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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대열, "한국인의 국제정치적 행위의 원형을 찾아서"(06.9.23)
 

2006-11-19 
2006년 9월 23일 (금) 전파모임

참석: 하영선, 구대열, 양승태, 최정운, 김봉진, 전재성, 김상배, 강상규
발표: 구대열, “한국인의 국제정치적 행위의 원형을 찾아서”
(발표문은 이화여대 구대열 선생님께 문의)

1. 구대열 선생님 덧붙임

- 광개토대왕비를 보면, “신라의 도성이 왜로 가득찼다.”고 함. 신라 초기의 최대 위협은 왜. 그런데 지증왕대 이후 500-560,570년에는 외교관계 없이 내정에만 치중.
- 신라가 백제와 연합, 대마도를 정벌하려는 논의를 한 적 있음. (실현되지는 않았음)
- 섬나라가 통일국가를 이룰 가능성이 더 큼. 선박 항해기술만 있으면 (바이킹의 경우를 봐도) 몇백명의 군사로도 잠시의 정벌은 가능. 그러므로 설사 왜가 신라를 침범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임나일본부설 등을 두고 싸우는 것은 무의미.

- 광개토대왕비의 해석을 놓고도 의견이 분분. 금석문 글자 자체가 확정되지 않으므로 정답을 낼 수 없다는 문제 있음.

- 한반도와 대륙 정권 간 접촉사에 있어서, ‘첫 만남’이 가장 중요함. 첫 접촉의 패턴이 훗날까지 계속 반복됨. 중국에 대해 한반도는 항복하겠다고 하면서 군사적으로 역량 있을 경우 중국을 물리침. 제후국이면서도 ‘태자’를 칭함. 일면 항복하면서 일면 저항. 국가가 망할 때까지 전면 항복은 없음. 무릎을 꿇고 실제 항복하는 것은 유일한 것이 인조. 이때에도 신하와 태자를 보내면서 왕이 나가지 않도록 해달라고 끈질기게 요구,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결국 인조가 항복의 예를 행함.  

2. 토론

양승태: 일본 최초 왕조의 영토가 얼마나 되는지?

김봉진: 큐슈, 오사카.

양승태: 천황체제에 복속되지 않은 변방에 대한 태도는?

김봉진: 야만족들과의 계속적 전투.

양승태: 혼슈까지 모두 통일되는 게 언제인지?

최정운: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

김봉진: 천 년 걸렸다고 보면 됨. 나라 헤이안 시대까지가 중앙집권적 천황 통치. 천황국가가 지방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다고 봄.
양승태: 고대 일본에 화이관념이 있는지?

김봉진: 있음. ‘오랑캐’, ‘더럽다’를 뜻하는 에조, 에따. 그런데 에조가 점차 지역적으로 이동. 큐슈 내에도 에조가 있었는데 복속시키면서 에도시대에는 홋카이도가 에조가 됨. 반면 스스로를 ‘천조대신’이라고 부르는 태도.

최정운: 14개조를 낸 지역은? 전 일본열도 아니면 자신의 지배영역에만?

김봉진: 자신의 지배영역에만. 일본 고대국가의 통합능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도 연구과제.

양승태: 직접 정복이 안 될 경우 에조나 에따와 공식적 조공관계를 맺었을까?

구대열: 한반도와 중국대륙 간의 관계의 역사적 예로 볼 때, ‘조공’은 군사적 복속을 전제로 성립.

김봉진: 征夷대장군(훗날의 쇼군)이라는 직명을 봐도, 천황제 국가의 오랑캐 통합, 정복 노력은 계속되었음.

양승태: 통합과 저항의 와중에 일정한 패턴의 관계가 생겨나지 않았을지? 오랑캐들 간에, 혹은 오랑캐와 천황정부 간에. 자기들끼리 동맹을 맺는다든가, 통합이라든가.

김봉진: 에도 시대 마지막 에조인 홋카이도의 경우, 씨족/부족 단위로 흩어져 있었음. 자발적 통합 이루지 못함.

