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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문사설선집 2권, 대한매일신보 1907.4-1908.12
 

2003-01-22 

2002년 3월 세미나 기록


일시 : 2002년 3월 9일 (토) 오후  3시~7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회의실
참석 : 하영선, 최정운, 장인성, 신욱희, 박지향, 김용직, 김영호, 손열 
독회내용 :『한국신문사설선집』2 권, <大韓每日申報> 1907.4-1908.12

 


 

주요 토론 내용

 

하영선 교수 발제내용(1907.4-1907.12)
- 1907년은, 글로벌한 차원에서는 기존의 영-러의 대결구도에 있어 영.불.러의 삼국협상이 이루어지는 의미있는 해. 불행하게도 <대한매일신보>나 <제국신문> 등에서 이 문제를 제대로 투영하지 못하고 있음. 1907년,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사건은 헤이그 밀사사건인데, 이 만국평화회의에서 우리는 우리의 독립에만 급급해 있었고 더 넓은 국제정세 속에서 동아시아와 우리의 운명의 향방을 파악하지 못했음. 1904년 러일 전쟁에서 비록 러시아가 지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일본이 모든 것을 다 얻은 100%의 승리자였다고 보기는 어려움. 삼국협상, 삼국동맹의 새로운 라인업에 따라 일-러, 일-프 간의 협상 진행되고, 1907년 결국에는 러시아와 일본 간의 합의가 도출됨. 러-일 간에 만주를 남북으로 반씩 나누고, 조선은 일본에, 몽고는 러시아에 넘기기로 하는 비밀협약 맺어짐.

 

- 1907년 상반기는 경제적 국권회복 운동의 상징인 국채보상운동이, 중반기는 외교적 국권회복 운동의 상징인 헤이그 밀사 특파가, 후반기는 군사적 국권회복운동의 상징인 의병운동이 주요이슈가 되었다는 점에서, 1907년은 이 세가지가 모두 공존한 해. 그런데, 각각의 사건들이 가장 최선의 방법론이었는가 하는 점에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음.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으로 읽었을 때 재구성되는 1907년은 각각 어떻게 다를 것인가? 어째서 그 당시, 발행부수 면에서 대한매일이 주도적일 수 있었는가? 1906년 고종이 을사보호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밀서를 각처에 보내고, 이것이 1907년 1월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됨으로써, 발행인 배설은 일본에 의해 6개월 근신처분. 발행부수 면에서 <대한매일신보>가 가장 앞서는 이유는 (i)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 (ii)헤이그 밀사사건에 대해서도, <황성신문>의  단 1회 보도에 비해 5회에 걸쳐 상세한 보도를 담은 논설 게재. 그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 <대한매일신보>가 일본의 제약을 넘어 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는 느낌.

 

-국채보상운동은 결과적으로 용두사미. 감정적 호소력은 높았으나 실제적 성과는 미약했음. 헤이그 밀사사건과 고종퇴위와 관련해서, 1907.5.15일자에 실린, 일본 유학생의 태극보 게재논문이 흥미로움. 국제정치에 대한 social darwinism적인 현실주의적 파악. 유길준과 박영효의 1880년대를 1기라고 한다면, <독립신문>의 1890년대를 2기, 1905-1910년 사이를 3기. 대부분의 개신유학자들이 양계초의 글을 통해서 서구의 담론을 접함. social darwinism에 대해서도 옌푸가 쓴 글과 양계초의 글은 차이가 있음. 양계초는 일본 번역어를 그대로 쓴 반면, 옌푸는 만들어 썼다는 점. 우리 쪽의 경우 양계초의 용어를 차용하는 경향. 1907년 5월이면, 고종이 목숨걸고 파견한 헤이그 밀사가 만국회의로 가는 도중인데, 이때 일본유학생은 이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내는 논문을 썼고, <대한매일신보>는 이를 게재했다는 것이 참으로 얄궂고 미묘.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의 상황에서, 헤이그 밀사의 실패는 예기되는 것. 만국평화회의 자체에 실익이 있기 어려운 상황. 만국평화회의에 공식적 참석이 허용되지 않자, 이위종 "한국을 위하여 호소함" 기자들 앞에 가서 읽음. 매우 치밀한 작성

 

- 군대해산과 의병활동. 1907.9.5의 한 대목이 1907년 하반기의 에센스. "옥석을 불문하고"->의병들 중에는 도적떼도 섞여있었음을 자인하는 암시. "압복하는 방책"->지나친 강경책은 오히려 반발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경고. 1907년의 3가지 국권회복 방법론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들이 공방을 벌이고 있었는지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겠으나, 신민회 그룹이 이에 문제제기를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의문의 여지 없음. 대한매일주필이 박은식에서 신채호로 가던 시기였고, 일본을 통한 전파보다는 양계초를 통한 전파의 시기.

