 당함. 이후 1984년 김옥균과 함께 복권됨.

결론적으로 유형준이 쓴 편지임. 그런데 편지의 내용을 보면 유형준이 경찰규칙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자신이 현재 배우고 있는 경찰규칙이 귀국 후 쓸모가 있을지 고민하고 있음. 후쿠자와에게 경찰규칙을 배웠다는 것은, 당시 유형준이 군사학교에서 배우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음. 재미있는 것은 1883-5년 어간의 유씨 집안의 움직임이 찢어진 편지 하나로 상당히 자세하게 밝혀지고 있다.
덧붙여, 서간집에서는 편지 내용 중 이노우에 가쿠고로(장관)와 이노우에 가오루(대사)를 착각해서 잘못 해석하고 있는데, 셀럼시 박물관은 결정적인 오독(誤讀)을 교정받은 셈..

글쓴이와 내용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다음으로 유형준이 왜 경찰규칙을 배우고 있었는가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할 차례이다.

김봉진: 하선생님 말씀 듣고 보니, 유형준이 경찰규칙을 쓴 것이 아니라 배웠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것 같다. 유길준은 유형준의 경찰규칙을 순찰의 규칙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듯.

구대열: 경찰문제에 대해서 유길준이 어떠한 해답을 보냈는가 하는 점은 중요한 문제이다. 또한 경찰의 성격이 빅토리아시대 이후 친 시민적으로 바뀌게 되는데, 유형준이나 유길준이 그러한 의식을 갖고 있었는지 여부도 중요하다. 그리고 경찰규칙을 공부한다는 것이, 귀국 후 포도대장 등 군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요직에 오를 기대를 하고 있었을 수도.

하영선: 갑신정변 이전이니 상당한 꿈을 가지고 유학갔을 듯. 경찰, 법 등 각기 분야를 나눠 배웠을 듯. 그 꿈은 늦게 귀국했다는 이유로형장의 이슬로 사라짐, .

김봉진: 유형준 귀국이 지체되면서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 박영효와 만났다는 정보가 조선에 들어갔을 것.

하영선: 편지 도착 시간. 5월에 부쳤는데 10월에 도착

구대열: 1910년대만 해도 도쿄에서 런던으로 편지를 보내려면 3-5주 걸림. 샌프란시스코에서 미대륙을 건너 런던으로 보냄. 외교 문건을 보내는데 3-5주 걸렸다는 것은, 실제는 훨씬 많이 걸렸다는 이야기.

하영선: 그리고 궁체 언문으로 기록했는데. 암호용이었나? 굉장히 읽기가 힘들다. 그리고 편지는 왜 찢어져 있었는지? 우연인지,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지.

김봉진: 국한문혼용체를 둘러싸고도 유길준, 이노우에 가쿠고로, 후쿠자와, 강위(姜瑋)와의 논의가 있다. 후쿠자와는 유길준에게 문자의 교(敎)라고 하여 가르치면서 조선도 가나처럼 혼용체를 써야한다고 이야기. 강위는 이노우에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도 함. 독립신문은 이들의 논의가 바탕이 되었던 것. 유길준 형도 유형준에게 한글을 쓰라는 설교가 있었을 것.

하영선: 편지 보낼 때 일본 우체국을 통했을 것이다. 결국 감시체제 때문에 한글로 쓴 것 아닌가?

김봉진: 아직까지 유학생들에 대한 감시체계가 철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갑신정변 전까지는 개화파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구대열: 로마시대 시저가 본국에 서신을 하면서 그리스 문자를 써서 보냈다. 로마문자를 쓰면 누구나 뜯어볼 수 있으나, 그리스어는 암호처럼 클래식을 공부한 사람만 읽을 수 있었다. 2차대전 때도 유명한 일화가 미국이 인디언들 사이에 교신을 하게 함. 일본이나 독일의 암호는 해독되었던 반면 인디언들 사이의 언어는 해독 불가했었다.

윤비: 당시 언문체계가 유난히 어려웠던 것인가?

하영선: 필체가 읽기가 쉽지 않다.

10편 이후로부터는 서양사정의 영향은 없어지고, 미국에서의 학습노트 혹은 유럽 여행으로부터 영향. 「개화의 등급」은 장문의 매우 고도의 논문.
15-18편 미국 사행 업무 중 기록으로 추측. 여자접대, 혼례, 장사, 친구사귀는 법 등에 관한 이야기. 에드워드 모스로부터 받았던 질문(조선의 생활상)을 토대로 조선과 비교되는 미국의 생활상을 묘사.

