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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서유견문> 13-16편
 

2005-10-19 
2004년 11월 6일 전파모임

* 참석: 하영선, 양승태, 최정운, 김봉진, 남궁곤, 손열, 김상배
* 독회: 유길준, <서유견문> 13-16편

하영선: 한외사 수업 때문에 서유견문을 매년 읽게 되는데, 횟수를 더해가면서 보이는 것이달라졌다. 처음 읽었을 때는 새로웠음. 14편의 경우, 1888년에 씌어진 것이 확실.(“예수가 1888년 전에 탄생”) 서양의 학문, 군사, 종교제도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음.

그런데, 2-3번 읽다보니까, 새롭다고는 하지만, 19세기 후반 개혁관료 조선 지성의 자기만의 목소리가 부족하다는 불만이 생겨남. 답답.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기 3부작인  “서양사정”, “학문의 권유”. “문명론의 개략”의 발췌 요약이라는 비판을 조심스럽게 검토. 

그러나 5번째 읽기를 넘어가면서, 행간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베낀 것들 사이에 숨어 있는 자기 목소리를 찾아내는 즐거움. 공부에도 허명과 실상이 있다든가 하는 부분은 명백히 유길준의 주석에 해당. 그 부분을 과장할 필요는 없지만 주목을 요함. 왜 주석본의 형식으로 밖에는 글쓰기를 하지 못했나는 별론으로 하고, 베낀 부분과 유길준의 주석 부분 간 긴장을 독해하는 것에 관심. 18세기 북학파의 서학관과 유길준의 서양관(군사, 상업, 학술 제도)이 얼마만큼 차별화되는가. content analysis가 아닌 discourse analysis할 수밖에 없음. 14편이 중요한 의미를 지님. (i) 조선 전통, 18세기 사상과의 관계 (ii) 원본이 된 텍스트(예: 후쿠자와 유키치)와의 관계.

13편 경우, p.352는 베끼지 않은 부분. “대저....실상은 천하인을 위하여.....” 서학이나 서교를 북학에서 어떻게 보았으며, 그 자세로부터 유길준은 얼마나 변화했는가. (+위정척사/ 동도서기/ 문명개화의 동시대 스펙트럼 속에서 파악)

종교 부분이 상대적으로 길다. 천주교와 기독교를 구분해서 길게 설명. 조선책략에서도 연미국하라고 권고하면서, 미국의 개신교는 기존에 우려하던 천주교와는 다르다는 주장이 등장.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서교에 대한 인식을 구체, 세분화시켜야 한다는 의식. 또 하나, 유길준은 God을 계속 상제로 이야기. 결론 부분, “야소교의 지하에는....무하다 운하더라”라고 쓴 마지막 어미를 보면서, 이런 말을 하기에는 당대 분위기가 아직 좀 조심스럽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학업하는 부분 시작에서는 “일국의 부강과 빈약은 기국인이 학업다소에 존하느니라.....”. 이 부분은 김상배 교수의, 21세기에는 지식과 기술이 부국/강병과 별개의 어젠다로 등장한다는 주장을 그대로 반영. 학업의 분류. 농학, 의학, 산학 다음에 정치학인데, 정치학의 실제 내용은 재정학. 그 당시 정치학과 재정학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했다?

동경대학에 재직했던 독일학자 라트겐의 정치학 강의록을 번역해서 <정치학>이라는 책을 냄. 이 글이 국내인이 쓴 최초의 정치학 저술. 당시는 political science라는 영어도 없던 때이고, 라트겐은 독일 국가론 배경이 강한 학자로서 Staatslehre를 번역하여 정치학이라고 했을 것으로 추정. 사실상 내용은 political economy. 국가경영 및 통치를 위한 경제학.

양승태: 정치학과 재정학을 구별하는 학문적 분화 자체가 20세기적 현상 아닌가. 모두 통치학에 포섭.

최정운: 경제학 자체가 가정경제로부터 시작한 것이므로, 국가의 경우에도 이를 확장 유추한 형태로 생각.

