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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문사설선집 2권, 대한매일신보 -1905.12
 

2003-01-22 

2001년 9월 세미나 기록


일시 : 2001년 9월 22일(土) 오후  3시~7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회의실
참석 : 하영선, 최정운, 김영호, 장인성
독회내용 : 『한국신문사설선집』2 권, <大韓每日申報>

 



주요토론내용

 

최정운 교수 발제내용
순한글로 시작했다가 1905년 8월부터 국한문혼용체로 바뀌는 이유가 궁금. 격앙된 글일수록 한문 투가 더 많이 나오는 듯. 띄어쓰기, 구두점, 문장, 문단 구분 등 혼란스러움.

대한매일신보가 내건 목적이 '공평한 변론'을 내겠다는 것이었음. 독자들에게 편지 교환을 공식적으로 요구, 공론의 형성에 대해 낙관적인 자세. 그러나 덕분에 소문에 의존한 기사들도 많은 듯 하고 공. 사 구별이 불분명함.

노일전쟁에 대한 기사. 일본을 돕는 대가로 독립을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 전쟁에 대해 현실주의적 생각 못하고 있다. 전략적 사고 부족, '국제사회', '여론'의 힘 과신. 이는 天. 道 등에 빗댄 동양적 권력관의 유산이 아닐까.

외국인들의 관찰, 타인의 시각을 우선시하는 듯한 모습. 자신들이 바라보는 자신들의 문제보다 남들이 지적하는 문제에 민감. 자신들의 인식에 대한 자신감 상실의 반증 아닌가. 한국 사람들의 풍습. 문화에 대한 포괄적 비판.

'정부', '권력'이라는 서양식 정치언어가 자유롭게 사용되고 있음. 정치에 관한 한 근대적 정치이념이 상당한 수준으로 전파. 우리나라 정부가 완전히 분열되어 있다는 구조적 분석. 그러나 거의 본능적인 보수적 입장을 보이고 있음. 한편, 청국, 만주에서의 '세력'에 대한 문제는 민감하면서 국내의 권력 과정인 '음모'에 대한 감각은 둔함. 관료주의적 권력 과소평가, '人心'에 대한 기대와 낙관론.

국가에 대한 이해 부족. 국가를 조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형식주의적 입장 고수. '愛國心'이 1905년 10월부터 나타나기 시작. 나라가 망하는 것이 확실한 시점에서 민족주의 discourse의 성격? 망국의 원인을 생각하면서 지방관리의 부패 문제를 언급하고, 이는 지방민들의 무지몽매함과 우리나라 문화. 국민에 대한 혐오로 이어짐.

 

최정운 교수
1905년 10월 14일자 사설에 보면 "大韓三千里江山 二千萬人衆"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런 '삼천리 강산 이천만 동포'류의 표현이 일본에도 있나요?

 

장인성 교수
영토에 관한 건 없는데, 2차대전 끝나고 "1억 총참회"라는 말은 나왔죠. 사실 천황의 전후책임을 일본 국민 전체에 전가시키는 방법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죠.

하영선 교수
첫째로, 1905-1910년 최대신문으로서 대한매일신보의 성격 문제인데, 신문 <대한매일신보>의 탄생연원이 애매해요. 1904-1910년 신문독자수 통계를 보면, 대한매일신보가 단연 선두거든요. 그런데, 편집인 및 발행인은 영국친구이고 필진은 박은식, 신채호 등 민족사학이 중심이었는데, 그렇다면 주도적인 인사가 배설(裵說, 베셀:Ernest Thomas Bethell)이었는지, 양기탁이었는지 말이죠. 이 배설이란 친구가 이력이 또 파란만장한데, 15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31세까지 일본에 있다가 조선에서 대한매일신보 하다가 36,7세에 사망합니다. 대한매일신보에 꽤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듯 한데, 러일전쟁 나니까 London Daily Telegraph 특파원으로 조선에 들어오지요.

