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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초기 한미관계의 재조명>(09.09.26)
 

2010-07-23 
2009년 9월 26일 전파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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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 하영선, 구대열, 양승태, 김봉진, 강상규, 이경미

발제: 강상규 선생님
김명호,『초기 한미관계의 재조명: 셔먼호 사건에서 신미양요까지』(서울:역사비평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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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및 토론

제1장 제너럴셔먼호 사건 中

구대열: 박규수 진주농민항쟁 진압 과정에서 삼국지를 읽었다고 하는데, 원말 명초 나관중이 주원장을 모델로 쓴 삼국지는 이시기 못 읽게 했던 책이었다.

강상규: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전말 보고에서 (p.63) 박규수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평화적인 사태해결을 모색. 방어가 중요하다는 해국도지를 읽은 박규수의 대응. 군사력이 우세한 서양의 침략에 대해 신중하면서도 과감한 대처.

구대열: 상선(商船)이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러나 실제로 제너럴셔먼호는 군함이나 마찬가지였다.

강상규: 그렇다. 영국인 개신교 선교사였던 토마스는 선교사가 아니라 침략자로서 사망한 것이다. 그런데 제너럴셔먼호 격침은 대원군의 명령이 아닌 박규수의 단독대응이었다.

제2장 병인양요기의 대응과 동진진 건설 中

강상규: 이항로와 대원군의 관계를 보면, 국내 문제에 대해서는 이항로가 대원군에 반대했지만 양이론(攘夷論)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었다. 이 때 박규수 역시 양이론, 척화론에 동의하고 있었음. 기존의 논의에서는 척화론을 둘러싸고 대원군과 박규수가 대립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제3장 와츄세트호의 내항 中

양승태: 제너럴 셔먼호의 정체는?

강상규: 해적선으로 보아야 한다.

하영선: 위키피디아에는 인도네시아인을 비롯하여 대부분 동양사람들이며, 선장은 영국인이라고 나와있는데 원래 덴마크인 인지. 그리고 선주는 미국사람이다. 그리고 배에는 교역품은 없고 대포만 있었다. 이를 통해 보건대 제너럴셔먼호는 도굴을 목표로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페르트 도굴사건의 평양판이었던 듯. 이에 대한 평가는 둘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토머스(Robert Jermain Thomas)를 옹호하는 측으로, 주로 기독교 측 주장으로서 토머스를 최초의 선교사로 평가하는 입장. 두 번째는 서양의 논리로 냉정하게 보았을 때 도굴꾼이었다고 평가하는 입장.

강상규: 이후 시대이긴 하나 스웨덴 왕자 구스타프도 왕실의 묘, 매장량 등을 물어보고 다녔다.

구대열: 제너럴 셔먼호는 상선, 무역선이었을 것. 명목상 영국선이라고 하면서 비공식적, 개인적 형태의 교역을 했던 듯.

양승태: 주식회사 같은 기업 형태로 교역을 시작했나?

하영선: 서양의 논리에 맞춰서 계약을 맺고자 했을 것.

구대열: china trade를 동인도 회사가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독점을 풀고 자유무역을 시작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동아시아로 왔을 것.

김봉진: 노예무역 등도 성행. 저자의 구체적인 묘사가 우연성을 잘 드러내어주고 있음. 토머스가 태평천국운동과 관련이 있었다는 기록. 추측컨대 셔먼호가 이 시기 선주를 사서 말레이시아, 태국인 등 다양한 사람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왔을 것. 선장 등 관리자 정도만 백인들이었을 듯. 토마스도 선교여행 차 조선에 1차 왔다가 복건성으로 돌아갔는데 이들과 함께 조선으로 같이 가게 됨.
토머스는 개신교 계통의 anglican. 한국에서는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음.

구대열: 그런데 박규수 장계에서 김일성 증조부 이야기 나오나? 북한 측에도 「역사과학」이라는 잡지에 제너럴셔먼호 사건 기록이 있다. 이 잡지는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그나마 읽을 만한데, 박규수와 김일성 관련한 논문에서는 김일성 증조부가 셔먼호 격침을 지휘했다고 이야기한다. 민족을 이끌고 앞장섰다는 민중군대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김봉진: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제4장 셰난도어호의 내항 中

강상규: 의답조회(擬黃海道觀察使答美國人照會)의 내용 중 서양 또한 예의 국가이다, 라는 이야기는 외교적 수사일 뿐이다. 이를 대원군과 박규수와의 의견대립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대원군은 셔먼호 선원 생존설에 관해 해명하는 글을 박규수에게 작성할 것을 맡겼다. 박규수는 정부측의 책임있는 답변 지시를 바랐으나, 대원군은 구체적 대안을 제공하지 않았으며, 지방에서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음.

