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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사회과학개념형성1: 최정운, <민중>, <사랑>
 

2003-06-10 

2003년 5월 3일 토요일 전파모임

 

장소 : 서울대학교 동원생활관 3층
참석 : 하영선, 최정운, 김영호, 김용직, 손열
독회내용 : 최정운 교수 <한국 반지성주의의 기원과 의미:{임꺽정}의 사상 분석>(2001년 11월 한국정치사상학회 월례세미나 발표문), <현대 사랑의 사회정치적 의미>(2000년 9월, {전통과 현대}), <사랑의 재현: 전통적 사랑 이야기와 근대적 사랑 이야기의 차이의 의미>(2000년 11월 {문화과학})

 


 

최정운 교수 발표

 

사랑의 재현: 전통적 사랑 이야기와 근대적 사랑 이야기의 차이의 의미

 

- <사랑>은 2000년 일본에서 급히 작성. 사랑의 전파에 대한 proposal은 1999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발표.

 

- 사랑의 문제에 대한 아이디어는 1998년경 전파상. 사랑이야기. 물론 동양 전통에도 존재. 하지만 독특한 형태의 사랑이야기. <춘향전>과 <유정>의 비교.

 

- 1. 비극적 종말 2. 내면의 고백의 형태.

 

1. 소재의 차이에 그치지 않는다. 삶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사랑은 삶의 의미라는 중대한 문제로.

 

2. 관찰한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 갈등하는 마음의 문제. 고독한 인간. 남이 알지 못하는 문제. 내면이란? 순수성. 육체적 관계를 배제함으로써 증명. 대상의 아름다움도 상대적인 문제.(cf. 色(이로), '바람'과 구별) 순수성이란? 반이성, 반합리.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 근친상간적. 불륜은 서양문학의 기본. 내면은 이성과 반이성적 사랑의 갈등에서 탄생. 갈등/ 비밀. 조용하지만 내면은 dynamic한 전쟁과 같은 이야기. 연애소설의 묘미. 비이성적 사랑과 이성은 갈등 속에서 서로를 무한히 키우고. 인간의 본질적 문제로 비화. '나'는 누구인가? 죽음! 죽음을 앞둔 사랑. 죽음으로밖에는 갈 수 없는 사랑. 비극은 사랑 개념 자체의 필연적인 문제. 우연이 아닌.

 

- spiritual한 존재로. 불륜은 결국 높은 수준의 인간. Bourgeois Model. 이성과 사랑이 누구보다도 강력한 인간을 제조...powerful!

 

- 연애소설은 청소년 교양. 특히 순수한 사랑. platonic love. Foucault의 와 연관. 순수한 사랑이란 성적 욕망의 존재를 조건으로 거부하는 Asceticism.

 

- 사랑이야기의 도입은 서구인, 서구 Bourgeois Model의 도입의.....그러나 편차.

 

현대 사랑의 사회정치적 의미

 

- 과정을 스케치. 일본을 통해. 일본의 경우, 小說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출발 시점에서.

 

- 愛國--자유민권운동가를 Rousseau적 의미로. 우리의 경우에도 도입되어, <독립신문>에도 간혹 쓰이고 '애국계몽운동'기에는 대단히 많이 쓰인 말. 의미는 상당히 차이.

 

- 막연한 미적 감각에서 쯔보우찌 소요. '라브'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 1889년 모리 오가이의 <마이히메>에 의해서 popular한 주제로. 1890년대 여류소설가, 히구찌 이찌요 등에 의해서. 게이샤가 주.

 

- 조선의 경우 신소설에서 남녀간의 관계를 문제시하고, 고부관계, 축첩 등의 문제. 사적 영역의 개화의 문제. 1910년대 <장한몽>, 오자키 토오요의 <곤지키야샤>의 번안. 1917년 이광수, <무정>. '속사람'. 새로운 인간. 오히려 여기에서는 성욕으로 힘을 얻는 주제. 나도향의 경우, 1920년대 초. 그러나 당시에는 비극을 감당하지 못하고.

 

- 미풍양속의 문제. 그러나 비정치적인 계몽 주제. 또 한편, 잃어버린 조국이 '그대'의 형태로. 한용운, 최남선의 <백팔번뇌> 등. 낭만주의는 순수한 애국과 연결되고.

 

- 1933년 <유정>. 이어서 새로운 조선인 모델이 이어서, 심훈의 <상록수>, 이광수의 <사랑>.

 

- 일본의 경우 비극적 낭만주의로 나아가지 못하고 성적 욕망으로 다야마 가타이의 <후톤>, 타니자키 준이찌로의 탐미주의적 Eroticism. 욕망 길들이기-나쯔메 소세키의 <고코로>. 시가 나오야의 <안야코로>.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유키구니>. 私小說.

 

- 죽음의 문제는 사랑의 도입에서 가장 어려운 장애로.

 

- 일본의 비극으로 나아가지 못하고.....종교문화의 문제? 자살이라는 현세의 show!로 발전. 일본과 한국의 경우 사랑과 결부된 죽음은 다른 의미를 갖고.

 

- 한국과 일본은 두 가지의 다른 근대서구인의 변종. 그러나 다른 변종.

 

임꺽정

 

- 2000년 후반쯤에 들었던 생각.

 

- 내면의 이중구조. 저항하는 영웅과 욕망하는 인간. Faust Model.  이 두 구조는 유혹의 과정을 통해. 서림이, 노밤이, 그리고 한온이는 Mephisto의 역할을. 종합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은 서림이(지식인).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패고.....<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어떤 과정을 거쳐 다시 저항하는 영웅으로 돌아오고 진정한 영웅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 임꺽정은  fictional한 인물. 역사에 나온다는 것은 fiction의 그럴듯함을 강화시키는 장치. <홍길동전>의 변형에서 출발. 폭력만으로 이루어진. <수호전>에서 많은 부분 차용. 그러나 한술 더 떠서. 오히려 <수호전>과 다른 측면에 착목해야. 그러나 personality의 구조는 근대서구적. Faust Model. 저항하는 영웅은....Bergson의 Elan Vital. 욕망하는 인간은 Don Juan에서 도입한 것이 아닌가?

 

- 반지성주의에 초점을 맞추고. 반지성주의는 이 Faust Model에서 저항과 욕망이 섞여서 희석되지 않도록 하는 칸막이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 개화기에 권력, 폭력 사상의 전파--여기서 사랑도 물론. 육체의 전파의 결과. 1920년대 자연주의.

 

- 재구성. 임꺽정은 다름 아닌 우리의 '민중', '민중영웅'. 최저층.....Proletariat도 아니고....경제적 측면은 배제된 정치적 인간. 반지성주의는 일부분에 불과.

