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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쩌허우, <중국근대사상사론> (06.6.27)
 

2006-11-19 
일시: 2006년 6월 27일(화) 3시
장소: 경기도 수지 세계정치연구소
참석: 하영선, 최정운, 양승태, 구대열, 김봉진, 전재성, 강상규, 최상용
발표: 최정운, 리쩌허우, <중국근대사상사론> (한길사, 2005) (원래 1979년작).

- 학진 소규모집담회 200만원 받게 되었음.
- 다음 발표는 김상배 박사. 노대환, <동도서기론 형성과정 연구>
- 다음 날짜는 8월 9일(수) 3시.
- 9월말 구대열 선생님 프로포절.

I. 최정운 발표

1. 홍슈취안(洪秀全)과 태평천국 사상 산론

종교의 형태를 띤 정치.경제 혁명. 실패의 원인은 봉건적 생산 양식을 극복한 새로운 생산양식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 예를 들어 ‘天祖田畝制度’ 같은 중국 고대의 이상주의적 토지제도는 현실화될 수 없었다. 말기에는 <자정신편>에서 근대적인 구상이 제시되었으나 현실화되지 못하고 말았다. 사건은 전체적으로 혁명적 반항성과 봉건적 낙후성의 갈등.

2. 19세기 개량파 변법유신 연구

태평천국과는 다른 맥락에서 이미 19세기 초부터 낭만적 현실비판이 등장. 예를 들어 궁쯔전(龔自珍). 그러나 전통적 시각에 머무르고. 그후 웨이위안(魏源)의 <海國圖志>의 개혁요구는 군사방면에 국한되고. 그 후 평구이펀(溤桂芬) 등도 ‘지주계급의 개명사상가’로서 현상유지에 머무르고.

개량파 변법유신 사상의 출발은 1870-80년대. 양무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정부에 민족자본의 발전을 중시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경제사상으로 출발. 1880년대 정관잉(鄭觀應)과 천츠(陳熾)도 주로 군사문제에 주안점을 두었으나 상공업의 중요성을 절감한 중상주의적 사상. 상품의 무역유통에 주안점을 두고. 애국주의적 선진적 성격.

당시 ‘頑固派’는 강력한 세력이며 명확한 입장, 서구사상 문물에 첨예한 적대감. 개량파는 온건한 자유주의 사조로 보수적인 입장이며 철학적 근거는 오로지 ‘變易’.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여 정통 지배사상과 경계를 긋지 못하고 양무파와 연합에 그침.

청일전쟁,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중국은 ‘半식민지’의 새로운 단계로, 직접 자본침략이 시작되고. ‘瓜分’. 반제국주의적 분위기가 고조. 그러나 한편 중국 내에 공장이 급증하며 개량파 변법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캉유웨이는 의회, 입헌제, 법치주의 등을 주장하고 기타 경제, 군사, 교육, 문화 면에서도 개혁을 요구. “부르주아 계급 성격을 지닌 사회.정치 이론과 철학 관점의 일습을 만들어 변법사상의 공고한 이론적 기초로 삼은 것은 이 단계 개량파 사상의 가장 중요한 발전이자 가장 탁월한 성취였다.” 신구 사상의 공식적 충돌. 개량파와 양무파, 중체서용 간의 충돌.

3. 캉유웨이 사상 연구

체계. 4가지 측면. 1) 변법유신의 구체적인 개혁사상. 2) ‘托古改制’로 변법이 ‘성인의 도’에 부합함을 논증하고 3) 대동사상, 원리원칙 위에 세워진 웅대한 자유주의 식의 낙관적 유토피아 4) 철학사상, 다양한 의미. 부르주아의 지적 욕구를 반영, 중국 고대 철학의 발전이자 완성, 신구세대의 교체를 담지.

우주론. 기일원론과 음양오행에 근거하여 서양과학을 도입. 그는 의식은 ‘電’(전기)과 동일시하고 박애주의적 ‘仁’의 철학으로 발전. 유물론적. “모방하기 어려운 천진함과 열정으로 알듯 모를듯한 과학에 대한 견문을 성급하게 자신의 사상에 섞었다.”(196-7)

진화론. ‘거란’->‘승평’으로, ‘군주’->‘군민 공주’로, ‘전제’->‘입헌’으로 진화. ‘대동’의 이상을 ‘공자의 眞道’로. 고대 철학을 계승한 근대철학의 진정한 시작으로 제시. 유물론적 요소와 관념론과 신비론을 또 다른 한편에.

