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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사료휘편 제1권 中 승정원일기 (08.12.13)
 

2009-07-22 
2008년 12월 13일 전파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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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 하영선, 구대열, 양승태, 김봉진, 전재성, 배영자, 김상배, 손열, 민병희, 강상규, 김준석, 김범수

발제: 강상규
   대원군 사료휘편 1권 (현음사) 승정원일기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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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강상규 선생님 발제
오늘 발제는 기존 연구를 훑어보고, <흥선대원군 사료휘편> 1권 중 승정원일기 부분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

1. 흥선대원군에 대한 기존연구 검토

◎ 흥선대원군 연구는 광범위하게 진행되어온 만큼 기존 연구를 총정리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 본 발제에서는 대원군에 대한 시각-긍정적, 혹은 부정적-을 기준으로 기존 연구를 분류, 살펴보기로.
- "근대지향적 개혁가"로 평가한 연구
이선근, 카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 Choe Ching Young(曺直亮), 토우마 세이타(藤間生大), 그레고리 헨더슨 등. 그레고리 헨더슨은 대원군의 정치가 비록 독재정치였으나 조선이 수세기 동안 경험한 정치 중 가장 효과적이었다고 평가. 문학작품에서도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과 같이 대원군의 영웅적 이미지를 부각.
- "반역사적, 보수적 정치가"로 평가한 연구
진덕규, 성대경, 팔레(Palais) 등. 성대경의 논의는 대원군 개혁 비판 논조의 전형을 이루고 있음. 팔레는 기존 논의가 봉건 대 근대, 보수 대 진보라는 지나친 단순화에 입각했음을 비판하면서, 대원군을 '실용적이면서도 보수적인 성격을 지닌 개혁가로 평가.

2. 대원군 관련 주요 연표
1864년부터 1873년 11월 5일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기까지의 대원군 권력의 부침을 유연하게 볼 필요가 있음.

3. <흥선대원군 사료휘편> 1권 중 승정원일기 부분(pp.15-412)
본 사료집의 한계: 승정원 자료 파트를 보면, 사건 중심이라기보다는 대원군과 관련 인물 중심으로 자료를 뽑다 보니, 주제가 일관성이 없음.

◎ 흥선대원군의 위상
- 고종 즉위 이후, 대원군에 대한 대우에 대한 논의. 이전의 대원군은 모두 사후 추존된 경우. 살아서 대원군이 된 경우는 흥선대원군이 처음. 따라서 국왕의 부친인 그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가 문제. 정치적 세력으로서 등장할 우려. 논의를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 초기 대원군의 미묘한 위상을 보여줌.
- 12세의 고종이 경연 하면서 효도에 대한 내용 등장. 조대비의 지시에 의해 효경을 읽으면서 효도에 대한 논쟁. ⇒ 단순히 효도의 문제를 넘어서, 고종이 효도를 해야 할 부모가 누구인가를 밝히는 왕통의 문제.
- 고종이 대왕대비를 모시고 운현궁 행차하여 대대적인 행사를 실시. 이 시기는 고종 즉위 후 1년이 지난 시기로서, 고종, 대원군, 조대비와의 관계가 밀착되었던 시기. ⇒ 의례적으로 고종이 대원군에게 정치적으로 힘을 실어주는 모습을 보임.
- 박규수가 대원군을 국태공이라고 지칭. 조대비가 경복궁 중건의 책임을 대원군에 맡김. (1865년 4월 3일) ⇒ 대원군 위상이 표면 위로 떠오르게 됨.
- 남연군 묘소 참배 후 돌아오는 대원군을 국왕이 친히 마중 ⇒ 생부인 대원군을 받드는 모습을 보임.

