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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규,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한반도> (08.6.28)
 

2008-10-14 
2008년 6월 28일(토) 전파

참석: 하영선, 김봉진, 전재성, 김상배, 강상규, 김범수, 김치욱,         , 홍지연, 송지예
발표: 강상규,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한반도> (논형, 2008)

I. 발표

* 책표지 소개 - “한반도에 밀어 닥친 삼중의 억압과 서로 다른 19세기의 패러독스”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래트의 춤 + 가쓰시카 호쿠사이, 神奈川沖浪裏 + 김정희, 세한도

* 서문: 가재의 탈피와 역사의 변환-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서재의 한쪽 구석 어항 속에 가재가 살고 있다. 가재는 지금 막 자신의 껍질을 벗으려 하고 있다.....이처럼 위험한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가재는 왜 탈피를 하는 것인가.”
유학 시절 가재 키웠음. 몸이 커짐에 따라 걸맞지 않는 껍질을 벗어나야 함. 집게발로 몸을 빼내는 과정 자체가 상당히 어렵고 흥미로움. 새로운 껍질은 굳지 않아 연약함.

* “고종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해 2008.4-5월에 진행된 한겨레 신문 논쟁
(하원호, 이태진, 강상규, 박노자, 김도형)
- 고종을 탓하기 전에, 현실정치적 제약이 컸음.
- 조선정치에 대한 구조적.역사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조선의 왕권, 군신관계, 정국운영방식, 지식인의 사유방식.
- 19세기 논의가 너무 이원론적으로 진행되는 경향 보임: 지배세력 vs 피지배 민중, 개화세력 vs 수구세력 등.

* 책의 목차 소개

1장. 19세기 동아시아 국가 ‘간’ 관계의 패러다임 변환과 한반도
- 무지 때문이 아니라 기존의 이념/가치관이 강고했기 때문에 부국강병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판단.
- 한반도 지식사회 내부의 고민들을 살펴보았음

2장.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과 전환기 한반도의 정치적 리더십
- 정조 사후 조선에서 천주교 탄압. 1863년 고종 즉위, 1866년부터 천주교 탄압 시작,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이어짐. 오페르트 도굴사건, 하치노에 준스키의 정한론 등등과 연계됨.
- 대원군이 천주교에 대한 이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탄압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복잡한 정치적 사정 있음. 천주교 탄압 통해 대원군은 강력한 정치권력 획득. 이를 통해 개혁 추진하지만, 천주교탄압은 조선의 정치적 선택의 폭을 급격히 축소시킴으로써 개혁을 어렵게 만듦. 패러독스.

3장. 명성왕후와 흥선대원군-왕실내 정치적 긴장관계의 구조와 과정

4장. 고종의 대내외 정세인식과 대한제국 외교의 배경
- 특히 고종 청년기 1870년대의 인식. 개혁 필요성을 느끼게 된 계기 확인. 1880년대 이루어진 개혁과 좌절 살펴보고, 대한제국 이후의 모색 살펴봄.

5장. 일본의 유구병합과 ‘조선문제’의 부상
- 서세동점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 류큐병합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국제정치 판도가 변화하고, ‘조선문제’가 부상하게 됨. 일본을 견제하려는 중국으로부터의 압박. or 류큐처럼 조선을 병합하려는 중국의 움직임. 유길준 양절체제론과 관련됨. 1870년대부터 조선 개혁이 시급해지는 한 원인이기도 함.
후기. 19세기 조선정치사에 대한 21세기적 이해를 위하여

* “명성왕후와 흥선대원군: 왕실 내 정치적 긴장관계의 구조와 과정”

1. 들어가면서

2. ‘기억’ 속의 명성왕후와 대원군 그리고 무능한 전제군주: 왕실에 관한 기억의 계보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와 다보하시 기요시의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의 묘사. 조선 왕실과 정치의 후진적 이미지.

