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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문사설선집 1권, 황성신문
 

2003-01-22 

일시 : 2001년 4월 28일 토요일 오후 3:30-7:00

읽을거리 : <한국신문사설선집> 황성신문

참가자 : 하영선, 장인성, 신욱희, 손  열, 안인해


장인성 교수
황성신문에서는 정당의 연원을 정권획득을 위한 당, 정책정당, 외국을 등에 업은 당으로 나누어 그 중 정책정당의 형태가 가장 바람직함을 밝히고 있다. 지식인을 분류함에 있어 완고한 지식인은 삼대의 예악문물을 좇아 三代至治를 추구하고, 개화자는 구미신법을 좇아 부강기업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고 분류하며, 이런 두 부류의 지식인들은 虛談을 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기도 하다. 虛談之士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서고금의 좋은 법을 첨삭절충하여야 한다고 하여 당시 개혁적인 유학자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기도 하다. 개혁유학자들은 공맹 사상의 너울을 떨쳐 버리지도 못하고, 새로운 법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예를 이 신문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유럽의 신법, 신학이 이미 공맹의 범주에 들어가 있는 것이나, 단지 그 조리와 규모가 다르고 그것의 시세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을사조약 이전 1905년 2월 16일의 사설 '國家思想論'에서는 근대국가를 어떻게 만들어 내고 또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가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자각과 일치단결을 호소하고 있음은 당시 개혁적인 유학자들이 급변하는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러한 일반적인 시세 분석 이외에도 많은 나라에 대한 평가가 나오는데 독립신문에서도 볼 수 있듯, 국가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한 나라가 미국으로 등식화된 면이 있었다. 독립신문에서는 미국이 나라의 크기에도 불구하고 군사력이 작은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나, 황성신문에서는 군사력의 증강에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하영선 교수
1905년은 1900년대의 전환점이라 볼 수 있다. 1904년의 러일전쟁은 그 전환점을 촉발시켰는데 일본이 해양국가 모델을 채용하여 서구를 제압했다는 것은 놀라움을 안겨 주게 된다. 당시 국내기록을 살펴 보아도 "차라리 일본의 개로 태어날 것을"이라는 일반 민중의 말이 남아 있기도 하다. 러일전쟁과 더불어 일본은 근대국가라는 단위체로 자리잡았으나 이후 조선은 근대국가의 길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렇다면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서 황성신문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후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의 모습은 어떠했는가를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1기 개화가 1880년대, 2기 개화가 독립협회 활동시기라면, 이 시기는 이제 '균세'의 가능성이 사라지고 오직 '자강'의 길만이 남은 3기 개화로 볼 수 있다. 황성신문을 주도하던 사람들의 경우 주로 한문을 배운 유학자들인데 장지연의 경우 후기 독립협회에도 가입하는 등 개신유학자적인 풍모를 보여왔다. 그들은 유학을 버리지 않되, 서양의 것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장인성 교수
동도서기에서는 물질과 정신을 구분한 반면 이 개신유학자 집단은 서양의 정치체제와 학문까지도 수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황성신문을 놓고 보았을 때 1907년은 매우 의미가 크다 1905년까지는 부회(공맹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야 하며, 중국에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1907년 이후 글의 성격, 글쓴이들의 교육배경, 출신배경들도 달라진다.

 

하영선 교수
우선 개화에 대한 논설부터 살펴 보자. 껍데기개화와 껍데기수구를 배척하는 논설에서 더 이상 공자와 맹자만을 들먹이는 수구는 가당치 않음을 밝히고 있다. 또 관심을 끄는 것은 사회진화론에 대한 것이다. 1905년까지의 글에서보다는 이 사회진화론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글로 1907년 6월 20일, 21일에 걸친 '민족주의'라는 논설을 보자. 민족주의 자체는 당시 사회진화론에 대한 동아시아적인 변용으로 처음 들어오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1883년 유길준의 '경쟁론'에서 최초로 일본식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1880년대는 일본에서 사회진화론이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유길준이 유학을 하던 시절, 일본에서 있었던  Morse의 <동물진화론> 강의 노트를 유길준이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1903년에 들어서야 양계초의 <吟氷室全集>이 유학자들의 기본적인 텍스트가 되었으며, 황성신문은 중국(優勝劣敗, 物競天擇)과 일본(生存競爭, 適者生存)에서 수입된 용어를 혼용하고 있다.