그다지 지식인도 아니었고, 돈도 없었는데 어떻게 신문을 만들었는지 수수께끼에요. 아무래도 모종의 스파이 첩보 활동을 한 게 아닐까 싶은데, 자금원에 대해서는 고종의 돈이다, 러시아의 돈이다, 일본의 돈이다, 이렇게 세 가지 설이 있어요. 아마도 돈을 따내려고 다방면으로 접촉했던 듯 해요. 배설이라는 인물이 처음부터 애국적. 민족주의적 베이스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하다보니 그렇게 흘러간 독특함이 있습니다. '공평한 보도'에 대해서도, 러일전쟁과 같은 사안에 대해 국내친일신문들을 의식해서 일본의 입장과는 다른 논의를 펴고 싶어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둘째로, 박은식, 신채호 모두 지적으로 新儒學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양계초와 만나게 됩니다. 양계초의 <음빙실 문집> 국한문 혼용 번역이 1907년에 최초로 나오는데, 지식인이라면 필독, 이라는 분위기가 있었던 듯 해요. 아무래도 일본이나 구미로부터 직접 들어오는 것보다 청을 경유해서 들어온 것이 심정적인 면에서 이해하고 읽어내기가 좀 편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이를테면 전파의 경로가 구미(의 관념들)->일본->청(양계초)->조선 이 되는 거죠.

최정운 교수
그렇지만, 양계초든 대한매일신보든, '자유'며 '민족주의'를 논함에 있어 어떤 체계는 없었다고 봐야 해요.

 

하영선 교수
그건 그렇죠. 양계초 자신도, 이 '문집'이라는 것이, 딱 세워진 체계는 없어요.


 

최정운 교수
이런 것이 오히려 조선적이고, 한국적인 것일 수도 있어요.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자기가 배운 서구관념을 그냥 주욱 서술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에 비해 <대한매일신보>는 나름대로 '현실을 구사'해보려고 한다고나 할까. 비록 비틀비틀거리긴 하지만, 그런 면에서는 한발 더 나아갔다고도 볼 수 있겠죠.


 

장인성 교수
일본과 중국은 글쓰기 방식이 다른데, 한국은 중국의 글쓰기 방식에 가깝다고 해야겠죠. 그 와중에 급하다 보니까, 중국 것이든 일본 것이든 그냥, 거의 그래도 가져다가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해석이나 체계가 시도되지 못하고, 시도되어도 치밀하지 못하고, 파편적이고 산만합니다.


 

최정운 교수
사실, 이때 일본은 너무 앞서 있었어서 따라가기가 어려웠죠.


 

장인성 교수
이 시기 조선의 근대적 개념 전파나 글쓰기를 알아보려면, 일본보다는 중국(청)을 단연 먼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유길준 등은 오히려 예외적인 케이스이고,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계초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요. 양무에서 변법으로 가는 과정에서 청의 discourse 방식이 상당히 유의미하지 않겠습니까.


 

하영선 교수
일본의 후쿠자와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앞설 수 있었는가, 그 반면 청은 왜 그렇게 파편적으로밖엔 받아들이지 못했는가, 늘 하는 이야기지만, 그것이 바로 청. 일. 조선의 전파 수용 상의 차이가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청의 진독수가 완전 서(서양)로 가야 한다고 했다면 그 반대지점엔 동은 동이고 서는 서다 전파수용은 불가능하다고 본 양수명이 있었고, 양계초는 그 중간쯤에서 제 3의 길을 모색하다 보니 파편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게 조선의 입맛엔 딱 맞았던 것이죠.


 

최정운 교수
단재 신채호 중심으로 논의되는 우리나라 민족주의 형성과정에 대해 다시 접근할 필요가 있어요. 관련된 동양 개념, 서양 개념을 하나씩 대비해 놓고 '我', '非我'라고 하는 것의 지적 source에 대해 추적해 봐야죠.

장인성 교수
예, '민족' 개념에 대해서도 위정척사 쪽에서는 반드시 '국가'와 연결시켜 생각하기보다는 '문명'으로 보는 것 같구요.


 

최정운 교수
얼마전 단군 민족사관이 논란이 되었는데, 위정척사 쪽에서는 오히려 '기자'를 우리 민족의 시조로 본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런 종류의 신앙이랄까 사상이 꽤나 복잡하고 뿌리가 깊단 말이죠. 이미 갑오경장 즈음해서 나왔던 교과서에는 단군을 시조로 인정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단재 신채호는 혹평을 했으니, 벌써 이때부터 물밑에서 다툼이 있었던 거죠. 


 

김영호 교수
<대한매일신보>가 왜 제일 많이 팔렸는가, 이게 참 흥미로운 문제제기입니다.


하영선 교수
아무래도 외국인이 낸 것이니까 원칙적으로 검열이 금지되어 있었다는 것이 한몫 했지 않나 싶어요.


 

최정운 교수
최소한 <대한매일신보>는 훈계조의 글은 실지 않았어요.


