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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사회과학개념형성4: 김영호,<부국강병>
 

2004-07-21 

일시2003년 12월 6일

장소: 세계정치연구소

참석: 하영선, 구대열, 최정운, 김영호, 신욱희, 전재성, 마상윤    

발표: 김영호, “구한말 조선의 부국강병 개념 연구”

 


발표내용


토론

최정운: 당시의 부국강병은 서양의 것도, 동양 고래의 것도 아닌 독특한 개념이었을 것으로 보임.


최정운: 부국강병과 상업의 발전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만 당시 사회구족 상 모순되는 면이 많았을 것. 애국심도 마찬가지


구대열: 문맥은 다를지 모르겠는데, 한일합방직후 미국과 영국 보고서에 나오는 논의를 보면 한국에서 착취가 사라졌다는 문구가 등장, 그래서 자국의 시장으로서의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음


최정운: 문유미양의 일진회 연구를 보면 독립협회식의 자유주의가 일진회식의 조선을 망하게 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음 


하영선: 부국강병의 터닝포인트는 언제?


김영호: 대원군은 과도기


하영선: 추상적 개념으로는 개화팀, 북학파가 맞을 것 같으나, 전통적으로 예의 국가론이 대단히 강했으므로 80년대 까지도 전통과 근대의 언어가 혼재. 척사파의 시각에서 보자면  부국강병을 국가 목표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 예의 국가에서 금수국가가 된다는 것임.  


구대열: 청일전쟁 이후 변화가 그런 것 아닌가?


김영호: 중국뿐 아니라 일본도 많은 영향력 행사, 1974-1876년 시기가 중요. 고종 스스로 언급


하영선: 그것이 대원군적 논의에서 얼마나 더 나아간 것인가를 연구해볼 필요 있음


구대열: 중국의 동치중흥시대(1880년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없는지?

        청일전쟁 이후 우리에게 청국식의 부국강병이 안 된다는 인식 없었는지?


김영호: 일본의 부국강병 권장에 대한 왕의 의심이 계속 있었고, 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였음-이는 파견되었던 사람들과 접견하는 과정에서 드러남(1880년)


최정운: 80년대 초반(임오군란전)보다 90년대로 오면서 사상적으로는 사실상 퇴보하고 있지 않은가? 


김영호: 대원군 시기에는 실제로 군사력 증강이 일어났으나 그 이후에는 별로 없었던 것은 사실 


하영선: 갑신정변 이후 개화팀이 제거됨에 따라 부국강병 사상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 밖에 없었음. 세계적으로 동아시아 차원에서도 80-90년대는 군비경쟁의 시대였음


최정운: 대원군63-73, 고종73-82, 82년 이후 등 10년 단위로 대강 끊어진다. 오히려 역사의 하이라이트는 앞부분에 있지 않은가. 이후에는 침체.


구대열: 고종의 군제 개편이 이전의 오위영을 궁정 수비대와 수도 방위대로 축소. 이는 부국강병과 배치되는 행위. 고종의 부국강병 마인드와 배치되지 않는가?


최정운: 70년대 후반 서양의 군대, 무기를 들여와야한다는 인식은 분명했음.


구대열: 이태진 선생에 의하면 고종이 매탄금을 내서 무기를 다량 구입하기도 하였음. 신빙성은 모르겠지만


최정운: 외국 교관을 데려온 것은 서양식 군대 훈련 도입의 필요성을 느꼈다는 점을 보여줌


구대열: 당시에 부국강병이 단순한 강병이 아니라 동맹을 포함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로움


하영선: 균세<장인성>와 자강(부국강병)<김영호>의 틀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방어를 위해서도 군사와 경제는 필요한데....개념으로는 깨달았는데 현실로서 왜 실행되지 못하는가의 과정을 생동감 있게 보완해야 함


최정운: 대원군의 부국강병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세금 문제가 아니었을까? 지방 유지나 유생의 반대 등. 돈을 찍는 것도 적지 않은 문제였을 것 관세 문제도 마찬가지. 