‘대동’은 개량주의의 이상을 담고. 그러나 개량파의 현실적 요구를 초월한 모습. 즐거움을 구한다는 질박한 인본주의에서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찬가. 형식적으로는 공상적 사회주의지만,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개인을 추구 특히 가족 소멸. 점진을 긍정, 비약을 부정. 대동은 진화의 결과이지만 먼 미래의 일. 혁명, 대중운동에 반대하고 현실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사상.

공자의 사상을 기본으로 삼아.....후기에 다시 공자로 돌아감.

4. 탄쓰퉁 연구

개량주의를 극복, 혁명주의로의 가교. 서양 자연과학 지식의 자의적 도입. ‘以太(ether)’ 개념을 도입하여 정신을 포함한 물질로 仁의 기반이자 우주의 기본 실체로. 자신의 무궁무진한 우주론을 구성. 유물론적 기반. ‘仁’을 자연적인 실체이자 법칙으로 개조하고 ‘仁一通’을 우주의 총법칙으로.

그러나 주관주의로 인해 그의 변증법은 절대적 회의론과 불가지론으로 귀착. 당시 중국 부르주아의 요구와 인륜을 자연법칙화하려는 시도.

서양과학의 관념, 또는 신화적 단어를 견강부회로 들여와 활용한 또 하나의 예. ‘以太’는 범신론적 색채를 띠고 엄청난 혼란. 상대주의에서 회의론과 불가지론을 거쳐 최종적으로 관념론에 이르고.

성급한 철학 체계의 완성을 위한 욕망. 이러한 유형의 성숙지 못한 철학은 중국 근대 부르주아지의 현실투쟁 역량의 결여를 반영. ‘以太’는 당시 중국 철학에서 나타나던 전형적인 애매한 존재. 이 모순은 “그 사회.정치사상의 급진성과 연약함, 혁명과 개량, 과학 주장과 종교미신의 모순을 직접표현.”

급진적 정치사상. 민주공화국. 이성만의 역사. 종교적 신비주의와 같이 공존. 비극적인 모순적 요인들이 상존하고. 탄쓰퉁은 캉유웨이와 달리 자신의 모순을 자각하지 못하고 결국은 원세개를 지지하여 비극적 종말.

5. 옌푸론

번역가로 알려진 인물. 보다 장기적이고 본질적 부분에서 강력한 영향력. <천연론>, <국부론>, <법의 정신>, <밀 논리학>을 번역. 서양사상의 체계적인 도입. 이론 지식을 최초로 소개함으로써 중국근대사상사의 신기원을 열고. 서양 학문 자체에 깊이있는 이해를 추구. 그러나 <천연론>의 경우 나름의 취사.선택.평론.개조. 정치적으로는 보수적 입장. 철인정치의 환상을 품고. 법가적 사상에서 다시 말년에는 孔孟으로 돌아가고. 다시 허무주의로.

서구 자본주의의 핵심을 자유로 판단, 민주에 앞서. 그러나 국가의 자유를 개인의 자유보다 우위에 두고.

6. 20세기 초 부르주아 혁명파 사상 논강

혁명사상은 1905년 쑨중산의 동맹회 성립으로 완성. 형성의 계기는 1900년 자립군 운동과 1903년 항러 의용군 운동. 이 과정에서 천부인권설, 공화제, 혁명강령이 도입되고. <공산당선언> 소개, 아나키즘 도입. 그러나 아직 좌우익 구별되지 않음.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상은 뿌리내리지 못함. 봉건주의와 소생산자 의식. 이들과 싸우며 5.4 등이 나타남. 경제토대가 제대로 근대화되지 못한 채. 봉건주의는 사회주의 옷을 입고 봉건파시즘으로 나타나고, 19세기 후반에 도입하려고 했던 근대서구 부르주아 사상과 이념은 근대 중국에서 살아남지 못한 가치.

