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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박천홍,<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 (09.03.28)
 

2009-07-22 
2009년 3월 28일 전파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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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 하영선, 구대열, 김봉진, 전재성, 김상배, 강상규, 김준석, 선승혜, 박준호

발제: 김상배, 강상규, 김준석
Geoffrey Parker, "The Seventeenth-Century Crisis Revisited", American Historical Review (2008)
김덕진,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우리가 몰랐던 17세기의 또다른 역사 (푸른역사, 2008)
박천홍,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 -서양과 조선의 만남(현실문화연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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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와 토론

1. 김준석: Geoffrey Parker, "The Seventeenth-Century Crisis Revis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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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 17세기 대기근은 세계사적인 현상이었다. 본 논문은 1560-1660년대 유럽, 특히 17세기 위기의 시기를 다루고 있음.
-평균 기온 낮음, 대기근 발생
-반란 등 발생,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기 쉬웠다. 중앙집권체제로의 전환.
-에릭홉스봄: 자본주의 등장 원인이라 지적.
-그러나 대기근 현상 자체에 대해서만 서술할 뿐, 그 결과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서술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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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배: 대기근의 원인을 자연과학 쪽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김준석: 물리적으로 대기근의 원인은 화산활동, 흑점이 적게 나타났기 때문 등으로 설명하고 있음. 최근 American Historical Review에 특집 기사 참조.



2. 강상규: 김덕진,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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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 본 책에서는 경제사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기후 등에 대한 과학적 원인 등은 적게 다룸.
- 17세기 가장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역사학자라는 장점을 살려서 경신대기근(1670년대)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이야기. 17세기 위기의 전모를 보여준다기보다는, 경신대기근 시기의 사회상을 정리하고 있다. 저의 관심사는 16세기와 17세기의 모습은 전혀 달랐는데, 그 원인이 무엇이나에 있었다. 즉 이러한 논의는 대기근의 정치적 의미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 (p.323-326 대기근과 정쟁의 연관성) 대체로 대기근의 시기는 붕당정치, 당파싸움이 시작되는 시기와 겹친다. 정치적으로 격변의 시대였으며, 다양한 논쟁이 등장하는데, 이는 대기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과정일 수 있다. 저의 또다른 문제의식은 자연재해가 전염병, 그리고 민심 동요로 이어지고, 매관매직의 상황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한편 18세기 영, 정조 시기에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 선조실록(1605년)에 기상이변과 전쟁으로 인한 기근에 대한 언급 등장. 주자학에서 말하는 천일합일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는 우주와 자연의 기운, 그리고 人事를 하나로 봄.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치는 왜란, 호란의 시기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송시열의 논의가 정통으로 자리를 잡게 되지 않았나. 그러나 학문적 탄력성을 잃게 되었다.
- 당시 신유학자들이 갖고 있던 사고와 닮아 있다고 생각되는 책, 에모토 마사루 저,『물은 답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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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김상배: 17세기 당시 홍대용은 흑점의 존재를 몰랐는가? 이미 유럽에서는 갈릴레이가 1630-40년 흑점을 관찰했는데. 당시 유럽에서는 기후적으로 이상 징후가 통치자의 부덕함에서 온다고 생각했는가? 정치사회사는 일반적으로 과학기술사와 함께 간다.

강상규: 이상 징후를 정치적으로 해석했다고 해서 당시 과학 수준이 낮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자연현상을 정치적으로 해석했다고 해서 지적으로 발달하지 않았다, 혹은 과학과 정치가 분화되지 않았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예) 조선 초 태종 대 가뭄이 들면 성리학자들은 임금으로서 덕을 문제삼았으나, 태종은 이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물론 특정 자연현상으로 인해 사회전반에 문제가 확산되면 정쟁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김상배: 倫理와 物理의 세계의 분리는 실제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18세기 후반 정약용 또한 당시 이러한 문제제기를 했다. 우리에게 그러한 근대적 관념이 언제 등장했는지 또한 간과해서는 안되는 문제이다.

강상규: 오늘날에도 기상이변은 정치적으로 논란이 된다. ‘하늘도 노했다’는 식의 비난이 그것. 따라서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사회적 상황을 볼 필요가 있다.

구대열: 성리학적 이념체계에서 과학적 인식을 분리하는 것은 사실상 힘들었을 것이다.