 

- 근대의 민중은 우리 고유의 <홍길동전>, <수호전>과 서구인의 모델을 융합하여 독창적인 구조.

 

- 1919년 <기미독립선언>에, 박은식의 글에 몇 번 등장하고 1923년 단재의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에 등장. 그리고는 <임꺽정>. 해방전 여운형, 안재홍 등은 대표적인 중도, 좌우합작파, 신민족주의는 민중주의로. 좌우의 중간은 대부분 민중주의로.

 

- 조영암 56년, 최인욱 66년 기타 작은 수많은 version. 저항과 욕망은 교차로 등장. 민중주의가 이름을 바꾸어가며 전쟁 이후 70년대까지 표면 밑에서 반복되고. 70년대 후반 박경리의 <토지>, 황석영의 <장길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그리고 한완상의 '민중론'.

 

- 80년대, 특히 83년경의 '삼민주의', '삼민투'. 80년대 중반 5.18은 '민중'으로 인식. 80년대는 지식인뿐만 아니라, 민중들이 민중주의를 흡수하는 단계.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민중(民衆)'이란 말이 중국어와 일본어에서는 전혀 정치적인 말이 아닌데, 한중일 한자문화권에서도 유독 한국에서만 '민중'이란 말이 고도로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일제 때 민족주의가 상당히 극도의 상황에서 변형된 하나의 변종으로서 '민중'이라는 말, 개념, 구체적 인물상을 포함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이런 얘기를 해보려고 하는데, 여러분이 비판들을 해주시면 제가 힘을 좀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토론

 

하영선 교수

'민중'이라는 단어가 1945년 이후에 언제쯤 등장?

 

최정운 교수

45년엔 많이 등장합니다.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라는 책에 보면 민중이라는 말이 한 페이지에 세 번씩 나오는데요.

 

김영호 교수

박헌영이도 쓰나요?

 

최정운 교수

박헌영은 안 써요. 박헌영은 아주 pure social communist고, 박헌영과 아주 극우 사이에 있는 사람들은 많이 썼어요.

 

하영선 교수

그런데 빈도수로 보면 '대중(大衆)'을 더 많이 쓰는 것 같은데.

 

최정운 교수

대중은 70년대에 많이 썼어요. 5,6,70년대에 '대중'이 많이 쓰이는데, '대중', '서민' 그런 근처의 연결되는 말들이 교차로 나타나지요.

 

하영선 교수

어제도 세션에서 그 얘기가 나왔는데, 전상숙 박사가 4.19를 설명하면서 독재, 민중, 외세라는 어휘를 사용. 내 기억엔 60년대 초반이 내가 중고등학교 다닌 시절인데, 그 당시엔 민중이란 말이 생소했거든. 그래서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를 실제 그 시대의 개념으로 구축하려고 한다면 이런 종류의 개념틀은 적절치 않음. 그런데, 그 앞으로 좀 가면, 50년대는 전쟁의 체험의 난장판이었던지라, 전쟁에 대한 discourse를 할 여력이 있던 시기가 아님. 그 뒤에 자유당, 민주당, 조봉암 이런거 나올 때 보면, 대체적으로 정치용어로는 '대중'의 빈도수가 많은 것 같음. '민중'이라는 용어가 보다 왼쪽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불온언어로 처리된 것이 아닌가.

 

최정운 교수

그게 그러니까, 허용가능한 언어 범위에서는 '민중'이 제일 왼쪽에 있는 말, 가장 아슬아슬한 말이었는지 모르죠.       

 

하영선 교수

그러니까 '대중'은 허가된 언어였는데, '민중'이 딱지붙은 언어 아니였나 그런 생각이 언뜻 들고, 의도적으로 그 말을 다시 쓰기 시작한 것도 discourse를 깨고 들어가려고 부활된 언어....45년 직후에 안재홍 정도까지 썼다고 하면 상당히 이쪽으로 왔었는데, 한국전쟁을 겪고 나서 다시 set back 되었다가, 다시 회복되어 들어오는 과정.

 

손열 교수

북은 '민중'이란 단어를 쓰나요?

 

최정운 교수

안 쓰죠. 민중이란 건 저항의 주체. 사회주의권에선 허용할 수 없는 말.

 

김영호 교수

그러면 이승만은 민중이란 말을 써요?

 

최정운 교수

안 쓴 걸로 알고 있는데.

 

하영선 교수

대중이지. 대체로 50년대 우파들은 '대중'이라는 어휘 사용.

 

최정운 교수

이승만의 경우는 '민중'이란 말이 나타나기 전 우리나라 민족주의 version을 가지고 미국으로 가서 사상적으로 동결된 채 있다가 1945년에 돌아온 케이스.

 

김영호 교수

결국, 민족이라고 하는 관념이 통치의 명분으로 창출되는 과정에서, 권력을 잡은 통치자가 통치의 대상에 일정한 이름을 부여하고 그에 따라 통치를 해 나가는데 있어, 거기에 불만을 가진 개혁세력, 반대세력들과의 역학관계와 그들이 사용한 용어, 개념의 정의 등에 대한 추적을 해 나가야 당시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듯.

 

하영선 교수

이 주제는 굉장히 중요. 민중주의라고 지금 막 그러는데 아무도 사실상 정확히 정리가 안 된 분야가 아닌가. '民'이라는 글자 자체가 우매한 백성을 가리킨다는 뉘앙스가 있고, '衆'이라는 글자는 원래는 경작한다는 의미를 가졌다고들 하는데. 45년 이후 50년대까지 民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승만의 觀은 전형적으로 한자에 가까운, 자기가 이끌어야 하는 대상. 그런 의미에서도 이승만이 민중이라는 용어를 빈번히 쓸 이유는 없었을 성싶음.

 

최정운 교수

제대로 한문을 배운 사람이라면 민중을 쓸 리가 없음.

 

김영호 교수

요즘 TV에 노무현 대통령이 나와서 계속 논쟁을 벌이는데, 노무현 대통령 얘기는 대기업 노동자하고 중소기업의 노동자하고 다르다는 것. 그런 것도 상당한 층을 규정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 노동운동가와 권력자는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다른 것 같음. 그런 걸 밝혀내야 현실이 돌아가는 모습이 잘 드러날 것. 그런데, 구한말이나 일제시기에 박은식이랄지 3.1독립선언서를 쓴 것은 루소와 관련지어서 애국애족, 국가가 없으니까 국가를 창출하기 위한 실체로서 민에 대한 생각을 했다고 하겠는데, 독립적인 권력이 형성되고 나서 오히려 거기에 따른 정치가 복잡하게 전개.

