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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계초,『음빙실자유서』101p.~
 

2003-04-01 

2002년 10월 세미나 기록

 

일시 : 2002년 10월 12일 (토) 오후  3시반 6시반
장소 : 서울대 사회과학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참석 : 하영선, 장인성, 신욱희, 박지향, 김용직, 손열
독회내용 : 양계초,『음빙실자유서』101p.~

 


 

김용직 교수 발제
- 발제문 참조. 일관성·합리성이 지속적으로 보장되는 체제로서의 공화정 소개. 君의 권력이란 것도 들여다보면 名과 實이 나뉨. 영국의 경우 민권 뿐 아니라 군권도 강함. 민이 자유권을 완전히 가지면 그 나라가 강해짐. 영웅에 대한 논의 많음. 보통교육의 중요성 강조. 죽음에는 참된 죽음/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세속적 죽음이 있음. 목숨을 버림으로써 忠을 세우는 문제 언급. 메이지 유신을 논함. 제국주의적 公과 私의 관계의 특징을 양계초가 감잡고 있었던 듯함. 토크빌을 읽은 듯함. 이홍장에 대해 매우 비판적 시각. 혁명실패의 원인제공자가 이홍장이므로 비판적일 수밖에 없음. 종교적 conversion의 문제를 비교종교적으로 논함.

 

김용직 교수

일단 요즘의 연구관심사부터 말해볼까 함. 개화기에는 대략 세가지 정도의 공·사 개념이 있었다고 봄. 유교적 公私개념, 자유주의적 public/ private 개념, 일본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재정의되는 공과 사 개념. 이 세 가지 개념들 간의 경쟁이 매우 치열. 실록을 보면 수구파 논리 일변도. 고종은 기본적으로 수구파의 입장. 하원 구성할 때에도 전체 50석 중 17석만 독립협회에 주고 나머지 33석은 황국협회 및 수구파가 차지. 결정적으로, 독립협회가 박영효를 명단에 올린 것이 실착. 고종은 이를 빌미로 독립협회를 해산시킴. 고종은 황실의 재정을 이용하여 여러 정치세력을 회유하려고 했던 듯함.

 

하영선 교수

서양에서 '제국주의'라는 말이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는가?

박지향 교수: 1840년대 무렵부터 '제국주의'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 처음에는 부정적으로 사용되다가 19세기 후반 가서 긍정적으로 변화되며, 20세기 초에는 경제적 의미가 가미됨. Hobson이 최초로 제국주의를 본격적으로 논의.

 

하영선 교수

162페이지 "세계외지세계"에서, 세계를 보려면 세계를 넘나들어야 한다고 함. 자기 자신의 글쓰는 태도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고찰.

 

박지향 교수

양계초의 사상적 오리엔테이션이라면? 서구 or 공자?

 

하영선 교수

절충적임. 전파적 시각에선 삼중적 의미를 지닌 인물. civilization을 '문명'으로 부른 것은 1896년 양계초가 최초. 그 앞의 축들은 civilization을 '문명'이라고 부르고 싶어하지 않았음.

 

1898년 무술변법의 100일 후 실패해서 일본에 가서 쓴 글들이 <음빙실자유서>. 이십세기 초에는 마오나 호적이 양계초로부터 매우 큰 영향을 받았는데, 그 후 저평가되다가 최근 다시 각광받고 있음. 1900년대 초 조선에서 양계초의 영향은 지대함. <음빙실자유서>가 번역되었다는 자체가 이를 반증함. 한중일이 '문명'에 대해 공유된 시각을 갖기 시작하게 된 시기의 대표주자. 동아시아 삼국 언어적 담론의 공유화 현상에서 양계초의 역할에 주목. 국내 연구는, 단재나 박은식에게 미친 양계초 영향에 대한 초벌작업의 수준. 동아시아 차원에서는 좀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함.

 

양계초의 사상. 기본적으로는 엄복, 옌푸와 함께 social Darwinism적 시각과 논리. 사회진화론적 세상 속에서 중국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新民說+영웅론. '民'을 새롭게 하는 수밖에 없음. 일본으로 도망가서 처음에는 자유민권론 영향 받고 서양적 모델에 경도되는 진보적 모습. 그러나 3-4년 지나 미국 다녀오면서 국가주의 쪽으로 돌아옴.