하영선: 여기서 궁금했던 것은 유럽과 조선의 대기근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유럽은 1560-1660년, 조선은 1670년 초. 세계사적인 현상이었다면 공간의 차별 없이 전세계적으로 피해가 있었어야 한다. 심지어 동아시아에서도 대기근이 부분적으로 발생한다. 본문을 보면 청나라로부터 원조를 받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이는 청나라는 피해가 없었다는 말인데, 그게 가능한가? 국지적 피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18세기 당시 조선의 위기 구조는 무엇이었는가? 그 중에 환경재해는 어떠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가? 환경위기가 양란 이후에는 어땠는가? 대기근을 낳은 다른 중요 변수를 동시에 검토생각보아야 한다.

18세기말 다산이 나라 망한다는(國亡) 이야기를 하면서 위기의식을 표출한다. 다산은 복합적 위기 구조를 명확히 짚어내고 있다.   노론vs남인의 정치적 위기삼정의 문란과 같은 경제적 위기. 주자학의 경직화와 같은 이념적 위기, 대외관계의 군가적 위기의 네 위기를 지적하고 있다.

17세기 위기도 18세기의 위기와 같이 구조화 시키려면 대기근 하나만 부각시키기 보다 더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환경 위기를 당쟁화 했다는 것은 이들이 아직 정신 못차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16, 18세기에 비해서 17세기에는 환경위기가 확실히 더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확실하나 17세기 위기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위기의 복합구조를 제대로 밝혀야 한다.

구대열: 유럽에서 이러한 위기상황은 절대왕정 출현, 국가권력 강화로 이어졌다. (예) 명예혁명(1668) 등의 시도. 그렇다면 조선은 어땠는가? 당쟁의 심화에 대한 기록이 있는가?

강상규: 당시 한중일의 상황을 보면 성리학의 이기론 논의의 시기와 맞물린다. 정치적으로 문제화하고 있다. 승정원일기 등 사료의 특수성과 이어지는 문제(이상 징후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의 문제)이기도 한데, 제 관심사는 어떻게 대기근이 정치화되었는가 하는 데에 있었다.

구대열: 17세기 기근은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났는가? 이를테면, 아일랜드 감자 기근(1845년)은 함경도 개척 시기와 맞물린다. 17세기 대기근도 다른 지역과 동시대적으로 나타났는가?

강상규: 대기근이 어느 한 지역만 강타했던 것이 아니다. 17세기 위기는 한반도 전지역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기상이변은 국지적일수 밖에 없다. 이태진 선생님의 외계충격설(소빙기, 소행성 충돌) 등의 논의는 물론 전세계적이라는 것이다.

하영선: 전국적으로도 동일하게 대기근이 나타났는지도 의문.

강상규: 이 책에서도 이태진 선생님의 논문을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실록의 기록이 세계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 가치가 있다.

김봉진: 첫째로 질문이 있는데, 경신대기근은 경신대출척과 일치되는 시기였다. 그런데 천재지변에 대한 인용이 있는가?
둘째로, 천변설이라는 것이 한 대에 성립되어 풍미했다. 그러다 주자 때에 와서는 천변설을 비판하면서 천리설이 자리 잡았다. 그런데 천재지변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신유학과의 논의랑 불일치하는 것 아닌가? 주자는 자연과학자였다. 따라서 유학자들이 당시 실제로 그렇게(물리적 현상을 윤리적 현상으로 해석) 생각했다는 것은 의문이다.
21세기 관점에서 보면 물리와 윤리의 분리가 오히려 문제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당시의 물리-윤리의 미분화를 非발달로 봐서는 안된다.

강상규: 주자는 하늘과 사람의 역할을 나누는데, 이는 하늘의 역할뿐 아니라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주자는 우주의 세계를 담아내려고 했다. 그러면서 불교도 내포하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잘못해서 하늘이 노했다는 레토릭이 거기서 나온 것.

김봉진: 천변설과 천리설의 차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천리설에서는 물리와 윤리의 분리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것. 반면 당시 이러한 실록의 기록은 천변설적인 입장 아닌가.

박준호: 17세기 관련 문서를 보던 중, 우암 송시열 종가 문서 중 청천 지방에 社倉(계조직)을 만들어서 기근 극복하려는 구휼 문서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17세기 대기근에 농민들이 노비로 스스로를 파는 문서는 별로 없는 반면, 19세기에는 그러한 문서가 많음. 이를 통해서 볼 때 17세기 기근은 국가적 차원, 혹은 양반 주도로 감당이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반면 19세기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이 힘들었다. 오히려 지금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17세기를 ‘위기’로 보려고 의도한 것은 아닌가.

김봉진: 천변설은 레토릭일 뿐이었다. 선조의 이야기는 행성이 떨어졌다고 물러나겠다고 하지는 않는다. 이것으로 성리학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된다.