하영선: 동양 고전의 중요성. 프레임웍의 문제. 동주-신일철의 사대주의 대담. 신선생이 사대를 매우 근대적/단재적으로 본 데 반해 동주 입장은 보다 복잡했음.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우리는 해동의 외진 곳에 있어”-는 고종 때에도 여전히 반복됨. ‘사방’이라는 지리적 개념 대신 보다 정치적인 ‘천하’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주나라 때부터 문제가 됨. 서로 다른 세력들 간의 실질적 싸움이라는 한 층위와 천하는 단일한 것이라는 다른 층위가 중층적으로 존재함. 천하질서 속에서 외진 곳에 있었다는 것이, 나라 대 나라 싸움이라는 의식보다 더 강렬했을 수도 있음. 그렇다면, 천하질서=국제질서인가? 전쟁, 경계, foreign이 존재했으므로 분명 국과 국의 관계로 파악되는 측면이 있지만, 중국의 역사를 자기의 역사처럼 여기는 또 다른 아이덴티티가 존재. 이 두 아이덴티티를 모두 포착할 수 있는 프레임웍 필요. 일본의 천하문제에 대해서는, 중국적 천하의 극변방이므로 상대적 자율성 내지 고립성을 지녔다고 보는 것이 옳음.
  
최정운: 삼국이 한반도 통일 프로젝트를 지녔다면, 언제부터일까요?

구대열: 660년 백제 멸망 직전에, 백제가 신라에 원조 청병하러 감. 그 때에조차, 이것은 통일 프로젝트가 아니라 정권 안보 차원. 그러므로 삼국통일 후의 정체성이란 역사적으로 점차 형성되었다기보다는, 갑작스레 주어진/발견된 것이 아닐까 싶음.
하영선: 삼국이 각자의 아이덴티티를 가졌으므로 상쟁했던 것 아닌가. 여러 가지 중층적 identity formation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 삼국 간의 말도 통역이 필요했음. 중국의 경우에도 천하가 명분체계로 완전 장악했다면 전쟁이 불필요했을텐데, 명분이 약해질 때-원명교체기, 명청교체기-면 주먹이 등장.

구대열: 나제동맹 시절, 백제의 한 변방의 성의 백성들이 모두 신라로 오자 신라왕이 이를 받아줌. 백제왕이 이에 우리 두 나라가 그동안 잘 지냈는데 왜 그랬느냐 항의하자, 신라 왕이 왈, “백성들은 오고 가는 것이 아닌가.”

양승태: 삼국시대 언어 최신 연구를 누가 하고 있는가.

구대열, 하영선: 자료 불충분.

양승태: 만주어를 완벽히 하는 것이 급선무.

구대열: 지금 생각은, 2장의 분량을 두 배로 늘려야겠다는 것. 문제가 자꾸 떠오름. 일단 기본적 입장은 1차자료를 보자는 것. 광개토왕비의 경우에도 하나하나 짚어봐야 할 글자들, 걸리는 문제가 어찌 많던지. 초기단계이므로 너무 많은 기대는 삼가 주시라.

최정운: 광개토왕비의 건립 목적이 무엇인지, 상정한 reader는 누구였는지 중요한 논쟁사항.

강상규: 1. 태학과 관련 사서삼경 이야기를 하시는데, 사서는 주자 때에 나온 것이라 오류가 아닌가 합니다. 육경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2. 쇄국정책 표현도 ‘해금’으로 바뀌는 것이 역사적 맥락에 적절. 3. 제왕운기에서 인용한 대목(2장 p.9)-“화인이 이름지어 소중화라 했도다”에서 보듯 ‘소중화’ 논의는 명 멸망 뒤에 나온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부터 계속되다가 조선조에 들어와서 변화되었다는 것이 요즘 중론. 4. 1장 각주 35번 이홍장이 이유원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이제이’를 쓰지 못한 이유와 관련, ‘이독공독’이나 ‘이적제적’이나 여기 컨텍스트는 서방의 국가로 하여금 다른 서방 국가를 치게 한다, 는 뜻. “조선에 대해서 직접 ‘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한 결과는 아니라고 봄. 이미 이 시기에 들어가면 조선은 스스로를 ‘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중국 또한 조선을 그렇게 보지 않음.

김봉진: ‘이이제이’를 쓰지 못한 이유는 ‘이’를 빼달라고 영국 측에서 요구해서 1858년 조약으로 명문화되었기 때문.