◎ 흥선대원군의 부상
- 고종3년, 1866년 1월 16일. 조대비가 고종의 혼인예식을 고종의 잠저인 동시에 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에서 치를 것을 지시. 이것은 효종의 잠저에서 국왕이나 세자의 혼례를 거행하던 관례(17대 효종대 이후 지속되고 있었던)를 깨는 것.
    ⇒ 의문 1>조대비는 왜 관행을 깨고 운현궁에서 가례를 치르도록 하였는가?
- 1866년 2월 13일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둘 것임을 발표. 이것은 새해 시작부터 국왕이 새롭게 정치를 시작하라는 의미에서 연말에 철렴을 하던 관례를 깨는 것. 게다가 당시는 왕비 간택 문제가 남아있던 중대한 시기(66년 1월 1일 금혼령 내림)
   ⇒ 의문 2> 조대비는 왜 관행을 깨고 연초에 철렴하였는가?
- 학계에서는 1866년의 시점부터 대원군이 실질적 권력을 획득하였다는 주장이 대체로 받아들여짐.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 조대비가 스스로 그 권력을 부여했는가, 혹은 대원군이 조대비로부터 권력을 획득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연갑수의 경우, 대원군이 조대비로부터 권력을 빼앗았다는 주장. 그러나 사료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건대, 그렇지 않다. 조대비가 자의적으로 대원군에게 권력을 양도했을 것이다.

◎ 흥선대원군의 권력 공고화: 천주교 박해
- 조대비는 자의적으로 대원군에게 권력을 양도했다. 그 근거는? 조대비의 철렴은 관례에서 벗어났다. 그것도 왕비 간택이라는 중대한 사건을 남겨 놓고 철렴하였다.
- 이 시기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는 조대비가 부여해 준 권한을 보다 국내적으로 공고화하려는 의도에서 발생하게 되었다. 기존 논의에서는 단순히 대원군의 심경변화 때문에 천주교를 박해하였다는 입장. 그러나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은 국내정치적인 고려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석해야 한다.
- 남종삼은 베르뇌 주교와 대원군의 만남 주선을 시도. 그 도중에 베르뇌 주교가 포박당하여 심문을 받게 됨(1866년 금혼령 내려진 이후 1월 9일). 조대비는 개혁을 위해서는 자신의 세력이 미약함을 깨닫고 대원군에게 모든 힘을 적극적으로 실어주면서 자신은 물러남. 대원군이라는 자리는 정치적으로 위치가 매우 위태하였기에, 국내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공고화하고자 천주교 탄압을 실시함으로써 천주교 포교에 반대하는 세력을 결집시키고 강력한 권위를 획득하려고 함. 이는 결과적으로 쇄국정책으로 흘렀고, 따라서 국제정치적 선택을 위축시킴.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로서 사료가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음.

◎ 흥선대원군의 불안정한 지위: 고종과의 관계
- 1864-65년, 서원철폐에 대한 논의. 대원군의 정치권력이 가장 강력한 시기. but 이 시기 대원군이 실질적으로 막강한 권력 가졌다 해도, 공식적인 정치의 장에서는 대원군 권력이 제한되었음.
- 1873년 대원군을 大老라고 지칭하며 칭송하는 장면. ⇒ 대원군의 권력이 거의 최고로 막강한 지점에 이름.
- 대원군을 大老라고 칭하며 그 권력이 최고조를 이루었다고 평가되는 때로부터 불과 몇 달 후 고종과 대원군 간의 미묘한 권력다툼 발생.
- 최익현이 대원군을 비판할 때, "그 무어라 부르기 힘든 누구, 사적인 권력가"라고 언급. 세도가들이 최익현의 발언을 발칙하다고 비판하지만, 고종은 최익현이 옳다고 편을 듬. 이에 따라 최익현은 재 상소. 이후 고종이 친정하겠다는 선언. ⇒ 막강하던 대원군의 권력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되었던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대원군의 권력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 대원군이 시골로 내려갔을 때, 이휘림, 손영로는 나라의 국왕이기 이전에 부자간의 효를 다하지 못하는 고종을 비판하는 상소. ⇒ 효와 충의 충돌 & 신하와 국왕의 긴장관계를 보여줌. 국왕이 이러한 상소를 무시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큰 문제였다. 따라서 대원군과의 대립을 표면화시킬 수 없었으며, 고종은 신하들을 회유할 수밖에 없었음. "어떻게 이 땅에는 선비는 있으되, 왕은 없는가?" 하는 자조 섞인 고종의 언급.

