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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규, “고종과 문명사적 전환기의 위기”
 

2005-10-19 
2005년 2월 28일 전파모임

참석: 하영선, 구대열, 양승태, 최정운, 장인성, 김봉진, 김상배, 김영호, 배영자, 남궁곤, 문유미, 강상규, 김용직, 전재성
발표: 강상규 박사(외교 85), “고종과 문명사적 전환기의 위기”

* 발표

- 박사논문 3장 해당 부분 고종 중심 발제.
- 발표문 참조.

- 서론
1. 조선시대 군주에 대한 연구가 부진한 원인
1) 근대적 진보관에 입각한 시대 인식과 동양사 연구
2) 기존 연구의 편향과 연구자들의 선입견

2. 중화적 천하질서 - 주자학적 세계관 - 왕권이라는 공간의 규명을 전제로, 고종의 정치의식과 대외관을 논하려고 함

양승태: 고종 뿐 아니라 조선 시대 군주 일반에 대한 연구가 전반적으로 부진한데, 군주 연구를 위한 실증적 자료가 어떤 것들이 있는가?

강상규: 일본에서는 실록 등 관찬자료 이외에 자료가 전무하다고 하지만, 실제 한국에 자료는 그보다 많다고 봄.(근세조선연감, 황현, 윤치호, 외국인들의 회상록 등.) 연구가 미진. 문제는, 이 자료들의 해석.

구대열: 전통적 역사서술 방식에서 보면, 왕조의 역사는 그 다음 왕조에서 기록하는 것이 관례. 조선시대에 대한 역사서술이나 연구가 미비하다는 것은 즉, 그 다음 대에서 전대에 대한 편찬작업이 없다는 의미.

강상규: 조선시대에 걸쳐 왕의 권력은 시기적으로 중대한 변동이 있었다고 봄. 중종반정 이후 사림정치기(17-18세기)에는 이미 왕에 대한 제한없는 비판이 허용되었음.  

문유미: 제가 고종실록을 읽고 받은 느낌은 고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매우 많다는 것. 일례로 매우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서 국사를 돌보기 힘들 정도라, 관료들이 일찍 일어나시라고 진언했을 정도. 그렇다면, 사료 이용에 있어, 실록, 일성록, 승정원 일기 등을 어떻게 구별해서 사용하고 이해했는지 밝혀 주시길.

강상규: 일상 위주의 부정적 서술이 대폭 늘어나는 것은 1890년대라고 생각. 고종실록은 1880년대까지만 정치적 기록으로서 의미를 가짐.

- 발표문에 나와 있는 논문 3장 목차.
1절. 군주 고종의 정치의식과 대외관의 형성
1. 고종 초기의 정치의식
1) 성왕(聖王)의 수련과 유교적 인군(仁君)의식의 성장: 고종의 정치의식의 기층
2) 화이적 명분론에 근거한 전통적 대외인식
2. 고종의 국내외 현실정치의 체험과 대외관의 전향
1) 고종의 정보 루트와 박규수
2) 일본에의 개항과 외국전래서적의 영향
3) ‘친중국’ 및 ‘연미방(聯美邦)’책의 협소한 전략공간과 고종

2절. 새로운 질서의 모색과 새로운 위기
1. 고종의 개혁정책과 자주적 다변외교의 모색
1) 현실정치 공간에서의 개혁의 시도
2) 고종의 자주적 다변외교의 추구
2. 협소한 정치공간과 정치적 구심축의 표류
1) 유교적 정치지형의 불협화음과 정치 위기
2) 자강의 방법을 둘러싼 갈등과 대내외적 압박의 심화

- 고종의 민본위민 의식.
- 1870년대부터는 역사서에 깊은 관심을 기울임. (명청역사에 대한 관심에서 조선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전) (현실감각)

양승태: 위민민본의식을 경연에서 ‘체득’하게 되었다? 형벌적용과 관련해서 구체적 사례가 존재하는가?  