하영선: 1장 처음의 인용문 매우 흥미로움. 시기(1880년 11월 22일) 또한 절묘함. 황준헌이 김홍집을 만나 <조선책략>을 건네준 것과 동일한 시기. 황준헌은 이 때 “4천년 역사 이래 없었던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극약처방이 필요하다.”는 과격한 이야기를 함. 이에 김홍집은 옛날 얘기 그대로 하면서(“조선은 해동의 외딴 곳에 위치하여.....”) 믿는 것은 중국밖에 없다고 함. 그러나 황준헌은 전통이 아닌 근대적 입장에서, 자강하라고 충고. 다음날 만난 하여장은 자강 뿐 아니라 균세까지 권함.

김봉진: like children이라는 것은 한-중 사이 전통적 ‘부자관계’의 비유, led by kindly and conciliatory treatment는 기미가 아닌가.

하영선: 하여장이 케네디에게 했다는 이 이야기가 중국측 어느 사료에 남아있을까? 용어를 비교해보면 재미있겠음.
  
구대열: 중일한 청계사료집.

김봉진: 하여장은 전통 중화질서를 생각하면서 군신-부자관계, 기미정책을 언급했을 수 있는데, 영국은 서양제국이 남미를 어린아이 비유를 통해 폄하했듯 제국주의적으로 이해했을 수 있음. 인식의 차이.

하영선: 조선을 어린애 다루듯 살살 다루라고 하면서 하여장은 영국으로 하여금 조선을 무력으로 침공하지 말라고 설득하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음.

최정운: 옛날에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삼한’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나왔는지? ‘한’이 세 개라는 뜻인데. 고려 왕건이 계속 삼한을 통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던데.

구대열: 태조 왕건의 유훈에는 분명히 나옵니다만. 그 이전 신라 통일 전후에 이 말이 나왔는지 알아보는 것이 한 과제. 마한, 진한, 변한이 고구려, 신라, 백제로 이어졌다는 의식이 담겨있음.

하영선: ‘신라’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왔는지?

김봉진: 신라의 어원은 삼국사기에 나와있음.

강상규: 일본서기와 고사기도 참조하시면 좋을 듯 함.  

하영선: ‘천하국가’ 책 낸 서강대 김한규 선생은 책의 서문에서 “고구려사는 한국사인 동시에 중국사다.”라는 논란의 여지 있는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김봉진: 동북공정에서 고구려사를 변방사라고 주장하는 것인지,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것인지?

일동: 중국사.

최정운: 그럼 흉노, 돌궐, 선비족은 다 어떻게 처리? 요동사를 중국사로 일괄처리하는 것은 말이 안 됨.

하영선: 그런데 결국 ‘국사’도 국력이 결정하는 것 아닌가?

강상규: 漢江의 ‘한’을 보면 오늘날 무슨 생각을 할까? 수도 서울의 한강에 한나라 ‘한’자를 썼으니, 이는 華에 대한 지향을 반영하고, 너희는 우리 중국의 제후국에 불과했다는 식의 논리.

김봉진: 일본 모로하시 테츠지의 대한화사전을 보면 ‘漢’에는 지리적 의미가 있음. 한나라 한, 한족의 한과는 상관없다고 알고 있음.

구대열: 게르만 족이 Holy Roman Empire라고 하면서 로마를 자기들이 전유하려고 별 짓을 다하는데, 이 정도야 약과.

최정운: 다시 ‘삼한’ 이야기를 좀.

김봉진: 온조신화와 주몽신화가 모두 같은 뿌리. 그러므로 고구려와 백제는 기본적으로 동질성 지녔음.

구대열: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는 ‘삼한’이라는 말이 나옴. 고려조.

최정운: 일본에서는 우리 고대사에 대해 어떤 입장?

강상규: 정한론 나오면서 임나일본부설을 논거로 사용.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그런 이미지.

구대열: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옛날 우리 신하국이었던 나라를 다시 회복한다”는 게 명분이었음.

강상규: 일본판 천하의식. 에도 시대에 천황 중심 역사 서술 진행. 따라서 그 이전 역사서의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 많음.

최정운: 한 시대에도 아이덴티티를 꼭 하나만 가졌을 것 같지는 않음.

하영선: 근대국민국가는 그것을 단일하게 통합시키려고 강압했던 독특한 시기.

** 다음 전파: 11월 4일 (토) 이헌미 발표
*** 그 다음 전파: 11월 25일 (토) 하영선 선생님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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