 

최정운 교수

일단은 민중주의라고 하는 것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지식인 사상. 민중은 민중주의자가 아니었음. 80년대 들어와서 터지는. 60년대까지만 해도 민중주의라는 말은 없었지만 attribute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민중이라는 말은 없어도 임꺽정적인 문제하고 identify를 할 수는 있었던 차원이 있을 테니까. 그런데 4.19같은 거를 그렇게 얘기하기는 곤란하겠죠 아마.

 

김용직 교수

제 기억에는 1920년대 초에 동아일보에 민중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그 때 뉘앙스가 이런 거였어요. 국민이라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만, 국민은 일본말로 천황의 통치를 받는 대상, 즉 고쿠민이었지요. 그래서 동아일보에서 국민이라는 말을 안 쓰고, 또 백성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백성이라는 건 근대 이전의 신민의 개념이기 때문에 개화기에 많이 나왔었는데 20년대 초의 동아일보로서는 쓸 수 없었죠. 민족이란 말도 잠깐 쓰는데 민족이란 말은 또 굉장히 정치적으로 위험하고 해서, 동아일보가 처음에 민중의 대변인이 되겠다, 이렇게 나와요. 동아일보가 설정한 민중이란 개념은 어쨌든 이러한 제반사정에 의해서 이것도 저것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선택해서 쓴 것이죠. 인민이란 말도 쓰는데 민중이란 말이 더 자주 나오는 것으로 기억하고. 그 이전에는 '민중'이란 말을 본 기억이 안 납니다.

 

최정운 교수

최남선이 기미독립선언 때 쓴 민중이란 뜻은 crowd 그 자체, 매우 물질적인 의미. 사람들이 모여서 몸으로 싸우는 형식적인 그것을 얘기하기 위해서.

 

하영선 교수

그럼, 정치적 implication을 가지고 민중이 사용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최정운 교수

아주 현대적인 정치적 의미로는 단재 신채호의 1923년 조선혁명선언.

 

김용직 교수

독립신문을 보면, 저는 公論이란 말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공론이란 말은 거의 안 나오고 衆論('즁론')이란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게 여론이란 얘기. 무리 중(衆) 자를 民이란 말과 결합해서 민중이라고 쓰기 시작하는 것은 20년대 초의 동아일보인데, 피치자들을 하나로 묶어서 논하되 여기에 민족적 색채를 넣으면 당시 상황상 정치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므로 어휘에 신중해졌을 거라는 점에서 그 당시의 정치적 시사점이 상당히 있다는 것입니다. 20년대 중반으로 가면서 사상문제가 심각해지는데 그때 일본이 제일 신경을 썼던 것이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였죠. 사회주의는 조금 봐주는 정도였지만,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는 그대로 때려잡는 대상이었죠. 1924-25년 치안유지법이 만들어져서 결국 조선의 사상통제의 넘을 수 없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넜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거죠. 20년대 이후의 신채호가 무정부주의였고 그래서 제 느낌에는 그 민중이라는 개념이 아마도 무정부주의와 상당한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해요. 무정부주의를 일제가 계속 탄압했기 때문에 해방 이후에 민중이라는 말을 쓰기 힘들었던 측면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영선 교수

그런데, 민중이란 어휘를 무정부주의가 가지고 있었는데 해방 이후에는 안재홍 같은 데서 다시 사용한다고 하면, 박헌영은 결국 인민으로 갔고....

 

최정운 교수

여운형 연설에서 민중이 얼마나 나오는지는 제가 체크를 못 해봤음.

 

김용직 교수

안재홍 같은 경우에는, 중국 쪽의 손문의 영향을 좀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요.

 

김영호 교수

그러면 20년대 초반에, 아까 동아일보 얘기도 했습니다만,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조가 들어오게 되면 공산주의라는 것은 민족이라는 용어를 쓸 수가 없고, 이러저러한 상황상 용어를 선택하는 데 상당한 난점이 있었다...

 

하영선 교수

그러다가 한국전쟁 나면서 상대적으로 지하로 잠복했다가 70년대 중반에.....그런데 재미있는 거는 내 어린 시절 기억에 민중이란 단어를 전혀 쓴 기억이 없는데, 유일한 예외가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 그런데 그건 엉뚱한 컨텍스트.

 

김영호 교수

그리고 20년대 사회주의 들어오고 조선공산당 만들어지고 할 때 민중, 민족을 못 쓰고, 노동자 이런 용어를 써야 하는데 당시에 실제로 노동자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해방 직후에 좌파쪽에서 쓴 문건들 보면 인민이라는 말 자체도 '노동인민'이라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씀. 어떤 카테고리를 분류해서 씀.

 

김용직 교수

일제시대 때 '민중'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이, 노재봉 선생님이 항상 강조하시지만, 20년대 야학, 브나로드 운동 이런 게 상당히 있었고 그때 러시아 포퓰리즘 사상이 상당히 들어왔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당시 야학 중에는 기독교 계통의 야학도 상당수. 민중이라는 개념이 서양사상에 폭넓게 나타나기 때문에 민중은 반드시 어휘 자체로 민중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people, 지배받는 사람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어떤 의미로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흐름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요. 그리고 70년대에 중요한 것은 해방신학의 영향이죠.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민중신학이 나옵니다. 70년대 민중론은 민중신학과의 연관이 중요합니다.

 

최정운 교수

함석헌의 '씨 '이 민중론. 1940년대 <뜻으로 본 한국사>에 민중이라는 말이 엄청 많이 나옴. 그 양반이 왜 민중이란 말을 계속 안 쓰고 씨알이란 말을 썼는지는 또 다른 문제인데, 아무튼 민중신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그때 나타난 실질적인 이미지, 초상은 난장이. 조세희 작 75년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하영선 교수

함석헌은 종교적으로 보면 민중신학으로 분류하기에는....퀘이커 쪽인데.

 

최정운 교수

퀘이커니까 부르주아 계열이라고 봐야. 민중신학은 감리교 쪽에서 나온 것.

 

김용직 교수

물론 그런데, 우찌무라 간조부터 시작한 이 무교회주의라는 것이 종교적 차원에서는 무교회주의지만 좀더 넓은 정치적 차원에서는 무정부주의적인 측면 있지 않을까 해요. 국가제도 자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최정운 교수

일종의 우파 무정부주의. 서구에서도 무정부주의라는 것이 크로포트킨만 있는 게 아니니까.

 

하영선 교수

기독교 아나키스트다?

 

최정운 교수

부르주아 아나키즘이 되는 거죠.

 

김영호 교수

조세희의 난쏘공에서는 노동자보다도 빈민의 상이 그려져 있는 듯한데?