7. 쑨중산의 사상

민족주의의 재정의에서 출발. 서구의 민족주의 이론을 학습, 그러나 현실적으로 ‘反滿’이 지배적 이념. 쑨중산은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고. 쑨은 산업화를 중요한 계획으로 구상. 쑨중산은 계속 민권주의, 민주사상을 강조했지만 중국에서는 결국 실패. 민생주의는 Henry George적 인민주의적 사회주의 사상에 근거.
(( 이하 발제문 참조 ))

* 논점

1. 그의 시각은 표면적으로는 맑스주의와 마오의 중국 혁명 사상에 동조하고 사회의 물질적 기반을 중요한 요인으로 간주하지만 실제로는 서구의 부르주아적 사상이 중국에 뿌리내리지 못한 것을 문제삼는 이중적 모습.

2. 중국의 근대사상의 흐름은 우리 근대 사상사와는 상당히 다른 패턴. 특히 동서양을 나름대로 융합시켜보겠다는 기상천외의 철학들이 다수 출현. 도저히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없는 미로의 사상. 이러한 사상들이 나타나게 된 근거와 원인은?

3. 사상적 괴물들이 출현, 캉유웨이, 탄쓰퉁, 장타이옌 등. 동서양의 모든 사상, 철학, 종교의 알 수 없는 잡거적 종합. 왜 이런 사람들이 조선에는 별로 없었을까?

4. 그들은 왜 동과 서의 철학을 융합하겠다는 욕망에 집착했을까? 그런데 왜 동과 서의 융합은 그런 괴이한 형태로 되었던가? 동과 서를 섞으면 이렇게 괴이하게 될 수밖에 없는가? 왜 우리는 ‘괴이’하다고 느끼는가?

5. 동서양의 문화가 교차되는 곳에서는 사상이나 철학 외에 개인적 차원에서의 ‘개화의 괴물’(예를 들어 ‘阿Q’ 같은 인물)은 공통적으로 많았을 텐데. 또한 이런 인물들은 유길준이 ‘개화의 노예’, ‘개화의 등신’ 등으로 비판했던 종류의 인물이 아니었던가?

이들은 ‘개화기’에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갖지 않았던가? 최악의 타락을 대표하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6. 중국의 경우는 전파의 시각에서 보면 복잡한 패턴. 몇 차례의 파고. 즉 단순한 하나의 곡선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경우가 아닌가? 각 波高는 그 전 파고의 좌절의 반동에 의해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 각 파도는 어떤 이유에서 좌절했던가?

7.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봉건 파시즘’을 거치지 않고는 중국의 근대화는 불가능했던가? 그렇다면 중국혁명의 미묘한 역사적 의미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II. 토론

하영선: 리쩌허우의 근대사상사론은 56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쓴 것. 그 사이에 문화혁명이 있었고 그 이후에 개혁개방을 겪는다는 점에서, 일정한 관점을 견지하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리쩌허우는 고대-근대-현대사상사론에서 방향성 유지. 그의 입장은 개혁개방적인 것.

고대사상사론의 첫 챕터와 현대사상사론의 마지막 챕터가 흥미로움. 공자의 ‘예’에서 시작, ‘서체중용’으로 끝맺음. 개개 사상가를 철학, 정치, 사회사상사적 측면에서 고루 살핌. 공자와 맹자 사이에 동중서를 넣는 논쟁의 핵심에 서 있음. ‘인’이 아니라 ‘예’에서 공자 논의를 시작한다는 점.

‘중체서용’이 아니라 ‘서체중용’이라는 것 또한 중요함. 양무와 변법의 도식. 책을 모두 끝내면서 리쩌허우가 말하기를, 아직도 중국에서는 세계적인 사상가가 나올 수 없다. 세계적 사상가가 나오려면 본격적인 서체중용이 이루어져야 함. 벨린스키가 푸시킨을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로 논하지만, 그를 세익스피어나 괴테와 같은 등급에 놓을 수 없음.

양무->변법->손문으로 갔는데, 리쩌허우가 글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양승태: ‘서체’? 서양제도의 도입?

구대열: 학문적 체계, 사상 전체를 알자.

최정운: 제도 뿐 아니라 identity, ego, self까지 들여와 내재화해야 함.

양승태: 중국은 서양적 가치, 문화, 제도를 통해 환골탈태해야 한다? 그러면 ‘중용’은 왜 필요한가?

최정운: 서양의 자유, 민주, 자본주의 경제 등이 구망의 과제에 의해 압도되었는데, 손문에 와서 비로소 혁명으로 전환된다는 점에서, 리쩌허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상가는 손문이 아닌가 함. 현실적으로 모택동으로 넘어가는 흐름이 불가피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불가피하다는 점 자체보다는 그로 인해 장기적으로 치른 댓가-서양의 부르주아적 가치들의 희생-에 주목함.

