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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서유견문> 1-4편
 

2005-04-18 
2004년 6월 29일 전파모임

* 참석: 하영선, 구대열, 양승태, 최정운, 김봉진, 김영호, 신욱희, 김상배, 남궁곤, 손열, 김석근

* 독회: 유길준, <서유견문> 1-4편


하영선: 서유견문을 본격적으로 다시 읽으려는 이유는, 전파모임의 생각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내려는 의무감 때문. 유길준전서 5권을 1-4-3-5-2 순서(서유견문-정치경제-역사-서한. 시문-국어학 관련 글들)로 다시 읽으려고 함.

유길준의 역사적 자리매김 왜 필요한가? 국내 사학계의 기존작업에도 불구하고  유길준 평가의 극단적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정치학계, 국제정치학계의 작업이 절대적으로 빈곤. 마루야마가 <문명론지개략> 주석본을 낸 것처럼, <서유견문>에 대한 주석본을 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함..

김봉진: 욕심으로는 철저한 주석서 냈으면 함. 그러나 이번 독회에서 그 작업 달성하긴 어렵다고 보고, 1차적으로 일단 자세히 읽고 난 후 참여진이 각각 한편씩의 논문. 그 다음 2차 목표로 주석서 내는 작업. 그때는 참여인력 재편 필요하다고 봄.

김석근: 각자의 관심 중심으로 읽고 논문 내는 것 선호. 개인적으로는 ‘권리’, ‘정부’라는 테마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

구대열: 서유견문이 근대 지식사의 한 산물이라고 볼 때, 여기 나오는 용어 하나하나에 대해서 당장 주석은 못 달더라도 구체적으로 천착하겠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읽어나가야 향후 주석 작업이 가능.

김봉진: 따라서, 각자 관심사를 중심으로 주석서 간행 염두에 두면서 작업진행.

최정운: 주석서 낸다고 할 때, 텍스트의 기본형태 선택 문제 간단치 않음. 원서-번역서를 어떤 식으로 조합할 것인가. 1차 논문집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유길준 및 서유견문에 대한 논쟁이 있어왔으니만큼, 그를 반영한 학술적 편집서가 나오는 것엔 찬성. 예를 들어, 유길준과 후쿠자와의 관련성-얼마나, 어떤 의도에서? 

하영선: 19세기 지성사에 대한 논문은 워낙 공부하는 사람이 적어서, 일단 쓰면 쉽게 정설이 될 위험성있음.  또 상대적으로 치밀한 연구 논문 적음. 그런 점에서 다시읽기 논문집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임.

양승태: 기존 유길준 연구에 대한 리뷰 필요. 리버럴리스트, 리얼리스트 등 양분적 개념틀을 활용하는 작업 필요. 유길준의 책에 대한 첫인상은, 서양에 대한 표피적 인상기+일본 책 요약정리 수준. 개화기 지식인으로서 주자학적 세계관에 기반한 성찰이 발견되지 않음. 왜?

구대열: 후쿠자와를 베낀 부분(19세기 당시 지식을 흡수해서 필기한 부분)과, 유길준 자신이 여행해서 보고 느낀 자기 지식 부분을 구분해야 함.

김봉진: <서유견문>은 유길준 32-34세 때 집필.

양승태: 독자적 통찰력 없는 것 아닌가. 이질적인 것에 대한 문화적 충격과 능동적 해석이 보이지 않음. 교과서 베껴놓은 수준.

김봉진: 1. <서유견문> 한글번역본, 기존연구문헌을 모두 모아볼 필요 있음. (정용화, <유길준의 정치사상> 서지목록 참고.) 2. 유길준이 일본 처음 간 1881년에 24세. 이때부터 1년 반 동안 일본 체류. 미국에 갔을 때 27세. 29세 되는 해 유럽 돌아서 귀국, 연금. 24-29세의 경험, 32-34세 때의 집필.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일본 거쳐 미국 유학했을 때, 그것을 얼마나 통찰력 있게 관찰, 해석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볼 문제. 3. 우리나라 개화기의 사상수용사, 문헌수용사에 있어 <서유견문>은 첫 스타트. 그러므로, 지금의 기준으로 너무 높은 수준을 요구할 수 없고, 한편 첫 스타트이므로, 전통과 근대의 이종교배를 보는 데에는 매우 적합한 저작. 번역, 용어 등에 주목. 다만, 아무 기반 없는 상태에서 처음 시작한 개척자의 한계는 있음. 4. 유길준 서문에 보면, 원고의 절반을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서유견문>의 후쿠자와 번역발췌 부분이 혹시 그 상실부분을 채워넣은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을 세워보았음. 유길준이 후쿠자와 <서양사정> 등 저작을 “의역”했다고 말한 이유는 그 속에 유길준 자신의 창작과 번역 부분이 섞여 있기 때문임. 