포르투갈-지브롤터-수에즈-홍해-싱가폴-홍콩 거쳐서 돌아옴. 그리고 동경에서 김옥균을 만나고 돌아옴. 그러나 김옥균을 만난 이야기는 생략됨.

구대열: 메이지 개혁 중 여성문제에 관련된 개혁 있었는가?

김봉진: 복식문제, 교육문제에 대한 언급 있음.

구대열: 사실 당시 재산권, 상속권 등에 있어서 조선 역시 미국 여성들과 동등한 정도의 권리를 누렸다.

구대열: 번안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설명하셨는데, 유길준과 후쿠자와의 견해가 뚜렷하게 구분되는가?

김봉진: 책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뚜렷하다.

구대열: 지구에 대한 것이 제일 먼저 나온다고 하셨는데, 세상이 이렇게 크구나, 중국이 천하가 아니구나, 하는 인식이 발전된 것이 아닌가? 어쩌면 그 호기심은 당연한 것 아닌가?

김봉진: 당시에는 그러한 사실이 대단한 충격이었을 것.

구대열: 독립 우리나라에서 당시 일반적으로 쓴 단어였다. 정치적 의미의 단어는 아니었지 않나? 독립이라는 단어는 황진이 시에도 나온다. "남루수독립(南樓愁獨立)"이라고 남쪽 누각에 홀로 서있다는 말로.

김봉진: 정치적 의미, 사회과학적으로 쓴 것은 아니었다. 독립이라는 말은 근대의 산물이다.

구대열: 도시가 근대의 지표로서 그로부터 정치적 독립성이 생기게 되었는데, 학교, 교통, 시민 등. 도시에 대한 이해가 있는가?

김봉진: 그러한 인식은 물론 들어가 있다. 도시의 내력 등은 포함하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윤비: 세계지리 지식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에 대해서, 당시 지식으로서 굉장히 시급한 측면이 분명 있다. 그러나 또 하나 생각할 부분은, 유럽사에서 세계 지리를 처음 언급하고 시작하는 것은 고대에서 이루어진 형태는 아니다. 세계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에 대한 12-16세기 여행기에서는 이러한 지리적 지식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유길준이 다른 나라의 풍속사 문화 정치제도를 설명하는 당시의 여행기의 서술방식을 수용했을 가능성은 없는가?

하영선: 서술방식 관련에 대해서도 흥미로움. 유길준이 1973년 박규수를 만나서 권한 책이 1848년 나왔던 해국도지였다. 그리고 일본에 유학가서 보았던 서양사정, 그 두 포맷에 더하여 미국 덤머스쿨에서 유학하면서 배웠던 지리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서유견문을 쓰게 되었던 듯. 그 맥락에서 종합적인 리서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김현숙: 1970-80년대 여행기를 참고로 했을 가능성은 없는가?

김봉진: 덤머 스쿨에서의 교과서 찾으면 될 것.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유견문이 여행기는 아니다. 말로만 견문이지 계몽 백과전서로 볼 수 있다. 제가 보기에는 명백한 계몽적 성격으로 맨 앞에 넣었을 것, 해국도지와 마찬가지로.

하영선: 그렇다면 리스트를 베낀 것은 덤머스쿨 교과서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유길준 관련 자료가 이제 인터넷으로 제공이 되고 있으나, 당시의 교과서는 직접 확인해야 할 것.

강상규: 오늘 발표해주신 해제는 논문이 아니라 책으로 내셔야 할 듯. 동북아재단에서 최근 동아시아 과목이 개설된다고 하는데, 지금 교사 지침서를 준비중 이라고 하는데, 한국사, 중국사, 일본사가 모이니까 합의가 안되고 있다. 김봉진 선생님이 이 논문을 바탕으로 단행본을 내신다면, 유길준을 통해서 후쿠자와를 보고, 왜 둘이 다를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담아낼 수 있을 듯. 그러한 방식이라면 호소력이 있을 것.


II. 발제

흥선대원군사료휘편 제3권 (현음사, 2005) 중
전재성 <日韓外交資料集成>(pp.7-43), 김준석 <秘書類纂(조선교섭자료)>(pp.437-572)

구대열: 대원군 귀국이 1885년 8월 말 9월초 아닌가? 또한 한러 밀약설은 1885년 1월이라면, 이 문서들에서 대원군 집권시 민씨 일파가 의탁할 가능성 등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일본이 이와같은 정보에 빨랐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강상규: 일본의 정보수집력이 대단했다. 조사해야할 부분들이 많다.