우리나라도, 중국도, 개화파가 철학적인 면에서 위정척사파와 논쟁하지 못함. 위정척사파가 원리적 우주관을 가지고 있는 반면 개화파는 그렇지 못함. 옌푸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도, 완고파와 논쟁을 벌일만큼 본질적인 서양가치 탐구 작업을 했던 유일한 사람. 급해서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의미를 새기면서 제대로 수용해야 함.

한편, 청나라의 완고파가 어떤 사상적 토대를 가졌는가는 우리=주자학보다는 복잡함. 금문학, 기철학 등. 완고파는 지주계급을 대표하고 기존 정치사회질서를 유지하겠다는 입장.

1890년대 이후에는 상당히 진전된 의식을 보이는 개화파가 나타나는데, 강유위를 비롯한 개량유신파들이 몰매를 맞는 상황이고, 몰매를 때리는 진영은 일정한 이념을 가졌다기보다는 개량유신에 반대하는 여러 진영의 연합.

그런 점에서는 신해혁명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 미스테리. 청조의 붕괴를 전제로 함.

구대열: 완고파는 집권층. 개화파에 대한 반대논리는 공맹에서 벗어난다는 점.

최정운: 신해혁명이 와해되기 직전 즈음에는, 중국 사상의 스펙트럼을 일별하기가 매우 어려울 만큼 다양하지 않았을까 함.

하영선: 두 가지 난점이 있었을 것. 중국근대사 해석이 1978년 이후에 격변을 겪음. 19세기 사상가 전집들이 전부 새로 공간됨. 리쩌허우가 평가받는 이유는, 이미 50년대부터 일관된(지금 호응받을 만한)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기 때문. 그렇다면 78년 이전에 이만큼 쓰는 것은 조심스러웠을 텐데도 용케 해냈음. 두 번째로, 19세기 당시 개량파들이 직면하고 있던 어려움. 완고파는 중국 역사와 전통 전체를 등에 엎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잠식해 들어갈 것인가?

중체중용/ 중체서용/ 서체중용/ 서체서용. 서체서용의 입장에서는 리쩌허우의 근대사상사 작업이나, 그 속에서 다루어진 개혁사상가들의 작업이 만족스럽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중체서용에서 서체중용으로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리쩌허우의 주장에는, 사후적이고 이론적인 완결성이 부족하다고 간단히 비판할 수 없는 측면 있음. 중공 56-78년까지는 강유위/양계초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었던 시절.

최정운: 손문이 강유위/양계초에서 마오의 혁명으로 가는 가교의 역할을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구성.

김봉진: 저의 유학 시절에 리쩌허우가 일본에서 유행. ‘서체중용론’은 1987년에 발표한 것이고, 그 전에 ‘구망과 계몽의 이중주’가 있었는데, 이 두 개의 논문으로 일약 유명해짐. 또 하나는 문화심층구조. 중국 저변에 흐르는 문화심리구조가 있다는 주장. 그와 관련해서는, 마루야마 마사오도 일본 정치사상의 중저음/고층론. 두 가지 비교해서 많이들 이야기.

리쩌허우의 핵심 주장은 중국이 근대화에 실패했고, 그러므로 이제라도 근대화해야 한다는 것. 계몽이 구망에 압도되어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 손문조차 혁명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음.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마오나 공산당에 대해서는 아예 평가하지 않음. 마오쩌둥 및 공산혁명의 불가피함을 인정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로 인한 근대화 실패 측면을 매우 비판하며, 근대사상사를 통해 등소평의 개혁.개방론을 매우 지지함.

리쩌허우 체=생산양식, 생활현실, 제도나 기술까지도 여기 속함. 용=적용, 응용. 등소평식 실용주의 노선에 들어가자. 중용=중국에 적용하자.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음.

하영선: 서체중용, 을 말할 때 서체서용의 단순한 모방보다는 좀더 고급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굳이 고대사상사론에서부터 시작한 이유가 무엇일까.