제5장 오페르트 사건 中

강상규: 오페르트 도굴사건에 있어서도 박규수에 대한 대원군의 두터운 신임을 보여줌. 박규수는 대원군의 강경노선을 지지. 국내 천주교인들의 모략이라고 간주, 외세와의 결합에 대해 경계.

제6장 신미양요기의 활동 中

양승태: 사건을 너무 박규수를 중심에 두고 보고 있다. 제목에 '박규수를 통해 본' 이라는 구절을 넣어야 하지 않을까.

구대열: 동감. 책 제목에 박규수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강상규: 393쪽을 보면 박규수는 미일 조약체결의 내용과 중요성에 대해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소식에 대해서는 어두웠다는 의미.

양승태: 당시 관료들이 일본을 잘 몰랐던 것은 당연하지 않나?

강상규: 그나마 외교적으로 1인자라고 할 수 있었던 박규수도 몰랐다는 것이니 당시 관료들이 일본을 몰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1811년 묶을 때 함께 편집된 김윤식의 안설(按說)을 분석 비교하여 박규수가 정말 대미수교를 원하고 있었는지 밝힐 필요가 있음. 저자는 395쪽에서 저자는 박규수가 사실은 대미수교를 원하고 있었다는 주장의 주요한 근거가 되고 있는 김윤식의 안설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아우 박선수에게 보낸 편지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강상규: 이 책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하자면, 첫째, 과거의 추체험이라는 점에서 이 글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둘째, 그러나 이 책이 다루는 시기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볼 피료가 있다. '초기 한미관계'라는 시야로는 조망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음을 고려해야 할 것. 셋째는 의문점인데, 척사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정책에 박규수가 동조했는지 여부. 박규수가 천주교신자 2명을 잡아내서 효수했는데, 대원군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당시 대원군이 패도정치를 하고 있다고 비판, 최익현의 경우도 대원군의 패도를 비판. 넷째, 고종과 박규수의 특수한 관계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양승태: 행정가로서 행동한 것으로 보아야지, 천주교 탄압으로 보기에는 힘들지 않은가.

하영선: 박규수는 벽위신편 평어에서 "천주교가 옳지는 않지만, 그를 이기는 방법은 탄압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되고, 이쪽의 주자학을 잘 알려서 사상변화를 꾀하여야 한다"는 포지션을 보인다. 즉 공식적으로 대원군이 취했던, 위정척사가 갖고 있었던 대응양식과 완전히 똑같았던 것은 아니다. 박규수는 행정 관료의 위치에서 대원군에 동의했으나, 그 생각의 끝에는 또 다른 뿌리가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양승태: 박규수를 개화파로 해석하는 것은 결국 너무 무리이다.

구대열: 대원군은 어디까지나 정치가. 천주교를 이념적 위협이 아니라 국가적 위협으로 받아들임. 유대인 학살의 경우에서도 히틀러는 유대인을 국가적 위협요인이라고 선전하였고, 그 학살 명령에 No한 군인이 얼마 없었다.

하영선: 이 책을 통해 저자는 한학자로서 사학계의 송병기, 국제정치의 김용구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꼼꼼히 안 읽었다, 혹은 잘못 읽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꼼꼼히 읽은 것은 인정, 그러나 저자가 국제정치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충고해줄 것이 있을 듯. 문서만을 읽어서는 전체 구도나 흐름를 보지 못할 가능성이 많은데, 그렇다면 국제정치학 쪽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지적을 할 수 있을까?

구대열: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고 받은 북경의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Bellonet)가 청나라에 공문을 보내 항의하며 조선 정벌의 결의를 표명하면서, "우리가 출발하면 조선은 끝장이다." 이는 서양의 시각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건. 저자는 그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1866-68이라는 시기. 일본은 이미 메이지 유신을 거침. 그런데 일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박규수는 과연 일본을 어떻게 생각했나? 이 시기 박규수의 시각이 대원군과 다르다는 점만 지적해서는 곤란. 시간적 변화에 따른 사상변화 분석 필요.

