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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사료휘편 제1권 中 청국관련문서 (09.04.25)
 

2009-07-22 
2009년 4월 25일 전파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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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 하영선 구대열 김봉진 박명규 전재성 강상규

발제: 전재성
    흥선대원군 사료휘편, 석파학술연구원, 현음사, 2005
    제1권 중 청계중일한관계사료, 청계외교사료, 청광서조중일교섭사료, 이문충공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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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발제

오늘 발제 부분은 1882년 임오군란 발발부터 그 처리과정-대원군 피랍, 그리고 1885년 대원군 귀국 후의 정황을 다루고 있는 청국 측 문서와 이홍장 문집.

II. 토론

강상규: 청국 측 문서를 보면 김윤식, 어윤중, 그리고 조선 내부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기존의 인식과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 승정원일기에서는 상당히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데 반해, 청국 측 문서는 매우 민감한 부분까지 서술하고 있음. 고종이 방계 혈통으로서 왕위에 오르면서 정통성에 있어서의 취약점, 私親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지의 문제 등에 있어서 고종과 대원군의 관계가 김윤식, 어윤중의 입을 통해서 드러남. 특히 1870년 이후 대원군의 정치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드러내고 있음. 아울러 임오군란 처리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음. 이 문서들과 더불어 기존 사학계의 연구, 그리고 일본측 자료를 더 참고한다면 1880년대 초반 전후부터 임오군란, 갑신정변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이어갈 수 있을 것.

하영선: 우선 사료 자체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 임오군란은 논쟁의 여지가 많은 만큼 학제연구가 필요하다. 청국 측 문서는 승정원일기보다 당시 청측의 입장을 더 잘 보여주고 있기는 하나, 앞으로 읽게 될 대원군 사료집 2,3권의 일본 측 자료와 비교를 통해서 맞춰보아야 한다. 『馬建忠の中国近代 』를 보면서도 사료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오늘 자료에 나타난 대원군은 상당히 세련된 논객이었음. 그는 개인문집에서는 중국에 잡혀가는 상황을 한탄하면서 매우 솔직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그러나 이홍장과 필담을 할 때에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음. 부인한테 쓴 편지에는 "여기서 죽을 것 같다, 못 돌아갈 것 같으니..." 등등 허물어지고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반면, 이홍장이 남긴 메모를 보면 -이홍장은 처음 대원군이 이송되었을 당시 喪을 당한 상황이라 직접 대면은 못하지만-그가 대원군에 대한 첫인상을 고집쟁이 할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공식 기록으로 남은 필담에서 이홍장과 대원군은 매우 젠틀하게 대화를 주고받는다.

결국 문서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가 관건이다. 노회한 정치가일수록 필담에서는 속내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따라서 私文書와 cross check를 해야 한다. 사문서가 없더라도 시대적 재구성을 할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러한 점에서 역사가들은 사실 굉장한 로맨티스트들이어야 한다. 당시 굉장히 드라마틱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임오군란을 재구성하는 데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임오군란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임오군란은 동아시아의 대사건. 중국이 대원군을 잡아갔다는 것은 military intervention을 한 것이며, 이것은 전통적 외교질서가 아니라 서양적 외교질서를 차용한 것이다. 적어도 일본 측 연구들에서는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일본이 임오군란을 바라보는 시각이라면, 한국은 임오군란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며 어떻게 그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을까. 우리는 임오군란을 국내정치적 싸움(대원군vs개화파)과 국제적 싸움(서양vs동양, 일본vs중국)으로 나누어서 살펴야 한다.