김준석: 박영효가 실제로 대원군과 접촉하는가?

강상규: 박영효가 실제로 대원군과 접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규직이 갑신정변 때 살해되는데, 한규직은 자신이 친청파는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김준석: 한규직은 친일본 아닌가?

강상규: 그렇게 보기는 어렵고, 외교적 언사일 것. 그리고 대원군의 귀국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주목해야 함. 대원군의 중요성, 대원군이 현실적 정치권에서 얼마나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한 문제. 1873년 후반 대원군이 현실정치 표면에서 사라진 이후의 영향력, 그리고 임오군란, 그 이후의 대원군 귀국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그리고 청나라에서 결국 대원군을 이용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끼치려 했을 때, 왜 그렇게 대원군의 가치가 높았을까 하는점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

김준석: 1894년 일본에게 있어 대원군의 이용가치는?

강상규: 당시 김윤식과 대원군이 손잡게 하여 대원군을 귀국시켜 대원군 위주로 판을 짜려고 했던 것이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당시 대원군이 중국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김윤식을 유배 보내고, 대원군 귀국 후 정치활동을 막으려 했던 것이 이 자료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대원군 친정 이후, 임오군란 후 송치된 대원군이 위력이 정말 그 정도의 영향력을 가졌었는가? 삼국지에서 죽은 제갈량의 위력에 비견될 정도로. 일본은 대원군과 동학의 관계가 유언비어일 뿐인지 사실인지 계속 정보수집하면서 예의주시 하고있음.

김봉진: 사료집에서 자료를 모아놓은 방식을 다시 문제시하지 않을 수 없는데, 날짜 순서도 불분명하다. 자료집으로서 문제가 있으나, 새로운 사실은 많이 알게 됨.
민영익, 한규직은 갑신정변 때 싸울 사람이 아닌데, 즉 둘 다 급진개화파인데 왜 싸우는가? 이들을 청쪽에 관여한 사람, 일본쪽에 관여한 사람으로 구분하기도 불가. 무슨 연유로 김옥균 일파가 죽이자고 한 것일지.

하영선: 갑신일록을 보면, 양 측이 분명해야한다. 특히 살생부를 만드려면 편가르기가 정확하지 않으면 안된다. 거의 매일 살생부가 계속 바뀌는데, 그 판단이 잘못될 수는 없다. 결국 우리가 먼저 치냐, 저쪽이 먼저 치냐의 문제였을 듯. 그런데 왜 민영익은 김옥균 관계가 벌어지게 되는가? 민영익이 견미사절단, 김옥균은 차관을 빌리러 일본에 갈 때 까지만 해도 소통의 채널이 있었는데, 이들이 귀국 후-5,6월 이후-소통이 없어짐. 그렇다면 민영익이 왜 돌아섰는가? 국내 연구를 보면 민영익이 일본 방문 시기 소홀하게 대접을 받고 일본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다, 미국을 방문해보니 개화의 오리지널은 미국의 것이라는 설명이다.

김봉진: 그것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하영선: 그렇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김현숙: 아직까지 아무도 타당한 설명을 못하고 있다. 1884년 김옥균과 화폐논쟁을 벌인 것과 연관성은 없는가?

김봉진: 화폐논쟁에는 한규직이나 민영익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타당성이 없다.

하영선: 정치학적 상상력으로 보자. 1883년 즈음 개화팀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던 상황. 국내 공작으로 일본에 차관을 얻으러 갔던 김옥균이 빈손으로 돌아와서 분개해하고 있던 차, 민영익이 귀국하면서 민씨 세력의 수장으로서 역할을 맡게 되면서 갈라선 것이 아닌가?

김봉진: 살생부를 작성하고, 소위 급진개화파가 먼저 손쓰지 않으면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실제로 드러나는가? 갑신일록에 그렇게 기록되었는가?

하영선: 어떠한 시각으로 갑신일록을 보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그렇게 해석될 소지가 있다. 10월 30일부터 첩자를 파견하는데, 양쪽이 긴박하게, 긴장감 있게 움직이고 있다. 정치전, 첩보전, 살생전을 향해 가고 있었다.

구대열: 일반적으로 계파간 대립은 개인적 감정, 정치적 견해차이로 시작되긴 하는데,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굳어지는 것은 후대 사람들이 해석하면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음.  

김봉진: 사후의 생각의 틀과 지식으로 이전을 설명하고자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당시에는 온건/급진 용어가 없었다. 양쪽이 모두 개화파였다. 또한 친청/친일도 분류불가. 일본이 만든 말이다. 김옥균, 박영효는 친일, 민영익도 친청? 아니다.

