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act    
허흥식, <한국중세불교사연구> (08.9.27)
 

2008-10-14 

2008년 9월 27일 전파모임

참석: 하영선, 최정운, 구대열, 양승태, 김봉진, 전재성, 김상배, 최진덕, 김태현, 김준석, 강상규

발표: 허흥식

I. 허흥식 선생님 발표

- 고려 사회사에서 공부 시작.
1981년부터 중국, 동(북)아시아에 관심.
‘중국’이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사용할 필요 있음. 중국과 신라, 중국과 고려 등의 표현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말이 안 됨. 중국은 영토 및 민족구성상 수많은 나라를 포괄함. 중국이라는 실체는 원 이후에야 존재함. 우리는 동양사, 라고 하면서도 황하 유역의 패권을 가진 왕조만을 왜곡되게 공부해 왔음. 학문적 자기반성이 필요하다고 봄. 국사학은 논리적/이론적으로 미흡한 학문임. 전공학자들의 절대적 숫자 자체가 작고, 지역적으로도 한국에 집중되어 있음.

- 한국 중세불교, 고려불교부터 논의 시작하겠음.
고려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종교사회학적 접근 시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 사회는 종교에 대한 이해 없이는 논할 수 없음. 고대는 신화종교 시대, 중세는 세계종교 시대, 근대는 국가주의 nationalism의 시대, 현대는 세계주의의 시대라고 봄.
불교는 고등종교 가운데에도 세계종교에 속함. 일본의 신도, 중국의 도교, 황하유역 중원에서 발달한 유교는 국가종교라고 봄. 성리학이나 유교의 원리 속으로 들어가면, 중원 패권주의, 책봉-조공체제에 의한 질서체계, 동아시아 패권을 바탕으로 하는 국가종교에 속함. 따라서 한국은 제국 국가에 조공을 바치는 종속적 지위를 가질 수밖에 없음. 이 점에서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세계종교. 유교, 힌두교는 국가종교.

- 불교는 세 종파. 북전, 남전, 티벳 불교. 요즘은 유럽, 미국으로 전해진 신전 불교까지 4전이라고도 함. 불교가 기원한 인도는 국가종교인 힌두교의 위세에 눌려 전체의 5%도 안 됨. 북전은 네팔 쪽. 남전은 스리랑카 쪽.
우리나라에도 남전불교의 영향이 많이 있음. 1300년대 랄란다 졸업생 지공(지봉?)스님이 우리나라에 왔다가 원나라에서 입적. 그를 모시는 절이 세 곳 있고, 초상화도 수십개 남아있음. 선불교가 남전불교의 요소에 기반을 두었다...초조 달마가 인도 동남쪽 칸티푸라 출신이라는 점. 육조 혜능은 갈로족(소수민족) 출신. 그가 활동한 광동지역 또한 남전불교. 달마가 가져온 능가경은 초기경전 아니며 뒤에 만들어진 것.....등을 고려할 때, 세계불교사는 다시 쓰여질 필요 있다고 봄. 선불교가 중국의 소산, 이라는 가설은 옳지 못함. 중국, 이라는 것 자체가 막연할뿐더러, 실제 불교의 발흥은 황하 유역이 아니라 주변 변방민족들 중심인 경우 많았음.



- 방법론과 관점.
원래는 불교 제도사에서 공부 시작했음. 고려 과거제도, 불교사, 사회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주목할 만한 요소들.

- 국사왕사 제도
고려사를 연구하기 위해 <동국이상국지>를 읽어보니, 매우 불교 중심. 그렇다면 고려시대의 주지임명권을 누가 가졌는지 궁금. 읽다보니 국사왕사, 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국사왕사로만 봐도 동아시아사가 보임. 관련하여, 역사학보에 국사왕사 제도에 대한 논문 실린 바 있음.

- 승과제도.

- 불교자료를 위해 금석문을 연구하였는데, 왕사였던 사람이 오래 살면 국사로 책봉. 왕사가 국사보다는 대개 젊음. 종파간 균형을 갖추기 위해 둘을 책봉했던 것이며, 성직자 임명권은 승과를 실시해서 관료처럼 성적순으로 낙점을 함.