 

김용직 교수 발제내용(1908.1-1908.12)

- 베델의 재판 흥미롭게 보았음. 1차 재판 1907년, 2차 재판 1908년으로 넘어와 복잡하게 얽혀있음. 일본으로서는, 대한매일이 외국인 발행신문이므로 검열 어려움. 영국으로서는, 베델 사안에 대해 영국의 동아시아에서의 위신이라는 문제와 일본과의 동맹이라는 이중적 고려가 작용했을 것. 사설의 논조 자체보다는 의병 등 통감부가 원하지 않는 기사를 게재했다는 점이 문제가 된 듯. 일단, 1907년 8월을 기점으로 전체적으로 톤다운된 채 1908년으로 넘어옴.

 

- 사회경제면. 1908.8.19 "일본농부의 도래"에서는 대한제국시절부터 이후 식민지 시기까지 이어지는 농가부채문제. 9.25 "유림 각성의 기"에서는 유림계통의 학교설립 환영. 9.30 "동양척식회사". 10.8 "탐정과 통역의 행패"에서는 외국인의 앞잡이들을 비판하며 공심, 공덕심의 부재 한탄. / 국제면. 국제면의 사설이 거의 없다는 것이 의외. 기자들이 국제문제 다룰 능력이 없었던 게 아닌가. 1.21 만국평화회의 참석했던 이준 열사의 죽음. 5.30 일본물품 매매배척./ 정치/ 언론/ 교육/ 문화/ 사상/ 역사. 7.25 "한국과 만주" 현실적으로 세태비판을 할 수 없게 되자, 역사로 돌아서 '영웅'에 대한 비유적 호소가 늘어나는 것이 눈에 띔./ 민족. 8.12 국수보존설


최정운 교수
나폴레옹 전기가 우리나라에 처음 나온 게 언제죠? 이 '영웅전'이라는 게 중요하지요. 1907년 즈음에 와서, '영웅'이라는 것이 새로운 주제죠. <이태리3걸전>, <애국소녀전> 등 영웅전들이 나오고 말입니다.

 

장인성 교수
이 시기 즈음이 아닌가 싶은데요. 사설에서 연극 이야기를 하면서 영웅을 언급하는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상당히 중요하지요. 강감찬, 연개소문, 피터 대제, 나폴레옹.....

 

최정운 교수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인생의 경로를 결정했다, 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그만큼 영향이 컸어요. '외로운 투쟁'의 아이콘으로서,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이 지극히 '개인주의적'이었다는 측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용직 교수
Peter Duus의 책을 보니까, 대일협력자 얘기가 상당히 자세히 나오고 있고, 최근에 국회의원들이 친일파 명단 발표도 했는데, 송병준이나 이런 인물들이 이 시기에는 어떻게 되나요?

 

최정운 교수
대일협력자라면 이인직이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한일합방 시나리오를 뒤에서 썼다고 하고, 일본인인 부인을 통해서 밀사로 왔다갔다 했다고 하니까. 이인직이 한일합방 되자마자 성균관 대제학을 지내는데, 그의 작품 <혈의 누>를 보면, 서구->일본->조선 식의, 우리도 어서 일본처럼 되어야 한다는 마찌니 민족주의가 투사되어 있지요.

 

박지향 교수
의병진압을 너무 폭압적으로 하니까, 일본을 개화의 모델로 생각했던 개화파들도 1908년 정도 되면 반일로 돌아서는 분위기가 보이지 않을까요?

 

최정운 교수
이미, 러일전쟁 끝나고 1905년 을사조약 때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반일의 비통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의병진압으로 인한 반일 분위기는, 지방에서라면 그럴 법도 했겠지요.

