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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서유견문> 17-20편, 이상하, "19세기 조선 성리학계의 동향"
 

2005-10-19 
2004년 12월 30일 전파모임

* 참석: 하영선, 구대열, 양승태, 최정운, 김봉진, 김용표, 한인택, 이성형, 이상하
* 독회: 유길준, <서유견문> 17-20편
* 발표: 이상하, “19세기 조선 성리학계의 동향”

0. 워밍업

양승태: ‘종교’라는 말은 마테오 리치가 만든 번역어.
이상하: ‘종(宗)’자는 불교에서 많이 쓰이고, 유교에서는 별로 많이 쓰이지 않는 글자.

하영선: 오늘이 서유견문 마지막인데, 다음 모임 때 자유방담 형식으로 서유견문을 총괄 토의하고, 유길준의 초기 저작으로 돌아가기로 하겠습니다.

오늘은 2003년 고려대에서 19세기 한국 주자학 연구(한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상하 박사로 부터 19세기 한국유학에 대해 배우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발표를 듣고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1. 발표 “19세기 조선 성리학계의 동향”

- 발표문 참조

- 영남학파의 理無爲, 氣自爾(이는 하는 것이 없고, 기의 성질은 스스로 그러함)의 기본 종지. 율곡이 퇴계를 비판한 주논지.
- 성리학에서 말하는 ‘기’와 최한기가 말하는 ‘기’는 전혀 내용이 다름. 율곡이 말하는 기는 심성 속에서의 기의 작용, 영향. 심즉기 성즉리라고 할 때, 성은 회복해야 할 대상, 심은 극복하고 다스려야 할 대상. 그에 비해, 최한기의 기는 현실과 물질 자체를 중요시한 것. 기화.  따라서 이 시대의 주기론=경제, 과학에 대한 관심이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곤란함. 실학파를 경세치용학파로 해석하는 것은, 일제 시대 이전에는 없던 일. 이익 자신도 성호학파로서 영남학파를 계승한다고 생각.
- 정통 성리학자들, 도학자들은 천주실의 등 서양서를 거의 접하지 않았음. 이들에게 서양, 양이=주기, 로 간주됨. 19세기 초반에는 위기의식과 몰락의식이 드러나고 체계적인 대응논리는 아직 발전하지 못함.

- 조선 후기 유학의 가장 큰 장점은, 주자학 연구가 정점에 달하여 완결되었다는 것.
중국에서는 주자에 대한 논쟁 자체가 비교적 일찍 끝나고 양명학으로 넘어가는데, 조선은 퇴계 율곡 이후에도 기호 영남이 논쟁을 확장 심화해 나감. 리기심성론의 정치(精緻)함. 퇴계의 주자 해석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인정.
비록 정치 상황에 의해 매몰되었지만, 조선 후기는 학문적으로 매우 성숙했던 시기.

- 19세기 주리설이 강화되는 경향은, 조선조 주자 연구의 발전선 상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음. 주리설 강화를 일본 및 양이에 대한 대응으로만 보는 것은 옳지 못함. 오히려 양이론은 주기론 쪽에서 더 강하게 주장되었음.
- 동양학의 기본 연구방법은 술이부작(述而不作)이지만, 주자학자라고 해서 주자를 맹종한다고 보지는 않음. 내부적 동학과 사고의 발전이 발견됨. 더불어, 동양학자의 기본 마인드는 주자나 그 이전 성현과 내가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계승하여 발전시킨다는 것. 또한 조선 왕조가 교체되지 않는 한 주자학 자체에 대한 부정은 어려웠을 것.

하영선: 영남 학파에게는 다산 저작은 의미가 없습니까?

이상하: 여유당전서 자체가 일제 때 간행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널리 읽힐 기회가 없었음. 다산은 복고주의인데, 복고주의 자체는 주자학 틀을 깨겠다는 의미. 주자를 부정하기 위해 양한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주장.

하영선: 여유당전집은 1920년대 후반에 나오지만, 다산이 경학에 많은 시간을 쏟는 것은 정조가 죽고 유배생활을 시작한 19세기 초였다. 만약 그의 경학연구가 의미가 있었다면 주목을 끌었을 텐데, 본격적 논의가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상하: 다산이 거유(巨儒)이며 큰 학자인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을 것. 다산은 주자의 틀을 깨려고 애썼지만, 그러한 다산 사상이 하나의 패러다임을 제시할 만큼 정립되었는지는 의문.

하영선: 홍대용의 연행록을 읽고 있는데, 홍대용도 연행록 전반부의 상당 부분에서 四書에 대한 재해석을 하고 있는데, 그 부분을 어떻게 해석할지가 중요한 과제임. 결국 경학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어려움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음.