강상규: 경복궁 건립과 관련해서 집을 잃게 되는 백성들은 어떻게 되는가라고 묻는 씬. 신하들의 대답은 국유지에 집을 짓고 사는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하지만, 고종은 땅을 마련해서 살게 해주라고 명령. 1865년 12월 대원군이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려다 결렬된 사건. 선교사가 의금부에 갇힌 상황에서 대원군 견제 신하들에 의해 철저한 문초 이루어짐. 관련 천주교 신자들을 삼대를 멸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고종은 상대적으로 너그러운 조치. 다음해 1866년 고종의 왕비간택 해. 그런데 왕비를 간택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원군의 비공식적 섭정이 계속되어 권력이 집중되고, 대원군은 자신이 천주교와 관련이 없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대대적 병인박해.

- 고종과 박규수의 인적 관계. (효명세자와 조대비를 통한 돈독한 영향관계)

양승규: 효명세자에 대한 연구현황은?

강상규: 본인을 직접 다룬 연구보다, 효명세자와 박규수의 관계에 대해 논한 연구들이 많이 나와 있음. 1864년 1월 1일 조대비가 처음 내린 지시가, 박규수의 채용이었음. 1860년대 이후 주요한 모든 현장(진주민란, 제네럴 셔먼 호 사건 등)에 있었다는 점에서 박규수는 매우 중요함. 1872년에는 고종의 직접 명령을 받고 청 사절단으로 파견됨. 가장 신뢰했던 인물.

- 1871년, 72년 즈음 고종은 중화적 세계질서관에서 탈피하는 면모.
- 1874, 75년 일본과의 수교에 대한 고종과 박규수 간 서신논쟁. (박규수는 1876년 12월 사망)
- 1876년에서 1881년까지 이유원과 이홍장 간의 서신교환.
- 1880년의 조선책략이 고종에게 아이디어를 준 것이 아니라, 고종이 조선책략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언어를 발견하고 이용했다고 봄.  

- 통리기무아문. 청의 총리아문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기구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연구 미비.  

- 고종과 대원군, 민씨세력 간의 정치적 관계. ‘민씨파’는 여흥 민씨 외척 세력에 국한되지 않고 대원군 세력에 대항하여 국왕을 보좌하던 소수세력을 총칭했다고 보아야 함.

- 1884년의 의복개혁과 전통 대 개혁의 논쟁.

- 임오군란(전통주의자)과 갑신정변(진보주의자). 문명사적 전환기에 군주의 개혁 속도와 변화에 대한 상반되는 반응.

* 문유미 박사 커멘트

1. 이 논문은 개화사의 고종 중심 재해석, 즉 개화군주로서의 고종을 조명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방법론적 입장에 대해 몇 가지. 그 이전의 아시아 인식, 정치사회론, 식민지사관에 대해 반대하면서 제시한 두 가지 입장. 첫째, 조선 고유의 정치적 맥락. 둘째, 근대지(近代知)라는 입장에서 고종을 비판하는 것의 한계. 유교적 정치지형과 군신관계를 ‘조선 고유의 맥락’이라고 보신 것 같은데, 제임스 팔레의 군신간의 이퀴리브리엄, 계속적 긴장관계를 비판하면서, 조선왕조에 이와는 다른 긍정성이 있었고, 이것이 부정적으로 된 것은 세도정치 이후의 담합관계라고 보고 있음. 고종을 통해 그 긍정성이 재발견될 가능성을 보고, 이상적 군주, 개화군주로서의 이니셔티브를 발견하고자 함. 개화군주로서 고종의 개인사적 성장, 일종의 전기적 연구가 아닌가 싶음. 박규수와의 관계, 화이관념에서 고종이 탈피하는 과정, 통리기무아문 형성에서 고종의 적극적 역할 등.

저의 질문은, 화이관념에서 근대적 외교관념으로의 전환에서 고종의 주도적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결국 이것이 실패하는 몇 가지 계기들을 지나치게 고종 중심으로 해석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것. 실패 원인을 조선의 유교적 정치지형(의 협소함)이라고 파악하시는데, 그 실체가 불분명. 예를 들어, 독립협회 해체 부분에 대해서는 당시 개화정치지도세력 측에 주권과 독립에 대한 몰이해가 있었다고 보고 고종의 정치력 부재나 판단미숙으로 보지 않는데, 이러한 해석이 정당한가도 묻게 됨.