최정운: 유길준이 이런 책을 왜 썼을까?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이 융합되지 못한 채 뒤섞여 있는 “소화 안 된” 모습, 그 갈등/모순된 양상 자체가 하나의 관찰거리.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까지 이어짐. 유길준 사상의 실체를 밝혀내는 것도 논문감이지만, 실체를 가진 사상을 못 만들어내는 개화기 지식인의 실존적 정황, 그 현상 자체도 논문감.

양승태: 유실/번역/창작 부분을 복원하는 문헌학적 차원은 정치학자의 몫이 아님. 유길준이 당시 개화파의 선구적 사상가로서 이 정도밖에 안 된다면, 개화기 지식인이나 전통 유학자들의 지성 수준을 재고하게 됨. 또, 현실적 문제에 부딪친 최초의 지식인으로서 유길준이 최한기와 같은 이전 사상가들의 서양이해(칸트, 몽테스키외)를 어떻게 이해하고 이용했는지 살펴보아야 함.

하영선: “다시읽기”에서 “다시” 라는 말이 들어간 이유는, 유길준에 대한 과소평가와 과대평가를 어떻게 함께 지양할 것인가의 문제의식 때문임. 과소평가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19세기를 공부하면 할수록,  무심하게 넘겨버린 행간속에 숨어 있는 논의를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임. 지난 시간 토론주제가 되었던 ‘양절’ 문제가 좋은 예임. 오늘 읽는 부분중 4편의 “인생의 경려(競勵)”만 해도, 83년에는 ‘경쟁론’이라고 썼던 것을, 왜 87,8년 서유견문에서는 굳이 ‘경려’라는 말로 후퇴했는가? 이러한 문제를 전체 텍스트를 꼼꼼히 살펴본 후 밝혀보자.

논문집의 구성은, <서유견문>에 대한 문제 던지기. 왜 그것 밖에 안 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서유견문이 정말 그것밖에 안 되는가는 보다 조심스러운 검토이후 평가할 필요가 있음. 다음으로 유길준 개인의 사상적 배경과 후쿠자와의 영향등을 검토하고, 한편 유길준이 처해 있던 국내외 현실을 따져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유길준 담론을 전파의 시각에서 본격적으로 분석한 다음 유길준을 제대로 평가해야 함 

유길준에 대한 학계의 기존연구는 일단 양적으로 너무 적고, 질적으로도 만족스럽지 못함. 경쟁과 경려, 양절론, 통의 모두 한평생 연구 테마. 그런데, 일단 논문 하나 나오면 일제히 유통되어 논의가 평준화됨. 이러한 분위기에 충격을 주려면, 구체적 개념을 가지고 천착하는 치열함을 보여줘야 함. 유길준 연구자들의 고민이 유길준의 고민에 못미침.

김봉진: 유길준이 고민한 만큼, 유길준 연구자가 유길준을 고민하였는가라는 것은 매우 심각한 질문. 저 자신도 여전히 못 따라간다고 고백.

경쟁과 경려 (競勵) 는 제 논문에서 각주로 처리했는데, 경쟁의 어원은 ‘competition’ 의 번역이며, 후쿠자와가 그 최초 번역자. 유길준의 ‘경쟁’ 과 ‘경려’는 결국 후쿠자와에게서 빌려온 것. 후쿠자와의 <서양사정> 속에도 ‘경려’에 해당하는 말이 있음. 상려(相勵)와 상경(相競)이라는 말이 동시에 출현. 여기에서 경려와 경쟁이 동시에 출현한 것. 실은 바쿠후 말기에 후쿠자와가 쳄벌스의 책을 번역했을 때 그는 ‘competition’을 처음에 ‘경쟁’이라고 번역했다고 함. 그러나 바쿠후의 번역 감독관1인이 ‘쟁’이라는 글자에 먹을 칠함. 이에 후쿠자와가 ‘쟁’을 ‘려(勵)’ 로 바꿈. 그후 경쟁과 경려는 길항관계에 있다가 결국 경쟁이 대세로 자리잡음. 유길준이 유학하던 시절은 이미 경쟁이 일반번역어로 자리잡았던 때.

유길준 <경쟁론>이 사회진화론, 약육강식적 세계관, 대국지향 문명개화론이라는 조경달 선생의 해석은 오류. <경쟁론> 속에 <논어>의 ‘팔일(八佾)’ 편의 일절이 등장. 이에 따르면 군자의 경쟁이란, 겨룰 땐 겨루지만 끝나면 예를 차리고 함께 술을 나누는 것. 유길준이 1881-1883년 일본에서 범람하고 있던 사회진화론을 배웠고, 거기에서 ‘경쟁’이라는 말을 따오긴 했지만, 그에 대한 비판으로서 <논어>의 구절을 써넣은 것으로 판단됨. 그와 같은 비판의식이 <서유견문>의 ‘경려’라는 단어선택에서도 드러남.

