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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서유견문> 9-12편, 홍지연 "조선의 근대화폐제도 도입"
 

2005-04-18 
2004년 10월 9일 전파모임

* 참석: 하영선, 구대열, 양승태, 최정운, 김봉진, 전재성, 손열, 김용표

* 독회: 유길준, <서유견문> 9-12편

* 발표: 홍지연(서울대 외교학과 석사과정), “조선의 근대화폐제도 도입”


1. 발표
- 발표문 참조.
- 신식화폐조례(1891년) 실행의 무산과 ‘안경수’라는 인물의 역할


2. 토론

하영선: 일본에 있는 방대한 오미와 쵸베 문서의 내용은?

홍지연: 계약서, 초안.... 신식화폐조례 초안은 오미와가 실질적으로 다 잡아준 것. 동전에 조선/대조선, 국화인 무궁화를 넣어달라는 주장 등등을 둘러싸고 공방이 오갔던 듯. 그런데, 최종안에도 보면 무궁화와 오얏꽃이 같이 들어가있음.

일동: 무궁화가 국화가 된 것은 언제?

구대열: 조선을 중국에서 ‘무궁화의 나라(?국)’라고 한 것은 조선시대에 이미. 서양의 경우, 왕실의 상징이었던 꽃이 국화가 됨. 그렇다면, 오얏 리->오얏꽃.

김봉진: 유길준의 ‘화폐의 대본’ 자체는, 후쿠자와의 ‘통화론’(<시사신보> 1878. 3월부터 5월 사이의 사설을 모아놓은 것)을 대본으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봄. 그러나 발표문에서 인용한 부분은 다분히 유길준이 조선의 상황을 의식해서 독자적으로 창작한 부분일 가능성 큼. p.279 인용부분이, ‘화폐의 대본’ 말미에서 동일하게 반복된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함. (유길준은 대개 그 절의 말미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침.)

안경수의 최후. 1898년7월에 고종의 양위음모사건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일본에 망명 갔다가 1900년2월에 귀국 후 처형(1900년5월). 그가 남긴 논문 <일청한동맹론>이 있음.   

양승태: 안경수 삼국동맹론의 내용은?

김봉진: 일본의 패권 및 지도를 인정하는 한중일 동맹론.

하영선: 친일적.

최정운: 당시 안국선 소설에도 나오는데, 청의 덩치에 비해 조선이 너무 작기 때문에 혼자서는 안 되고 만주, 일본과 묶어서 해야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마찌니 민족주의. 마찌니 책에 보면, 유럽지도를 놓고 12개 단위로 묶어, 이래야 생존할 수 있다고 주장.(유고슬라비아도 이 때 나온 아이디어) 일종의, 한일합방 민족주의. 일진회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음.

김봉진: 단 조심스럽긴 하나 ‘저항으로서의 친일’도 가능하다고 봄.

최정운: 가설은, 독립협회 해체 후 좌절한 상당수 인사들이 마찌니 민족주의자들로서, 조선은 합방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생각을 했었을 수 있다는 것.

하영선: 통화론에 관한 한, 안경수가 결정적인데, 기존연구 자체가 미비한데다가, 결정적으로 안경수가 남긴 글 자체가 별로 없음.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은 1900년대 것임.

김봉진: 후쿠자와의 ‘통화론’을 일별해보니 유길준의 ‘화폐의 대본’과는 별로 공통점이 없음. 

홍지연: 서울대 구관본 도서관에 있는 독일 화폐론 책과 편제나 내용이 오히려 유사. 그러므로 유길준이 미국 가 있을 때 직접 보았던 서양 화폐론을 정리했을 개연성이 있음.

김봉진: 19세기 중반 들어와서 금본위-은본위 논쟁이 세계적으로 벌어짐. 일본이 금본위제 를 채택한 것은 시기적으로 서양과 거의 동일. 19세기 후반.

홍지연: 본위제가 전통적 상품통화와 다른 것은, 최고 통화 아래 보조통화들이 있고, 상호 교환비율이 정해져 있다는 것.

최정운: 안경수 <삼국동맹론>은 일진회 사상 맥락과 관련, 읽어보고 싶음.

하영선: 갑오개혁 6인방 중 김가진, 안경수는 조선에서도 일본에서도 공히 친일파로 정평. 그런데, 조선의 군국기무처 상황을 일본에 보고하던 스기무라 글을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가진, 안경수가 과연 완전히 일본의 이익을 대변하여 행동할 것인지에 대해 상당부분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음. (이중첩자 의혹.) 일본측 기록을 보면 안경수의 경우, 개인적 사욕/착복 때문에 91년 화폐초안이 망했다고 하는데, 과연 안경수를 그런 인물로만 보아야 할지 모르겠음.