이상하: 옛날 학자들은 논리의 정합성을 확보하려는 강박관념이 있었음. 경학에 비추어 보아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하고 검토함.

- 한주의 사상은 양명학과 매우 흡사하면서도 다른 성격을 가짐. 기존 주자학의 경우, 선진 고경에는 ‘기’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음. 정자나 주자에 와서 ‘기’를 자꾸 논하게 된 데에는 불교 비판의 목적. 한주는 심즉리를 주장. 마음의 근본은 리다. 기를 극복하고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면, 자기 자신을 수양하는데 치중하게 되는데, 한주의 경우, 마음이 리라고 하면, 내가 직접적으로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 왕양명과 일맥상통. 한주학파는 현실과 서양학문에 적극적 관심.

- 같은 심즉리라고 해도, 한주의 심즉리는 자기 마음이 밝게 깨어있음으로써 사물의 이치를 잘 파악해야 한다는 것. 격물치지 자체에 대해 주자와 왕양명의 입장이 다름. 주자는 지식인들이 마음에만 빠져있는 병폐를 꺼려 대학 8조목의 근본을 ‘격물’에 둠. 그러나 왕양명은 처음부터 자신이 성인이 되어야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대학 8조목은 ‘성의’에 있다고 봄. 격물은 성의의 방도일 뿐. 왕양명이 생각하는 격물=자기 마음 속에 있는 일. 그러므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면 됨. 이 때문에 주자학파가 양명학파를 선학(禪學), 심학이라고 비판. 

- 한주의 심즉리는, 자기 마음이 주체적으로 격물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 왕양명처럼 모든 공부가 내면으로 수렴된다는 주장이 아님. 그럼에도 한주의 주장은 왕양명류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음. 한주는 심을 세 가지로 보았음. 모든 사물을 처음 보았을 때는 기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보다 자세히 보면 기와 리가 합일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더 나아가면 마음의 근본은 리다. 마음의 근본이 리여야만, 인간이 발전하고 심성을 회복하여 성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

- 우주 보편적으로 있는 것이 리, 이것이 개체 속으로 들어가면 性, 성은 이미 개체 속의 기를 포함하고 있음. 성은 본체, 情은 작용. 심은 성과 정이 합해진 것. 성즉리라는 것은 주자학의 기본명제로서 이론의 여지가 없음. 그런데 심즉리는, 리를 본체로만 보지 않고 작용론으로까지 끌고 들어갔기 때문에 논란의 대상이 됨. 왕양명이나 한주의 심즉리설은 심의 주체성을 강조함으로써 강렬한 현실참여로 이어짐.

양승태: 진암 이병헌이 개진한 공교(孔敎)운동, 유교의 종교화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상하: 유교를 보존하고 지켜나가기 위한 방편이었음. 주로 심성 수양. 공자교라는 아이디어는 역설적으로 유교 절대의 사고에서 벗어나 다른 종교들을 인정하는 태도를 반영함.

최정운: 자연과학이나 서양학문을 전면적으로 용인하고 유학을 역사적인 숭배대상으로 만듦으로써, 유학은 주변화됨.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종교는 irrational한 것으로 취급됨. 후쿠자와 유키치 또한, 공적으로는 자연과학과 물질문명을 신봉하고, 유학은 사적 수양의 방편으로 삼자고 함.

김봉진: 이병헌의 공교운동은 강유위 영향. 서양 문명 발전에 기독교가 큰 역할을 하였으므로, 동양에서는 유교를 종교화하자. 공자묘 참배하고 민중 교화. 하지만 대중화에는 실패. 이 시기 공자교 이외에도 대종교, 대동교 등 아시아 종교운동이 벌어졌음.

김용표: 종교라고 하면 조물주가 있는데, 유교의 경우 리가 그에 해당?

이상하: 정이천=정자가 天卽理 라고 말함. 리는 근원자인 동시에 사물의 본질적 가치. 그런데 주자학의 리의 특징은, 구체적인 사물의 본성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 (예: 컵은 물 따라 먹는 데 쓰는 물건. 컵 자체에서 컵의 실존이 도출됨) 이 점, 불교의 불성과는 다름.