 

1912-20년 정치생활. 1929년 56세로 별세. 마지막 10년에는 문화 쪽으로 돌아옴. <청대학술개론> 등 중국전통 정리작업에 주력. 양계초의 사상적 중심은 <음빙실자유서> 류가 아니라, <청대학술개론> 쪽. 중국전통에 대한 강렬한 열의. 40세에 자서전. 1890년에 강유위와 만남. 그의 신학문에 경도되어 과거 및 구학으로부터 전향.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의 주필이었던 조선의 개신유학자들에게는 일본 쪽 직수입보다는 양계초를 거친 시각이 훨씬 편했던 듯. 양계초의 저작들은 한말의 베스트셀러였던 셈.

 

김용직 교수

'음빙실'이 왜 음빙실인지?

 

박지향 교수

어디선가 봤는데, 당시 중국정세가 하도 답답해서 얼음집 안에 들어가 앉아있어야 화가 가라앉는다...는 데서 유래.

 

김용직 교수

'손문'에 대한 언급은 없는지?

 

하영선 교수

1899-1902년에는 손문과 꽤 가까움. 그러나 이후 보황적 논조와 함께 강유위로 회귀.

 

손열 교수

조선에 대한 글은 없는지?

 

하영선 교수

꽤 있음. <월남망국사> 중 '조선망국사' 부분도 있고. 1900년대 청과 조선에 담론공급자로서의 양계초는 2등 없는 1등. 일본유학생들이 당시 일본에서 내고 있던 잡지들을 보면, 일본유학생들도 양계초를 꽤 읽고 있더라는 것. 일본입장에서는 양계초가 일본사상을 번안하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양계초나 양계초를 읽은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음.

 

장인성 교수

양계초만 해도 자신이 누구의 글을 인용하고 있는지를 밝혀주는데, 당시 조선의 신문이나 유길준 등의 글에서는 인용표시 없이 가져다 쓴 경우가 많아 연구에 어려움. 영향관계를 밝히기가 복잡해짐.

 

박지향 교수

"러시아인의 자유사상"이란 논설 서두에, 20세기 초 세계세력으로 러시아, 미국, 중국을 꼽고 있는데, 풍전등화의 중국을 여기에 끼워넣은 심사는?

 

김용직 교수

이 때는 위화단 사건 직후로서, 러일전쟁이 끝난 뒤에 상황이 나빠지는 것에 비교하면 아직은 중국적 자존심이 살아있음.

 

장인성 교수

양계초는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어떤 시각을?

 

하영선 교수

기본적으로는 social Darwinism의 입장. 신민설+영웅론을 논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책임을 상당 부분 묻는다는 것.

 

장인성 교수

그러나 유학자라면 당연히 규범적 측면에서 제국주의 비판이 있을 터인데.

 

하영선 교수

일본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논의는 언제?

 

장인성 교수

코토쿠 슈스이의 제국주의 비판은 1905-6년. 러일전쟁 끝나고. 기독교/사회주의 쪽으로부터 나왔음. 그러나 이러한 기독 사회주의에 기반한 제국주의 비판을 강유위 쪽이 수용하기는 곤란했을 것.

 

하영선 교수

social Darwinism적 현실주의 국제정치관을 수용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내가 강해져야 한다'는 류의 자기책임을 묻는 쪽으로 가게 되지 않았을까?

 

장인성 교수

유학 쪽에서는 그렇지 않음. 제국주의 비판이 강함. 박은식이 대표적. 사회진화론을 수용하면서도 제국주의 비판. 국제사회에 있어서는 사회진화론을 인정하지 않음.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식민지 행위 자체를 강하게 비판.

 

김용직 교수

168페이지 '여론'에 대한 이야기. 조선에서는 여론, 공론이 절대적 기준으로 거론되는 데 반해, 양계초는 "여론의 소재가 곧 공익의 소재는 아니다"라고 못박으면서 오히려 "여론을 환기하고 지도하는" 호걸의 역할을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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