첫째로, 국내파트.
일단 대원군이 임오군란의 도모를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혹은 단지 군인들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일어났는지 사실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보수 vs 진보로 나누어 본다면, 척사와 개화에 대한 분위기가 1876년 이후 1880년 들어오면 변화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특히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오면서 고종은 개화로 인식을 바꾸게 되고 조미교섭이 시작된다. 이러한 1881년 1882년 분위기를 보았을 때 대원군에게 있어서 임오군란은 마지막 타이밍 이였을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임오군란에 대한 국내적 의미(대원군 vs 개화파로 나뉘어지는)를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둘째로, 국제파트.
전통질서에서 대원군 호송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중국으로서는 일본을 체크할 필요성, 조선 내 親淸이 세력을 잃어감에 따라서 청은 근대적 방법으로 개입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원군의 귀국 논의 과정도 전형적이다. 부모자식관계 때문에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 대원군도 고종의 적극적이지 못한 태도에 대해 계속 섭섭해 하는 모습. 대원군은 조선에 돌아가 가서 뭐 하실 꺼냐는 물음에 “절대 아무것도 안하겠다”고 공언. 실제로 귀국 후에도 당분간 조용히 지냄.

이 국내-국제 정치적으로 맞물린 사건을 바라봄에 있어서 우리는 원세개, 민비, 고종, 대원군, 김옥균의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되느냐를 살펴야 함. 김옥균은 대원군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러는데, 이때 이미 대원군은 청도 의심을 하고 있다.

갑신정변 이후 고종 민비는 러시아로 기울고, 또 그 이후 미국으로 향함. 계속 외세를 잡으려는 상황. 따라서 개화파도 대원군과의 연계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었다.
개화파는 권토중래하려고 하고, 따라서 이러한 다각적인 면을 함께 살펴본다면 10년의 시기가 더 활발하게 씌여질 수 있을 것이다. 1886년도 거문도사건 이후로는 드라마틱한 사건이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계속되고 있었다. 유길준이 가택연금 당하여 서유견문을 쓰는 과정도 그렇고, 갑신정변 6인방이 모여서 쿠데타 vs 정착 고민하는 것은 이후 갑오개혁과의 연장선상에 있다.

김용구 선생님도 문서작업을 하시면서 이야기 하셨듯, 문서 자체에 대한 신뢰도에 모두가 합의하였다고 해도 그 진실성 여부는 알지 못한다.

구대열: 삼국사기를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가짐.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며, 대담하게 argument를 개진하고 수정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학문적 발전이 가능할 것. 이를테면 삼국사기에 말 1천 마리를 보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실제로 과연 그러했는지 나폴레옹 기단과 비교해볼 수 있을 것.

이 문제는 결국 국제정치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임오군란에 대응하는 청국 측 입장은 일단 배를 타고 정찰을 하면서 상황이 돌아가는 추이를 본다는 것이다. 조선이 잘 돌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돌아오겠다, 그러나 중국 정책과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면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이다. 운요호사건을 보면 영국은 happily concluded라고 판단하고 돌아간다.  

삼국시대에서도 결국 중국의 정책적 입장과 가장 일치했던 신라가 살아남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시대를 보아도 고려 충선왕의 경우 원의 정치에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넬슨 제독의 해석은 동아시아 관점에서 아우의 집이 문제가 없으면 상관 안하지만 문제가 있으면 간섭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중국이 처음에는 매우 조심스럽게 조선에 대한 간섭을 논의하게 되는데, 이는 민비의 초청이 아니라 자신들의 판단에 의해서 들어왔기 때문. 특히 당시 러시아와 일본으로부터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중국으로서는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원세개는 임오군란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 오자서와 같이 왕을 옹립하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했다면 국내정치적으로 큰 소리를 낼 수 있듯, 중국은 임오군란 처리이후 감(찰)국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을 것.

다른 예로, 조대비가 죽었을 때 중국에서는 조선에 사절을 일부러 보내게 된다. 조선에서 필요 없다고 해도 보내게 되는데, 이러한 것은 조공을 강요하고 종주국의 지위를 확인하려는 것. 조공의 국제정치학이 power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것을 담아내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강상규: 한편 이하응을 칭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 등으로 표현. 일본의 첩보 문서를 보면 "대원군 세력"이라고 언급하고 있음.