3. ‘구조’ 속의 명성왕후와 대원군: 조선의 정치지형에서 두 인물이 갖는 정치적 위상의 특수성과 고종
- 고종의 비정상적 왕위승계 과정은 ‘대원군’이라는 특수한 존재를 조선정치사에 탄생시킴.
국가권력의 실질적 중심. 조선의 유교적 정치지형에서 국왕을 제한했던 이념적, 제도적 틀에 구애받지 않고 결단력 있는 정책들을 추진할 수 있었음.
- 그러나 그 독특성으로 인해, 대원군은 고종/국왕에 대해서만은 취약할 수밖에 없음.
- 대원군과 고종은 효의 원리와 충의 원리가 부딪히는 미묘하고 불편한 정치적 관계. 현실 정치의 장에서 고종이 정치력 발휘하는 데 장애요소로 작용.
- 명성왕후, 조대비(신정왕후)의 역할, 왕실정치에 있어 또한 중요

4. 과정 속의 <고종과 명성왕후 대 대원군>: 상호 간 정치적 긴장관계가 확대 심화되는 현실정치적 맥락  

(1) 당시의 정치적 상황

- 대원군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 1873년 고종의 친정선언. 그러나 대원군의 광범위한 인적.물리적 권력 기반과 동거하면서 국정 운영
- 전통적 신권의 견제구조
- 조야에 팽배한 화이론적 명분론

(2) 고종의 개혁정책의 노력: 1884년 5월-7월까지 진행된 복식개혁 공방 (136-144쪽)

- 실록
- 전현직 대신, 주요 당상관의 대대적 반대에 직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식개혁 관철.
- 고종 측근 개혁세력의 분화: 갑신정변의 한 계기였다고 봄. '의복개혁을 둘러싼 논란에서 나타난 고종에 대한 강렬한 견제와 비판은 국왕의 측근 그룹 내부에 오히려 개혁의 성공 여부에 대한 불안감을 심화시켰고, 이들을 열악한 정치현실 앞에서 무력감과 초조함에 빠져들게 했다. 고종과 명성왕후의 견해가 엇갈리는 것도 이 지점.(고종-친일 김옥균 지지, 명성왕후-친청 민영익 지지)

(3) 고종과 개화, 개혁  
- 명성왕후 vs 흥선대원군, 의 대당은 잘못 되었다. 반드시 고종이 들어가야 함. 개화파 vs. 수구파도 기실은 고종 vs. 흥선대원군에 가까움. 국내개혁을 추진함으로써 개화세력이 활동하고 성장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준 것은 고종. 김옥균 등이 내걸었던 반청자주와 내정개혁을 골자로 하는 혁신정강의 개혁프로그램은 사실상 고종의 정치적 구상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음.
- 모든 개혁은 개화파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고종을 무능하다, 1880년대 개혁은 지배층 기득권 강화 목적이었다는 것이 기존의 통설.  
- 그러나, 갑신정변 주도 5인방이 통리기무아문을 만들었고 국정개혁을 관장했다는 사실은 어불성설.

II. 토론

김치욱: 명성왕후와 대원군 사이에서 우왕좌왕한 것이 아니라면, 고종에게 독자적인 비전이 있었는가?

강상규: 조선 정치 메카니즘 상, 세상 돌아가는 정보가 왕권으로 모이는 루트를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음. 1860년대 고종이 받았던 경연을 보면, 위민과 덕치를 하는 국왕으로서의 책임을 익혔음. 한편, 1871년 신미양요를 계기로, 사신을 통해 중국의 혼란상을 알게 됨. 1880년대가 되면 청의 압박이 현실화됨. 그 과정에서 ‘자주국가’에 대한 고민이 드러남.

김치욱: 고민에 그치지 않는 비전 내지 해결책이 있었는가?

강상규: 1880년 조선책략이 들어온 뒤, 미국과의 조약체결 작업 시작됨. 그러나 이것은 조선책략에 의해 촉발되었다기보다, 1870년대 말부터 고종의 개혁 복안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봄. 통리아문의 창설에 개혁세력을 포진시킨 것이나 일본과 중국에 시찰조사단을 파견한 것을 봐도 그러함.

유교적 가치관 상, 무비를 증설하는 개혁은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웠음. 청, 일본에의 조사단 파견 등도 모두 고종의 내탕금으로 비밀리에 진행되었음.

당시에 급진적 개화/친일/고종측근 세력이 모두 일괄적으로 ‘민씨세력’으로 불려졌음.