구대열: 실제로 임란 때 선조의 시를 보면 당시 정국이 자기 탓이 아니라 대신들 탓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다 선조가 심적으로 좀 여유로워 지니까 내탓이요 하는 것. 따라서 천재지변에 대해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당시에도 레토릭일 뿐이었다.

김봉진: 천변설로서 설명하기는 불가하다. 환원주의적 시각일 뿐. 국가별 구휼대책의 차이, 즉 천재냐 인재냐의 문제, 관개용수, 의료기술로 인해 예방할 수 있는지의 여부로 설명해야 한다. 즉 사회사적인 이야기도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혜민국의 역할, 지방관의 역할이 컸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것을 보려는 시도는 없다. 이는 역오리엔탈리즘이며, 우리 안의 색안경이다. 우리 스스로를 그렇게 너무나 단편적으로, 왜곡되게 바라본다. 간단한 이야기를 이 책에서는 너무 길게 한다.

강상규: 그래도 저자는 힘든 작업을 했다는 것에 박수를 쳐주어야 한다. 저자의 주장은 당시 기근의 정도가 매우 심했기 때문에, 그 대응책이 미치지 못했다는 견해이다. 조선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 제 관심은 왜 조선에서 송시열 방식의 논의가 18세기 이후 정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정신적 토대가 17세기 대기근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영선: 17세기 위기국면의 한 부분이 그 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는데, 이 문제를 부각시킨 데에 의의가 있다. 앞으로의 더 작업이 필요할 듯. 이 시기 기근은 분명히 중요한 요소였다.

구대열: 글로벌한 영향은 전세계적으로 보아야 한다. 주자학적인 논의에서 끝나면 문제가 있다.

하영선: 예컨대, 10년 사이에 지구 온도가 지구역사를 통틀어 상승한 만큼 올랐다. 여기까지의 논의가 자연과학의 역할이며, 그로 인한 정치적 영향력 등 이후의 논의는 사회사적인 의미에서 발전시켜야 한다. 21세기 환경문제에 있어서도, 과학, 경제, 국제정치학이 모두 포함되어 들어와야 한다. 저자도 그 문제에 봉착하고 있는 것.

강상규: 저자 약력을 보면 전남대 국사교육 전공인데, 이태진 선생님 계열은 아닌 것 같다.



3. 김상배: 박천홍,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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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 19세기, 특히 1860년대까지를 다루고 있음. 그러나 시기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관심에 따라 재구성하고 있다. 에피소드가 매우 많아서 다 소개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논지만 간단히 요약하도록 하겠음.
- 부제에도 드러나듯이 조선과 서양이 서로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고 있음. 주체와 타자의 시각이 서로 교차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저자의 문제의식은 관찬 사서에서 최초의 서양인은 16세기에서부터 등장했다는 것, 그리고 서양인이 등장한 것이 어느 한 시점이 아니라는 것.
- 인용된 사료를 보면 조선 측 문서에는 외국 선박에 대한 허위보고, 혹은 은폐가 나타난다. 반면 서양인들은 세세하고 풍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김상배: 내용을 보던 중 궁금했던 점, 私交가 맞는지 外交맞는지?
구: 중국 봉건제에서는 친인척을 지방으로 보내면서 사사로이 연락하지 말라는 뜻에서 私交를 금한다고 했음.
김봉진: 이 시기의 논의에서는 외교가 맞는 듯.)

◎ 본 서는 다양한 사례를 관심사에 따라 분류하고 있음.
- 16-18세기: 우연한 표류, 혹은 지리학적 탐사의 목적. 조선이 야만인으로 인식됨. 호기심과 공포의 시각.
- 19세기 중엽 이후: 무역과 선교의 목적. 통상을 두려워하는 조선인으로 묘사됨. ⇒ 친절한 조선인에 대해 경계.
- 1850년대: 러시아, 미국의 이양선 등장. 거문도에 대한 기록. 약탈을 하는 사례 등장.
- 19세기 중후반: 중국의 몰락에 대한 조선의 시각.