김봉진: 조선측 기록과 서양기록과 병렬 대조, 다시 읽어봐야 함.

구대열: 김가진이 양반가 서자 출신인데 공사로까지 승진을 했다면, 일본측 신임을 상당히 받았다는 증거 아닌가?

홍지연: 처음에는 공사가 아니었음. 몇 번의 위기와 변신 끝에 살아남은 인물.

김봉진: 일본은 가장 친일로 분류되는 일진회조차도 믿지 못해서, 한일합방 후 해체시킴. 그런 면에서 소위 친일파라고 해도 일본과의 관계를 평면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음.

양승태: 당시 다른 쪽 인사들과의 교류는?

최정운: 서재필-유길준/ 유길준-김가진-안경수로 연결. 을사오적이 나올 때까지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민족반역자라는 의식이 없었음.

홍지연: 김가진과 안경수도 서로 다른 인물.

하영선: 김가진이 애국계몽기 학술지에 남긴 글은 친일로만 보기 어려움.

구대열: 민영환, 윤치호 등도 러일전쟁 직전까지 일본공사를 찾아가는 걸 보면, 민족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어떤 세력과도 연합할 수 있었다는 분위기. 그러므로 민족주의/ 친일을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해서는 안 됨. 관계설정이 다시 되어야 함.

김봉진: 그래서 나는 ‘용(用)일’이라는 단어를 쓰자고 주장.

구대열: 친일이 민족생존의 이익에 기여했는가, 가 판단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봄. 민영환은 친일에 친러에 매우 복잡하고 유동적인 행보를 생애에 걸쳐 보이는데. 단순 이분법의 마녀사냥은 이러한 사정을 전혀 반영 못하는 것.

양승태: ‘용일’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일본에 이용당했을 수도 있고.

하영선: 오늘 숙제가 여럿 나왔음. 발제는 오늘 화폐를 했지만, 12장은 <애국론>. 1880년대 말 유길준의 애국론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가 하나의 숙제.

9-12장을 보면, 정부가 해야 할 일로 교육, 화폐, 군사, 법률, 경찰 등등을 내놓는데, 군사에 대한 유길준 의견은 화폐에 비해 훨씬 보수적. 군사론의 서두에 당장 무기체계가 나올 것 같은데, 이는 기강-훈련에 이어 세 번째 순위. 전통적인 의미의 군사론. 법도 마찬가지.

양승태: 유길준 법제 논리는 서양교과서를 그대로 따왔음. 어째서 동양 천도(天道), 이런 게 안 나오고?

최정운: smuggling.

하영선: 유길준이 파악한 항구법에 관한 일본 논문(강극언=오카 가츠히코)을 보면, 자연법 수용과정에서 유길준이 좀더 고민이 있었다고 봐주고 있음. 유길준은 분명히 고민이 있었음. 그를 개혁적 관료로만 볼 수는 없는데 과연 그것이 사상적 통찰로까지 이어졌는가는 또 다른 문제.

최정운: 글쓰기 전략의 문제. 제가 보기에는, 서양 군사를 얘기하려면 무기보다 훈련을 먼저 얘기해야 하는데, 사기나 정신의 이야기를 앞에 둔 것은 전통적 주자학에서 좀더 친근한 주제를 앞세우고 서양적 이야기를 슬쩍 끼워넣으려는 smuggling의 전략 아니냐.

양승태: 어째서, 서양 철학을 동양 철학의 언어로 바꾸어서 논하고 이해하지를 못하고(않고), 서양 용어로만 이야기를 하는가. 학문적 고민과 깊이가 없다고 생각함.

하영선: 전통 주자학의 이기론은 존재론에 대한 것. 인식론, 존재론의 혼돈. 진정한 개화사상이 못 나왔던 것.

양승태: 서양 표상만을 수입해서, 해석 없이 사용하는 고질적 문제.

최정운: ‘애국’이라는 말은 이미 일본에서 먼저 많이 쓰고 있던 것. 그런데, ‘애국’을 아무리 강조해도, 민족주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함.

양승태; 서구의 university를 大學이라고 번역한 것은 그야말로 서양의 맥락을 동양 전통에서 찾아내어 제대로 번역한 것. 헌데, 다른 번역어들은 그 정도 수준을 달성하고 있지를 못함.
 
최정운: 1800년대 초에 이미 신식군대가 들어오니까, 서양 군대와 우리 군대가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을 텐데.