김봉진: 결국 저자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하나다. 이 시기 박규수에 대한 기존 김윤식의 해석은 잘못되었다는 것. 그렇다면 대미관계에 대한 박규수의 시각이 바뀌는 때는 언제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필요하다.

양승태: 그러한 의미에서 intellectual biography가 필요함.

김봉진: 조선 근대사 틀이 다시 짜여져야 함. 박규수와 대원군이 다를 바가 없이 똑같았다는 주장이나 두 입장이 대립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분명 당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조선의 당국자라면 누구나 유원지도(柔遠之道)의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것. 유학에 근본을 두고 외국인들을 대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박규수는 조선중화론, 대명주의, 척사파, 화의질서의 중심인물이다.

양승태: 서간문은 있나?

하영선: 환재 전집을 저자가 6권으로 개편한 것이 있음.

구대열: 유학자들의 일기에서 개인감정을 파악하기 힘듬. 간단한 일정만 기록함. 별로 도움이 안됨.

김봉진: 그러나 환재의 서한집에는 상세한 이야기도 나옴.

양승태: 단순한 사료에는 나오지 않는 사상사적 변환을 보아야 한다.

강상규: 하선생님께서 하신 말씀과 관련해서, 이 책에 대한 따끔한 서평이 있는지 찾아보았는데,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둘로 나뉨. 황당한 논의다, 아니면 결국 주장은 간단하다는 것.

강상규: 박규수를 중심으로 본 신미양요를 다른 인물들과 함께 엮어서 나머지 공백을 채워줄 필요가 있다. 당시 국제관계 전체 그림과 작은 그림을 함께 보아야. 그 둘의 통합 혹은 그 사이의 교류가 필요.

구대열: 1860년대면 이미 중국 내에서는 그래도 미국이 유럽과는 다르다는 인식이 생기는데, 그런 영향이 드러나는가?

하영선: 『해국도지』에 그러한 시각이 드러나고 있다.

김봉진: 김윤식의 안설(按說)이 시기적으로 이르기는 하나, 미국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담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던졌을 것. 안설을 10년 정도 차이가 있게 본 것이다.

구대열: 중앙과 지방 관료들의 책임 분화로 보아야지, 대원군과 박규수의 대립으로 보면 안된다.

하영선: 저자는 연암을 연구한 국문학자이다. 그의 손자에 대한 연구로 이 책이 나온 것. 저자는 역사학이나 국제정치학계의 기존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즉, 대원군과 박규수, 위정척사와 문명개화와 같이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다. 대원군과 박규수는 똑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대립적인 시각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박규수의 용어가 대원군과 다르다고 하는 것은 꼼꼼한 사료읽기의 산물로서 높게 평가할만하다. 기존 연구들은 박규수 저작을 대단히 제한적으로 읽었음. 외교사에서는 거의 안 읽었고, 국사학 쪽에서는 띄엄띄엄 읽었다.

1840년 벽위신편 쓸 때의 박규수는  『해국도지』의 영향을 받은 해방론자였다. 그러나 문명개화론자는 아니었다. 반면 대원군은 『해국도지』론자도 아니었다.
박규수가 취했던 것이 해국도지 전략이었다는 것을 김명호 교수는 정확히 읽고 있다. 가능한 한 수세(守勢)로서 공세(攻勢)를 하고, 조약을 맺자고 나오면 맺어라, 하는 해국도지 지침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토머스의 공격에 대해 방어로 대응한 것은 정확히 해방론자적이다. 해안에서 지키는 법조항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았냐고 김명호 교수가 이야기하는데
1864년 중국에서 『만국공법』 번역이 나오고, 조일 수호조약 때 처음 반영됨. 그런데 1866년 조선인들은 서양인들에게 이미 보편적 법 적용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음. 『만국공법』을 읽었던 것인가?
그리고 박규수는 개화론자인가? 『만국공법』론자는 개화론자 아니다. 마틴이 주장하는 것도, 적의 논리를 적에게 적용하기 위해서 배우자는 논리이므로 개화론자는 아니다. 만국공법에 대한 이해는 있으나, 문명의 스탠다드는 우리이라는 원용론으로 보아야 할 듯. 개화론자인지 여부를 가리는 척도는 자강균세이다. 균세론자가 되었다고 이야기할 때부터 개화론자라고 해야한다.
국사에서는 위정척사, 동도서기, 문명개화로 구분. 그런데 안맞는 부분이 있다. 김명호 교수도 국사학계의 framework가 안맞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해결책을 우리가 제공해야 한다. 문서와 사상과의 아귀가 맞아야 한다.