- 불교행정제도, 인사제도. 승록사(승적관리) 제도.

- 고려시대 12개 진전사원(King's Portrait Shrine). 고려시대에는 태묘, 라 함. 왕의 행차를 의식하여, 매우 화려하고 유지비용이 많이 듦. 대장경. cf. 신라시대 성전 사원.  
무덤과 종교시설과의 관계.

- 사원에서 발전한 회계학(복식부기, 삼계, 사계 등)에 최근 주목하고 있음. 매우 중요함.

- 고려시대 불교연구의 또 다른 주요 요인은 ‘종파’.
고려시대를 5교 9산으로 파악하는 것은 옳지 못함. 학파시대에서 종파시대로. 신라 말까지는 학파시대, 고려시대는 종파가 중심이 된 시대. 훈요십조에 종파 이야기가 나옴. 고려 전기에는 한 사원이 한 종파를 계속 유지. 고려 초에는 3대 종파(조계종, 화엄종, 유가종).

고려 중기에 3대 종파에서 4대 종파가 됨. 조선 초가 되면 12종파가 됨. <용재총화>에도 12종파라 나옴. 세종 때 불교를 정리해서 12종파를 7종파로 만들 때에도 4대 종파의 골격은 굳건히 유지되었음.

- 의례(ritual/festival)와 불교의 관계.
혼례는 매우 간략했음. 고려시대까지는 데릴사위, 처가살이가 만연. 처족-모계 중심. 여자가 제사권까지 가지고 있었음.
고려 태종이 불교를 가장 탄압했음. 그런데 고려 때 거란이 침입하니까 폐지했던 팔관회, 연등회를 다시 살려 민심을 도모했음. 조선시대에도 전쟁시 승병의 역할이 지대했음. 군역을 질 중민계층이 희박해지고, 노비와 양반 계층만 비대해진 것이 조선 약화의 원인이라고 봄. 또한 부계중심 가정이 되면서 남자들이 사회와 국가에 투신하는 대신 집안일에 너무 매몰되었음.
팔관회와 연등회는 불교의 제전으로 수렴되었지만, 그 내용이 다름. 연등회는 봄을 맞이하는 탄생의 축제이고, 팔관회는 추수감사제. 연등회는 불교와 왕실의 영속성을 논하고, 팔관회는 토속신앙과의 수렴을 강조함.

- 법통.
우리나라 법통에 대해, 주류 통설과 달리 저는 우리나라 불표 법통을 조계종의 나오? 법통으로 파악하고 있음.

II. 토론

구대열: 중국에서 정사는 후기 왕조가 전왕조의 역사를 쓸 때, 전왕조를 인정한다는 의도가 암묵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 아닌가?

허흥식: 전왕조가 망해야만 했음, 을 당위적으로 쓴 것이 조선시대의 역사이며 중국도 마찬가지. 왜 우리가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만 했는가...를 쓴 것. 25사 전체가 그런 의미에서 차별성, 단절성을 강조한 것.

양승태: 국통/국사. 왕사/국사는 차이가 무엇인지?

허흥식: <고려불교사 연구>에서 자세히 썼음. 전국의 성직자 임명권을 국통이 가졌음. 신라 삼국통일 후 국통이 있으면서도 국사를 책봉함. 성직자 임명권을 가진 황룡사 주지는 국통, 국사는 상징적으로 요즘의 종정? 노릇. 고려 광종 때 국통은 사라지고, 국사-왕사 2사 제도가 됨. 왕사가 뒤에 국사로 책봉되는 경우도 있지만, 왕사는 주로 상징적 인물.  

최진덕: 일본은 처음부터 국가에서 승려 수 및 종파를 관리하고, 승려가 이동할 때도 국가의 허락을 받는 모습. 국가공무원에 준함. 우리나라 신라나 고려의 경우?

허흥식: 신라에 국통제도가 있을 때는 그랬음. 일본 불교와 한국 불교의 차이가 있음. 일본은 신도가 마치 힌두교처럼 국가종교. 보편적 사회기반의 일부. 불교보다는 신도가 우세함.