하영선: 그래서 유길준의 군사론이 대원군 때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것은 더욱 의외. 임오군란, 갑신정변을 다 거치고 나서, 강병을 위해 기강부터 잡아야 한다는 것은 의문임. 근대적 사고로 얘기하자면 무기체계 증강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책이 너무 급진적이 되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뒤로 뺀 것인가 잘 모르겠음. 서유견문 책읽기 방식은, 전통적으로 읽기/ 근대적으로 읽기/ 복합적으로 읽기의 세가지가 가능할 것임.. 서유견문중에 세 번째 내용은 양적으로는 매우 적지만, 내용상으로는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한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이 적은  것은 당시의 여건속에서 글쓰기 전략으로 읽어주어야 할 것인지 궁금.

최정운: 복합적으로 읽기 어려운 것이, 실제 내용은 거의 다 서양제도에 대한 것. 동서양을 절충하거나 섞어야 한다는 주장은 못 봤음. 그러므로 원칙적으로는 근대론자인데, 다만 부딪치는 부분을 슬쩍 지워버리는 글쓰기 전략으로서, 전통 뒤에다 서구적인 것들을 가리워놓은 것.

하영선: 후쿠자와 유키치의 한 몸으로 두 시대를 살았다는 말이 유길준에게도 적용될 수 있지 않나?

양승태: 유길준의 정당론에서 학문당, 종교당은 어디서 나온 이야기? 

김봉진: 서양 제국의 정당들을 보았거나 서양 서적들을 참고해서 유길준이 창작한 것이 아닌가 싶음.

최정운: 미국 영향이 크다고 봄. 유길준이 개화당으로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도 숨겨져 있음. 정권획득이 목적이 아닌 학문적 근거가 있다는 주장.

김봉진: ‘당파’의 부정적 이미지를 떨치고 좋게 해석하려는 저의가 깔려있음. 당의 공/사 론을 길게 전개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 당이라는 것은 사적인 것만 있는 것 아니고 공적 성격 있다는 주장. 유길준이 미국에 있었던 1883-84년은 미국의 각종 정당이나 단체들이 범람했던 시기.

구대열: 종교당/학문당 논의는 창조론/진화론의 싸움과 관련된 것은 아닌가? 유길준의 후견인 모스도 진화론자.

김봉진: 모스 (E. S. Morse, 1838-1925)는 일본에 다위니즘을 전파한 사람. 그러자 일본에 들어와 있던 선교 단체들이 이에 반발 각종 신문잡지에서 논쟁이 벌어짐. 유길준이 그러한 상황에서 진화론을 수용했을 가능성은 충분. 단 모스 자신은 전적으로 자연과학자. 실제로 사회진화론은 모스가 도쿄대학 교수로 추천해서 부임한 페놀로사 (E. F. Fenollosa, 1853-1908)에 의해 교육, 전파됨. 

양승태: 그 배후에 무엇이 있을 개연성과는 별도로, 유길준 본문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지 않음. 개론 수준.

하영선: 편제 분류와 상관없이, 여러 군데에서 반복되고 있는 논의가 많음.

김봉진: 유길준의 ‘당’에는 party, association이란 개념이 모두 섞여 있는 것으로 보임.

하영선: 신사유람단 60명 중 10명이 남았는데, 그 중 5명이 오사카 조폐국에 남았다는 흥미로운 기록. 신사유람단 1차자료를 보다 상세하게 검토할 필요있음..

김봉진: 변수는 박영효 따라 교토에 가서 양잠 배우고, 갑신정변 실패후 미국에 망명, 유학. 1891년 철도 사고로 사망함.

하영선: 김옥균은 일본 망명중 일본 양잠업 책 서문을 쓴 적 있음. 1890년대 전반 청일전쟁 전야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적음. 고종이 새로운 화폐 주조문제로 안경수를 일본에 밀사로 보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일본에 밀사를 보내는 것까지는 가능했지만 국내외적 제약 때문에 1891년 화폐개혁 시도는 실패함. 국내정치관계는  1884년 갑신정변이후 개화파들은 정치권력에서 제거되었음. 온건 개화파의 지적 전통에 포함할 수 있는 안경수, 김가진은 직책을 유지함.  한편 유길준은 1891년 가택연금에서 풀려 남. 갑신정변이후 청일전쟁 이전까지의 국내/국제역학관계가 보다 명확히 파악되야 함.

최정운: 직접적 자료가 없다면, 동학 쪽 연구가 도움될 수 있음. 전봉준과 대원군.
양승태: 동학파들이 명치시대 근왕파적 생각을 가졌을 가능성 충분.

구대열: 1888년 이후에는 사건이 없다 보니 외교사 연구가 남아있는 게 없음. 1891년 조대비 죽음. 중국 쪽이 조의사절을 보내려고 하는데, 우리 쪽에서는 의례문제가 복잡해지니까 오지 말라고 고사. 그럼에도 불구, 중국이 사절을 보내는 바람에 고종이 청 사신에게 결국 사대의 예를 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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