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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문사설선집 2권, 황성신문
 

2003-01-22 

일시 : 2001년 6월 18일 토요일 오후 3:30-7:00

읽을거리 : <한국신문사설선집> 2권 황성신문

참가자 : 하영선, 최정운, 장인성, 김영호, 김용직, 신욱희, 박지향, 손  열, 안인해


김영호 교수
우선 이 시기의 중요한 사실들을 잠깐 살펴보면 1907년 2월에는 2천만이 매달 20전씩을 절약하여 3개월이면 1천만원의 차관 상환이 가능하다고 본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7월에는 순종이 즉위하였으며,같은 달 일본인에 의한 차관정치 시행을 골자로 한 정미칠조약이 맺어졌다. 군대해산과 더불어 의병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진 때도 이 시기이다. 황성신문의 논설을 크게 다섯 주제로 나누어 살펴 보고자 한다. 우선 의병활동과 일본경찰 탄압에 대한 사설을 보면, 의병활동에 대해 전반적으로 비판적인 논조를 보이면서, 일본경찰과 군대에 의한 탄압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의 대한 정책에 대한 사설들이다. 한국의 현재 지위와 실력으로는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기 힘들기 때문에 한일양국이 정의를 친밀하게 하여 공진하는 길밖에 없다고 쓰며,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기우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런 기본적인 입장에서 황무지 개간 사업 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언론에 대한 탄압과 언론의 정도에 관련된 사설들과 함께 애국심 고취를 주장하는 사설들도 눈에 띤다. 조선혼에 대한 사설, 영웅전기 발행 등을 언급하는 가운데 윤리의 문명과 물질의 문명 중 물질의 문명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 나라의 물질 문명 전통에 대해 언급한 부분 특기할 만하다.

 

김용직 교수
1909년 8월, 국민 대다수가 외교와 排外를 혼동하여 소극적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비판하여, 20세기에 독립을 보존할 수 있으려면 외교사상이 선결문제라고 쓰고 있다. 국가사상이 박약한 이유로 참정권과 정치학문이 부족했음을 말하고 있고, 민족성 때문이 아닌 조선조 정치사회적 구조나 과정에 의해 분당의 습성이 나타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하영선 교수
황성신문에서는 문명에 대한 개신유학자의 입장을 알 수 있다. 물질문명과 정신문명 중 물질문명이 핵심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드러나 있다. 관심있게 읽었던 것은 1909년 5월 27일자의 ‘宇內大勢觀’과 6월 8일자의 ‘세계지식양성론’ 그리고 7월 1일부터 연재되고 있는 ‘宇內大勢와 한국’이었다. 이 글들은 오늘의 국제질서에서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본 것이다. 한국의 장래문제를 당시 이천만 모두의 장래가 달린 문제로 보고 세부방침을 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교육, 산업발달, 실력양성 등 內治의 문제와 전국인민의 세계적 지식 양성, 특히 일본, 러시아 그리고 淸의 외교, 정치, 경제의 변모를 연구하고 우리의 대처방안을 따지는 外交의 문제 등 양방면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의 장래는 일본, 러시아, 청 이 삼국의 균형지세 속에서만이 있을 수 있으며 이는 최대한 긴박한 문제라고 강조하면서도 세계적 지식을 양성해야 한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다.

 

장인성 교수
황성신문에서의 세력균형은 권력적 의미가 아니라, 윤리적인 접근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영선 교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실력양성 뿐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배어 있다. 갑오개혁과 비교해서 위로부터의 개혁보다는 밑에서의 양성에 주목하고 있다.

 

최정운 교수
당시 ‘文明’은 일진회가 내세우던 친일적인 언술이었으므로, 황성신문에서는 ‘文明’에 대한 언급이 많이 드러나 있지 않다.

 

김영호 교수
혼, 애국심에 대한 강조, 해외동포에 대한 기대가 자주 드러나는 것으로 볼때 이미 이때 합방을 예상하고 있지 않았겠는가?

 

최정운 교수
1910년대 논설은 불교, 기독교계, 노인계 등 각 사회세력에 대해 일종의 ‘遺言’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하영선 교수
유학자들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황성신문이 의병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의병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의병준비론’으로 보아야 한다.

 

김용직 교수 
독립신문의 경우 자각한 사람들에 대한 호소가 돋보였는데, 황성신문은 목표나 논의의 구심점이 없는 것 같다. 따라서 영웅이 없다는 등, 교육과 도덕이 타락했다는 등의 관념적인 논의로 흐르는 것 같다.

 

최정운 교수
단재도 ‘조선사람이 바뀌어야 한다’라고 하고, 도산도 ‘새로운 조선인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등 이즈음 황성신문은 독립신문 시기 자유주의적 논조와는 거리가 멀다.