구대열: 이분법으로 나누기에는 gray zone이 많다.

김봉진: 그럼 어떻게 판을 다시 짤 것인가? 기존의 판을 그대로 쓰되 gray zone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해주는 것만으로도 일단 의미있다. 물론 이원론이 글을 쓰기에는 편함. 삼원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시 사원, 오원을 짜야한다. 무지하게 철학적인 글이 된다.

하영선: 저자는 한문으로 곧장 들어간 것인데, 적어도 약간의 틀을 갖고 들어 갈 필요있다. 한문뿐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학문적 욕구까지 포함한 양이다.

해국도지는 위원의 주저가 아니다. 서양에 대한 서양인들의 글을 모은 것이 해국도지다. 위원의 주전인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읽을 필요있다.. 그러나 국사학은 너무 시기별로 나눠 읽는다.

김봉진: 황조경세문편은 여러 번 개정편이 나오는데, 해국도지와 비슷한 시기 등장했다. 그런데 고염무, 황종의까지 들어간 내용이다. 청조의 주도로 금서까지 포함. 1편이 그렇게 나오고, 외편, 2편도 간행. 90년대 나온 2편은 근대 학문이 증보되어 들어간다.

하영선: 위정척사론자와 해방론자의 차이가 얼마나 날까? 그 차이는 중국에서 이미 틀이 만들어진  이후에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 국사학 쪽에서는 셋으로 나눠보는가?

김봉진: 개화파를 온건/급진으로 묶으면 유길준은 그 중 어느 것도 아니다. 보수도 있고 진보도 있다. 박영효도 역시 마찬가지. 정치적 행동으로 보면 급진, 그러나 사상적으로는 온건/급진으로 나눌수는 없다.

하영선: 대원군이 73년 물러난 이후 대원군을 설득하면서 일본과 수호 맺는 과정을 볼 필요 있음. 대원군은 이때 변화가 없는 것에 반해, 박규수는 만국공법 정도 혹은 균세 정도의 국제관계를 상정했던 것인가? 만국공법 적 균세에서 개화적 균세로 넘어가는지 확인해야 함. 그리고 1870년대 초 유길준에게 책을 읽어보라 권하며 1840년대 나온 해국도지를 건넸을까? 만국공법이 더 최근 책인데. 다음 세대에게 추천하는 책으로서 해국도지를 줬다는 것은 박규수가 생각하고 있는 국제관계가 결국 해국도지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김봉진: 해국도지는 대단한 책이 아니다. 해방론이 끝에 조금 붙어있고. 미국 측 견해가 조금 들어가 있다. 대부분 지도, 지리, 면적 등에 대한 내용이다. 1870년대쯤이면 이미 대단한 정보 서적은 아니다. 사실 조선에서는 이미 당시 그만한 수준은 되었다.
박규수는 만국공법적 마인드는 있었을지 몰라도 균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김봉진: 이이제이(以夷制夷) 정도의 느낌이 아닐까? 그러나 다음단계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했다.

하영선: 대원군 영향력은 당시 이미 강력했음. 조미수호는 균세적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치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박규수 자신은 만국공법 수준이면서 대원군 수준의 언어로 이야기해야하는 난관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해국도지에서 만국공법 사이에 박규수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듯.

시대적 추이를 보면, 과거에는 우리만 예(禮)라고 보았다면, 이 시기는 우리도 예(禮), 너희도 예(禮)라는 인식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후 너희가 예(禮)라는 인식으로 변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가운데 단계를 둘로 나눠 보아야 하는데, 우리도 예(禮), 너희도 예(禮)라는 인식 속에서도 우리가 낫다는 입장과 너희가 나은 것 같다는 입장으로 단계가 나뉜다.

김봉진: 또 다른 문제제기. 박규수만 중심으로 해서는 안 된다. 박규수의 사랑방뿐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 소위 개화파들이 박규수에게서만 배운 것이 아니다. 여러 인물들이 있었는데, 박규수만 너무 부각시키고 있다. 또한 박규수와 대원군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도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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