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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계초,『음빙실자유서』~100p
 

2003-04-01 

2002년 8월 세미나 기록

 

일시 : 2002년 8월 31일 (토) 오후  4시 7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회의실
참석 : 하영선, 장인성, 손열 
독회내용 : 양계초,『음빙실자유서』~100p.

 


 

손   열 교수 발제내용
- 유길준, 독립신문 등과 많이 다르다는 느낌은 못 받았음.
- 발제문 참조.

 

손   열 교수

양계초 말년은 어땠는지?

 

하영선 교수

전통, 문화에 관한 저술에 주력. 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 1873-1929년까지 생존. <음빙실문집> 쓴 것은 27세경.

 

손   열 교수

일본엔 언제부터 언제까지?

 

하영선 교수

1898년 10월부터 1911년 혁명 이후까지. 양계초는 손문 line도, 공산당 line도 아니었기 때문에 말년에 직위랄 게 없었음. <음빙실문집>은, 당대 일본서적들에 대한 양계초 version의 독서요약집이라고 할 수 있음. 특별히, civilization, '문명'이라는 용어의 사용 에 주목.

 

<음빙실문집>은, 어떻게 보면 제목에 비해 내용은 소략하므로 실망스러울 수도 있음. 그러나, 또 다르게 보면, 양계초가 서양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일본의 번안을, 중국적 시각에서 읽으려 했다는 점에서 전파의 전형적 양상이라는 점. 주로 나카무라 번역판 Mill의 자유론을 양계초가 보았다는데, 과연, 밀의 '자유'=양계초의 '자유'일 것이냐? 서구->일본->중국 양계초-> 한국 개신유학자, 의 경로. <음빙실문집>이 중국에서 출판된 후 한국에 매우 빨리 곧장 들어왔음. 동아시아 전파의 맥락에서 양계초와 그의 <음빙실문집>은 일본과 조선과 중국을 모두 연결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징검다리.

 

손   열 교수 

양계초와 후쿠자와 유키치와의 관계?

 

하영선 교수

직접적 언급은 없는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음. 발제문 1페이지에 있는 '文野三界之別'의 경우, 반드시 후쿠자와 유키치의 논의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어떤 연속성이 보임. (하지만, 여기에서, 강유위 등 당시 중국쪽 사상가들의 동향을 따라잡을 필요가 있음.) 문명, 반개, 야만의 3구분법은 당시 매우 큰 논쟁거리였을 것. 비단 학술적 논의의 차원이 아닌 현실적으로 각국의 위상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임. 일본 후쿠자와 유키치에 따르면 중국은 반개에 속하므로 받아들이기가 곤란한 논리인데, 따라서 <음빙실자유서>에서 '문야삼계지별'을 거론한 것 자체가 큰 결심이라면 결심이라고 읽을 수도 있겠다.

 

요컨대, 문제의식은 크게 2가지인 듯함. 첫째, 중국 국내 정치 시스템을 어떻게 할 것인가? 둘째, 국제정세. 이에 대해 통설은 1899년에서 1902년 일본망명 초기까지는 '민권론'(루소)에 상당히 쏠리는 모양이었다가(루소), 1902-3년을 경계로 다시 보황론, 국가주의(블룬츨리) 쪽으로 기운다는 것. 이러한 전환이 왜 이루어지는가? 중국 내의 강유위, 일본의 손문과의 관계와 미묘한 관련 있음. 강유위는 보황파로서 양계초가 지나치게 민권론으로 기울어지는 것에 대해 경계.

 

개인적으로는, 이십대 시절의 <음빙실자유서>보다는, 말년의 <청대학술개론> 등 자기네 역사와 전통을 쾌도난마하는 저술들에 압도당함. 그렇다면, 이처럼 자신의 지적 전통의 깊이와 넓이를 꿰고 있던 양계초가, 일본에 가서 서양서번역서들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을 가졌을 것인가.

 

장인성 교수

양계초가 <음빙실자유서>에서 논하고 있는 일본의 사상·저술들은, 그가 일본에 가 있던 189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반의 동시대 저술들이라기보다는, 전시대인 '계몽기'의 논의들이 아니었을까 싶음. 이 시기 일본은 이미, 국가주의적 법제도에 대한 논의가 심화되고 있었는데, 양계초는 주로 서양의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

 

하영선 교수

양계초의 관심은 일본이 아니라 중국이었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장인성 교수

일종의 글쓰기 전략이었을 수도 있음. 최신 선진사상들은 양계초가 읽었더라도 중국에 풀어놓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면.

 

손   열 교수

기대했던 것보다 중국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별로 없는 듯.

 

장인성 교수 

<청의보>에 실렸던 이 글들이 <음빙실문집>으로 묶여서 중국 국내에서 실제로 많이 읽혔는지?
 
하영선 교수

그런 것으로 안다. 한중일 삼국관계 연구의 대표주자로는 이노우에 코하시, 야마무로 신이치 등을 들 수 있는데, 지식과 제도의 네트워크로서 한중일 삼국을 아우르는 공동연구는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게다. 그런데, 수입과 전파의 경로를 찾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며 기초적인 일이라 치고, 그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방대한 역사적 지식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므로 간단치가 않다.

 

장인성 교수

일본 쪽에서는 아이디어와 제도의 한중일 삼국 네트워크에 대한 연구붐이 일고 있음.

 

하영선 교수

Kari Palonen, Reinhart Koselleck, Quentin Skinner를 참고할 만함. 특히, Palonen을 중심으로 핀란드 쪽에서 자신들의 정치·사회 사상 개념 형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음. 이것은 전파학회의 방향과 상당히 유사. 핀란드 또한 스웨덴의 식민지였으므로 우리의 문제의식을 어느 정도 공유하리라 예상됨. 한편, Howland의 <Translating the West: Language and Political Reason in Nineteenth-Century Japan>을 읽어들 보시기 바람. '문화번역론'은 세계적으로 이미 관심들을 가지고 있음. 오히려 우리가 뒤쳐진 부분 있음. 동아시아 지역에서 지적 회랑이 어떻게 도는가, 또한 이것이 각 개별국가로 들어오면 어떤 애환들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십세기 사상사는 기존의 동양/서양 사상사가 아닌 새로운 구분법으로 갈 것이며, 이는 삼중의 학문적 훈련을 요하게 됨.

 

장인성 교수

일본학자들은 설사 이론으로 명시적으로 내세우지 않았더라도 그동안 그러한 방향으로 작업을 해왔다고 본다. 자국의 개념형성문제는 이미 어느 정도 축적된 연구성과가 있고, 이제는 지역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 우리의 경우 당면한 현실적 압박과 필요에 의해서라도 지역적 차원과 글로벌한 차원을 동시에 염두에 두고 우리것을 하는 작업이 긴요함.

 

하영선 교수

그렇지만, 과연 일본에서조차 자국을 벗어난 수준의 작업이 얼마나 이루어져 있는지? 일단 삼중의 접근법이 필요할 텐데, 작업의 순서로 보자면 1. 한국의 텍스트에서 전파의 경로와 회로를 구성해내는 작업 -> 2. 동아시아 한중일 삼국의 네트워크에서 사상과 개념의 의미 파악 -> 3. 세계사적 지적 맥락에서의 지형도 완성 순서가 됨.

 

장인성 교수

그러려면 서양사상에서 각 개념을 학문적으로 잘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전통적 텍스트를 해석해낼 능력을 겸비한 연구인력이 필요. 텍스트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연구팀의 조직에 대해 생각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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