 

최정운 교수

그게 바로 민중. 임꺽정도 백정이라고 하지만 가축을 도살하거나 백정으로서의 모습이 묘사되는 대목은 거의 없음. 최하층이라는, 순전히 정치적 장치인 셈.

 

김영호 교수

조세희는 빈민이라고 생각되고, 노동자, 라고 하면 노동의 새벽을 쓴 박노해. 그건 그렇고, 그러면 사랑을 그릴 때 이광수 등이 염두에 둔 사랑의 주체나 대상은 지식인 or 민중?

 

최정운 교수

당연히 지식인. 부르주아 모델.

 

김영호 교수

그럼 보통사람들의 사랑은 없는 건가?

 

최정운 교수

그 질문 자체가 매우 민중주의적 질문인데, 이광수의 <유정>은 세팅 자체가 조선호텔로 택시타고 밥먹으러 가는 등 철저하게 부르주아적. 우리나라 근대문학에서 외정 때 그야말로 민중의 모습을 그린 것은 KAPF 문학 계열. 그런데 카프 문학에서는 사랑 문제가 거의 나오지 않음. 카프 쪽에서는 자연주의 문학하고 연결되어 있지 낭만주의적인 사랑 얘기하고는 영 거리가 멈.

 

김영호 교수

그럼 사랑과 연애의 개념은 그 시대 사회적인 현상인데, 사람들 중 제한적 층의 사회적인 현상이다?

 

최정운 교수

이광수 같은 경우, 새로운 인간 모델을 창출하려고 했지만, 그 대상층은 부르주아 지식인.

 

하영선 교수

그럼 부르주아 아닌 쪽에서 우리는 어떤 언어를 가지고 있지?  전파적인 시각에서 보면, 근대적인 의미에서 특정한 계층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남녀간의 만남에서 나타나는 감성적인 것을 포함해서 러브를 새로운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연애라고 부르든지 사랑이라고 하든지 간에. 그렇다면 전통적으로 존재하는 남녀간의 feel을 표현하는 언어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최정운 교수

그 때 당시 대표적인 것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춘향전의 사랑.

 

하영선 교수

그럼 그것을 표현하는, 우리가 쓰고 있었던 언어가 뭐냐? 는 것.

 

최정운 교수

사랑.

 

하영선 교수

지금 얘기의 문맥에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연애와 대칭되는 것. 연애, 는 플라토닉한 것.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은? 춘원이 제목으로 잡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은 전형적으로 플라토닉한 사랑 아닌가.

 

최정운 교수

춘원은 연애라는 말을 쓴 적이 없음. 춘원이 사용하는 사랑의 의미는 플라토닉한 러브인 것 맞음.

 

하영선 교수

그렇다면 남녀상열지사의 육체적 측면 말고 보다 보편적 의미의 감정적인 것을 표현하던 전통적인 언어는 없었는가?

 

김영호 교수

야나부 아키라가 <번역어성립사정>에서 하고 있는 얘기는, 부모-자식간의 사랑에 대해서는 사랑 愛자를 쓰는데, 부정적인 의미로는 戀자를 쓰고, 러브가 들어오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해서 합쳐서 연애라고 썼다는 것. 그런데 저자가 괄호치고 하는 얘기는, 한국에서의 사랑 얘기는 일본과는 또 다르다는 것.

 

최정운 교수

연애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시시껍절한 것, 음담패설에 가까운 것이었고, 이광수는 연애라는 말을 쓰지 않고 사랑이라고 했음.

 

하영선 교수

그러니까 전통적으로는 사랑, 이라고 불렀다?

 

최정운 교수

그렇죠. 춘향전에 사랑가 나오잖습니까.

 

하영선 교수

그렇다면 근대 들어와서는 뺏긴 거 아니겠어? 춘원이 쓰는 의미로 가버렸으면.

 

최정운 교수

그렇죠. 부르주아들은 춘원적 사랑의 의미로 갔죠.

 

하영선 교수

그러면, 민중들의 사랑은 똑같이 사랑이라고 불렀다?

 

최정운 교수

그렇죠.

 

하영선 교수

난 궁금한 게 19세기나 20세기 초반에 그럼 사랑이라는 말을 이중적 의미로 사용했느냐.

 

최정운 교수

이중적 의미로 썼다고 봐야죠. 다른 계층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지식인들은 서양적 사랑 개념을 생각했고, 민중 레벨에서는 아직도 여전히 전통적 춘향전의 사랑을 생각했을 테고,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죠.

 

김용직 교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어휘보다도 좀더 넓은 의미에서, 사랑이라고 하는 테마의 문학적인 방식을 생각해보면 이런 것 같아요. 서양화를 보면, 고전적인 서양화에서 생각하는 사랑의 개념은 귀부인의 나부(裸婦)와 관련됩니다. 그런데 고야 작품을 보면 나부인데 몸 자체가 이전의 유한계급적으로 나른한 나부들과는 전혀 다른 근육질 노동자의 그것이죠. 그걸 그린 작가는 지금까지의 부르주아적으로 표현된 방식의 사랑을 거부하고 예술가로서 미와 예술에 대한 대안적 모델을 제기한 것이죠. 그걸 봤을 때, 사랑이라는 것도 상당히 hegemonic한 discourse가 있다고 봐야할 것 같아요. 보통 상민들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고전주의 작품엔 거의 표현이 안 되다가, 스탕달 정도 되어야 평민과 귀족간의 계층을 넘어서는 사랑이 처음으로 생생하게 나타나죠.

 

최정운 교수

그렇지만 <적과 흑>의 쥘리앙 소렐도 지식인이라는 점. 부르주아 지식인에 가까움. 민중은 아님. 조금 내려간 건 사실이지만.

 

김용직 교수

말하자면, 크게 봤을 때 어휘 자체보다도 그런 것을 표현하는 장르가 개화기에 있었느냐, 하는 건데, 예를 들어 판소리가 그런 기능을 했었느냐. 더구나 판소리의 정신이 뒤로 이어졌느냐. 사랑이라는 테마가 어디서 다시 재생산되었느냐 이런 것을 찾아봐야 될 듯해요. 그래서 예를 들면 신극에서 그런 것이 반영되었느냐 이인직이나....

 

최정운 교수

신극. 이인직에서는 사랑이라는 것은 거의 안 나오고, 봉건적인 가족 모델로 고부간의 갈등을 잔혹하게 그려내는 것들이 많았음. 오히려 popular한 의미에서의 사랑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헤게모니는 단연 춘향전이 잡고 있는데, 춘향전이라고 하면 196,70년대까지 영화가 만들어지고 대중적으로도 큰 흥행을 했거든요. 33년 <유정>나오고 나서, 김말봉의 <찔레꽃>이 나와서 베스트셀러가 되는데, 그때부터 파퓰러한 수준에서의 easy love....나중에 포르노 비슷하게 되기도 하고, 이런 게 30년대 후반부터는 상당히 많이 나오는 걸로 얘기되고 있음. 이광수의 <유정>같은 것은 보통 사람들이 바쁜 사람들이 읽을 수 없는 agony와 마지막에 죽는 비극적 결말을 담고 있는데, 비극이라는 것은 지식인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 민중은 감당할 수 없는 법. 그래서 그것보다 훨씬 쉬운 그런 사랑이 하나의 대중보급판으로 30년대 후반부터는 나옴.