최진덕: 국가와 불교가 그토록 밀착되어 있었다면, 일반 토착 침투성은 떨어지는 것 아닌가?

허흥식: 일본 불교는 생활 속에 침투되어 있고, 한국 불교는 고답적? 초월적? 국사왕사는 조선시대 초기에 소멸. 고려불교에서 국사왕사라는 요소는 중요. 이러한 제도적 요소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연구할 필요 있음.

양승태: 국통, 국사 왕사 연구에 있어 금석문 말씀하셨는데, 일반 삼국유사,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없는지?

허흥식: 정사, 는 왕의 행적과 국제관계 등 정치사에 초점. 불교에 관한 사항은 조금씩 나옴. 고려의 열두개 진전사원은 고려사 병기-위수군지에 실려있음. 복잡한 왕의 국사책봉 절차는 비문에만 기록되어 있음.

양승태: 비문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허흥식: 제 저작에 모두 전거가 기록되어 있음. 귀한 자료는 반드시 번역해서 집어넣고, 원문 또한 병기했음.

구대열: 정치권력자 입장에서 보면, 고려시대 국사왕사 책봉과 전국 각 절의 통수권 관계가 상당히 중요한데요.

허흥식: 고려시대 불교행정에 관한 저의 저작 있음. 고려 시대 국가의 불교계 통제 문제. 전국에 3만여개의 절이 있었다고 함. 승과 제도 또한 이를 관료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제도였음. 다른 하나가 ‘승계’라고 하는 진급제도를 두어, 승록사에서 일일이 관리함.

양승태: 사찰관리, 주지임명 및 재정문제를 관리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있었다는 말씀이지요?

허흥식: 네. 있었는데, 그 기록이 너무 부족해서 문제. 주지록, 사원전 등을 보면 대략 짐작 가능한데 체계적인 연구는 부족한 형편.

양승태: 고려시대 절의 회계장부가 남아 있나요?

허흥식: 조금씩 남아있으며, 놀랍습니다. 비교적 공정했고, 불교가 융성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음. 서양 중세 카톨릭, 유대교의 재정을 방불케 함. 고려 수학, 지리학, 의학, 기술 등이 많이 연구되어야 함. 불교의학 등.

김상배: 국가가 통치 필요성에서 불교를 활용하는 측면에서 말씀하시는데, 불교가 현실 정치에 참여하고 개입하는 모습은 없는지요?

허흥식: 고려 후기에 가면 많이 나옴.
고려 전기에 국사왕사는 상징적 기능. 왕을 컨설팅. 부처님 뜻대로 하라고 함. 불교계가 왕에게 통치권을 암묵적으로 위임한다는 상징적 행위양식이었다고 봄. 고려 태조를 진전사원에 봉헌함. 국사왕사를 책봉할 때 재삼재사 사양하다가 받아들이는 형식인 삼반례, 오반례, 하산례, 구배례(왕이 국사에게 절하고 오체투지)가 있었음. 국사는 부처의 현신이라 하여 왕보다 상석에서 절을 받음.

양승태: 왕권 약화되고 불교가 세속화되면서 모습이 변질되는 것 아닌가?

허흥식: 고려 후기에 가면 승록사를 직접 접수하고 관장하는 실질적 기능을 가지게 됨. 그러나 고려 전기의 상징적 기능이 오히려 불교가 일반대중 동의 얻어내는 잠재력이 거대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함. 후대에 국사왕사의 권력이 커질수록 고승들이 정쟁에 휩싸이면서, 불교에 염증을 불러일으켜 쇠퇴하는 원인이 됨.

왕사가 국사보다 아래였음. 국사는 중생의 아버지이고, 왕사는 일왕의 스승이다. 국왕보다 중생이 더 높다. 고도의 상징성. 국사와 왕사는 서로 다른 종파 간에 안배함으로써 균형을 도모함. 마치 조선 시대에 국왕이 탕평책을 쓰듯.

최진덕: 학파가 종파로 바뀌는 계기는?