 

장인성 교수
김윤식이, 워싱턴과 나폴레옹의 영웅주의를 비판하면서, 그들 1인의 힘이 아니라 무명의 용사들과 조화로운 관료 등용을 통해서 독립과 통일이 가능했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김영호 교수
1908년 2월 <황성신문>에 '무명의 영웅'에 기대하는 동일한 논지의 사설이 있어요.

 

장인성 교수
김윤식의 경우에는, 군주의 역할에 기대를 거는 거죠. 의병에 대해서는 '비적' 정도로 보았으니까요.

 

김용직 교수
이 시기 통감부가 식민지 통치를 위해 어떠한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는가가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개혁'이라는 모토를 세웠던 듯 합니다. <독립신문>에는 '개혁'이라는 구호가 다발되고 있는 반면, <대한매일신보>에는 '개혁'이라는 어젠더 자체가 빠져있거든요. 또,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이인직이 원각사를 세웠는데, 감상적인 창극 일변도라는 점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영선 교수
조선식민지화와 관련한 1905-1910년의 일본 분위기에 대해, 이토오 히로부미가 사실은 온건파였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보다 현실적으로 결정적인 입장의 차이라기보다는 다만 시간의 차이였다고 보는 거죠. 일본측에서 국제적인 변수들은 당연히 고려했을테고, 국내변수로서 '의병'을 얼마나 의식했을지?

 

김용직 교수
이토오 히로부미가 의병을 매우 의식했고, 초조했던 것은 사실일 겁니다. 그래서 더 강경진압에 나섰던 거죠.

 

하영선 교수
그럼, 역설적으로, 의병을 안 하는 게 더 나았을까요?

 

김용직 교수
도덕적으로는 의병을 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손해가 더 커진 측면이 있지요.

 

하영선 교수
신민회 측에서도, 사실, 의병으로는 안 되고, modern war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 아니었습니까 식산진흥을 통해서.

 

장인성 교수
그런 식의 counter-factual은 좀 곤란하지 않습니까.

 

김용직 교수
그게 아니라, 의병이라는 것이 게릴라 전이기 때문에, 의병토벌시 양민학살이 수반되는 문제점을 분석하지 않는 국사학계에 대한 지적입니다.

 

하영선 교수
헤이그 밀사사건 같은 경우에도, 일종의 음모설이긴 하지만 '고종이 (일본의) 덫에 걸린 것이냐?'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공식적 외교문서 연구로는 될 일이 아니고 깊은 탐색이 필요하겠죠.

 

김영호 교수
자료에 대한 엄밀한 천착이 안 되니까 자꾸 음모론으로 가는데, 일본측 문서들을 들여다봐서 얼개를 만들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정운 교수
일본이 한일합방을 위해서는 고종을 제거해야 한다고 파악했을까요?

 

하영선 교수
그럼요. 일진회에서 이미 이토오에게 그렇게 귀띔을 하는데요. 그런데, 이 헤이그밀사파견이 그렇게 효과가 있었을까요? 오늘날 보면 쓸데없는 짓일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박지향 교수
고종의 심리가, 해외에 호소해서 난국을 타개하겠다는 쪽이었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영국대사도 그래봐야 소용없고 그보다는 일단 내정개혁부터 해야 한다고 진언을 하는데도 그러거든요.

 

김용직 교수
이미 1906년에, 고종이 이토오와 함께가 아니면 외교사절을 접견 못 하는 실질적 가택연금상태가 되지 않습니까, 일본은 을사조약 때부터 한일합방을 착착 준비하고 있었다고 봐야 해요.

 

최정운 교수
도대체, 1905년과 1910년 사이, 1907-8년에는 큰 대외적 사건도 없는 가운데, 일본은 속에서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었을까요? 일본헌법을 만든 이토오 히로부미를 내보냈다는 점에서, 이 당시 일본에 있어 최대현안은 조선 아니었겠습니까.

 

하영선 교수
자꾸 밀사만 보낼 것이 아니라, 삼국동맹과 연결할 방법이 없었을까요?