 

장인성 교수
시국이 전환되면서 논조가 어떤 식으로 변해가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영어로 나온 기사들과 비교해 가면서, 과연 이것이 조선의 독립을 위한 논조였는지 그게 아니라 배후에 다른 함의를 가지고 있는지 궁리해 봐야죠.


 

하영선 교수
결과적으로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대한매일신보>가 분명히 뭔가 발언할 장을 제공한 측면이 있어요. 배설이 처음부터 일본첩자로 들어온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만약 이 신문에 고종의 돈이 들어갔다면, 배설이 먼저 접근을 한 것인지, 한편 러시아의 돈이 들어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또 전혀 다른 얘기가 되고 말이죠.


 

장인성 교수
배설은 시작할 때는 비즈니스 마인드로 시작한 것 같고, 그런데 하다보니 일본측의 박해도 받고, 그러다 청으로 감옥도 살러가고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최정운 교수
여기에서 '전쟁'에 대한 보도를 하는데, 이, 전쟁에 대한 감각이 일본과는 너무 달라요. 농사일이 바쁜 계절에 무슨 전쟁이냐 이런 식이거든요. 전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일상과 비일상의 구별이 혼란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재가 '愛國者'라는 것은 일상적인 순간에도 끊임없이 애국을 생각하는 자라고 말한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죠.


 

장인성 교수
일본에서는, 일본이 전쟁 당사국이 아닌 경우에라도 국민 총동원 분위기였을 텐데요.

 

하영선 교수
당시 경찰력이 이미 다 일본수중에 넘어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에 대해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그러한 면모가 <대한매일신보>의 판매부수를 높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장인성 교수
사실 러일전쟁까지는 일본에 대해 아주 naive한 접근을 하고 있거든요.


 

최정운 교수
그렇죠. 그러니까 어떤 침략의 흉계가 있을 거라는, 그런 종류의 근대적 사고를 전혀 못 하고 있던 때에요. 일본에서는 러일전쟁 들어가면서 조선에 대해 대대적인 propaganda를 했을 거에요. '황인종 연합'이니 하는 얘기도 다 그런 것의 일환이죠.

 


 

집담회 결과보고서 6차


일시 : 2001년 9월 22일(土) 오후  3시~7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회의실
참석자 : 하영선, 최정운, 김영호, 장인성
윤독내용 : 『한국신문사설선집』2 권, <大韓每日申報>

 

이날 독회는 참석자 중 1인의 발제 후 그 시기 해당신문의 사설에서 발견되는 국내적 국제적 상황인식 및 그 의미와 한계를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토의된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음.

 

사설의 내용
- 순한글로 시작했다가 1905년 8월부터 국한문혼용체로 바뀜. 격앙된 글일수록 한문 투가 더 많이 나오는 듯한 모습을 보임. 띄어쓰기, 구두점, 문장, 문단 구분 등 혼란스러움.
- 대한매일신보가 내건 목적이 '공평한 변론'을 내겠다는 것이었음. 독자들에게 편지 교환을 공식적으로 요구, 공론의 형성에 대해 낙관적인 자세. 그러나 덕분에 소문에 의존한 기사들도 많은 듯 하고 공. 사 구별이 불분명함.
- 노일전쟁에 대한 기사에서는, 일본을 돕는 대가로 독립을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 전쟁에 대해 현실주의적 생각 못하고 전략적 사고가 부족, '국제사회', '여론'의 힘 과신. 이는 天. 道 등에 빗댄 동양적 권력관의 유산일 수 있음
- 외국인들의 관찰, 타인의 시각을 우선시하는 듯한 모습. 자신들이 바라보는 자신들의 문제보다 남들이 지적하는 문제에 민감. 한국 사람들의 풍습. 문화에 대한 포괄적 비판.

 

내용에 대한 비판적 검토
- '정부', '권력'이라는 서양식 정치언어가 자유롭게 사용되고 있음. 정치에 관한 한 근대적 정치이념이 상당한 수준으로 전파 
- 청국, 만주에서의 '세력'에 대한 문제는 민감하면서 국내의 권력 과정인 '음모'에 대한 감각은 둔함. 관료주의적 권력 과소평가, '人心'에 대한 기대와 낙관론
- 국가에 대한 이해 부족. 국가를 조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형식주의적 입장 고수. '愛國心'이 1905년 10월부터 나타나기 시작. 나라가 망하는 것이 확실한 시점에서 민족주의 담론의 성격을 띤다고 사료됨
- 망국의 원인을 생각하면서 지방관리의 부패 문제를 언급하고, 이는 지방민들의 무지몽매함과 우리나라 문화. 국민에 대한 혐오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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