◎ 결론: 복수의 근대를 상상하기. 조선의 근대는 복합적 대응으로 나타났다.
①집권층: ‘동일성 지향의식’ (중국 문명과 동질적이거나 유사한 요소를 찾아내서 그것에 의거해 자국이 문명국가임을 증명하려는 의식 성향) 소중화 의식, 외부에 대한 위협 인식, 천주교의 전파에 대한 두려움 ⇒ 경직된 쇄국으로 이어졌다.
②천주교 신자: ‘세계주의’적 대응
황사영 백서사건과 천주교도들의 양박청래 운동 등 ⇒ 신앙과 종교를 국가주권의 우위에 두고 있었다.
③재야 지식인: 일부 진보적 사고
해상무역, 통상, 서양기술에 대한 긍정적 시각, but 정책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④‘민중세계’: 실제로 이양선을 만났던 사람들은 서양의 근대에 대한 친밀한 대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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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전재성: 서양의 전파는 매우 폭력적이었다. 식민지국가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제 의문은 첫째, 과연 조선이 서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었는가? 조선의 가치는 어떠했는가?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개항이 되지 않고 서양에 의해 서구화 했다면 어떠했을까?
둘째, 조선의 대응은 어땠는가? 청에 의해 걸러진 서구는 문제가 없었는데, 해양으로 들어온 서양은 철저히 배척했다.  
유럽의 근대화는 제3세계에 의해 이루어진 측면이 많다. 그렇다면 단순히 조선vs이양선의 이분법이 아니라 글로벌 히스토리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상배: 학술적으로 주민들 간의 교류 이상의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강상규: 박천홍 다른 저서를 보면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이 있는데, 철도를 주제로 쓴 책. 그는 본격적인 학자로서의 학위는 없으나 발랄하게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 첫 부분에서 신선했던 것은 조선의 관찬자료, 개인자료, 서양 기록을 비교하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점. 첫장: 영국 탐사선⇒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이어진다는 논의를 발견한 것은 중요. 둘째장: 박연과 하멜에 의해 조선이 어떻게 알려졌는가. 네덜란드와 나가사키와의 관계 등 17-18세기의 기존 논의와 다른 방식으로, 세계사 속에서의 동아시아사를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폴케네디 강대국의 흥망, 서양에서 본 한국 이상의 이야기를 지금 할 수 있지 않을까.

흥미로웠던 부분은, 서양은 일본측을 통해 조선과 접촉을 시도하는데, 쓰시마에서 조선이 유럽쪽과 이어지는 것을 반대하였다는 부분. 영국 측은 조선통신사와의 만남을 이루려 시도하기도 했다. 최근 왜관에 관한 연구 등이 나오고 있는데, 큰 그림에서의 동아시아 관계사, 세계사와 연관하여 조선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편 오리엔탈리즘이 가진 문제를 잘 정리하고 있으면서도 중간중간에 모순되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가진 문제가 아닌가. 여기서 모순되는 이야기란, 사대교린은 이념상의 문제였다고 서술하면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언급. 이는 달레의 말을 그냥 인용하는 식.


김상배: 문정관의 기록 보다 오히려 서양인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이야기하는데, 역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 보인다.

강상규: 확실히 열심히 한 작업의 결과물이다. 결국 조선 지배층은 김용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오지적 사고를 보여줬던 반면 민중들은 오히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구대열: 몇 가지 주목할 부분. 첫째, 지방관이 보고서를 올릴 때, 국가정책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 이는 자기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둘째, 황사영 백서사건과 프로비던스 호는 기독교도들의 인식 차원에서 봐야 하지 않나. 셋째, 지식의 축적과 관리 차원에서 조선의 이미지가 어떻게 서양에 형성되었는지 알 수 있음.

강상규: 우리는 서양을 접할 기회는 많았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선택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했다. 한일 관계에서도 다채롭게 볼 수 있지 않을까.

구대열: 포경선의 목적은 기름을 얻기 위함이었다. 석유가 나기 전에 고래 기름이 가장 중요.

하영선: 저자가 고생은 많이 했는데, 자료를 읽는 면에서 문제가 보인다. 17세기 외국에 비친 한국을 보려면 네덜란드를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네덜란드에서 코리아에 대한 기록을 모두 모은다고 해서 될 일인가? 요즘 한미관계를 보더라도 미국에서 한국관련 자료만 보면 보일까? 아니다. 네덜란드는 당시 제국이었기 때문에, 왜 네덜란드가 글로벌 파워가 되었는지 먼저 보아야 한다. 데지마까지는 왔고 왜 조선에는 안왔는가. 네덜란드의 눈으로 세계를 보아야 하고, 그 속에서 코리아를 보아야 한다.

근대사 서술은 주로 각국사이다. 그러나 네덜란드를 각국사로만 보면 안된디. 17세기 네덜란드, 18세기와 19세기 영국, 20세기 미국은 스스로를 지구국가라고 보기 때문에, 일국 중심의 우리 눈으로 보면 상당히 제한되게 보게 된다. 따라서 일국사 중심으로 보아서는 안되고, 지구정치사의 안목으로 봐야 한다.