하영선: 김윤식, 어윤중의 표현에는 대원군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부디 와 달라고 청하고 있다.

구대열: 독립과 자주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김윤식, 어윤중의 의존적 태도는 외교적 실책이었다.

하영선: 당시 김윤식, 어윤중은 임오군란을 국내게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윤식, 어윤중은 일본이 대원군을 통제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청이 나서야 한다고 봄. 그렇게 되면 자신들에게도 유리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 그런데 청국에서는 당시 조선의 국내 상황에 대해 무지했다.

구대열: 이 때만해도 중국은 어윤중, 김윤식을 통해서만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던 상황.

하영선: 청나라에 대한 영문 저널 중 중국의 양절외교에 대한 논문 존재. 양절외교를 "double diplomacy"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한국의 외교에 대해서 정용화의 양절체제 논의를 인용-한국에도 양절외교의 노력이 있었다고 언급하면서-하고 있다.

구대열: 양절체제를 double diplomacy라고 번역을 하면 여기저기 여러 나라와 협상했다는 뜻이 되지 않나?

강상규: 김윤식이 주복(周馥)에게 '만약 우리가 조선에 있었다면 어윤중은 물론이고, 자기, 처자식도 죽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대목, 대원군 세력을 왜 칠 수 없었는지 등등의 이야기들을 보면서 당시 대원군의 위세 정도를 알 수 있다.

하영선: 중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김윤식, 어윤중이 죽었다면 어떠했을까? 당시 대원군은 이미 chance가 없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시대정신은 1882년 8월 고종의 교서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근대화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강상규: 류큐를 병합하고 조선 문제가 핵심 이슈로 부각되고, 국경, 영토문제에 대한 고민이 맞물리면서 국내에서도 이 논의가 계속된다.

구대열: 사실 1876년 이전부터 그런 문제가 시작되었다. 류큐 문제는 그 일련의 사건 중 마지막 사건이었는데, 류큐 병합(1979년)은 당시 중국으로선 큰 사건이었다.

하영선: 고종해석에 대한 평가를 보면 상당히 의도적이다, 일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논의가 있음. 과연 그러한가? 청측 문서를 봐도 고종에 대해서 일본과 비슷한 평가를 하고 있다.

강상규: 1982년 시점에서 조선을 들여다보면 민비 vs 대원군보다는 고종 vs 대원군 싸움으로 묘사되고 있다.

박명규: 정치적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민비와 대원군 보다는 고종과 대원군 싸움으로 보는 것이 중국측에 유리하지 않았을까. 정치적 개입에 정당성을 부여하기가 더 쉬웠을 것이다. 조선 국왕 책봉의 권한을 들어 중국의 개입을 정당화할 수 있었을 것.

강상규: 청측 문서에는 갑신정변 전후로부터 고종폐위까지 '암울한 군주' 등의 표현이 나온다.  이것이 일본에 영향을 미쳤을 것. 그런데 한편 당시 일본은 고종을 회유하기 위해서 고종을 세계의 군주의 반열에서 함께 언급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상반된 시각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헤이그 밀사 이후로는 고종을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묘사.

전재성: 고종을 직접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는 않으나, 청측에서는 대원군이 조선으로 돌아갈 때 민씨 일파와 잘 지낼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한다.

박명규: 조청수륙무역장정에서 양절을 제도화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데, 중국 입장에서는 전통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던 것. 조선을 대함에 있어서 새로운 방식을 취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첫 시도를 임오군란의 처리과정에서 시작.

구대열: 우리는 고종의 행위 결과에 너무 치중. 선교사였던 알렌의 묘사를 보면 1894년 청일전쟁 직전 영국의 기록을 보면 가장 우매하다고 조선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정말 당시 상황이 그러했다. 고종의 정책 의도도 그렇고.

박명규: 언더우드 부인의 여행기를 보면 민비에 대해서는 굉장히 우호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똑똑하고 명민하다고.