◎ 이를 종합해 보았을 때, 고종과 대원군의 갈등은 근원적으로 고종을 왕으로 택하는 과정에서 그 씨앗을 내포하고 있었음.
1) 고종의 정통성 미약, 2) 정통성이 약한 고종의 등극과 ‘살아있는’ 대원군의 존재에 대한 논란, 3) 국제 정세적으로 변환의 시기를 맞아 권력이 이원화 혹은 파편화되는 경향. 이와 더불어 카리스마 넘치는 대원군이라는 존재와 그에 대비되는 고종의 캐릭터가 맞물리면서 복잡한 양상을 보임.

II. 질문 및 토론

양승태: 흥성군 봉해진다는 의미는? 절차가 있나? 자동적으로 일정한 나이가 되면 봉해지는 것인가?
강상규: 흥성군에 봉해진다는 것은 왕족으로서의 자기 위상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것.
구대열: 일정한 나이가 되면 봉해지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남연군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임.

구대열: 사실 확인을 위하여, 운현궁에 군사를 이끌고 와서 청군이 대원군을 납치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양승태: 대원군 납치 기록이 이것뿐인가?
강상규: 날짜상으로 82년 7월 7일에.
구대열: 답방으로 대원군을 잡아간 것 아닌가?
강상규: 정설이 무엇인가는 확인된 바가 없다.
양승태: 대원군과 고종에 대해서 국사학계에서 세세하게 수만 편 논문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다못해 고종이 왜 25세에 장가갔는지 등에 관해서도 사실적인 부분에 대한 연구가 없는 것 같음.
강상규: 사료 실증주의 문제가 있다. 사료가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연구가 힘든 면이 있음. 팔레도 이야기하듯, 사실 대원군에 비해 고종은 연구되고 있지 않은 측면이 있음.

구대열: 대원군의 아킬레스건이란 무엇인가?
강상규: 대원군은 정치적으로 결코 최고의 권력을 쥔 적이 없었다. 팔레는 대원군이 공식적으로 섭정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지적이 옳다. 사실상 섭정이지만, 그는 어떠한 정치적 정당성과 합법성도 갖지 못했다.
양승태: 대원군의 정치적 권위의 법적 근거는 무엇인가?
강상규: 조선은 왕족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철저하게 견제가 이루어지도록 제도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대원군도 그에 따라 사실상 섭정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원칙상으로 정치적 합법성은 없었다.
구대열: 최익현 상소에서 대원군을 "그 무어라 부르기 힘든 누구, 사적인 권력가"라고 지칭한 것을 보면 정당성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한 듯.
강상규: 철종실록 후반, 고종실록 초반의 내용을 보면 흥선군의 둘째아들 명복을 조대비가 자신의 양자로 들여서 왕으로 삼는다는 내용 등장. 정통성 상으로도 대원군은 생부일 뿐 혈통상으로 조대비와 익종이 고종의 부모나 다름없음.

양승태: 정치적 정당성은 없었다고는 해도, 대원군의 존재가 조대비의 권위 부여에서 이미 확인된 것 아닌가?
강상규: 그렇긴 하나, 그것이 사료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시기는 조대비가  경복궁 중건을 본격적으로 흥선대원군에게 맡기면서 시작됨.