 

김용직 교수
그게 안중근과 연결되는 테마인데요, 이토오가 러시아에 담판을 하러 가는 길에 하얼삔에서 저격당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거죠. 안중근의 배경이 아주 복잡한데, 아버지는 개화파고 본인은 유학교육을 받은 데다가 카톨릭 신자거든요. 학교를 세우면서 신민회 쪽과 만나게 되구요. 안중근의 주장은, 천황의 동양평화론에 어긋나게 러시아와 화의를 하려는 이토오 히로부미를 죽였다, 는 것이었지요.

 

하영선 교수
1907년에 러일 비밀협상이 타결되는데, 그 내용인즉슨 청을 나눠먹자는 것이었거든요. 그런데 한쪽에서는 동시에 동양평화론이 진행되고 있었단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동양평화론이란 것은 지식인들의 명분론이었고, 실제 일본정부의 전쟁과 평화로의 행보는 다르다고 봐야 하지 않겠어요.

 

장인성 교수
일본 지식인들의 동양평화론은 1880년대까지는 청,일,조선의 삼국의 평화였을지 몰라도, 일본이 팽창하기 시작하면서는 이미 삼국평화는 사라지고, 명분으로 변질되고 말지요. 이 시기 일본의 동양평화론은 그냥 일반적인 동양의 평화와 안정을 뜻하는, 정치적 수사일 수 있지요.

 

박지향 교수
1905-1907년에 일본이 인종주의를 심각하게 느끼기 시작한 것은 사실일 거에요. 한창 황화론이 대두되고, 미국의 일본이민차별이 시작된 것도 이미 이 시기부터거든요.

 

김영호 교수
동양평화론의 실체를 보기 위해서는 그 당시 일본의 문건들을 직접 봐야지, 떠돌아다니는 얘기만으로는 안 될 겁니다.

 

하영선 교수
평화론에도 자유주의적 평화론과 현실주의적 평화론이 있을 수 있을텐데, 이 때의 평화론도 이렇게 분류해서 접근이 가능할 거에요. 어쨌거나 매우 조심스럽게 재구성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집담회 결과보고서 9차


일시 : 2002년 3월 9일 (토) 오후  3시~7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회의실
참석 : 하영선, 최정운, 장인성, 신욱희, 박지향, 김용직, 김영호, 손열
윤독내용 : 『한국신문사설선집』2 권, <大韓每日申報>

 

이날 독회는 참석자 중 1인의 발제 후 그 시기 해당신문의 사설에서 발견되는 국내적 국제적 상황인식 및 그 의미와 한계를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토의된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음.

 

사설의 내용
- 1907년은, 글로벌한 차원에서는 기존의 영-러의 대결구도에 있어 영.불.러의 삼국협상이 이루어지는 의미있는 해. 불행하게도 <대한매일신보>나 <제국신문> 등에서 이 문제를 제대로 투영하지 못하고 있음.

 

내용에 대한 비판적 검토
- 헤이그 밀사사건과 만국평화회의에서 우리는 우리의 독립에만 급급해 있었고 더 넓은 국제정세 속에서 동아시아와 우리의 운명의 향방을 파악하지 못했음.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의 상황에서, 헤이그 밀사의 실패는 예기되는 것. 만국평화회의 자체에 실익이 있기 어려운 상황. 
- 1907년 상반기는 경제적 국권회복 운동의 상징인 국채보상운동이, 중반기는 외교적 국권회복 운동의 상징인 헤이그 밀사 특파가, 후반기는 군사적 국권회복운동의 상징인 의병운동이 주요이슈가 되었다는 점에서, 1907년은 이 세가지가 모두 공존한 해. 그런데, 각각의 사건들이 가장 최선의 방법론이었는가 하는 점에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음.
- 국채보상운동은 결과적으로 용두사미. 감정적 호소력은 높았으나 실제적 성과는 미약했음. 
-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으로 읽었을 때 재구성되는 1907년은 각각 어떻게 다를 것인가? 발행부수 면에서 <대한매일신보>가 가장 앞서는 이유는 그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 <대한매일신보>가 일본의 제약을 넘어 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는 느낌.
- 대한매일주필이 박은식에서 신채호로 가던 시기였고, 일본을 통한 전파보다는 양계초를 통한 전파의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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