손열: ‘경제’라는 말은 네덜란드로 유학간 일본학자가 William Ellis의 저서를 <경제학요강>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하면서 쓰이기 시작했음.

하영선: 일본 경제학 도입의 첫 시작은, 水田 羊의 『思想の國際轉位』(2000)에 따르자면,  西와 津田의 친구인 申田孝平이 1867년 H. Hooft Graaftland의 Grondtrekken der staathuishoudkunde (1852)를 홀랜드어에서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經濟學要綱』라고 제목을 부치면서 부터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은  William Ellis의 『Outlines of Social Economy』(1846)을 영어에서 홀랜드어로 번역한 것임.

양승태: 서유견문의 정치학은 경제학 중심.

최정운: 유길준 서유견문에서도 종교가 매우 중요. 종교 개념 도입사 연구 필요. 일본의 경우, 천황제 헌법 하면서 종교 논의가 중요한 역할. 서양의 시민종교가 일본엔 없기 때문에 천황제가 필요하다는 주장.

양승태: 유길준은 서양의 종교에 대해 피상적 이해 수준에 머물렀다고 봄.

하영선: 서교가 처음 들어오던 18세기 말 다산 경우, 서양의 God 개념과 동양의 天 개념 접목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있었는데, 유길준 경우엔 그런 논의가 거의 전혀 없음.

최정운: 서유견문 나온 때는 이미 서양에서는 니체, 헤겔, 포이어바흐 논의되었을 때인데.

하영선: 그것들을 모두 ‘허명(虛名)’으로 보았기 때문. 학업은 반드시 실용의 도라야 한다고 생각. (13편 말미)

최정운: 서양에서 나온 논의는, 사회에는 irrational belief system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 생각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못함. 대종교. 192-30년대에 가면 양식이 서구화.

양승태: ‘종교’라는 번역어는 누가 만들어냈는가?

하영선: “명치언어사전”등을 이용하면 일본 근대 번역어들의 창출과 사용을 비교적 소상하게 찾아 볼 수 있음. 그러나 어디까지나 서지적인 추적이 중심이며 사상적 맥락까지 천착하지 못함. 동아시아의 개념사 사전은 매우 필요한 작업이지만, 유럽에 비해 동서양을 동시에 담아야 하는 작업의 방대성 때문에 학계의 장기 사업으로 추진해야 할 것임.

양승태: 동서양 사상과 학문과 전통이 만날 때, 개념이 형성되는 과정. 일본이 근대 초 아시아의 (서양을 번역한) 근대어 창출에 일조하였지만, 사실상 그냥 언어의 치환 수준에 머문 것이 태반이고, 이쪽의 고민을 반영한 유용하고 의미있는 진짜 번역이 이루어지지 못한 측면 있음.

김봉진: 실제로 서구의 아이디어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오역한 것도 많음. 현재 사용되고 있는 근대적 개념어의 80% 이상이 메이지 일본에서 만들어졌는데, 누가 어떻게 왜 그렇게 번역했는지 거의 밝혀져 있지 않음. 이시다, 야나부 정도.

김상배: 기술과 권력과 관련해서, 서유견문에서 지식이 힘이라고 하는 것은 프랜시스 베이컨에 대한 reference. 그런데, 실제로는 프랜시스 베이컨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음. 여기 나온 1200년대의 베이컨은 로저 베이컨. 프랜시스 베이컨의 논의는 사회적 기획으로서의 교육과 사회진보의 힘인데, 여기에선 그런 함의가 없음. information system에서 분류체계를 만들어가는 과정....

하영선: 유길준은 1874년 박규수로부터 해국도지 등을 소개받고  대전향. 서유견문 쓰기 14년 전. 완전히 다른 학문체계로의 전환이었음을 이해해야 함.

김상배: 분류체계의 층위 혼란, 서로 다른 커리큘럼 혼재.

하영선: 양계초의 경우, 학문체계는 서양과 동양의 병렬법. 그에 비해 유길준은 동양 얘기를 거의 하고 있지 않음.

양승태: 유길준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음을 상기해야 할 뿐 아니라,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에 대한 인식론적 분류가 체계화되지 않았던 과도기였다는 사실.