하영선: 그러나 살생부 작성을 위해서는 양 측을 나누는 기준이 정확해야한다. 일단 쉽게 민파, 김파라고 부르자. 갑신일록을 보면, 민파와 김파는 매일매일 상대편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모여서 하는 이야기의 진행을 보면, 명확히 다른 두 그룹이 있으며, 나와 적의 구분이 뚜렷하다. 그 틀로서 갑신일록을 읽어야 한다. 첩보전이 진행되는 상황을 읽어내야 한다.

김봉진: 갑신일록의 저본은 이노우에 가쿠고로와 후쿠자와의 사촌조카, 그 둘의 정보에 의해 쓰여진 경성사변 시말서, 그것이 저본이다. 김옥균은 일본망명 가서 경성사변 시말서를 참고하여 하루하루 빠짐없이 기록하려고 했을 것. 그런데 갑신일록과 경성사변시말서의 날짜가 조금씩 다르다. 시말서가 더 정확하다. 김옥균은 날짜를 바꿔놓고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그리고 날짜가 부정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술마시면서 논의했기 때문에. 따라서 갑신일록은 상당부분 일본의 시각을 대변하고 있으며, 또한 김옥균의 사후 기록이기 때문에 그의 의도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함.
그렇다면 갑신일록과 대조할만한 기록이 있는가? 없다.

하영선: 갑신일록은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책이 나왔는데, 위작의 근거로 표현이 일본식이다, 날짜가 부정확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물론 보고를 받은 후쿠자와의 기록이 정확했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현장을 직접 경험한 김옥균과 그 전말을 보고로 받은 후쿠자와 중 전체적인 분위기, 내부사정을 누가 더 잘 알았겠는가? 그것을 일본사람들이 파악했을 수는 없었을 것. 김옥균은 갑신 기록을 남기려 했으나 날짜를 참고하기 위해 시말서를 보았을 듯. 김옥균이 자기 정당화를 하기 위해 갑신일록을 남겼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현장기록을 위서(僞書)라고 할 수는 없다.

김봉진: 일본인에 의해서 기록했을 뿐 특파원이라는 자격으로 파견되어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경성사변시말서는 정확했다고 보아야 한다.

하영선: 일본과 김옥균의 시각차를 비교한다면, 김옥균의 시각에 더 의미를 두어야 할 부분이 있다. 후쿠자와가 쓴 경성사변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 김옥균의 기록은 10월 30일부터 시작되는데 이날 일본이 들어왔던 것. 김옥균은 일본이 약속을 어겼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는데, 이러한 내용은 일본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부분의 내용으로, 일본으로서는 기록하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
싸움이 정쟁으로 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민영익의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그 중 일정한 부분은 정사 기록으로 체크될 수 있을 것. 김옥균 측에서 살생부를 작성하고 있는데, 양측에서 첩보전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그리고 쿠데타를 준비하려면 상당한 기간이 필요한데, 민영익이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러면서 11월-12월 초에는 이미 양 측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존재했을 것.

강상규: 갑신일록이 김옥균의 주관적 해석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김옥균이 가진 위기감의 진실, 실체는 사실 약하다. 예컨대 미국 공사의 기록을 보면, 홍영식이 "지금 군주는 똑똑한데 군주를 싸고 있는 벽이 너무 두터워서 싸고 나가지 못한다. 그 벽을 깨야 한다"라고 이야기 한 데에 대해서, 그 벽을 깨 보니 주변의 강한 바람에 의해 꺼져버릴 가능성이 있다고 비유하여 말하고 있음. 오늘 자료에서도 김옥균이 위기를 과장하고 있었다. 주관적인 의식과 객관적인 사실을 구분, 비교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김봉진: 1884년 11월 12일이면 정변 20일 전, 한규직과 시마무라 대화. 이 때 한규직을 살생부에 올렸다는 것은 난센스. 이 기록도 일본측 시각이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보아야 하지만, 여기서 드러난 한규직은 친일파이다. 그리고 이시기 온건/급진, 친일/친청도 없다. 한규직, 조영하, 이들은 대단한 인재이며 같은 개화파이다.

전재성: 갑신일록을 다시 보아야 할 듯.

김현숙: 이 시기 지배층들의 인식체계에 있어서 외국에 의지한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갖았는가?