아울러 재밌게 본 것은, 프로비던스 배. 정조는 네덜란드를 대만 근처에 있다고 보고 있다. 서학까지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공간적 인식은 좁았다. 16세기 이전과 마테오리치 이후 지봉유설의 지식체계가 별로 차이가 없었지 않나 생각된다. 19세기 초 한국의 대표적 중국 전문가였던 추사 김정희의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도는 낮았다. 해국도지는 그 이후에 본 것.

구대열: 참고할 만한 글로 김학준,「서양인들이 관찰한 조선의 모습들: 개항 이전의 시기」(한국정치연구, 2009)가 있다. 신라, 고려~오페르트 사건까지 다루고 있다.

하영선: 1차 자료에 대한 정리에는 이 책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감동을 주려면 내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구대열: 서양의 시각을 바로잡는 데, 오리엔탈리즘이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오리엔탈리즘적으로 쓴 게 아니다. 실제로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보았던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반유대적 태도도 그가 특별히 그러한 시각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그랬지 않나.

하영선: 본인은 그렇지 않았는데, 이후 그러한 시각으로 고정되었다.

박승혜: 흥미로웠던 점. 첫째로, 일본의 서양에 대한 이해에 대한 관심이 갔다. 서양 사람이 본 동양, 즉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연구는 많은 반면, 동양사람이 본 서양의 모습인 옥시덴탈리즘에 대한 연구는 편협하다. 왜 더 발전하지 않는가. 책 제목에서도 악령이 출몰하던 조선의 바다라고 했는데, 왜 악령이라 표현했을까? 둘째, 왜 조선은 그토록 발달된 도자기를 수출하지 않았나?

하영선: 사실 데지마(1640년대)나 아리타 쪽에서 네덜란드가 수입했던 도자기는 임란 이후 일본으로 들어간 조선 도공에 의해 생산되었던 것이었다. 왜 하멜과 데지마 케이스가 다른가. 동주식 해석은 일본이 중국적 천하질서의 주변부에 있었기에 관대하게 외국에 개항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은 보다 천하질서 중심에 가까워서 뤌씬 어려웠다.

김봉진: 조선에는 교류를 할만한 항구가 없었고 따라서 조선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양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트라우마를 갖게 된다. 교류에서도 외국이 오게 하면 안된다고 여겼고, 또한 유교사상이 상업을 억압했을 것이다. 바실 홀 등도 일본을 거쳐 조선에 온다. 서양인은 대부분 일본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만 대상으로 한 케이스는 별로 없다. 보통 곁들여서 들르는 격. 그럼에도 이 책에서는 자료에 대한 축적이 꽤 되어있다는 데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겠다.

구대열: 이제 영국 외교문서를 그대로 복사 출간하는 시기는 벗어나야 한다. 아시아의 무역에 관한 시각은 1795년 에머스트호에 보내는 청국의 입장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다 가지고 있다. 우리가 거래하는 것은 식량이고 자연물인데, 이는 한정된 자원이다. 반면 영국이 거래하려는 것은 계속 생산이 가능한 것리었다.  
중국의 古來의 법칙으로서 죽기 전에는 외국인이 중국 땅을 떠나지 못한다. 국가 기밀을 반출할까 우려하였기 때문.

하영선: 단순히 지리적으로 접근도가 낮았기 때문이 아니라, 서양이 조선과 만난 이미지가  굳혀져갔고, 기회가 있었음에도 일본의 견제와 지배층의 통제책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배층은 왜 쇄국정책을 택했는가? 목이 잘린다는 듯한 표현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생각보다 중앙집권적 측면이 강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쓰시마는 일본과 조선에 조공을 바쳤는가? 아니면 무역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김봉진: 마테오 리치의 지도가 조선에 들어왔는데도 우리의 인식은 그에 못 미쳤던 것 아닌가. 양란 이후 조선은 대단히 강한 쇄국정책을 취했다. 조선 초에도 왜적들 때문에 그런 경향이 있었다.
양란이후로 이미 일본은 이미 脫亞했었다. 일본의 자유로움에는 우연이 있었지 않나 생각된다. 자기 충족감이 강하면, 호기심이 제약된다. 도전의식도 약화된다. 중국의 천하질서에 좀더 가까웠고 만족을 느꼈기에 당시 조선은 맹자 식의 恒心을 유지하는 데 전념하였고, 따라서 모험정신은 사라져갔던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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