 

박지향 교수
군대해산 후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으며, 이등박문은 합병은 없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1907년부터 1910년까지는 나라는 망했으나 합병은 없는 상태가 장기적으로 지속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 듯하다.

 

장인성 교수
유교적인 낙관론이 표출된 것 아니겠는가?

 

최정운 교수
왕조에 흥망성쇠가 있을 수 있으나, 계급구조가 흔들리느냐의 여부에 더 관심을 쏟았을 수 있다. 의병에 반대한 것도 이같은 맥락이 아니겠는가?

 

김용직 교수
황성신문은 그들이 생각하는 國家는 어디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 아직까지 제대로 맞춰야 하는지 모르는 것같다. 전통적으로는 왕이 국가라는 등식이 성립하였으나, 순종은 그들의 표준적인 ‘국가로서의 왕’은 아니었다.

 

김영호 교수
勞組에 관련된 사설에서는 유교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애국심’, ‘국가사상’이 일본에서 들어온 애매한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에서 ‘國 ’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전통적인 왕을 가르키는 것인지, 근대적인 국가관인지를 다시 따져보아야 한다.

 

최정운 교수
단재가 찾고 있는 영웅의 의미는 우리 민족의 당쟁과 파당성을 단합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이야기되는 것이다.

 

김영호 교수
국치정론’이라는 논설에서 보면 순종을 뛰어넘는 어떤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리 든다.

 

박지향 교수
서양인들은 우리나라에 와서 ‘사람들이 애국심이 없다’라고 주장하는데, 황성신문을 만드는 사람들과 같은 여론조성 엘리트들은 민초의 애국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노비도 해방시키고, 교육시키고 또한 실력양성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영선 교수
장기적으로 우리에게도 균세의 기회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거라는 믿음으로 장기적인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용직 교수
대한자강회의 경우 정치적인 활동을 했기 때문에 ‘대한매일신보’가 개화파와의 현실적인 연계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황성신문은 그들의 논의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사회적 제도와 활동이 없다. 따라서 실력양성론도 허무할 수밖에 없고, 이런 맥락에서 영웅이야기가 갑자기 한번씩 튀어나오는 것이다.

 

하영선 교수
이 시기 개신유학자의 논의와 언술은 중국 특히 일본망명 후 일본의 논의와 언어를 숙지하고 돌아온 양계초의 논의가 중심이 되고 있다.

 

최정운 교수
전파적 시각에서 보면 독립협회나 유길준을 제외하면 1880년대부터 중국이 끼치는 영향이 더 컸다.

 

하영선 교수
당시 근대적인 의미의 식민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식이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집담회 결과보고서 5차


일시 : 2001년 6월 18일 토요일 오후 3:30-7:00
참석자 : 하영선, 최정운, 장인성, 김영호, 김용직, 신욱희, 박지향, 손 열, 안인해
윤독내용 : 『한국신문사설선집』2권, <황성신문>

 

이날 독회는 참석자 중 1인의 발제 후 그 시기 해당신문의 사설에서 발견되는 국내적 국제적 상황변화와 그에 대한 논자들의 시각을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토의된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음.

 

사설의 내용
-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 7월 순종 즉위, 일본인에 의한 차관정치 시행을 골자로 한 정미칠조약, 군대해산과 더불어 의병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진 시기임. 
- 20세기에 독립을 보존할 수 있으려면 외교사상이 선결문제라고 쓰고 있음. 국가사상이 박약한 이유로 참정권과 정치학문이 부족했음을 말하고 있고, 민족성 때문이 아닌 조선조 정치사회적 구조나 과정에 의해 분당의 습성이 나타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
- 일본의 대한 정책에 대한 사설들에서는, 한국의 현재 지위와 실력으로는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기 힘들기 때문에 한일양국이 정의를 친밀하게 하여 공진하는 길밖에 없다고 쓰며,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기우라고 인식
- 의병활동에 대해 전반적으로 비판적인 논조를 보이면서, 일본경찰과 군대에 의한 탄압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음
- 언론에 대한 탄압과 언론의 정도에 관련된 사설들과 함께 조선혼, 영웅전기 발행 등 애국심 고취를 주장하는 사설들도 눈에 띔

 

내용에 대한 비판적 검토
- 문명에 대한 개신유학자의 입장을 알 수 있음. 물질문명과 정신문명 중 물질문명이 핵심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드러나 있음 
- 당시의 국제정세 속에서 한국의 미래를 위한 세부방침으로, 교육, 산업발달, 실력양성 등 內治의 문제와 전국인민의 세계적 지식 양성, 특히 일본, 러시아 그리고 淸의 외교, 정치, 경제의 변모를 연구하고 우리의 대처방안을 따지는 外交의 문제 등 양방면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음
- 한국의 장래는 일본, 러시아, 청 이 삼국의 균형지세 속에서만이 있을 수 있으며 이는 최대한 긴박한 문제라고 강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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