하영선: 사료에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형식상 논리 보다는, 실제 권력의 양상이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 그 사실상 논리를 밝히는 것이 정치학이 담당할 부분이 아닐까. 고종 시대에서 두 가지 큰 사건을 들자면 이재선과 이준용 사건이 있는데, 이준용 사건의 경우 사형에 준하는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대신이 사형을 받고 이준용은 무기징역을 받았다가 다시 복권됨. 고종 친정 이후 한일 수교 될 때에도 박규수가 고종과 대화하면서 계속 대원군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임. 즉 친정을 한 이후에도 대원군의 파워는 존속됨. 형식상으로는 대원군이라는 위치가 제약이 있었으나, 실제적으로는 대원군의 보이지 않는 힘에 조정이 좌지우지되고 있었던 상황을 보아야 함. 이것이 정치학이 해야 할 일.

강상규: 고종 친정 이후에도 대원군 주변 세력이 여전히 조정에 남아 있었고, 대원군 영향력은 이어짐. 이를 자료로서 보여줄 수 있으려면, 상대적으로 더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 일본의 비밀문서를 볼 필요가 있음. 모두가 대원군 눈치를 보고 있다는 서술, 혹은 1880년대 상황에서 조선 정계에 대한 보고에서 실세는 대원군이라는 서술이 보임.

구대열: 권력의 제도화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이를테면 고종에게 상소가 전달되기 이전에 대원군을 거치도록 제도화 되지 않았는가?
강상규: 대원군의 정치권력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천주교 탄압과 병인양요를 치르면서 전 현직 관리와 군인에게 명령을 하달하는 과정에서 드러날 뿐, 상소를 미리 검토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음.

구대열: 모든 상소가 대원군을 거쳐 가지 않았나?
양승태: 이에 관해 실증적으로 사료를 근거로 연구된 논문은 없는가?
강상규: 이성근 등의 연구를 통해서, 혹은 김동인 등의 문학작품에서 드러난 이미지일 뿐 실증적으로 확인되지 않음. 이렇듯 형식적으로 권력의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대비가 힘을 실어주게 된 것. 따라서 세도정치 혹은 다른 전 현직 관료들에 의해서 대원군 권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강했음.
양승태: 대원군 권력의 정당성이 단지 조대비의 권한부여에만 근거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강상규: 대원군의 정치적 정당성이 조대비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표현되었다는 의미이지, 실제적으로는 이미 권력을 행사하고 있기는 했었다.

하영선: 오신 분들이 모두 발언을 하실 기회를 갖았으면 하는데.

민병희: 사학자들은 이러한 식으로 사료 편찬을 하지는 않는데, 본 사료집은 인물중심으로 사료를 편집하다 보니 내용이 일관성이 없다. 이번 발제 부분을 훑어보면서, 정치학에서는 이 시기를 어떻게 바라볼 지 궁금했음. 개인적으로 외척, 사대부, 세도정치가 무너지고 아직 제도적 토대가 마련되기 이전, 그 공백 속에서 근대화를 겪으며 사대부 연합체가 붕괴되는 양상에 주목하고 있었음. 아울러 사학자의 입장에서 대변하자면, 사학자들의 한계는 사료 부족이라는 측면이 있다.

김상배: 고종과 대원군, 조대비 사이의 권력관계를 보면, 근대로의 이행기 과정에서 이루어졌던 전형적인 권력의 분점화 현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실제적 권력과 형식적 권력의 차이에 주목해야 함. 이는 서양 근대 시기 나타나기 시작했던 분산된 권력체계의 모습과 함께 살펴봄으로써 비교적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종과 대원군과의 권력 관계를 밝히는 것이 의미 있을 듯. 아울러 본 모임에서 너무 1차적 사료를 보는 것에 치중하기 보다는 주제 위주로 진행했으면.

전재성: 사료를 보면서 어떠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를 계속 생각해야 함. 특히 국내 정세를 서술한 사료를 보면서 이를 어떻게 국제정치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고민할 필요가 있음. 대원군 대외정책의 패러다임이 무엇인지, 국내권력정치구조의 변화 속에서 어떠한 국제정치적 선택을 하는지 등, 대원군이라는 행위자와 그의 정책이 국제정치적으로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강상규: 그러한 측면에서 앞으로 전파모임은 자기 관심사에서 사료를 읽은 것을 바탕으로 각자의 견해를 밝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대원군과 조대비의 관계, 명성황후와의 관계의 그 미묘한 갈등관계를 보려면 준비를 해야 한다.