 

김용직 교수

그런데 우리가 개화기라는 사회적 공간을 생각해본다면 전 이렇게 생각이 되요. 개화기 민족주의 흐름이 크게 세 가지. 주자학적이고 양반 흐름으로 내려오는 위정척사계열, 거기서부터 개화 흐름으로 해서 서구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개혁적인 독립협회 그룹, 그리고 동학이나 민란, 판소리 등으로 표출되는 민중적인 흐름이죠.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지금 사랑이라고 할까, 여러 가지 개인, 사랑, 애국, 민중 그런 다양한 것들을 보고 있는데, 그 당시에 실지로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것을 받아들였을까요. 이에 관해 제가 개인사적인 얘기를 조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희 집안에 외증조 할아버님 전기를 써야 하는데, 몇 년간 고민하다가 제가 깨달은 게 좀 있습니다. 우선 저희 아버님 쪽은 전형적인 양반 가문이었지만,  저희 어머님 쪽은 중인 가문이었어요. 그걸 저는 몰랐는데....

 

하영선 교수

자료가 있는지?

 

김용직 교수

자료가 아니라 회고담이 있어요. 저희 외증조 할아버님이 최초로 기독교신자가 되셨는데, 그분의 아버님이 한의사라고 해요. 그 당시는 개화기 직전이거든요, 한의사라는 직업은 전형적인 중인의 신분을 의미합니다. 그 중인 집안에서 셋째 아들이 전통적 관념을 거부하고 서양 종교,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 그게 어느 정도 혁명적인 사건이냐 하면, 그것 때문에 집에서 쫓겨났지요. 당시 야밤에 지게에다 이불을 메고 집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하영선 교수

원래 고향이 어디신가?

 

김용직 교수

서울이지요. 그래가지고 쫓겨나서 동대문에 가서 동대문 교회에서 사세요. 그래서 한국인 최초의 전도사가 되셨지요.

 

하영선 교수

그게 몇 년이었나?

 

김용직 교수

그게 천팔백구십몇년. 그래서 증조부께서 배재학당에 들어가셨는데, 배재학당에서 이승만 박사를 만나서 같이 다니셨죠, 나이는 한 살 차이인데 이승만 박사가 1875년생, 저희 할아버님이 76년생입니다. 좌우간, 거기 기록이 나와요. 협성회보에 저희 할아버지(이경직)가 잠깐 간여하였죠. 그런데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협성회보를 창간하고 기자로 활동하면서 독립협회 총대의원이 되어서 완전히 대중적 정치인의 길로 갔죠. 반면에 저희 할아버지는 전도사가 되어서 교회 지도자의 길로 나가셨죠. 같은 배재학당에서 한 사람은 정치를 발견하고 다른 한 사람은 종교를 만난 것이죠.

 

저희 할아버님이 1903년(1903년에 한국의 이민역사가 시작되는데)에 하와이로 가는 두 번째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에 가셨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윤치호가 타고 미국간 코스와 그 코스가 대개 비슷하다는 것이죠. 배는 일본의 나가사키를 거쳐 요코하마로 해서 올라가는데... 그 배에 타고 있던 유일한 여자가 저희 할머님이셨어요. 할아버지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서 결혼하셨다는 저희 할머님 참 대단한 분인 것이, 이 분이 결혼하러 오셨는데 벽에 걸린 시계를 볼 줄 알았다는 것이죠. 그 당시 숫자를 읽는 여성이 조선에 별로 없었기 때문에 여성으로서 시계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영선 교수

서양적인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가.

 

김용직 교수

글쎄요. 할머니 이분이 왜 기독교신자가 되었는고 하니, 그 분의 어머님이 유언으로  기독교 신자와 결혼하라고 하셨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때는 아펜젤러나 언더우드가 막 조선에 들어온 1885년 직후 또는 직전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기록된 것보다도 더 이전에 이미 서구사상이나 종교 등의 전파가 의외로 상당히 이루어 진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하여간 그래서 요코하마를 거쳐서 하와이로 갔는데, 그때 한인 노동자들이 다 사탕수수밭에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이경직 목사(증조부)는 처음에는 노동을 하셨는데 그곳 감독이 보니까 아무리 봐도 다른 사람들은 다 노동자인데 이 사람은 노동자가 아닌 것 같아 당신은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이냐고 물었고, 이력을 따져보니 전도사를 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죠. 그래서 당신은 하던 일은 계속 하는 것이 낳겠다고 했고 이목사님은 그래서 전도사 목회를 하고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저희 할머니가 무엇을 하시는고 하니, 거길 가니까 결혼 때 장만한 저고리하고 치마를 가져갔는데 그걸 미국부인이 그토록 칭찬하면서  이런 것이 있느냐고 감탄해서 그것하고 그 당시 미싱하고 서로 맞바꿨다고 해요. 그래서 미싱을 받아가지고 한인노동자들의 옷을 다 만들어주셨다는 것이에요. 제 생각에 저희 증조 할머니가 전형적으로 중인적 기질(멘탈리티)이 있으셨기에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었지 않았나 해요. 개화기에 중인들은 굉장히 달랐죠. 양반들은 그런 것 도저히 하지 못했죠.


 

그래가지고 거기서 7년을 사시고 1910년에 집안에서 형님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부랴부랴 귀국을 하셨어요. 그런데 돌아와서 보니까 돌아가셨다던 형님은 멀쩡히 살아계셨는데, 빚을 져서 빚 갚아 달라고 거짓으로 연락을 했던 것이랍니다.

 

그런데, 할아버님이 하와이에서 돌아온 것이 1910년인데, 이승만 박사도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그 해에 돌아오잖아요. 그때 우리 할아버님이 오셨을 때에 감리교에서 최초로 만든 신학교(협성신학교)에서 1기로 졸업해서 목사 안수를  받으셨죠. 그후 종로 중앙교회 담임부목사가 되셨는데, 이 때 다시 이승만 박사와 인연을 맺게 되십니다. 이승만 박사는 그때는 종교운동을 통해서 구국운동을 하겠다고 YMCA 총간사가 되어서 전국을 누비고 다녔죠.  그러다가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는 105인사건이 막 시작되려는 참이라 여기저기서 기독교도들이 체포되자 이박사도 신변에 위협을 느껴 더 이상 안되겠다고 생각해 출국하려고 하는데 나갈 수가 없었죠.