김봉진: 당시 독립에 대한 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본에 의지하거나 러시아에 의지한다는 것이 무슨 일을 초래할지 알지 못했다. 그들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구대열: 그러나 생각해야 할 것은, 일본과의 협조를 통해서 근대화를 이루려는 측, 즉 일본을 끌어들여서 우리의 이익을 지키려는 측과 그야말로 소위 친일 측이 딱 잘라 구분되어지는 것은 또 아니다.

김봉진: 그렇기 때문에 친일/친청, 개회/보수의 시각으로 나눠 보아서는 안된다.

하영선: 그렇다면 당시에 불리던 이름은 무엇인가?

강상규: 자유당, 사대당. 그 반대는 친청 수구당.

하영선: 자기들이 수구당이라고 스스로를 불렀을까?

강상규: 자기들은 그렇게 안불렀다. 일본이나 개화파측에서 그렇게 부름.

김봉진: 그러한 말이 나온 것은 일본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하면서이다.

하영선: 청나라에서는 민씨 세력을 뭐라고 불렀나?

강상규: 민(씨)족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민(씨)족을 지칭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시간에 따라 바뀐다.

하영선: 민씨족은 개화파라고 불렀나?

강상규: 개화파라고 부르지 않고 과격한 깡패라는 식으로 표현. 그것도 바뀌는데, 자신과 타자를 어떻게 규정하고 싶어하는지에 따라서.

하영선: 그렇다면 유영익 선생의 분류인  갑신파, 갑오파, 대원군파, 황실파 등으로 불러야 하는가? 그런데 당시 자신들은 그렇게 안불렀을텐데.

강상규: 지금 우리가 지칭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개화파로 알려진 갑신세력이 명명하던 방식이 자리잡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그리고 제 생각에는 같은 개화파라고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서 그 호칭에 담긴 의미가 달랐다고 본다. 비유하자면 현대사에서 박정희 정권 때 민주화의 대표주자로서의 양김(兩金)은 1990년대 청산되어야 될 정치적 인물로서의 양김과는 그 뉘앙스가 다르다. 민씨의 의미도 처음에는 이동인을 비롯한 개화세력을 모두 지칭하면서 정치적으로 대원군과 맞서는 파를 통칭했다. 그러나 이후 그러한 시각이 일부 개화파의 입장을 대변하게 된 것. 예를들어 이광린 선생님도 개화파의 눈으로 당시를 보고 있는데, 따라서 그 과정에서 친청파/친일파, 자주당/사대당,완고당 식의 용어들이 정착되게 됨.

하영선: 그 이름을 붙이는 게 중요하다. 고종의 말을 통해 개화파들은 1883년 쯤 오면 어느 정도 판단이 섰기 때문에 갑신정편을 일으킨 것인데.

김현숙: 고종의 허락을 받고 움직인 것 아닌가. 군사 300명을 내준 것도 그러한 의미.

하영선: 그렇다면 왜 그렇게 쉽게 돌아섰는가?

김현숙: 보통 살생부 때문이었다고 해석. 그런데 고종의 캐릭터는 아니었을까. 우리가 설명 못하는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

한: 1500대 300이라는 병력차이가 있었는데, 그런데 결국 궁을 옮기면서 그 좁은 곳에서 어느 정도 버틸 수도 있지 않았었을까. 그러나 견해차가 생기면서 혼란이 생기기 시작.

김현숙: 또 재미있는 것이 원세개는 스스로 감국대신(監國大臣) 으로 칭함. 그런데 당시 원세개의 status 관련하여 논란이 많았다.

하영선: 감국이라는 표현이 당시 흔한 표현이었나?

구대열: 명나라 때에는 황제가 외출하면 왕을 대신해서 정무를 대신 보던 사람에 대해서 감국이라고 표현.

김현숙: 서양 외교관들은 감국을 총독으로 번역을 하고 있었다.

구대열: 감국=superintendent, 총독=governor

김현숙: 사실 원세개는 governor라고 스스로를 보는데, 외국인들은 minister가 아닌가 의문을 가졌다.

하영선: 서양인들 눈에도 거의 governor행사한 것이 아닌가?

구대열: 자신 스스로 minister는 아니라고 주장.

김현숙: 한국전쟁 때 마을에서 일어난 다툼도 겉으로는 이념적 분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집안싸움에서 비롯된 것이 많았다.

구대열: 그렇다. 감정싸움에서 시작된 것이 많았다.

윤비: 유럽에서도 계급갈등이나 교황과 황제의 대립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어떤 단일한 하나의 이념적 정치적 견해에 따라 파벌이 나뉘었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결국 권력지향적인 인간의 본성으로 귀착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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