하영선: 아시아 최고의 왕비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지금의 힐러리 클린턴에 비유할 수 있을 것.

박명규: 당시 중국으로서는 조선에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가 기회가 되었던 것. 조선은 계속해서 그러한 기회를 주면서 개입의 실마리를 주고 있지 않았나.

전재성: 대원군을 잡아가는 것에 대한 국내적 저항은 없었나?

하영선: 중국이 서양의 방식 중 못된 것만 배웠다.

박명규: 중국은 전통적 속방 관계를 서양적 의미에서 고정화, 제도화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영선: 임오군란 처리과정에서 대원군을 잡아가는 방식은 게임의 원칙이나 룰이 근대의 그것과 다르다. 이를테면 1894년까지는 조선에서 중국으로 조공이 간다.

박명규: 조선에서는 잡혀간 대원군에 대해서 되돌려 보내줄 것을 요청하면서, 그가 노쇠하다는 이유만 대고 있다. 그러나 옛날 전통적 방식으로라도 조선은 보다 강력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즉 보다 정치적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었는데, 안했다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었다는 것.

하영선: 거문도사건에서 김윤식은 만국공법을 근거로 영국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임오군란 당시에는 유길준이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좋은 조공관계로 바꾸자고만 이야기한다. 즉 어느 정도 전통질서의 기반 하에서 이야기하고 있으며, 근대의 방식으로 하자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청일전쟁에서 깨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강상규: 사실 청일전쟁 이후로도 청은 조약 맺는 것을 싫어하고 조선 무시했다. 청일전쟁 이전의 정책을 양절 적으로도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는 일종의 편의적 오해일 수 있다. 현실 속에서 주의나 입장은 여러 개 존재하긴 하였지만, 결국 명분은 하나였다.

하영선: 그렇다면 청이 조선을 대하는 방법은 1894년을 기점으로 일종의 transformation을 맞는다고 할 수 있다.

박명규: 김옥균의 이야기는 어떠한지?

하영선: 김옥균은 왜 잡아가느냐는 이야기를 한다. 갑신일록 중 첫째조건이 그것이다. 상당히 근대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박명규: 청국 자료를 보니 김윤식, 어윤중에 대한 평가를 좋게 내릴 수 없다.

김봉진: 김윤식, 어윤중도 근대적 수순을 밟았는데도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니.

전재성: 그렇다고 그들이 근대 제국주의적 입장을 취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랬나?

김봉진: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들이 동지인데 자기를 적으로 본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

박명규: 김윤식은 나름 조선 개혁 프로그램으로 중국 영선사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변화를 제대로 짚지 못하고 있다.

김봉진: 국내적으로 보면 개화파의 분열, 국제적으로는 청군 주둔으로 인한 일본과 대치상황이 임오군란의 결과이다.
대원군에 대한 인식이 갑신정변 이후 바뀐다. 청나라도 임오군란시에는 조선의 국내정치 상황에 대한 정보파악 하는 단계인데, 어윤중과 김윤식은 대원군을 역모쪽으로 몰아가면서 청국에 그렇게 보고한다. 그러면서 구원요청. 그러니까 대원군과 고종의 싸움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청이 실태파악하고 보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 대원군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며, 민비와의 관계에도 문제가 있었고, 고종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도 다르다는 것 알게 되었던 것이다.
대원군에 대한 김옥균, 서광범의 평가는 어땠나?

전재성: 대원군도 고종이 인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부분이 있다.

김봉진: 김옥균, 서광범은 대원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양 측이 손을 잡기에는 힘들었을 것.

하영선: 김옥균전을 보면, 세를 규합하려면 대원군을 데려오는 것이 1차적인 것이라는 고민이고, 2차적으로는 근대적인 의미에서 대원군을 잡아간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김봉진: 대원군 피랍은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는 영어기록에도 나온다. 박영효가 각국 공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렇게 말한다. 민영익도 그 때는 같은 목소리를 낸다.