<서유견문> 150페이지를 보면, 후쿠자와에 없는 부분 있음. 뒤에서부터 6째줄. “이는 경려하는 도(道)에 강기(綱紀)가 무(無)함을----도에 지(至)할지라”는 부분이 후쿠자와의 <서양사정>에는 없음. ‘도’와 ‘강기’가 특징적으로 눈에 띔. 151페이지 3행 중간, “혹 무명한 간과(干戈)를 거(擧)하여 (명목없는 전쟁을 일으켜).....타인을 손해하여 자기의 이(利) 를 작(作)하는 자라”는 부분도 후쿠자와에 없음. 경쟁에 대한 비판의식 들어가 있음을 금방 느낄 수 있음. 152페이지 중간 三이라고 써있는 절, 후쿠자와에 없는 단어가 중간중간 있음. “세계 공동(公同)한 이익을 영구(營求)하여 상자(相資)하는 대도(大道)를…”도 후쿠자와에는 없음. 153페이지 四 이하는 유길준의 창작을 첨가한 부분. 후쿠자와를 옮겼다고 하는 논문에서도 그 결론 부분은 유길준 자신의 주의/주장 들어가 있는 경우 많고, 그 내용에는 대개 후쿠자와에 대한 비판의식 드러남.
 
구대열: 이 시기 중국사상가 정관응과 유길준의 관계는? 중국사상가들 중에서도 굳이 정관응이 두드러진 이유는?

김봉진: 중국의 경우1880년대의 선진사상가는 쩡 꾸안잉(鄭觀應), 왕 타오(王韜) 등 극히 소수였다 할 수 있음. 대다수의 유명한 사상가들은 1890년대 이후에야 등장함.  청일전쟁, 그리고 러일전쟁이 전환점 역할. 쩡꾸안잉은 이른바 매판(買辦; 서양 상인이나 기업가들과 거래하거나 그들 밑에서 일한 중국인) 이었으며 동시에 리 훙장(李鴻章) 등 양무관료가 설립한 근대적 기관의 관리직을 맡았고, <이언(易言)> 등 그의 저작이 일찍부터 널리 개명 지식인들 사이에 읽혔음.

하영선: 1. ‘경(競)’이라는 말이 우리 전통사상에서 어떻게 해석되었겠는가? 2. ‘쟁(爭)’이라는 말 대신 ‘려(勵)’를 선택한 유길준의 제도적 구상은 교육과 법률이었다. ‘세계공동’과의 관계, 조선현실과의 관계. 3. <서유견문>의 편제가 묘하다. 생각에는 “인생의 경려”가 맨 앞에 와야 할 것 같은데?

최정운: 유길준이 미국에서 배워온 로크 사상의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보다 낙관적이고 equilibrium적 생각에서 쟁 대신 려를 쓴 것일 수 있음.

하영선: 려-교육-통의.

최정운: 유길준에게 있어 경쟁이 경려로 간 것에 대해 주자학 영향을 논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   

양승태: 유길준은 약육강식 세계관을 서구근대문명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개념 자체를 수정하는 시도를 했고, ‘경려’를 선택한 것도 그 일환.

김봉진: 로크 사상 중 어떤 영향을 유길준이 받았다는 것인지?

최정운: ‘권리’를 법적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천부의 권리라고 규정. 로크적인 입장에서 인민, 정부, 권리에 대한 개념을 전부 재정의. 현실태로서가 아니라 이상태로서 권리는 기본적으로 개인에게도 국가에게도 모두 동등하다는 가정.

김봉진: 로크주의는 한마디로 무엇인가?

최정운: 사회계약론.

양승태: 로크 자체를 읽고 깊이있는 철학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교과서화된 로크주의 내지 사회계약론을 받아들였음.

최정운: 교과서적인 수준일망정 로크주의를 조선에 도입하겠다는 시도 자체가 꽤나 음험한 야심이었을 수 있음.

김영호: 로크사상에 있어서 가장 핵심은 경제. 경쟁을 통해 재산권의 무한대 축적이 가능하며, 국가가 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 로크-사유권, 경쟁, 리버럴리스트. 이러한 생각은 전통사상에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음.

김봉진: 유길준이 미국 유학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로크를 접했을 가능성이 있음. 그러나 로크를 제대로 읽었을 시간이 있었을지는 의문. 약1년간 유학했던 고등학교 (거버너 덤머 아카데미)의 1883년 커리큘럼에 따르면 당시 개설된 과목들은, 물리학, 화학, 언어학, 논리학 등. 정치학은 없었음.