김봉진: GDA 커리큘럼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좀 다르다.

김상배: 도서관 분류의 문제와 학문분류체계문제가 연계된 것..

최정운: 19세기 말에 들어와 서양에서 도서관분류체계 정착.

하영선: 지식 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고 생각됨. 국한문혼용체 자체가 비정상 아닌가. 게다가 내용은 미국 것을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헤겔, 베이컨 등 인명도 오늘날 기준으로는 알기 어려움.

양승태: 철학과 정치학 분류법도 내용이나 자신의 사상과 연결되지 못하고 매우 간단. 학문의 실용성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쉽게 도피.

김상배: science로서의 학문과 engineering technology로서의 학문에 대한 차별적 인식 없음.

김봉진: p.350의 프랜시스와 바콘데스카데스는 누구인가? 이 부분은 후쿠자와에게 없음. 이 “프랜시스”가 “프랜시스 베이컨”일 가능성 있음. 카데스는 데카르트?

김상배: 유길준 한글번역본 역자가, 추정이 가능한 사람들은 그 이름이 누구인지 밝혀 놓았음. 참조. p.350 다섯 번째 줄 로저 베이컨의 친구 “맥나수”는 역자도 밝혀놓지 못했음.   
하영선: 유길준은 유학시절 크리스찬 공부를 했음에도  기독교에 귀의하지 않았음.

김봉진: 20년 후에나 교회에 다님.

하영선: 14편으로 넘어갑시다. 유길준이 개화를 6영역으로 나누고 있는 것은 사실상 후쿠자와 유키치가 “문명론의 개략”에서 문명을 3구분하고 있는 것과 사실상 정확하게 짝이 맞음. 그런데, 유길준이 첫 번 째 개화로 드고 있는 ‘행실의 개화’는 무슨 의미인가? ‘행실’이라는 말이 일본에는 없음. 아마도 삼강행실도의 행실. 개화등급론=서양 표준을 따라가야 할 것이 있고 우리 전통을 고수해야 할 것이 있음. 개화의 병신/원수 논의를 더 본격적으로 전개 했다면, 서유견문은 훨씬 재미있었을 것임. 19세기말 당시 4대신문-대한매일, 제국, 황성신문 등-을 보면, 개화등급론이 유길준이라는 저자 이름 없이 여러번 반복 게재.

14편 1장에서 상업을 설명면서, 전쟁과 경제를 비유한 문장이 매우 재미있음. “전쟁은 난시의 상업이고, 상업은 평시의 전쟁이니......”

김봉진: 그 문장은, 후쿠자와, 정관응이 모두 말한 것. 당대의 유행어.

하영선: 14편의 “개화의 등급”을 책의 맨 앞으로 뽑지 않고, 중간에 둔 까닭은?

최정운: 서양에 대해 ‘소개’한다고 하는 이 책을 쓰는 목적과 관련되어 있다고 추정. 또한, 개화등급론을 전면 배치하면 갈등이 부각되므로 전술적으로 회피했을 수 있음.

하영선: 15편부터는 읽은 것이 아니라 본 것을 소개하고 있음. 글의 톤이 바뀜.

김봉진: 개화의 등급을, 그 이전 부분의 결론이라고 볼 수 있음. 서유견문 자체가 3편 가량으로 분류 가능.

최정운: 상업을 매우 중시하면서 행실 개화는 불필요하다는 주장은 모순.

양승태: 상업과 교역 확산에 따른 구조가 인간 의식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까지 논의가 심화되지 않기 때문에, 상업과 행실을 이분적으로 생각. 

최정운: 그것이 동도서기론의 전형적 논리. 이광수가 교육문제에 대해 매일신보에 연재하면서, 학교 선생들은 무엇보다도 아동들에게 욕망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주장 전개. 그런데 여기에서는 상업을 부흥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그 원천이 되는 인간의 흑심, 에 대한 언급 전혀 없음. 동도서기론에는 그런 고민들이 없나?