김상배: 당시 governance structure는 어떠했는가?

강상규: 조선의 정치구조. 강력한 신권(臣權). 순자적 개혁목표(패도정치)와 맹자적 정치문화(왕도정치) 사이의 충돌.

김상배: 명분적 차원이 아닌, 실질적 차원에서 조선의 정치구조가 어떠했으며, 고종은 그것에 어떤 식으로 대응했는지?

강상규: 명분과 실질을 따로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는 데에, 이 시기 정치변화 연구의 어려움이 있음.

김봉진: 고종이 그동안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 의해) 부당하게 비판받아왔다, 는 주장에는 기본적으로 동의. 그러나 여기에 대응하려고 고종을 지나치게 변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종이 그러한 의지와 능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실수/실패한 모습을 실증적으로 연구해서 보여주어야 마땅함. 고종은 바보가 아니었다, 라는 주장은 설사 기존의 넌센스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넌센스.

고종 개혁 추진의 첫 번째 타격은 임오군란. 이에 대한 고종의 대응은 상당히 현명하고 과단성 있었음. 그런데,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측근을 모두 잃음으로써 고종은 심하게 타격을 받음. 1884년 김윤식이 쓴 글을 (재상정치를 해야 한다=청에 맡기고, 고종은 물러나라) 본인이 윤음으로 반포.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개혁노력을 계속함. 미국에 재정 및 군사원조(고문파견)를 계속 요구하지만, 미국은 불개입 원칙. 1894년 갑오개혁 정권이 들어섰을 때에도, 고종이 자신의 개혁의지를 매치시키려 했지만 잘 안 됨.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명성왕후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아관파천까지 해야 했을까? 왜?) 돌아와서 광무개혁. 광무개혁이 민권을 외면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그럼에도 어쨌든, 고종의 희망은 계속 좌절됨. 이러한 과정을 ‘신중’하고 ‘치밀’하게 연구해주기 바람.

강상규: 개인적으로는 고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음. 다만, 기존의 논쟁(이태진 vs. 신용하)에 개입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측면.

김봉진: p.146 “구미각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민영익이 오히려 개화 자강정책에 대한 자신감을 급속히 상실하고 친청(親淸)의 자세로 경도”, p.147 “고종-김옥균 지지, 명성왕후-민영익 지지”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시 일본신문을 보면, 구미 여행 중의 민영익은 복식변화에 찬성함은 물론, 엄청나게 쇼핑을 해서 명성왕후에게 선물을 해댐. 그때까지만 해도 급진개화파에 속함. 그런데 돌아와서 태도가 변하는 이유는?

강상규: 격변의 시대상황이었기 때문인지, 이 시절의 개인은 구조적 변화를 파악하지 못하고 각자의 한계 속에서 파편적인 기록을 남긴 경우가 많음. 라쇼몽이나 빨간 모자의 진실, 식으로 여러 개의 이야기만 있고 하나의 진실은 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함.

오늘날의 시각에서 애정을 갖게 되는 인물들(최익현, 황현...)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다를 수 있음. 고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임.

하영선: ‘어렵다’는 토로가 매우 와 닿음. 학계의 선배들이 할 일을 하지 못해서 고생이 많음. 김태진, 신용하 퍼스펙티브와 다른 제 3의 입장을 내세우려니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함.

첫번째, visionary로서의 고종을 보자. 1880-1882년 사이의 문제. 일본시찰단이 다녀온 뒤 어윤중과 고종의 대담. 고종이 질문하는 방식이 흥미로움. “오로지 부강을 도모하려는 모습이 전국시대와 동일한가?” 고종이 연행사 다녀온 신하 복명시 던진 질문을 봐도, 상당한 지식과 안목이 있음은 확실. 그러므로 개혁/무능 여부를 따지는 것은 비효율적. ‘부강’을 물어보는 것은 상당히 미래지향적인데, ‘전국시대’를 끌어들이고 있음은 시대적 한계를 드러냄. 위정척사론과 해방론보다는 나아갔음이 확실한데, 원용부회론에 머물고 있음. 이 시기가 매우 중요한 때.