하영선: 부국강병 논쟁에 사활이 걸린 1880년대 상황에서 (갑신정변의 핵심 논쟁) 김옥균과 묄렌도르프의 논쟁 = 차관과 화폐주조 사이의 논쟁. 김옥균은 돈을 꿔서 어디에 쓰려고 한 것이냐?  군사국가 건설이 우선 이었을 것임. 일본은 조선의  근대화를 지원하면서도 청국으로부터는 자유로우나 일본에 덤빌 수는 없는 상황으로 조선을  유도하려는 의도였음. 84년 이후 중,일은 군비경쟁에 들어갔는데, 우리는 기회를 담론과 현실 모두에서 잃게 됨.


구대열: 서양학계에서는 1895년에서 1904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데(‘독립이 주어졌는데 뭐하고 있었느냐?’는 주장), 오늘의 논의는 새로운 것임.


김영호: 임오군란 결과가 달랐을 가능성은?


최정운: 전보가 있었기 때문에 임오군란 발발 직후 청군이 들어옴. 청국이 대원군부터 잡아간 청의 인식이 중요함. 대원군의 재집권 시 통제 불가능성을 예견한 것임.


하영선: 과연 그럴까? 청은 자기 힘만으로 조선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음. 전통적 특수관계는 유지하되 혼자는 안 되니까 균세 속에서 전통관계 유지를 모색. 원세계가 온 이후 10여년(청일전쟁 발발 후 도망)은 군정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음. 


구대열: 몽고지배 이후 다시 찾아온 중국의 중앙지배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음.


구대열: 영국과 중국의 공동 한국 정책이 성공했다고 평가한 후 임오군란 발발. 영국도 당연히 임오군란 후 대원군의 재집권을 반대했을 것.


김영호: 대원군 스스로는 쇄국을 언급한 적이 없는데, 일본인들이 후일 붙인 것


구대열: 그러나 당시 신문을 보면 민족주의라는 말을 꼭 쓰지 않아도 민족주의적인 아이디어는 분명히 있음.


최정운: 겨레, 동포라는 말은 또 독립신문에서 함. 개념화가 매우 곤란함.


김영호: 부국강병이라는 용어는 많이 쓰이는데, 유교적인 제재로 인해 개념이 배제됨.

        정조 이후 적극성을 띠게 됨. 


최정운: 정조 때 부국강병이 강조된 이유? 확실한 군사적 위협은 없었던 시기이므로.


구대열:왕이 총명해서?


하영선: 다산의 글을 보면 걱정이 있었음. 동아시아 전쟁사를 모아서 분석하려는  방대한 구상을 보여주고 있음.  일본 및 청과의 군사관계 걱정에서 이러한 시도를 했음. 동주는 수원천도를 국내의 왕권 강화와 대외 안보의  이중적 성격으로 해석함.


하영선: 다산의 부국강병은 실학에서 비롯되는 개념. 다산은 당시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여전제를 주장하고, 이 기반 위에  오늘의 예비군과 비슷한 민보위 시스템을 주장. 적국은 일차적으로는 일본, 잠재적으로는 청이었을 것으로 보임. 다산은 글을 쓰는 목표가 분명한 사람. 자신의 누명을 벗고, 정치 제도 바꾸고, 이념 개혁, 경제제도 개혁, 군사제도 개혁을 구상함..

19세기 서세동점의 안보 불안 상황에서 군사문제가 가장 앞으로 오게 됨. 대원군의 안목으로는 다산의 군사 개혁안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음.

10년 단위별로 차별화해서 흐름을 보여줄 필요 있음


구대열: 정조의 수원성 건설은 일본을 분명히 경계하는 것. 북으로부터의 공격은 북에서 막을 성이 많음. 그러나 일본에 대해서는 없었음. 서울을 지키는 전초기지로서 수원성 건립. 그러나 당시 일본의 위협이 얼마나 컸느냐는 별개의 문제.


하영선: 양난 후 시간이 지난 후에도 다산 같은 경우 가시적인 위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계속 불신. 


최정운: 20세기 애국계몽기 들어오면 ‘실력’이라는 논의 등장. 부국강병과의 연관성.


하영선: 북의 ‘강성대국’논의와 부국강병, 19세기에도 ‘강성’이라는 말이 있었음. 남에서 처음에는 强性으로 해석했음 나중에 영어를 보고 군사경제적인 의미임을 알았음.


최정운: 실력은 결국 교육에서 출발하는 것이었음.  


하영선: 정조 당시 특별히 위협이 없었다고 하지만 다산 같은 경우 당시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음. 위기의식 상당했음.