김봉진: 역시 맑시스트 역사학자. 문화심리구조=정신적 토대. 서체=물질적 토대. 서체를 말할 때에는 과거에 ‘용’이었던 것을 ‘체’로 뒤집어 버림. 정-반-합의 ‘반’을 제시하고 있음. 서양의 기술/제도/사상을 중국의 일상생활에 적용하고 응용하자. 서체중용 이후 중국의 ‘체’와 ‘용’은 미래세대에 맡기고, 지금 단계의 중국에 필요한 것만을 말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주의적 태도.

양승태: 이 사람이 미학사 등을 천착한 것은, 역시 뭔가 중국적인 본질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게 아닌가? ‘중용’이 무엇인가?

최정운: 고대사상을 나름대로 재해석하겠다는 것이지, 중국정신을 다시 일깨우겠다는 것 아님. 김봉진 박사의 체용론이 맞다고 봄. 체를 맑시스트적으로 물질생활 면에서 재정의하고, 그 경우 서체는 서양식 경제시스템을 들여오는 문제가 됨.

양승태: 리쩌허우가 서양의 근대성 자체를 얼마나 어떻게 이해했는지 궁금.

구대열: 1930년대 중국지식인 사이에서 좌파 논쟁이 있었을 때, 이것을 좌파쪽으로 끌고 간 것이 곽말약. 공산주의 체제에서의 지식인 지위라는 것의 핍진함. 궁핍함. 이런 속에서 살아남아 리쩌허우가 이런 글을 썼음을 상기했을 때, 개혁파는 이렇고 완고파는 이렇다는 식으로 반대당의 논지를 균형감있게 제시하는 것이 가능했을지 의문. 기본적으로 이념적 글쓰기.

김봉진: 리쩌허우는 박정희주의자와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함. 서체라고 하는 것도, 물질적 토대를 만드는 것. 과거 체용론에서의 체와 용을 논하는 것은 그 이후에 가능해짐. 1990년대 리쩌허우 이후 세대에서는 양무운동 연구가 유행. 이미 어느 정도 물질적 토대가 확보되었기 때문에 보다 보수적인 ‘중체’에 대한 문제의식 회복 가능. 지금은 빈부격차, 부패 등 중국현실 비판하는 포스트모던의 군웅할거.

양승태: 현대 중국 학계에서 리쩌허우에 대한 평가는?

김봉진: 거의 거론되지 않음. 이미 유행 지났음. 한국은 20년 뒤진 셈.

하영선: 우리 동도서기/ 문명개화의 철학적 기조도 마찬가지이지만, 19세기 표현으로 천리/시세라고 부르든, 18세기 표현으로 천리/경세라고 부르든, 예(禮)라고 하는 것은 ‘천리’를 말하는 것이고, 인(仁)이라는 것은 '시세'를 말하는 것인데, 리쩌허우가 예에서 시작하는 것은 리를 매우 flexible하게 보는 것. 조선은 리를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 핵심. 그런데 리쩌허우는 리까지도 서양 것을 받아들이자. 쉽게 할 수 없는 이야기.

리쩌허우는 주자주가 아니라 선진주로 돌아간 것. 서양 것도 기 수준이 아니라 도 수준에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유학사를 재정리할 필요. 굳이 고대사상사론을 쓴 것은 간단히 볼 문제 아님.

최정운: 중국에서는 강유위에서부터, 공맹 해석이 사상사적 투쟁의 최전선이었음.

양승태: ‘예’라는 것도, 관념적 ‘리’의 질서라기보다 사회제도로 객관화된 측면에 집중한 것 아닌가.

하영선: 기존 유학적 사고에서 서양은 ‘천리’에 어긋나며 따라서 비판. 그런데 ‘예’를 거론하는 것은, 원시유학을 끌어와서 ‘리’를 보다 flexible하게 만들려는 기획. 원시유학에서는 ‘리’ 논하지 않음. ‘리’가 추상화되는 것은 정주에서부터 시작.

구대열: 예악을 논어에서 규정하는 방식을 보면, 사회 체제, 객관화된 질서.

양승태: 그와 관련해서, 이완용이 결국 유학자로서 서도서기론으로 전향했다고 보는 것이 옳은가? 서학이 더 우월한 도의 실현이다, 라는 식으로.

김봉진: 그런 논리 발견하기 어려움. 약육강식의 상황에서 강력에 굴복한 것 아닌가. ‘서도서기’라는 표현이 적합한지 모르겠음.