김상배: 단순히 사료만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역사사회학적 시각에서 사료를 읽으면서 현재의 이슈와 연결시키면 더 진전된 논의가 있을 듯. 예를 들어 촛불집회를 고종 시대 만민공동회를 통해서 읽을 수 있다.

하영선: 전파모임에서도 발제자는 자신의 시각을 뒷받침할만한 일관성 있는 사료를 함께 제시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주장하면 어떠할지. 박규수가 대원군을 설득하는 일을 힘들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친정 이후에도 대원군의 실세를 확인시켜주는 이러한 당시 서간의 내용을 함께 제시하면서, 대원군과 고종 사이의 권력구조를 함께 논의해 볼 수 있다. 1882년 대원군이 청으로 호송되는 과정도 이번에 살펴본 승정원일기 부분에는 매우 간략히 서술되어 있으나, 중국 문서에는 매우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강상규: 대원군이 처음부터 쇄국정책의 의도는 없었는데, 국내정치적인 상황-권력의 공고화를 위한 천주교 탄압책 선택-이 걷잡을 수 없게 확대 생산되면서 쇄국정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실용주의적 보수적 개혁노선"이라고 명명했던 팔레의 표현대로 이러한 국내외 상황에 의해서 대외정책이 좌우되었다.

강상규: 앞으로 바라는 점은 선생님들이 각자 사료를 보시고, 문제의식을 갖고 오시도록. 발제자는 매우 간단한 수준으로 내용을 다루어준 다음에, 각자의 관심사와 토론 주제를 나누는 식으로 진행.

하영선: 이번 사료집 부분에서 재미있게 본 케이스는 이준용 역모사건이다. 대원군도 이준용을 단순히 귀여워한 것이 아니고 매우 크게 성장할 것으로 바라봄.
396페이지 하반에 상소 내용을 보면, 신기선이 유길준에 관해 반 페이지 정도 견해 표출, 동도서기 쪽 입장이었던 신기선은 유길준을 "험하고 거만한 태도로 임금 업신여긴다”고 비판하면서 이어 일본으로 망명한 역적 11인에 대한 비난을 계속하고 있음. 이에 대한 고종의 커멘트를 보면, "빈말에 의탁하는 것도 춘추의 의리인가?"라며 신기선을 비난하는 듯한 태도 취함. 그리고 역모를 주도한 11인은 일본으로 망명한 반면, 이준용은 곧 복귀됨.

양승태: 고종의 어투가 비꼬는 듯한데?
강상규: 고종은 일반적으로 자기 생각을 잘 안 드러냄. 진의가 무엇인지 알기 힘든 측면. 정보가 확실한지 확인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재확인하는 모습도 드러남.

하영선: 대원군을 잡아가는 상황 또한 흥미로움. 청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드라마틱한 상황을 제대로 들여다보려면 사실 역사학에서 보다는 정치학에서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측면에서 국왕의 언급만을 서술한 승정원일기 보다는 중국 측 사료를 보는 것이 나을 듯.

구대열: 흥선대원군 사료휘편은 자료 수집이 체계적이지 못하다.

하영선: 그래도 흥선대원군에 대한 자료를 사료집으로 묶어 냈다는 점에서 고마운 일이다. 서문을 보면 이하응을 잡아가면서, 그리고 돌려보면서 이홍장의 태도 변화가 달랐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선조에 대해 재평가를 해야 된다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중복된 사료를 계속 재인용하는 것보다, 부족하더라도 이러한 사료집 하나가 더 의미있다.