김영호: 집권세력이 부국강병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정조와 다산은 특이하다.


하영선: 다산의 군사적 제일 과제는 정조의 친위병력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의 문제였음. 일정한 책임은 결국 국내정치에 있음. 고종의 재평가를 위한 이태진 선생 연구의 경우 조심스러운 것은 고종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얼마나 균형감있게 파악하느냐 하는 것임. 90년대에 여러 외세 활용을 시도하지만 국내 정치역량을 효율적으로 결집못한 채 갈등하는 속에 외세들의 희생물이 됨.


하영선: 당시 상황을 볼 때 부국강병 개혁은 대원군을 업고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모름. 개화파 단독으로 당시의 국내역량을 효율적으로 결집하기에는 역불급이었음.


최정운: 그러나 정조나 대원군이나 전통과 같은 선상에서 생각할 수 없음. 북인, 남인 등 모두 다른 부국강병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도시락 싸움이라고만 볼 수 없음.


구대열: 제갈량의 개혁론이 부국강병론의 단초가 되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김영호: 70년대에 왕과 부국강병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됨. 구체적 실행 과정은 아직 연구과제임. 


최정운: 박영효의 ‘건백서’를 보면서 느낀 것인데 개혁조항이 108개. 전략적 마인드가 없으니까 이렇게 난삽한 것 아닌가. 순서가 없음. 


하영선: 어떻게 108개나 모았는지도 궁금함.


최정운: 70년대 폐정개혁안 모집 시 수많은 개혁안이 올라옴


김영호: 상소 대부분이 유교로 돌아가자는 논의임


하영선: 당시 담론에서는 그 언어로 쓸 수밖에 없었을 것


구대열: 당시 꾸준히 추진되는 것이 하나도 없음. 일시적 필요에 의해 하고, 안되면 말고 식.


하영선: 헤이그 밀사를 그렇게 치밀하게 추진한 이유? 가도 별볼 일 없었는데...


구대열: 고종이 마지막으로 믿은 것이기 때문. 그것이 고종의 판단력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태진 선생의 평가는 사회과학적 마인드가 결여된 고평가임.


최정운: 고종이 현실감이 부족하고 아이디어만 존재.


구대열: 국사학계에서 이런 마인드가 너무 부족. 청산리 대첩도 당시 상해 독립신문이 날림으로 천명 죽였다고 쓴 것을 계속 역사로 이어가는 실태. 일본 기록은 8명. 현실적으로 천명은 불가능. 부상자와 포로, 사망자 비율을 생각해볼 때도 천명은 불가능한 상황.

- ‘국민’, ‘민족’, ‘제국주의’ 용어의 한중일 등장 시기?


제국주의


구대열: 원래 Imperial은 좋은 말이었는데, 의미가 변하게 된 듯.


최정운: 영국이 스스로를 empire로 지칭한 시기?


구대열: 18세기에 빅토리아여왕을 empress of Victoria라고 하는 말이 있었음. 영국의 동아시아에서 지배체제 네트워크(treaty port)를 imformal empire라고 지칭하기도 함.


하영선: 조선에서는 고종이 제국이라는 말을 처음 씀.


구대열: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가장 먼저 empire라고 부름. 강화도조약에서도 조선국과 ‘일본제국’의 조약이라고 일컬음. 그러나 이것은 유럽식 제국이라기보다는 천황을 가진 국가로 돌아갔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싶음. 


최정운: 천황이라는 말의 연원은? 가마쿠라 막부시절부터 부른 것일까?


최정운: 대한제국시대에 韓자를 기자의 국가에서 따와서 쓰기 시작한 것은 민족주의에 역행하는 의미가 있었다는 지적이 있음. 중국 같은 경우 나라이름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명이 처음이었음. 이전에는 후대에 지역 이름을 따 지어 부른 것일 뿐.


구대열: 세계적으로 나라이름은 지역이름 아닌가? 


최정운: 나라라는 것이 무엇인가? 나라에 이름이 있고, 국제적으로 인식되었을 때 국제정치의 주체로 등장하게 됨.


구대열: 중국이라는 말이 언제 나왔는가? 이에 대해 상대부터 나왔다는 논의가 있음.


최정운: 중화 이런 말도 공자 때까지는 안나왔음. 이적이라는 말은 나왔어도.


하영선: 천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주나라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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