사회진화론 자체를 살펴보면 유길준의 도입이 1기이고, 우리의 전통 모델이 서양의 모델에 의해 깨져 버려 중국도 일본 모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진 청일전쟁이 그 다음 시기를 차지하고 있다. 을사조약 직전 양계초가  세 개 신문에 기고한 글을 모은 <吟氷室全集>이 번역죄어 나왔을 때 지식인의 관심은 대단했다. 이 글들에서 양계초는 일본식 모델의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을사조약 이후에는 사회진화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적자생존의 틀이 맞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당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선택지는 '자강' 뿐이었다.

1906년 11월 16일에서 19일에 이르는 '경쟁시대'라는 논설은 이 사회진화론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유학에서는 경쟁이 그다지 권장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서구에서 말하는 'struggle for existence'는 기본적으로 단위체 내에서의 경쟁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에서 이것은 다분히 자유주의적인 전통 아래 있는 것이었다. 일본의 해석은 단위체들의 경쟁으로 전파되어 단위체 내의 보수화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전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논설이 바로 위에 언급한 '민족주의' 두 편, '경쟁시대' 세 편이다.

이외에도 박영효에 관한 두 개의 글들이 보이는데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 폐위 직전의 시기에 박영효의 귀국에 대하여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책임정부론'이라는 글에서는 '무엇을 고쳐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과제로서 외교권의 회복, 치안과 행정, 교육, 재정과 외채문제 등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 부분에 대한 독해를 미루어 볼때, 황성신문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논조가 어떻게 달라져 왔는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유길준과 김윤식의 개화론은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두고 있음에 반하여 유길준과 이 당시 황성신문은 거의 그 차이가 구별되지 않는다.

 

장인성 교수
사회진화론은 저항적 민족주의를 낳기도 하지만,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탈을 인정하고 일본의 정치적 지배를 받아들이는 변명이 되기도 했다.

 

하영선 교수
국제정치학에서 강국정치가 가장 현실적인 분석이기는 하지만, 만약 그 경우 비강대국은 설 자리가 없다는 것과 같은 문제 아니겠는가?

 

장인성 교수
정치적인 입장 차이에 따라 사회진화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겠는가?

 

하영선 교수
서양의 경우 국민국가로서의 nationalism과 민족국가로서의 nationalism이 균형을 이루고 있음에 비하여, 우리의 민족주의는 자강의 nationalism이었기 때문에 내적인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회진화론과 민족주의의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동주의 표현대로 '전파의 굴절' 아니겠는가? 
   


 

집담회 결과보고서 4차


일시 : 2001년 4월 28일 (토) 오후 3:30-7:00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회의실
참가자 : 하영선, 장인성, 신욱희, 손 열, 안인해
읽을거리 : 『한국신문사설선집』, <황성신문>

 

사설의 내용
- 정당의 연원을 정권획득을 위한 당, 정책정당, 외국을 등에 업은 당으로 나누어 그 중 정책정당의 형태가 가장 바람직함을 밝히고 있음
- 당시 개혁적인 유학자들의 생각을 대변. 지식인들이 허담을 추구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서고금의 좋은 법을 첨삭절충하여야 한다고 하고 있음. 유럽의 신법, 신학이 이미 공맹의 범주에 들어가 있는 것이나, 단지 그 조리와 규모가 다르고 그것의 시세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주장
- 을사조약 이전의 사설에서는 근대국가를 어떻게 만들어 내고 또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자각과 일치단결을 호소하고 있음
- 국가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한 나라가 미국으로 등식화된 면. 군사력의 증강에 후한 점수를 주고 있음

 

내용에 대한 비판적 검토
- 1904년의 러일전쟁과 더불어 일본은 근대국가라는 단위체로 자리잡았으나 이후 조선은 근대국가의 길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서 황성신문의 역할과 이후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의 모습은 어떠했는가를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음
- 1기 개화가 1880년대, 2기 개화가 독립협회 활동시기라면, 이 시기는 이제 '균세'의 가능성이 사라지고 오직 '자강'의 길만이 남은 3기 개화. 황성신문을 주도하던 사람들의 경우 주로 한문을 배운 유학자들인데 그들은 유학을 버리지 않되, 서양의 것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
- 1905년까지의 글에서보다 사회진화론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나고 있음. 우리나라에서는 1883년 Morse의 <동물진화론> 강의 노트를 차용하여 유길준이 '경쟁론'에서 최초로 사회진화론 언급. 유길준의 도입이 1기이고, 우리의 전통 모델이 서양의 모델에 의해 깨져 버려 중국도 일본 모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진 청일전쟁이 그 다음 시기.
- 을사조약 이후 적자생존의 논리를 가진 사회진화론에 대한 관심이 증폭. 당시 사회진화론에 대한 동아시아적인 변용으로 민족주의가 처음 들어오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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