최정운: 독립협회 시절의 개화파는 서도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음에 분명. 그러나 서도가 우월하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나라를 팔아먹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음. 독립협회의 주된 주장은 일본이 아니라 ‘미국’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

김봉진: 독립신문 발간자들(서재필, 윤치호)을 서도서기론자들이라 부를 수는 있음. 동도=공맹의 도, 서도=기독교. 이완용은 독립협회 부회장까지 지냈으니 영향을 받았을 것. 그러나 서도서기론과 일본에의 동화는 구별되어야 하지 않은가.

양승태: 일본에의 동화가 서도서기의 한 방편으로 사고될 수 있음. 지극한 민족주의가 독립을 포기하는 논리로 이어지는 민족주의의 역설.

최정운: 민족주의라기보다는 문명론. 단재는 두 번의 부정. 유학은 안 된다. 서양모방도 안 된다. 조선 자체로부터 구망이 기획되어야 한다.

강상규: 중국이 근대를 수용하는 방식이 일본보다 철저했다, 는 논의가 194-50년대(버틀란드 러셀, 다케우치 요시미)에 나왔었음. 그런데 문화혁명 등을 목격하면서 중국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뀜. 리쩌허우는 이 지점에 서 있는 것 아닌가 싶음. 기본적으로 리쩌허우의 입장이, 매우 근대편향적이면서, 상당히 모호한 것이 불만. 완고파 내지 반동파를 다루지 않고 있고, 중국 근대화를 염두에 두고 사후적으로 선별된 사상가들을 다룸.

‘동도서기’라는 말은 조선에서 1880년대에 개혁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선책략 들어온 뒤 비판적 여론 들끓는 상황에서 전통주의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논리로 등장. 정치적 레토릭으로 읽혀져야 함. ‘동도서기’가 기존 보수 개혁가들의 수구적 논리라고 파악되어서는 안 됨.    

양승태 선생님 식으로 ‘서도서기’를 파악하는 것의 문제는, 동일한 서도서기론자라고 할 수 있는 김옥균과 이완용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하영선: 우리 경우는 역시 초기 개화에 있어 위원의 <해국도지>가 중요한데, 해국도지는 중체의 입장이고, 매우 제한적인 서용. 우리는 고종친정으로 들어서는 1874-5년이 전환의 시기였다고 생각하는데, 유길준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실제 유길준의 입장은? 유길준과 김윤식을 비교할 때, 민두기 선생이 중국의 중체서용에 대해 양무와 변법 사이의 애매한 개념이라고 비판한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 우리에게도 벌어짐. 김윤식 입장은 분명. ‘천리’에 대해 양보할 생각 없음. 그런데 유길준 입장은? 양절을 말할 때에는 양쪽을 다 인정하겠다는 것 아닌가? 아니면 이미 서양으로 전향한 것인가?

최정운: 이미 서양 언어로 전환을 했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서양의 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 중국이 우리와 특이하게 다른 점은, 강유위, 담사동 등 괴물 철학자들의 출현. 중체서용이란 것은 사실상 말단의 실용적 목적을 주로 한 것이며 철학적으로 매우 취약한 논리구성인데,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완고파와 논쟁하기 위해 괴물철학을 만든 것 아닌가.

양승태: 리쩌허우의 글은 학문적으로 성실치 못함.

하영선: 강유위를 봐도 1884년 중불전쟁 일어났을 때 한달을 불면에 시달림. 담사동도 청일전쟁 터지자 거의 제정신을 잃어버림. 모두 현실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음.

양승태: 강유위 대동사상 연구에서, 자유로운 개인 추구가 왜 가족 소멸로 이어지는지?

최정운: 당장 대동으로 갈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몇백 몇천 년 뒤의 공상적 사회의 상을 제시하는, 일종의 역사에 대한 진보철학.

양승태: 담사동이 “캉유웨이와 달리 자신의 모순을 자각하지 못하고 결국은 원세개를 지지하여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는 발제문의 문구는 무슨 의미인가?

김봉진: 담사동이 원세개를 지지했다는 것은, 1898년 무술정변 이야기. 일본망명을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  

구대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사상사 단행본 연구가 벤자민 슈월츠와 조지프 레벤슨 뿐이었음.

김봉진: 벤자민 슈월츠에 따르면, 옌푸는 헉슬리를 스펜서적으로 해석한 사람. <천연론>.