양승태: 대원군이라고 흥선군에게 봉작하는 것이 묵시적으로 그 권력을 인정하는 것 아니었나. 초유의 사건임을 들면서 안동김씨(김좌근 등) 세력에서 대원군 칭호를 내리는 것을 반대하는 것을 보면, 이 사건 자체가 갖는 의미가 크지 않나 생각된다. 즉 조대비가 대원군에게 공식적으로 권위를 부여한 것이라 봐야 하지 않는가.
강상규: 철종 사망 후 정통성 측면에서 조대비가 가장 우선순위에 있었으나, 정치 세력 측면에서 조대비의 권력 기반은 매우 취약했음. "왕실에서 있는 규수의 몸이라 아는 것이 적으니" 라는 고백이 보임. 따라서 당시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대원군이라는 존재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대원군에게 보다 분명한 방식으로 1866년에 권위 부여.
그러나 대원군이 자신이 세도정치 비판했음에도, 실제로 자신이 그것을 되풀이 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 아내나 며느리 모두 민씨 집안 사람인데, 이를 통해 권력 기반을 확고히 하려했던 의도.

처음에는 조대비, 대원군이 합세하여 고종에 힘을 실어주다가, 나중에는 조대비와 대원군이 의견차가 생기게 되는 시점이 있음.
구대열: 조대비가 대원군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시점은 언제인가?
강상규: 명성황후 간택 시기에 조대비는 대원군에 막강한 권위 부여. 그 이후 천주교 탄압문제에 있어서도 조대비는 그것이 자신의 지시라고 하면서 화살을 자신에게 돌림. 조대비의 생각으로는 어린 고종의 정치적 성장을 위해서는 대원군의 정치적 기반이 확고해야 한다고 생각. 그러나 대원군과 고종 사이 불화가 시작되면서 문제가 발생. 팔레의 경우 "학생같은 고종, 개혁가 대원군" 표현하면서 개혁가 대원군이 고종에 의해 물러난 것을 안타깝게 생각. 그러나 팔레의 견해는 일부 맞고 일부 틀림. 고종의 정치적 성장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

강상규: 대원군 실각 후 대원군의 영향력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었는지에 더 주목해야.

김봉진: 본 사료집은 자료정리가 미비, 주석도 부족. 조선은 근대의 충격으로 엄청난 격변과 혼란을 겪었다. 대원군은 실패한 정치가, 그리고 그 국가까지 실패로 이끌었다. 특히 위기 난국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반대파를 비논리적, 이분법적 비판이 이루어졌던 상황.
그러나 우리만 우울하고 추악한 역사는 아니다. 일본도 그랬다. 그나마 구심점을 찾고 극복했기 때문에 만회했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정치적 행위자의 운용의 폭을 한정지음. 고종 구심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끝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고종 개인적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 역량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시대 자체가 당시 동아시아의 근대를 결정하는 데 큰 변수였다. 과연 이 시기를 정치사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볼 문제임.
보다 미시적으로는 대원군-민비 관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주목해야 함. 왕가 내에서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서로 다른 파벌 문제이다. 이것은 시대의 종속변수인가, 독립변수인가.

구대열: 효종 잠저에 가서 가례식 하던 것이 관례였던 것은 아니고 효종대 이후의 국왕은 궁궐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효종의 잠저에서 가례식을 했던 것. 고종의 법통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경국대전에서는 법통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강상규: 황현 매천야록을 보면, 고종을 국왕으로 택하는 문제에 있어서 반대하는 관료들의 논리는, 생부가 살아있는데 왕으로 택한다면, 왕이 둘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언급에서 드러나듯, 법통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음.
양승태: 이에 대하여 사료를 보다 철저히 보아야 하는데, 승정원일기는 왕의 언행만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고종을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 조대비와 신하들 사이에 오간 대화에 대한 내용은 없음. 단지 16페이지 세 번째 문건에서 보듯, 1863년 대왕대비는 흥선군 둘째를 승통토록 결정하였다는 언급 뿐. 다음번 대원군사료휘편 후반부에서 다룰 청국 측 문서를 통해서 승정원일기의 서술과 맞춰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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