 

그래서 1912년 봄에 미니아폴리스에서 감리교 평신도 대회가 열렸는데 거기에 이승만 박사를 대표로 파송하려 했는데, 이 박사가 미국에서 장로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관계로 그게 어려웠습니다. 감옥에서 개종을 했는데 세례는 막상 미국 장로교회에서 받았기 때문에 이제 감리교대표로 갈 수가 없었죠. 그래서 결국 미국교회에 편지를 보내서 장로교 교적을 중지시키고 이쪽 종로중앙감리교회에 입적을 시키고 바로 대표로 출국을 시킵니다. 그때 감리교인들이 반대를 했기 때문에 이경직 목사님은 이를 무마하시느라 애를 쓰셨는데, 이런 사실은 나중에 이승만박사 문서에서 그 서신이 발견되어 알게 되었죠.

 

그래가지고 이승만 박사가 결국 출국했는데, 이 때 나간 것이 망명이 되어버렸거든요. 그러니까 일본에서 누가 내보냈냐를 조사했을 것이고 종로교회에서 했다는 것이 알려졌을 것이죠. 이후 이경직목사는 그 다음부터 목회를 길게 하지 못하고 6개월마다 교회를 옮겨 다니다가 마침내 1918년에 육남매를 이끌고 만주로 이주하셨어요. 그래서 용정에서 양주삼 목사와 교회를 만들어서 양주삼 씨가 목회를 하고 할아버지는 협동목사겸 한약방을 하셨죠. 만주에서 한 10년 있다가 귀국해서 청진에서 사시다가 다시 서울로 오셔서 가회동에서 또 한약방을 하셨다고 해요.


 

그런데 참 꼭 말씀드리려고 한 것은 할머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셨다는 것이죠. 만주에 가서도 할아버님보다도 할머님이 오히려 더 열심이셨다고 해요. 용정일대의 한국사람들을  가가호호 방문하셨는데, 그때는 전도부인이 의사나 간호사역할까지 하셨다고 해요. 한인 환자들을 먹이시고 씻기고 고쳐주고..... 그런데 이런 것들을 양반집 규수는 할 수가 없었을 것이에요.


 

본론으로 돌아와서 문제는 이런 개화기 한인들의 사회적 삶의 경험이 문학 등에서 어떻게 표출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근대로의 적응 과정에서 보면, 중인계층의 멘탈리티와 양반 계층의 멘탈리티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리고 독립협회 이쪽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들 계층 분석해 보면, 아주 명문가 출신인 사람들이 있지만, 집안이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 이들, 따라서 양반으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다수 있어요. 대표적으로 홍종우, 길영수 같은 사람들은 아마도 중인출신으로 마키아벨리적으로 권력을 추구한 것 같아요. 이런 사실에서 계층 문제를 정치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당시 사람들을 분류할 때에, 양반과 민중이라는 이분법은 너무 단순화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 사이에 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했을 것이고 특히 중인들의 유형을 설정할 필요가 있어요. 중인들 중 역관들은 특히 서구적 지식을 가장 빨리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죠.

 

하영선 교수

공공영역(public sphere)으로부터 역으로 그 시대의 실상을 추측해 들어가는 작업보다는 지금 같이 리얼한 스토리를 사회과학적으로 조명해 들어오면 그게 1910년이나 1920년대의 우리의 실제모습에 더 가까울 듯 싶군요.

 

김용직 교수

그 당시의 그런 개인사적인 연구나 문중사가 별로 없어서 저도 해 보고 싶은데, 결정적 어려움은 뭐냐하면,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희 외조부는 연희전문을 나오셔서 경기도 이천에 가셔서 학교를 세우셨는데 그 지역의 유지이다 보니까 일제 형사가 아예 집에 같이 살았대요. 집을 둘로 나눠서 뒷 채를 아예 형사를 내줘서 살라 그랬답니다. 그 정도로 그 당시에 감시체계가 심했는데, 그렇다보니까 문제가 될 기록을 안 남기니까 기록 자체가 별로 없죠. 또, 그나마 약간의 기록들도 난리를 겪어 없어졌어요.  피난갈 때 천장을 뜯고 그 안에 중요한 서류들을 넣어두었는데 피난갔다 오니까 모든 일기나 그런 것들이 싹 없어졌다는 것이죠.

불타 없어진 경우도 있겠고 국군이나 인민군이 와서 수색해서 가지고 간 경우도 있겠고. 그래서 기록이 없어요. 사진들이 좀 남아있죠. 그래서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실들이 정확하지 않아요. 그때 그걸 했다는데 왜 했는지를 모르겠다는 식인 것이죠. 나중에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상호 비교해 맞추어 보니까 점차 그 시기의 행적이 밝혀지죠. 그래도 세세한 것은 잘 모르시죠. 왜 만주로 갔는지 물으니 잘 모르시는 것이에요. 대충 일본 사람들이 못살게 굴어서 그랬던 것 같다고 해요.  그럼 왜 못살게 굴었느냐고 물으면 잘 모르시는 것이에요.

 

최정운 교수

단재와 이승만이 같은 세대인데, 단재는 만주에 가서 민중을 발견하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가 형무소에 들어가서 열심히 읽은 책이 번연의 '천로역정'이라는 것. 당시 그 책 읽고 감명받은 사람이 한두명 아님. 최남선 전기를 봐도 그 또한 천로역정을 읽고 또 읽었다고 함. 이승만도 그렇게 하고는 민중이다 이런 사상적 변화를 겪기 전에 미국으로 간 거. 사실은 이승만이란 사람 전체의 삶이 천로역정. 그 독선과 고집이라는 면에서. 그러니 민중주의 시대에 그러한 천로역정적 세계관이 갈등을 안 빚을 수가 있나. 백범 김구도 이승만과 한 살 정도밖에 차이 안 나는 같은 세대인데, 백범은 기미독립 전까지 국내에 있었음. 백범은 민중주의적인 데가 있음. 백범의 호가 1910년대 3.1운동 가까이 되어서 지어진 것인데, 백범의 白자가 백정(白丁)할 때 백자고, 凡자가 범인(凡人)할 때 범자라고 함. 이 양반만 해도 피지배층이라는 게 민족을 대표한다는 관념이 있었던 거지. 그러니까 그렇게 보자면 한국이나 중국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민중주의에 익숙한데, 미국 간 사람들은 완전히 냉동고에 그냥 민족주의를 가지고 있었던.