하영선: 흥미롭게도, 양계초는 일본번역을 그대로 원용하는데, 옌푸는 고민을 통해 일본번역과는 차별화. 옌푸는 최초의 국비유학생으로 영국에 갔던 인물로서, 시간과 싸우며 대중계몽을 목적으로 했던 양계초와는 입장이 다름.  

김봉진: 유학을 다녀와서도 계속 과거를 보기 위해 공부. 팔고문의 대가. 번역할 때도 전통어를 살려쓰는 한편, 한문신조어들을 많이 만들어 씀.

구대열: 강유위 대동사상이 일진회에 영향을 주지 않는지?
모택동이 맑시즘의 중국화를 말했을 때, 중국적인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것이라 대답. 중국적인 방식으로 서구적인 원칙.원리를 실용화시킨다는 뜻으로 ‘중체서용’을 말한 측면은 없을까.

최정운: 강유위는 그 딜레마에서 탈출하기 위해 아예 자기만의 우주론을 만들어버림.

전재성: 맑시스트 사관을 강하게 느꼈음. 서체 이야기도 서구식 자연과학과 유물론적 역사발전법칙에 대한 신뢰. 예전의 봉건적 사회질서와 이념체계로 환원시키려는 완고파에 대한 반대. 태평천국-개량파-혁명파 3단계 공산화의 목적론이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확고한 사회주의자. 다만, 결론 부분에서 중국의 사회주의는 너무 관념론으로 치우쳐서 관념론의 여지를 현대의 사회주의가 못 메우고 있다는 비판. 두 번째는 전쟁의 변수를 매우 중시. 아편전쟁과 태평천국, 청불전쟁과 강유위 개량파 등장, 청일전쟁과 혁명파 등장. 전쟁이 있을 때마다 사상사적 도약 발견. 그런 면에서는 국제정치적으로도 흥미로웠음.

최상용: 지난번 중국 갔을 때, 이데올로기 담당관에게 중국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했더니, 맑시즘과 유교라고 대답. 서체중용에서 서체는 맑시즘. ‘혁명’이라는 말 별로 사용하지 않고, ‘평등’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의식하는 한 맑시즘을 떠날 수 없다. 그리고 유교를 ‘평화’와 연결시켜서 설명. 중국 지식인의 담론은 현실정치와의 관련성 없이 이해해선 안 됨. 이데올로그의 성격이 강함. 중국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어도, 중국 사람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정언명제가 너무 많음. 리쩌허우는 맑시즘 카테고리를 구사하는 절충적 개량주의자인 듯. 망명 근대화론자. marginal man. 왜 이 사람의 책이 한국에서 인기가 있는가.

‘서체중용’ 속에는 서양우위의 판단이 있음. 서양학문에 기초를 두고 중국을 분석하는 것이 중국을 더 분석하기 쉽다는 주장이, 중국학자 쪽에는 없는지? 나 개인적으로는 ‘서체’에 사상적 우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음. 다만, 방법론적으로는 ‘서체’ 우위 인정. 소크라테스 방법과 아리스토텔레스 방법의 차이. 동양의 학문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몇몇 엘리트들에 의해 진리가 재단되지 않는가. 서양적 의미에서 대화를 통해 진리를 ‘추구’해 가기 어려움. 그런 의미에서 이 책도 동양 학문하는 전통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것 아닌가 함.  

강상규: 1899년 고종의 유교국가 선언의 의미?
동교서법과 동도서기, 중체서용은 다름.
구본신참에서 ‘새로운 것’의 대표는 만국공법.

양승태: 정통적 왕권 유지 목적의, 정권안보용 레토릭 아닌가?

강상규: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 했던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은 종교 문제. 일본의 정신적 축.
일본의 유교국가 선언이 유교 이외의 것을 배척하겠다는 의도 아님.

최정운: 1898년의 사태를 염두에 두고 했을 가능성 크다고 봄.

구대열: ‘만국공법’을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에는, 사회체제 전체를 변혁해야만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음. 유교를 표방한다고 해서 바로 중국화를 의미하는 것도 아님. 과거에도 ‘우리의식’은 존재했음.

강상규: 정치적 실패가 바로 (고종의) 의도를 무화시킬 수 없음.

구대열: 1930년대 장개석이 모택동에 대항하여 유교 표방. 만국공법을 국가이념으로 삼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충성을 동원할 만한 이념은 역시 유교.

최상용: 대내통합과 대외적 상징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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