개항 후 전제군주제로의 전환, 1890년대 이후에는 고종이 이니셔티브를 쥐게 되는데, 그 시기 이후의 고종의 역할과 판단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문제가 됨. 특히 광무개혁의 내용에서, 갑오개혁을 일부 무화시키고 재정집중이 이루어지는데, 세제의 자의성 등과 관련한 대중적 차원에서의 반발. 개화세력 내부에서도 고종에 대한 반발이 격화. 이 논문에는 1890년대 중반 이후 고종 권력이 가장 강할 때에 대한 논의가 부족.

결국 팔레가 제시한 군권-신권의 이퀴리브리엄 갈등 구조적 제약 속에서 그것이 부정적으로 귀결되었다, 현상타파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개혁의 시기를 놓쳤다는 소위 팔레적 시각을 과연 극복하고 있는가?

고종 중심의 개화사 재해석에 있어서도, 다른 정치사회 세력들에 대한 균형잡힌 고려가 필요할 텐데 결여되어 있음. 전제군주정에 대한 최종적 해결은 결국 극단적 혁명 아니고는 불가능했다는 논의가 아니라면, 고종에 대한 어폴로지 정도의 의미밖엔 없다.

* 발표자 답변

브로델의 입장을 정치사적으로 수용하고자 했음. 역사에 대한 명확한 인과관계 서술에 조심스러움.

고종 시대 군주권력의 특수성은, 조선왕조의 유일한 살아있는 대원군으로서 흥선대원군의 역할과 고종의 왕위승계상의 정통성의 부재.

한편, 고종의 전통군주로서의 연속성과 그 긍정성을 논하고 싶었음. 경연. 유교국가라는 천명. 고종에 대한 개명군주론 혹은 전제군주론은 조선의 왕권 자체에 대한 이해 없이 논의될 때 호도하는 측면 있음.

대한제국 시기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음.
고종과 여타 정치사회세력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논문의 기술상 문제로 소략한 측면 있음.  

갑신정변 이후 정치적 이니셔티브를 누가 쥐었는가라는 논의가 현실정치적으로 중요한지에 대해서 발표자는 회의적. 고종이 이니셔티브를 쥐었다고 한들 그 정치적 효과를 과대평가해서는 안 됨. 따라서 오히려 상징적 층위(구본신참, 신구절충 등)에 주목. 고종이 유교국가를 선언한 것은 위기상황에서 ‘주체성’의 강조로 대응하고자 한 것이라고 봄.

* 다른 분들 커멘트

남궁곤: 고종이 개인적으로 문집 등 남긴 것이 있는지?
강상규: 500 페이지 정도의 주연집을 남김. 1919 또는 1920년에 간행.
남궁곤: 그 안에 강상규 박사 주장의 근거가 있는지?
강상규: 인군(仁君)으로서의 입장이 매우 강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봄.
남궁곤: 문유미 박사 지적했듯, 서양 근대의 보편성 잣대에서 벗어나 고종 시대를 보려는 입장은 충분히 엿볼 수 있음. 한 개인을 연구할 때, 고종의 인식(perception, personality)을 보는 방법이 있고, 고종의 제도적 기능(구조적, 다른 세력과의 관계 속)을 보는 방법이 있음. 강박사 논문 요지대로라면 고종의 인식, 성격을 먼저 규명하는 것이 순서일 듯한데, 실제 논문 초점은 관계적 상황 위주라서 의문이 드는데?

양승태: 고종의 역할에 대한 재해석 시도라면, 사건의 표면적 추이를 서술하는 대신 정책결정 과정 하나하나에서 고종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견을 개진했고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는지를 밝혀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구대열: 논문의 야심적 시작에 비해 결론은 apologetic하게 끝났다는 아쉬운 느낌. 논문 시작할 때 브로델 이야기부터 했는데, event가 under-current를 설명할 수 있는 인과관계가 있어야만 브로델 논의가 의미있는 것. 그런데, 의복개혁이라든지 경복궁 보수시의 발언이 고종의 시대인식과 어떤 관련을 가지는지 설명이 부족함. 제임스 팔레의 군권-신권 긴장관계에 대해서는 우리가 보다 분명히 규명해줘야 함. 고종의 인간적 덕과는 별개로, 정책입안자로서 고종이 얼마나 일관성 있게 정책을 추진해 나갔는가를 비판적으로 판단해 주어야 함.