 

김용직 교수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 중 중요한 것은, 역시 조선개화기나 그 전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주자학적 영향을 어떻게 극복하는가라는 것이죠. 개화기 때 주자학적 사고와 담론질서를 깨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할 정도이면 이것은 그냥 생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다른 세계를 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죠. 즉, 이인직처럼 일본에 가서 신문화를 보고 온다든지, 춘원도 마찬가지 사례이죠. 그 당시 대부분 그 정도 경험을 한 사람들이 글을 썼죠. 주자학적 오리엔테이션, 즉 주자학적 중독상태에서 빨리 깨어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바로 중인들이었죠. 양반들은 빠져나오기 대단히 힘들었어요. 주자학적 세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파문을 의미했죠. 이동인이라든지 오경석 등도 개화파 가운데 중인들이 있었죠.


 

그리고 또 하나는, 주자학적 관점에서 사랑을 좀 정리해 주시고, 거기에서 실질적으로 그렇다면 현실의 민중적 삶에 사랑이라는 개념이 분명히 있었는데, 문제는 그것이 담론의 형태로 표출될 수 있었는가 아니면 제한적이었는가. 개화기에는 그것이 표출되었는가 아닌가. 표출되지 못했다면 그것을 대치하는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질문을 드립니다.


 

그랬을 때, 그 당시 기록들 중에 개화파들이 소개한 것들, 천로역정이라든지. 배재학당에 와서 그 사람들이 뭘 가르쳤는지. 이승만 같은 경우엔,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수천명 앞에서 영어연설을 했죠. 그렇다면, 이승만이 배재학당에서 배운 것들은 필시 모두 암기하다시피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죠. 그리하여 서재필이나 윤치호가 와서 한 이야기들을 6개월쯤 배운 후에 학생들은 나중에는 스스로가 전파자가 되어 담론을 재생산하고 창출하는 역할 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의미는 시간이 좀더 경과한 후에야 생생하게 깨달을 수 있었겠지만요.

 

최정운 교수

그런 이야기들이 참 추적하기 어려운 난점. 오늘 제가 한 얘기들은 나와있는 텍스트 수준에서 이야기. 민중이라고 하는 것도 실체적 개념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fictional하게 들은 민중이라는 것을 만들겠다는 노력. 벽초 홍명희는 천재. 명문대가집 출신. 이 양반이 민중을 창조하는데 물론 목적은 민중까지도 교화하기를 바랬겠지만, 직접적으로 영향받은 사람들은 지식인들. 사실 민중적 요소가 상당히 개재되어 있음. 홍길동에서 출발. 당시 홍길동전이 흥미로운 것이, 갑오동학란 때 전봉준에 대해서 항간에 떠돌기를, 신출귀몰하고 둔갑술도 쓰는 것이 완전히 홍길동처럼 묘사. 1896년부터 활빈당이라는 것이 등장. 그때 당시 대장이 맹감영. 그 사람은 양반출신이었다고 얘기됨. 아마 동학잔당. 홍길동전설이라는 것이 민중저항의 discourse의 커다란 분기점이 아닌가 싶음. 홍길동전 보면 당시 민중들의 신화적 이야기들이 다수 녹아있음. 아기장수설화. 벽초의 <임꺽정>이 천재적인 이유는 이처럼 전통적 민중설화의 기반 위에 서양적 인물상을 구현해 놓았다는 것.

 

김영호 교수

결국 사랑의 정치사회적 의미라는 것이, 지금 보면 애국애족으로 이어지는데, 애국이라는 말이 조선시대에는 없었을까요?

 

최정운 교수

없었죠. 들어온 말입니다. 애민(愛民)이란 말은, 고종 때부터 조정에서 나름대로 내밀었음. 애민, 이란 말 자체는 백성들을 사랑한다는 의미로 고전에서 많이 나오는 말인데,  그런데 그것도 일본에서 애민이라는 말이 1880년대 초반부터 막 돌아다녔던 말이라. 그리고 애국이라는 게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독립신문.

 

김영호 교수

그러면 프랑스혁명에 관한 책들이 넘어오면서는 애국, 애족 이런 말들이 들어옵니까?

 

최정운 교수

그렇죠. patriotism이란 말은 루소 전부터 하던 말. 그러나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애국이라고 번역해서 愛라는 말을 넣은 것은 루소.

 

김영호 교수

patriotism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애국, 이란 말입니까?

 

최정운 교수

그렇죠. 아니, 일본에서 번역을 했는데, 루소적으로 번역을 한 셈. 원래 patriotism은 말 자체는 patrie, '고향주의'죠. 그 말을 루소가 쓰면서 amour의 뜻을 넣었고 그것을 일본에서 애국이라고 번역했고, 그게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일본은 1880년대 우리나라는 1890년대에 굉장히 많이 쓰이던 말이고, 그게 인제 남녀간의 사랑이라고 하는 거하고 연결되어서 일본에서 들어오고. 그러면서 사실 남녀간의 사랑 문제가 미풍양속에 부딪치지만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애국이라는 문제가 여성에 대한 사랑하고 다시 결부시켜서 논의되었기 때문. 그래서 남녀간의 사랑 문제가 1920년대가 되면 이미 정치적 의미를 가짐.

 

김영호 교수

독립신문 이전에 주자학적 사상에서 사랑에 대한 논의는 없습니까?

 

최정운 교수

주자학에서 사랑 愛자는 정치하고 연관되는 문제 아님.

 

김용직 교수

주자학 쪽에서는 사단칠정론하고 결부되어서, 정감적인 표현을 매우 억제하고,  그런 것은 안 할수록 좋은 것으로 보았죠.

 

김영호 교수

그러던 것이 愛자하고 國자하고 합쳐져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 만들어진 셈. 그런데 조선실록을 쳐보니까 '軍國'이란 말이 많이 나옴. 애국이란 말은 없음. 태조가 말하기를 軍國은 이성계 자신이 하고 機務는 밑의 신하들을 시킨다고 했음.

 

김용직 교수

아까 앞부분에서 동의하기 다소 불편한 부분이 있었는데, 불륜이 서양문학의 기본테마로서 흥미롭다고 생각하기는 하는데, 이 때의 불륜은 당시의 기존 사회관념, 전통적 제도를 깨고 들어가면서 미래를 형성해가는 해방적 의미가 있었다고 봄. 아까 얘기한 스탕달의 적과 흑이라든지,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여기서 얘기하는 부르조아적 모델, 불륜 자체가 에센스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서 전통적 관념에서 봤을 때는 안 되는 건데 그것을 깨고 근대라고 하는 세계가 나오기 때문에, 근대라고 하는 세계는 그러한 전통적 세계를 깨고 나름대로 rational한 사회를 형성해 내는 과정에서, 그 이전까지는 불륜이라고 해석되었는데 그 이후에는 free love가 되는 게 아닙니까.