1882년 임오군란 직후 고종의 교서가 나옴. 김윤식이 썼다고는 하지만, 고종의 의견이 절대 반영되어 있다고 파악됨. 이 시기를 다루는 사람들이 모두 인용하는 사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린 번역이 일제히 나돌고 있음. 첫 시작은, “춘추열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만국병립의 시대로서.....”라고 당시 시대를 규정. 그렇다면, 고종의 대외관/세계정치관은 상당하지만, 그 인식의 수준이 어디까지인지를 확정하려면, 기존 국사학계는 뛰어넘어야 함.

같은 시기에 일본은 이미 ‘국제(國際)’라는 말을 만들어 쓰면서 부국강병의 경쟁시대임을 깨닫고 있었고, <조선책략>을 주면서 황준헌이 한 말 또한 “지금 시대는 사천년래 초유의 사건을 겪고 있소”로 시작. 그렇다면, 중국도 부회론은 이미 넘어섰음. ‘전국’과 근대는 나라가 나뉘어져 있음은 동일하지만, ‘국’의 존재방식 자체가 다름. 고종이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1880년대 후반의 슬픔을 피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두 번째, 정치인으로서 고종을 보자. 1884년이 중요한 해. 민영익이 왜 전향하는가에 관해 만족스러운 정치학적 분석은 나온 바 없음. 지금 남아있는 민영익 자료만으로는 증명하기 어렵고, 따라서 정치학적/국제정치학적 상상력을 필요로 함. 내가 보기에는, 민영익이 떠나있는 동안 개화압력이 점점 커져서. 그 결과 돌아오자, 민영익은 개화/반개화 양편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수장을 맡을 수밖에 없는 형편. 따라서 갑신정변이 급하게 꾸려져 한판승부가 이뤄짐. 고종은 민영익보다 더 조심스럽고 어려운 입장에서 정치인으로서 고종의 prudence가 고도로 요구되었음.

이처럼, 고종이 가졌던 vision의 가능성과 한계+prudence의 가능성과 한계를 이태진, 신용하 선생들과는 다른 강상규 버전으로 연구해야 한다.

김상배: 책 제목들에, ‘패러다임 변환’이라고 했는데, 패러다임과 transformation은 모순되는 듯 싶다.

강상규: 이 시기를 보면서, 내부에서 변화하려는 힘과 변화하지 않으려는 힘이 상충하고 얽혀 돌아가기 때문에, 백년 동안의 변화가 급격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에 (내부적 모순 속의 변증법적 변화), shift 라고 쓰지 않았다.

김상배: 패러다임을 빼고, 그냥 ‘변환’이라고 쓰면 어떨지.

강상규: 고종의 교서에는 정치적 레토릭이 상당히 들어가 있으리라 생각함. 식자층을 설득하기 위해 기존의 레토릭을 가지고 변화를 회유하고 있었다면, 그 속에서 진의 파악 어려움. 고종의 prudence에 대해서 결과적으로 평가해 본다면, 실패 맞음. 다만, 너무나 변수가 많았다는 점.  

하영선: 기무라 칸이 작년에 일본에서 고종에 관해 책을 썼음. 김봉진 선생이 강상규 박사와 기무라 칸 책 두 권을 서평하면 어떨지?

김봉진: 기무라 칸도 오리엔탈리스트.... 노력해 보겠음.

하영선: 의복과 관련하여, 히라노 겐이치로 선생이 예전 전파모임에서 모리-이홍장 대담을 얘기한 적 있음. 이홍장이 왜 옷을 양식으로 입었는가라고 모리에게 묻자, 모리 왈, 옷이야 편하면 되는 게 아니냐고 대답. 이어지는 갑론을박. 또 하나, 흥미롭게도, 박규수 저작의  많은 양이 복식 예법에 관한 것임.

강상규: 1884년 고종 복식사 개정이 매우 중요함. (얼마 전 의류학과 학위논문 나왔음, 향후 참고) 갑신정변 역풍을 가장 세게 맞은 것은 고종.

김상배: 후속작업 이야기 좀 해 주시죠.

강상규: 방학 때 박사학위논문 단행본으로 나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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