최정운: <서유견문> 경려 사상은, 위정척사파에 대한 정면도전. 사욕으로 이루어진 사회에 대한 부정 대 긍정.

김봉진: 조선의 유학도 다양하며 유학자들 또한 여러 유파가 있었음을 인식할 필요 있음. 위정척사파도 그 일파.또 하나 오해하지 말 것은 주자의 ‘존천리멸인욕(存天理滅人慾)’ 이란  명제의 해석인데 실은 주자가 부정한 인욕은 사리사욕이나 탐욕일 뿐 욕망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님. 

김영호: ‘인세(人世)’라는 것은? --> 세상. 구체적으로는 아마도 조선사회.

하영선: <서유견문>이라는 제목의 연유는 무엇일까? 서유견문을 쓴 이유는, 서(序)에 나옴. 유길준은 사상가라기보다는 개혁 행정실무가의 입장. 19세기 중반 조선에 이를 넘어서는 고급담론이 왜 없었는가는 또다른 문제.

구대열: 동양적 학문 전통은 성현의 문헌에 대한 주석. 서양 학문 전통과 판이함, 당시 지식인들이 서양 사상 수용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음.

양승태: 우리 지성사에서, 동양 전통에 기반하여 서양학문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태도가 결여되어 있다. 동양학문에 대한 자신감 상실이라는 점에서 유길준 <서유견문>은 그 시발점.

하영선: 유길준이 서양 학문에 의해 일방적으로 압도당했다는 시각은 적절치 못함. 서유견문 14편에서 유길준 자신이 ‘개화의 병신’을 논하고 있으므로. <서유견문>은 갑신정변 실패 후 가택연금 상태에서 씌어졌기 때문에 언어선택으르 유보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음을 감안해야 함.

구대열: 우리 독회를 진행하려면, 1. 1880년대 후반 일본의 시대상, 그 당시 일본지식인들의 관심사, 서양학문 도입의 수준을 먼저 알아야겠고, 2. 미국의 사상계 동향파악 필요함. 1860년대 다윈의 진화론, 1870년대 모스의 우생학, 1880년대 독일 중심의 화학 발전. 188,90년대 미국의 급격한 산업화라는 시대배경.

김석근: 같은 <서유견문> 안에, 상쟁(相爭), 호경(互競) 등이 나오는데, ‘경’, ‘쟁’ 자들이 용례에 따라 뉘앙스 달라짐. 후반부로 가면 다시 ‘경쟁’으로 돌아감.

하영선: 유길준은 <서유견문> 화폐론 부분에서 외국화폐를 쓰면 절대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갑오개혁당시 본인이 참여했던 군국기무처에서는 일본화폐 사용을 통과시킴. “행실의 개화”는 반대하고 주자학적 표준을 따르자고 주장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딜레마 상황. 

하영선: <서유견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4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김상배: 3-2. 국민의 교육 부분은, 후쿠자와 것을 따온 것인가?

김봉진: 인민의 교육은 많은 부분 <서양사정> 권지상(券之上) ‘인민의 교육’을  따왔다고 볼 수 있음.     

김상배: 과학, 기술 부분에 대한 유길준의 언급에 관심을 가졌는데, 유길준에 오면 이미 논쟁은 끝났고, 그 이전 사상가들을 봐야하지 않나 싶음. 근대적 부국강병 달성 수단으로서의 지식, 과학기술 인정하고 있음. 다음, 영어에서 science, technology의 번역용어 문제. 器와 技 둘다 사용. 185,60년대 중국에서 처음 번역할 때는 하드웨어적인 그릇 器자를 사용. 그런데, 187,80년대 일본에서 번역하면서는 하드웨어 너머의 활동에 보다 방점 두어서 技로 번역. <서유견문>에서는 둘 다 사용. 다음으로, 才와 藝.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는 기술의 번역어. 1880년대 중반경에 들어와서 유길준을 통해본 조선지식인들은 서구과학, 기술, 지식의 전체상을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임.

최정운: 경제, 기술 등의 주제는 비단 유길준에 국한될 것이 아니라 시대 전체상 파악을 위해 도전할만한 주제.

손열: 유길준 <서유견문>만으로 하나의 개념을 파악하는 것은 무리.

일동: 그래서 유길준 전서를 모두 읽는 것이고, 필요하면 다른 책들을 동원.

김영호: (김봉진 교수에게)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후쿠자와에서 따온 부분/창작 부분 구분을 전체 공유해주기 바람.

김봉진: 안 그래도 그것은 저의 과제 중 하나로 생각함. 우선 <서유견문> 전체 읽으시고, 다음 모임까지 <서유견문>과 <서양사정> 등 다른 저작과의 대조표를 작성해 오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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