 

최정운 교수

free love가 아니라, 로맨티시즘 자체가 해방을 의미하는 것인데, 불륜이라고 하는 것이, 이광수의 <유정>에서도 그 대상은 수양딸. 불륜을 절대 하지는 않음. 이를테면 근친상간을 하지는 않는데 근친상간'적'. 그럼 왜 그러한 세팅에다 연애를 놓았느냐? 사랑의 순수성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일부러 못된 경우를 갖다 집어넣는 것. 동서양 사랑의 다른 측면은, 서양의 사랑은 내면적인 것이기 때문에 순수함을 강조하는 데 비해 동양의 사랑, 춘향전의 사랑은 종합선물세트. 중국고사를 동원하여 음탕한 육욕에서부터 천상의 사랑까지 온갖 것들을 가져다 섞어놓음. 서양의 경우 순수함, 이성이 그러한 욕망을 자제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러한 근친상간적 세팅을 놓고 게임을 벌인다.

 

김영호 교수

그런 발상은 서양에도 중세적 관념이 많이 남아 있는 것. 중세와 근대가 많이 차이나는 것이, 중세 사랑의 이상은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 먼 거리에서 숭배하는 기사와 같이 정신적인 교감을 중시. 그러다가 근대로 들어오면 부정적인 의미의 불륜이 되어버리는 것. 그러나 근대적 관점에서는 종교적 판단이 사라지기 때문에 새로운 사랑이 오히려 죄악감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짐.

 

최정운 교수

사실상, 서양에서도 중세에 사랑이 나옴. 11-12세기쯤 프로방스 지방에서 나온 고대의 에로스 아가페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사랑을 묘파한 이야기가 랜슬롯과 아서왕. 역작 중 하나가 트리스탄과 이졸데. 기사가 자신이 모시는 왕의 여인과 사랑에 빠져서 죽는 비극. 그것이 르네상스를 만들어 내는 중요한 힘. 중세 한 가운데서 사랑이 나옴. 중세를 깨는 역할을 하기도 함. 세익스피어 페트라르카 등 사랑 얘기가 많은데 17세기 초가 되면, 프란시스 베이컨 등이 근대를 만들어 냄에 있어서 사랑이라는 것을 public life에서 완전히 추방. 공식적 철학에서 사랑을 완전히 없애버림. 그리하여 라씬이라든지 희곡이나 문학 영역에서만 이야기되고 정치사상에선 사라지면서 완전히 rationalized. 그러다가 루소가 다시 사랑을 구해내서 로맨티시즘을 논하게 되니까 로맨티시즘을 중세적인 부활이라고들 하는데, 사실은 매우 근대적인 것인 셈. 루소가 만들어낸 사랑을 이론적으로 완성한 사람이 스탕달. 스탕달의 <사랑론>이 플라토닉 러브, 에로틱 러브 등등의 교과서에 해당.

 

김용직 교수

바보 온달은 언제? 그 안에도 사랑 개념이 있는데.

 

최정운 교수

뭐, 이미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향가 <헌화가> 보면, 절세미인이었던 수로부인한테 소를 몰고 지나가던 한 노인이 꺾어다 바침. 우리나라도 고려 때까지 남녀관계가 매우 리버럴했다고 함. 그러다가 조선조 들어와서 소설책도 다 금지하고 사회전반에 성리학적 규제 강화됨.

 

김용직 교수

<노래하는 역사 : 이영희의 한·일 고대사 이야기>에서 하는 이야기가 그럴 듯은 한데, 과연 그 정도로 과거 우리 작가들이 성(性)이나 에로스를 생각했느냐 의문입니다.

 

최정운 교수

조선조, 유교권 문화에서 남녀관계의 문제라는 건 굉장히 묘함. 그런 생활을 했지만 글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음. 그런데, 왕이 후궁 두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관청에 소속된 관기(官妓)의 존재로 보아 사실상 성을 공식적으로 접대하는 문화였던 셈. 생활에서는 에로틱한 것을 굉장히 많이 실천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매우 엄숙주의.

 

김용직 교수

그 경우 성이라는 것이 권력의 외연에 있는 하나의 장식품이 아녔을까요?

 

김영호 교수

후쿠자와 유키치가 말한 권력의 편중의 대표적인 현상. 그런데, 루소가 얘기하는 '애국'은 정확히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지?

 

최정운 교수

루소의 경우, 국가구성원들 간에 문화적 일체감과 공통의 언어, 습속, 나아가 시민종교까지도 필요하다,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함. <에밀>을 보면 사람의 성장에 있어 사랑, 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함. amour de soi와 amour de propre를 놓고 게임을 하고 있는데,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에 의해 인간이 타락하게 되며 자기 자신의 내면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교육을 통해 계발해야 한다고 함. 이전의 로크의 교육론과 매우 다른 점은, 로크의 교육론이 어릴 때부터 어떻게 이성을 발달시킬 수 있는가 하는 데 초점이 있는 반면, <에밀>의 교육론은 amour de propre인 성욕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를 자기애로 연결시킬 것인가. 따라서 어릴 때부터 운동을 시켜서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자연에서 키워야 한다는 논의를 전개.

 

김영호 교수

시민양성을 위한 교육론으로서 <에밀>과 결합하여 생각하면,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말하는 애국의 기준은, 보통사람으로선 충족시키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아닌지?

 

최정운 교수

루소는 자기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만큼, 반드시 그렇게 어렵다고만은 볼 수 없음.

 

김용직 교수

사상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것을 누가 사상으로 표현하느냐의 문제. 루소의 경우, 루소 자서전을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루소의 원래 출신이 제네바의 평민 가문이죠. 그 후 빠리로 진출해서 불란서 전체를 일순간에 장악할 정도의 천재적인 영감을 내비치며 혜성같이 등장하죠. 그 당시 불란서 사상계의 거장은 볼테르였죠.

그 때 루소의 파워는 자기 삶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죠. 두 종류의 경험, 즉 제네바에서의 소시민적 삶과 빠리 살롱계의 부르주아적 삶. 루소는 이 양쪽을 모두 알고 즐긴 동시에 양자의 갈등과 긴장관계를 느꼈던 것이죠. 부르주아의 삶이 이성적이라면, 서민의 삶은 정감적인 것이죠. 정감이 이성보다 열등하지 않다고 보았죠. 교육, 민족주의, 정치공동체 등의 문제들에 있어 기존이론에 도전하며 자신의 설명틀을 조직해 나갔어요. 결국 중요한 것은 문자나 언어로 표현되기 전에 그러한 경험들을 먼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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