하영선: 민영익은 세계일주 하고 와서 딱 돌아서게 된다. 그 전까지는 같이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왜 돌아섰는가? 아무도 그에 대한 설명을 못해주고 있다. 일본에서 민영익을 잘 대우를 안 해주었으며, 미국을 보니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 진짜라고 생각했다는 설명이 있긴 하다. 그러나 문서가 없어서 주장할 수 없다.
내 생각에 일차적으로는 국내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민영익으로서는 당시 어깨가 무거웠을 것이다. 민씨로서 네가 앞장서야 한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소회를 남기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 1884년 김옥균 입장에서는 민영익의 변절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일본이 이번에는 도와준다고 하니 일을 벌였을 것이다.

한편 얼마 전 일본에 갔을 때 재일대사가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 일본에서 김옥균 기념 행사를 개최하려고 하는데, 한국 측을 초대한 것. 우리나라로서는 김옥균 연구이니 참석하는것이 의미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 김옥균 연구는 주로 우파에 의해서 진행되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보면 일본 보수파의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김옥균에 대한 평가가 일치하지 않는다. 유영익 vs 이태진으로 갈린다.

강상규: 김옥균의 대동아공영 정당성 논의를 보면 선각자적인 의미가 일부 있다고 생각한다.

박명규: 언어가 텍스트화되면 사건 당시 발화(discourse)의 본래의 의미를 잃는다. 그 특수한 상황과 의미가 보편적 의미로 전환된다.

하영선: 그 예시로, 김일성이 한국전쟁 직전 스탈린과 만나고 돌아와서 모택동과의 대면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 때 모택동은 김일성과 만나기 전 모스크바 중국대사에 연락하여 스탈린과 김일성 사이에 어떠한 이야기가 오갔는지,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무엇을 보장해주었는지 이미 물어보았던 상태. 그런데 모택동과 김일정이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이 때 모택동은 다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도와준다고 했다는데 뭐해준다고 했느냐?"고 묻는다. 기록상에는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모택동이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한숨을 쉬면서 이야기 했는지, 어조는 어떠했는지는 텍스트로는 알 수 없다. 당시 김일성은 이 말을 적극적인 태도로 해석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majority가 한국전참전을 반대하고 있었는데.

하영선: 물론 국사, 사회, 정치학적 모두 봐야겠지만. 한 나라가 망해가는 때를 제대로 보려면 국제정치학적 시각으로 읽어야 한다.

강상규: 텍스트화된 사료에 대한 다른 예로, 일본 전범재판을 들 수 있겠다. 당시 그를 둘러싼 국제정치적 의미는 매우 컸음에도 불구하고, 전범재판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실정이다. 그런데 종전 항복문서를 텍스트로 보는 것과 녹음으로 듣는 것은 상당히 다르다.
김봉진: 참고로 맥아더와 소화천황의 대화문서에 대한 작은 책자가 일본에서 간행되었다.

하영선: 일본이 중국을 능가하기 시작했던 1894년, 그리고 중국의 GDP가 일본을 넘어서기 시작하는 2009년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두 시기를 비교해 보았을 때, 우리로서는 21세기적 양절이 성공할 수 있을지 열심히 고민해야 한다. 성공 못하면 우리한테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1919-45년 시기의 국제정치학적 논의와 상상력은 매우 컸다. 21세기 동아시아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러한 규모의 논의가 나와야 한다.

우리의 경제력은 1조 중국은 5조의 규모이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로 둘러싸인 한국은 지금 19세기의 조선과 유사하면서도 또 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 여기서 우리의 활로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우리는 강대국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들을 적절하게 제시하면서 틈새를 노리고 그것에서 우리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이를테면 북한에 대한 정보 어떻게 대화해야하는지 등을 조언할 수 있을 것. 19세기 말 임오군란 처리과정에서, 강국들 사이에서 취했던 조선의 외교는 21세기 한국의 외교가 어떠해야 할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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