최정운: 왕권의 역사적 변화, 고종의 개인사와 주변인물들과의 관계, 개화에 대한 정치적 인식, 리더쉽, 정치적 입지 확보를 위한 노력 등등 여러 개 층위의 이야기들이 복잡하게 섞여 있음. 초점을 맞춰 다시 정리할 필요가 절박함.

하영선: 논문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명확함. 19세기 후반 조선 정치무대의 주인공은 분명 고종이었음에도, 고종을 생략한 기존의 역사서술에 분개하여 고종에게 제자리를 찾아주고 싶었다는 것. 현재 국사학계에서도 고종의 재서술이 핫 이슈. 그런데, 오늘 발표한 논문에 대한 여러분들의 공통된 지적은 결국 고종에 대한 옹호론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 이에 대한 해결책은, 고종을 무대 위로 올리되, 고종에 대한 애정을 견지하면서 고종에 대한 비판론을 쓰는 것. 조일수호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광무개혁 등 주요사건들을 통찰하고 처리하는 고종의 능력 및 한계를 밝히는 작업이 되어야 함. 이를 위해서는 동시대 다른 군주들과의 비교사적 시각 도입 필요.

최정운: 고종은 무대의 중앙에 있었음에도 주인공이 아니었음. 조명은 수구세력, 개화세력, 이홍장, 통리기무아문 등 다른 곳에 비추어짐. 그렇다면 어떻게 써야 할까?    

김영호: 논문 처음에 고종의 왕권이 기존의 조선시대 왕권의 위치와 비교하여 가지는 연속성과 변화를 설명해 주기 바람. ‘동양 (전제)군주’의 상에 대해서도 일본이나 중국의 것과 차별적으로 비교하여 구체적으로 서술해야 함.

김용직: 첫째, 대내적 측면에서 조선에서 ‘권력’의 배분 및 충돌 문제를 역사적으로 규명해야만, 고종의 아이디어가 실현되지 않는 이유를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가 있다. 둘째, 군권-신권에 대한 팔레의 논의를 고종 시대에 적용하여 보다 철저하게 파헤치는 것이 오히려 팔레를 극복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장인성: ‘정치지형’과 ‘문명사’라는 분석틀을 사용하고 있는데, 정치지형이 187-80년대를 관통하면서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밝히고 있지 않다. 또, ‘문명사’라는 개념 자체가 애매하다. 대한제국 시기의 구본신참, 신구절충의 사상사적 흐름을 대단히 중시한다고 했는데, 이는 지식사회, 학문세계에 있어 새로운 문명관이 사회 전체의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주목한다는 것. 그렇다면, 187-80년대 초반을 문명사적 ‘전환기’로 파악하는 것은 어폐가 있음. 조선조 ‘정치지형’의 모습을 밝히고 그것의 187-80년대의 변화 및 그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관계의 전개(권력의 문제)를 고종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이 논문을 보다 명료하게 만들 것이라고 봄.

김봉진: 이 논문의 문제제기는 참신한 단계는 이미 지났음. 그렇다면 그 주장 자체를 반복하는 것보다는 설득력을 높여야 함. 고종의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보고 객관적/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하지, 고종에 대한 변호. 변명으로 그쳐서는 곤란함.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규명도 고종 연구에서는 빠져서는 안 되는 부분. 복식개혁, 통리기무아문 등 이 논문에서 평이한 서술로 그치고 있는 사건들도 각각 전문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주제. 향후의 숙제로 보임.

문유미: “고종은 개화군주가 아니라 개명적 의식을 가졌던 전통군주였다”라는 주장에 대한 입증이 논문에서 보다 충실하게 이루어졌으면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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