허흥식: 신라 말에 지방사원들에 대한 국가통제가 와해되면서, 불교 독자적인 계승체제가 강해짐. 이를 고려 초에 3대 종파로 묶어 승과 실시하면서 국가 통제로 만들려고 함.
이능화=이입설. 김영수=5격 9산설. 이 둘을 붕괴시킨 것이, 본인의 1978년 논문.

구대열: 당나라 시대에 인도에서 나온 여러 불교 종파에 대한 의식이 있어서 여러 곳으로 승려들을 유학보낸 것인가?

허흥식: 법현, 현장 등은 자신들의 연구 관심사에 따라 자발적으로 간 것. 당시 최고의 랄란다 대학에 주로 많이 갔음. 중원 승려들이 유학간 것을 보면, 당대 철학, 의학, 천문학, 수학 등 학문의 중심은 인도.
학파와 종파에 관한 상설은 <고려사 불교 연구>, <한국 중세불교사 연구> 참조 바람.

최정운: 고려시대 가족제도와 불교 사이에 상관성이 있는지?

허흥식: 매우 큰 관련 있음. 인생관, 공간관 자체를 결정함. 우리 사회는 성리학에 의해 수평적 사회(고려)에서 수직적 사회(조선)로 바뀌었음.

최정운: 인도에서 달마가 와서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는.... 등 불교 선교의 희한한 역사적 사례가 많은데, 말도 안 통하는데 어떻게 가능했을지?

허흥식: 징기스칸이 제국 건설하면서 언어는 중요하지 않았음.
중국 오지를 돌아다니면, 한어 하는 사람들 별로 없음. 그런데도 말 다 통함.

최정운: 근대에 서양에서 중국에 기독교 전파하면서, 17세기에 마테오 리치가 십년동안 한문을 공부했다는데, 선대 불교 전파에서 그런 과정이 없었을까요?

허흥식: 제가 지공을 연구하면서, 지공도 인도에서 여러 민족을 거쳐 고려에 들어왔는데, 겨우 2년 반 머물면서 스타가 되었음. 그런데, 지공은 자기 이름만 겨우 한자로 서명하는 수준이었음.

최정운: 그렇다면 불교의 전파는 전반적으로 비언어적인 것?

허흥식: 주로 과학. 기술.

최정운: 달마가 왔던 시대는 기록문화가 매우 융성했던 때. 그렇다면, 달마는 무엇으로 사람을 감화시켰는지 논한 기록이 없습니까?

허흥식: 별로 없는데, 병을 고쳐주었다 정도의 기록이 남아있음. 지공을 연구하면서, 운남성을 가보았더니, 지공이 그 지방에 와서 먹을 수 있는 식물, 약초류를 가르쳐주고 갔다는 기록을 확인했음.

최정운: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몸의 수양이 중요하지, 기독교의 성서와 불교의 경전은 지위가 다른 것 아닌지요?

허흥식: 차원이 높은 이야기라 말씀을 삼가겠음.

허흥식: 불교는 왜 서쪽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동쪽으로 전파되었을까?

최정운: 기독교는 신의 외재성을 믿는 전통이고, 동아시아는 신의 내재성/만유성을 믿는 전통이기 때문이 아닐런지.

허흥식: 불교가 자이나교/조로아스터교의 영향(비로자나 법신사상)을 많이 받았다고 봄. 더 연구해 볼 과제.

최정운: 고려시대에 융성했던 불교가 어째서 조선시대에 그처럼 간단히 제압되었는가?

허흥식: 불교는 군사력/경제력을 동반하여 전파되지 않았음. 아소카 왕 또한 군사력으로 일단 제압한 뒤, 정복한 지역을 평화적으로 통합하기 위한 방책으로 불교를 성원했음.

최정운: 불교는 힌두교에서 나왔는데, 불교는 왜 세계종교가 되었고, 힌두교는 왜 국가종교에 머물렀는가?

허흥식: 석가모니는 크샤트리아 계층에서 나왔지만, 깨달음을 통해 인간의 차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설파했음. 이 점에서 공자와 석가는 공통됨. 하지만 유교는 군사패권에 의존한 중원 중심의 한계를 지녔기 때문에 세계종교는 될 수 없음. 힌두교에서 나온 불교와 중세불교는 양상이 다르다고 봄.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