김봉진: 1. 한주가 심즉리를 주장했는데, 본인 스스로는 양명학과 구별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양명설이라는 비판을 받았음. 19세기까지 조선조는 주자학 일종주의라는 것이 통설인데, 이것이 옳은 말인가? 이와 관련, 퇴계, 율곡은 양명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분들인데, 퇴계나 율곡 저작 중 양명학의 영향을 받은 부분은 없겠는가? 조선조 성리학 자체 내부에 양명설이 스며든 부분은 없겠는가? 2. 주리/ 주기라는 말은 누가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는가? 주자어류에도 나오지 않는데, 최한기의 <기학>에는 나옴.

이상하: 1. 노수신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해석을 쓰면서 불교적 견해를 개진. 퇴계집에서는 노수신을 비판. 노수신이 양명설을 정리해둔 것이 간행은 안 되고 집안에서 읽혔다고 함. 따라서 퇴계도 양명설을 알고 있었는데, <心經後論>을 통해 선학(禪學)의 위험성을 강렬하게 비판. 서애 유성룡 경우 선학에 상당히 심취, 비판을 많이 받았음. 2. 통속적 주리/주기론은 다카시 도루가 만들어낸 것. 한주가 주리/주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심 자체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주리/주기로 나눔.
김봉진: 주자학 체계를 리기론(본체론, 존재론), 심성론, 인심불신론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유학서는 논쟁을 각론별로 정리해 주지 않고 그냥 써내려가서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움.
예를 들어, 주자 입장은 규범론은 주리, 우주론 자연론 쪽은 주기론이라고 정리할 수 있음.

이상하: 주자는 ‘당연(當然)’을 강조하는 데 비해, 육상산, 왕양명 등은 ‘자연(自然)’을 강조. 육상산은 자기 마음만 믿고 공부하면 되겠다고 주장했는데, 주자는 그것은 위험하다고 비판. 주자는, 왕양명의 심학과 한당 주석가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균형감각을 가지려고 애쓴 인물.

김봉진: 맹자와 고자의 리기론은?

이상하: 물에 대한 고자와 맹자의 논변. 고자 왈, 우리 심성도 물과 같아서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음. 불교의 심무선악(心無善惡)설과 유사. 맹자 왈, 물을 그냥 두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선으로 가는 것이 본래 속성. 수행되지 못한 상태가 악. 

양승태: 김봉진 박사가 주자에 대해 규범론은 주리, 우주론 자연론은 주기라고 했는데, 존재론과 규범론이 그렇게 이원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가?

최정운: 분리될 수 없고, 실제로 주자의 논의 속에서도 관련성을 설명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나누어 말해볼 수는 있음. 분류의 언어. 분류적 사고.

이상하: 홍대용의 경우, 많이 오해된 학자. 옛날에는 흔히 홍대용을 주기론자라고 했는데, 홍대용 자신의 논의는 주기론적인 게 거의 없음. 주리론자라고 해서 ‘기’를 배척하는 것이 아님. 

김봉진: 최한기의 기학조차도 리를 떠나지 않음. 기를 강조하면 근대적이다, 욕망을 긍정하면 근대적이다라는 것도 잘못된 생각.

최정운: 이상하 박사의 요지는 19세기 조선의 주자학이 꽃피었고, 답답한 주자학으로 귀결된 것이 전혀 아니다,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시간이 좀더 있었다면...)는 것인 듯. 서양이 동양에 밀려올 적에, 지식인들이 고민을 많이 하지 않았겠는가. 한주를 비롯, 이 시기 유학자들이 주자학적 틀 내에서 서양학문을 소화하고자 하는 욕구를 많이 느꼈을 듯한데, 어째서 만족스러운 지적 산물이 나오지 않았는가? 

이상하: 노론 벌렬층과 지식인을 동일시해선 안 됨. 또, 오늘날처럼 외부 문물을 자유롭게 접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변화의 속도와 압력은 해일과 같았음.

하영선: 이상하 선생은 퇴계-한주의 학맥을 잇고 있는 분. 이선생을 오늘 모시고 온 것은, 19세기 우리 지성사의 원텍스트를 정면으로 읽은 분이기 때문. 우리는 <서유견문>을 읽으면서도 한주는 전혀 몰랐음. 한주 입장에서는 자신이 학계의 정통이며, <서유견문>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을 것. 19세기 지성의 전체 지형도가 확보되어 있지 않음. 동양철학에서도, 정치학에서도 다루지 않는 이 사각지대의 19세기 지성사를 쓸 사람은 누구인가?

구대열: 1905-1910년 당시 서로 다른 계열의 성리학자들의 정치적 선택을 다시 한번 정리해 주십사. 예를 들어 최익현의 위치는?

이상하: 화서학파. 심즉리설에 가깝지만, 우암의 절의사상에서 가장 많은 영향 받았음. 그러나 최익현은 벼슬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학문적 저술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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