김봉진: 그런 고민이, 일종의 미완의 계기로 끝났음. 결국 동도서기는 실패했으니까. ‘동도서기’라는 말 자체가 oxymoron. 경학론에서는 원래 도와 기를 나눌 수가 없음. 체와 용도 마찬가지. 동양 전통사고의 인식론적 틀은 이원론적 일원론.

양승태: 취장단사의 용이한 절충론에 불과. 지성적 역량의 부족을 반영.

최정운: 유길준 뿐 아니라, 한중일 모두 동도서기론자들이 존재. 후쿠자와 유키치도 공덕, 사덕을 나누었음. 공적인 차원에서는 서구화, 사적인 차원에서는 전통이라는 이분법.

김봉진: 그런 식으로 인식론적 이분화 가능했던 것 자체가 후쿠자와의 근대성. 그런데 유길준 등 조선 지식인들은 이분화를 하지 못했음.

최정운: 그 문제에 대한 고민은 일본이 훨씬 심했을 것 같음.

김봉진: 조선은, 고민할 만한 시간적 여유 없이 근대가 지나가 버린 형국. 유길준의 뒷세대는 이미 국망의 상황에서 고민이 국가 보전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음.

양승태: 유길준은 나중에 기독교에 귀의. 이유가 무엇?

김봉진: 개인적 차원에서는 현실적 좌절 때문. 정신적 구원과 나아가 국민적 구원이 기독교 신앙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 기독교에 귀의하면서도 공자는 계속 믿어야 한다고 말함.

최정운: 이광수는 불교에 귀의. 불교와 친일이 함께 감.

양승태: 단재나 박은식의 비장한 민족주의에 비해, 유길준은 정신적으로 허약했던 것 아닌가?

김봉진: 유길준이 단재나 박은식에게 길을 닦아주었던 것.

하영선: 실질적으로는 서유견문이 끝난 셈.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은 제목에 비해, 일본의 전통적 시각을 상대로 알아듣기 쉽게 논의를 개진하고 있다. 결국 전통과 근대의 길항. 후쿠자와의 고민과 유길준의 고민을 비교한다면, 유길준이 반드시 1880년대 조선의 지성을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현실상황에서 고민의 무게는 유길준 쪽이 훨씬 무거웠다. 갑신정변 실패 후 개화 진영의 절망. 입도 벙긋하기 어려운 분위기.  유길준이 밖에 나가서 본 세상을 모델삼아 현실적으로 개화를 실천하려는 노력은 불가능했음. 살아남기 위해서는 책을 쓰는 수준에 머물려야 했다. 서유견문을 이해하려면, 1888년 당시의 분위기+조선조 500년과 서양 전통 사이에서의 갈등을 반영해서 읽어줘야 한다. 변방의 지식인으로서, 제국 지식의 패러다임의 변용에 가장 성공적이었던 때는 언제일까. 아마도 퇴계와 율곡의 시대 아니었을까. 오늘의 타산지석.

최정운: 유길준은 후쿠자와의 문명론지개략을 읽고 서유견문을 썼다. 그런데, 문명론지개략을 다 읽고도 왜 이런 책을 썼을까? 전략적 상황이 전혀 달랐다. 후쿠자와처럼 바로 치고 들어가서, 우리나라가 식민지가 되면 풀 한포기 못 살아남는다고 쓰지 못한 이유가, 오히려 더 굉장히 복잡한 고민을 하고 이 책을 구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양승태: 물론 그런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서양을 격파하려면 서양에 대한 이해가 본질적 수준까지 심화되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는 것. 유학자들만 해도 최소한 경전을 철저히 이해했는데, 1880년대 조선 지식인들은 그에 비해 너무나 역량 부족.

하영선: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학 사상가들은 전통 지식의 핵심 질문들을 상당히 세련되게 따지고 있었는데, 19세기에 들어 그러한 지적 전통으로부터 단절된 형태로 서양을 따라 잡는 데에 급급해서 오늘날까지 100년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한국 근대지성사는 바로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까지는 한국의 전통과 근대를 관통하는 지성사가 보편적 언어로 서술되지 못했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개화파와 전통파를 아우르는 19세기 지성의 균형잡힌 지도가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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